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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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
그는 내게 역사가 내지는 전기 작가로서 더 익숙하다. 세계사 특히 유럽 역사와 왕족사에 관심이 많았던 난 일찌감치 츠바이크의 책들을 알았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 너무 흥미로와 도서관에서 다른 책들을 찾아 읽었던 것 같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 <마리앙투와네트> <에라스무스 평전>... 등등... 단지, 그 작품의 작가가 츠바이크란 사실만 인식 못했을 뿐이다.;; 그 당시엔 어떤 역사적 사실을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욕구로만 책을 탐독했기 때문에, 한 작품에 대한 문학적 가치라던가 작가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 그 책들은 어떤 소설보다도 재밌었다. 최근에 읽었던 <메리스튜어트>도 정말 재밌다.

츠바이크가 역사나 인물 외에 뛰어난 소설도 썼다는 것은 얼마 전 읽은 <연민>이란 작품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인간의 '연민'이란 감정 하나로 그렇게 치밀하고 탄탄한 작품을 쓸 수 있는 그의 기량에 놀라웠다. 그는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인간의 내밀한 심리까지도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알고보니 츠바이크는 프로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단다. 이 책에 나와 있는 단편  <체스 이야기>와 <낯선 여인의 편지>도 인간의 심리를 심도 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중 <낯선 여인의 편지>에 대한 감상만 조금 남겨 본다. 
 

<낯선 여인의 편지>는 제목 그대로 한 여인의 편지글로 이루어진 단편이다. 40대 초반 주인공 남자에게 어느날 "결코 저를 모르는 당신께"란 제목의 편지가 온다. 스물네장이나 되는 두툼한 이 편지를 주인공은 당혹스러움과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한다. 
 

여인은 자신의 아들이 죽었다는 내용으로 편지를 시작한다. 그리고 열세살 때부터 사랑해 온 한 남자를 향한 고백의 글을 풀어낸다. 내막을 알고보니 바로 주인공 남자를 평생 사랑해 온 자신의 구구절절한 고백이었다. 소녀시절 첫 만남에서 시작해서, 격정적인 사흘간 사랑, 그리고 이후 또 다시 스처 지나갔던 만남에 대해 자신의 모든 감정을 풀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주인공 남자만을 가슴에 품고 그가 자신을 알아봐주길 바라며, 평생 남자의 주위를 맴돌았지만, 남자는 끝까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남자는 기껏해야 그녀를 거리에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여자들 중 하나이거나, 가벼운 하룻밤 상대의 매춘부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았다. 소녀시절 그녀와 만났던 기억도, 그녀와 하룻밤 열정을 나눈 기억도, 그 남자에겐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숯한 인연 중 하나에 불과했다. 애써 떠올릴 가치도 없는 하찮은 것이었다.

답답한 것은 그녀는 결코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남자에게 밝히지 않았다. 그저 그 남자가 자신을 알아봐주길 바라면서 끊임없이 그 남자 주위를 맴돌았다. 그 남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아들이 죽고, 그와 더불어 자신도 죽어가기 일보 직전에서야 긴 고백의 글을 남자에게 보낸 것이다. 
 

현대를 사는 나의 관점으로 그 여자를 지켜보면, 도저히 말도 안돼는 사랑이다. 답답하고 지겹다. 평생 자신을 알아주지도 않는 한 남자를 향한 순정적인 사랑만 하다가 죽기 직전에서야 고백을 한다는 게....이해가 안갔다. 게다가 그 남자의 아이까지 키우지 않았던가? 다시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 숨겼다는 여자의 고백이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그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 순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이도 죽고, 자신도 죽기 직전에 고백하는 이유는 뭘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죽은 아이와 자신의 사랑을 기억해 달라고?

