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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아내를 위해, 아들을 위해 한평생 피를 팔아 살아가는 한 남자, 허삼관의 인생역정....이책 허삼관 매혈기의 내용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말을 기억할 것이다. '돼지간볶음 한 접시, 황주 두냥..' 허삼관이 피를 팔고 돌아오는 길에 식당에 들러 습관처럼 행하는 일종의 몸보신 의식이다. 참, 한가지 의식이 더 있는데, 피를 팔기 전에 피를 묽혀 많이 늘리기 위해 여덟대접의 물을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행위들이 매우 해학적이고 유쾌하게 그려진다. 돼지간볶음 한접시와 황주 두냥을 먹는 그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 육체노동으로 몇날 며칠을 고생해야 벌어야 하는 돈을 피를 팔면 단숨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피를 팔면 근심걱정하는 가족들의 마음을 한결 덜어 줄수 있다. 결국 허삼관 자신의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는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피를 팔아 위기를 넘긴다.
일락이, 이락이, 삼락이 세 아들에 대한 허삼관의 부성은 지극하다. 하지만 일락이가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허삼관의 태도는 변한다. 자신의 피를 판 돈을 친자식이 아닌 일락이에게 쓰는 것이 아까워진 것이다. 일락이를 둘러싼 친부와 허삼관 주변의 이야기는 굉장히 우습게 느껴지면서도 결국은 가슴이 찡해진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바로 이 부분이다.
문화혁명기를 전후한 시기 온 가족이 옥수수죽으로 연명하던 때, 허삼관은 피를 팔아 가족들에게 국수를 사먹이기로 한다. 친자식이 아닌 일락이를 떼어놓고 온 식구들이 국수를 먹으러 가자, 일락이는 마음이 상해 자신의 친부를 찾아 집을 나가버린다. 하지만 친부에게서도 외면받은 일락이는 거리를 헤멘다. 늦은 시간까지 들어오지 않는 일락이가 걱정이 된 허삼관을 결국 그를 찾아 나선다. 거리 끝에서 일락이를 발견한 허삼관은 그를 업어들고 쉴 새 없이 욕을 퍼붓는다. "이 쪼그만 자식, 개 같은 자식, 밥통 같은 자식...오늘 완전히 날 미쳐 죽게 만들어 놓고..... 가고 싶으면 가, 이 자식아. 사람들이 보면 내가 널 업신여기고, 만날 욕하고, 두들겨 패고 그런 줄 알 거 아니냐. 널 십일년이나 키워줬는데, 난 고작 계부밖에 안되는 거 아니냐. 그 개같은 놈의 하소용은 단돈 일 원도 안들이고 네 친아비인데 말이다. 나만큼 재수 옴 붙은 놈도 없을 거다. 내세에는 죽어도 네 아비 노릇은 안하련다.... " 등에 업힌 일락이는 아주 조심스럽게 허삼관에게 묻는다. "아버지 우리 지금 국수 먹으러 가는 거에요?" 허삼관은 문득 욕을 멈추고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p.192>
겉으로는 욕을 퍼붓고, 차갑게 대해도 결국 부성이란 이런 것이다. 일락은 허삼관은 아들이었고, 허삼관의 아들들은 그의 삶을 지탱하는, 그리고 그가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다. 그의 부성은 후에 자신의 목숨을 빼앗길 고비를 넘기면서까지 피를 팔아 병든 일락이를 살려낸다.
"내가 널 십삼 년 동안 키우면서 때리기도 했고, 욕도 했지만 마음에 담지는 말아라. 다 널 위해서였으니까. 십삼 년 동안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난 나중에 네가 나한테 뭘 해줄 거란 기대 안 한다. 그냥 네가 나한테, 내가 넷째 삼촌한테 느꼈던 감정만큼만 가져준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내가 늙어서 죽을 때, 그저 널 키운 걸 생각해서 가슴이 북받치고, 눈물 몇 방울 흘려주면 난 그걸로 만족한다. <p.205>
읽을 땐 피식피식 웃으며 넘겼던 책장이 갈수록 무거워졌다. 또 우리 아버지가 계속 떠올랐다. 등에 늘 자식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지금까지도 그 짐을 선뜻 내려놓지 못하시는 우리 아버지...허삼관은 평생 피를 팔아 자식을 먹여 살렸다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 아버지의 피를 빨아가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자식을 위해 평생을 일하셨는데, 정작 자식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반이나 헤아릴런지 모르겠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생각들을 더욱 뼈져리게 느끼게 했다. "양심은 개한테 갖다줬냐?" 라는 물음엔 나 자신 또한 가책을 느꼈다. 나의 가책을 두고두고 갚을 수 있을만큼 오래오래 건강하셔야 하는데...어쩌면 이런 생각조차 내 자신을 위한 이기심이란 생각이 든다.
이번 주말에는 모처럼 아버지 모시고 가족들끼리 외식을 해야겠다. 돼지간볶음...은 아니구..돼지갈비에 소주나 한잔 사드려야겠다. 이 시대의 모든 자식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