이런 느낌은 얼마 전 읽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의 베르테르에게 느꼈던 감정과 유사하다. 자신의 지독한  감정에 못이긴 나머지 이 여자는 병들어 죽고, 베르테르는 자살을 택한 것이다. 지독한 열정이다. 지독한 순정이다. 아니 이건 열정도 순정도 뭣도 아니다. 자기 감정에 못이겨 자신을 희생시키고 끝낸 것이다. 왠지 난 무섭다. 한간에선 영혼을 울린 순정적 사랑이라 칭송하지만, 내가 볼 때 그건 정신병적인 집착이다.  
 

주인공 남자는 죽음을 앞 둔, 아니 지금쯤이면 벌써 이세상 사람이 아닐 여자의 긴 편지를 읽은 후에 비로소 그녀를 생각하게 된다. 눈으로 볼 수 없게 된 순간에야 그녀를 떠올려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니 마음 속에 짠한 여운이 남는다기보다 그냥 화가 나고 짜증스러워졌다. 절대 공감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베르테르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난 이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 짜증나고 싫고 공감할 수 없는 데, 마음에 든다는 나의 생각이 이상하지만, 난 이 작품이 좋다. 공감할 수 없는 사랑에 욕을 하면서도 내 스스로 이 여자의 감정에 몰입했었다. 짧은 단편이었지만 이 작품 속에 완전히 빠져 들었었다. 역시 츠바이크의 흡입력 있는 문장력은 대단한 것 같다. 그의 다른 소설들도 찾아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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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온천
요시다 슈이치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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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본 소설이나 애니메이션을 보면 온천을 배경으로 한 것들이 많다. 또 왠만한 애니메이션에는 목욕씬이나 온천씬이 꼭 나온다. 선정적인 장면을 위한 요소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일본인들에게 온천이 친숙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도 언젠가부터 눈내리는 겨울밤 노천에서의 온천욕이 로망(?)이 되었다. 꼭 밤이여야 하고, 꼭 눈이 와야 하며, 꼭 노천이어야 한다. 이거 일애니를 너무 많이 봤나부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곳이 있으려나?? 눈내리는 밤의 노천온천이라면 일본의 북해도 쪽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 제목을 보고 쫌 웃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다소 유치한 듯한 문구 때문이라기보다 왠지 요시다 슈이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요샌 읽는 책 제목마다 말할 꺼리가 생기는지 모르겠다.;;)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은 다소 차갑고 시니컬하며,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 있다. 그런데 왠 온천?? 게다가 첫사랑?? 

기대 반, 의심 반으로 이 책을 읽었다. 역시 나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첫사랑 온천은 제목만큼 닭살스럽거나 풋풋하지 않았다. 여러 주인공의 사연을 통해 다양한 종류의 사랑을 말하고 있었지만, 그 느낌이 흔히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었다. 첫사랑 온천이란 제목의 단편은 오히려 사랑을 잃는 이야기였다.(이 책에는 첫사랑 온천, 흰눈 온천, 망설임의 온천, 바람이 불어오는 온천, 순정 온천의 단편이 실려 있다.) 각 작품에는 저마다 사연을 지닌 10대, 20대, 30대 등의 다섯 커플이 등장한다. 결별, 불륜, 분열, 사랑, 약속 등 각각의 사연을 위해 온천을 찾은 커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각 커플들의 다섯가지 다른 사연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마치 하나의 사랑의 과정을 보여 주는 것 같다. 풋풋한 10대의 미래를 약속하는 순정적 사랑에서 시작해서 20대, 30대의 망설임과 분열, 불륜을 다룬 이야기를 지나 '첫사랑 온천'이란 제목의 단편에서는 결국 사랑을 잃는다. 그 단편의 순서가 사랑을 잃는 '첫사랑 온천'이야기가 맨 처음 나오고 10대의 풋풋한 사랑을 약속하는 '순정 온천'이 맨 나중 나온다는 것이 묘한 특징이었다. 마치 사랑의 과정을 거꾸러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10대의 청소년 남녀가 부모님 몰래 온천 여행을 가서 앞날의 사랑을 약속하는 '순정 온천'의 이야기가 꽤 풋풋하지만, 그 느낌에 왠지 쓸쓸함이 묻어나는 건 '첫사랑 온천'을 포함한 앞의 네가지 이야기를 먼저 읽고 난 다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요시다 슈이치'다운 느낌의 책이었다. 난 그런 그의 시니컬한 느낌이 좋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온천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조만간 날잡아서 가까운 도고 스파비스라도 다녀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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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립 Bleep - 일상의 현실을 바꾸는 무한한 가능성의 발견
윌리암 안츠 외 지음, 박인재 옮김 / 지혜의나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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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the Bleep do we Know? 이 제목은 정말 내가 묻고 싶은 것이었다. 블립이 모여?
블립(Bleep)은 단어적 의미로 그대로 해석하면, 전자 장치에서 나는 삐~ 소리이다. 그럼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더 생긴다. 그게 뭐? 어쨌다고...?? 물론 책 제목을 늘 이런식으로 걸고 넘어가진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이런 의문들은 지극히 적절한 반응이다. 답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어떤 사건과 가정들에 도전하는 질문을 통해서 과학은 진보한다. ㅎㅎ

제목에서 묻고 있는 Bleep에 대한 대답을 이 책에서는 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전자파의 삐~ 소리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고작 그 수준의 극히 작은 정보 조각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가 그동안 당연한 듯 받아들였던 것들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가령 '현실은 무엇인가?' 라는 것 같은...

일반적으로 우린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즉,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어떤 인식 가능한 것들을 현실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 너머의 무한한 '의식'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 핵심으로 작용하는 원리로서 '양자물리학' 이론을 도입한다.

우리가 현실과 의식을 이원론적으로 나누어 받아들이게 된 배경엔 데카르트부터 뉴턴, 아인슈타인에 이르는 기계론적 세계관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과학의 패러다임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기계적이고 예측 가능한 것이 되어 조건만 주어지면 수학과 과학에 의해 완벽한 결과를 산출해낼 수 있다. 그것이 과학적 사고이고,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은 현실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기계론적 세계관은 '양자물리학'이란 새로운 이론이 도입되며 흔들리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양자물리학에서 설명하는 원자는 거의 빈공간이며, 우리를 지지해 주는 물질이란 형태는 결국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지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 과학으로 원자의 빈공간이 대부분 에너지라고 밝혀졌지만, 근본적으로 '물질이란 것이 어떤 존재하는 딱딱한 것일까'라는 것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 것이다. 물질 세계가 의식의 세계로부터 나왔는지, 혹은 의식 그 자체보다 더 근원적인 우주의 물질인지 더 깊이 탐구할 필요가 있다.

양자 물리학에서는 물질 세계의 핵심은 완전히 비물질 영역이며, 그것을 정보 확률파, 혹은 의식이라고 말한다. 양자물리학의 입자, 파동성과 양자 도약, 불확정성 원리, 비국소성 등을 연구하다 보면 양자 물리학이 신비주의 개념과 일부 상통함을 느낄 수 있다. 기계론적 사고관에 젖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물질적 신비주의 세계관을 현실과 과학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양자 역학으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환상이라고 일컬어지는 현상까지도 설명이 가능할 수 있다. 양자물리학은 어쩌면 현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종교와 과학 문제에 대한 것들에 해답을 줄 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양자물리학은 과거 이원론적 사고(현실과 의식의 분리), 기계론적 사고관에 이별을 고하고, 더 큰 우주론적 관점으로 우리와 세상이 연결되어 있음을 설명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따라 무한한 에너지로 가득찬 이 세상을 바꾸어 갈 수 있는 우리 뇌의 놀라운 능력을 탐구해 간다. 인간의 뇌가 움직이는 전체 과정의 기본이 되는 것을 양자의 불확정성으로 설명해 간다. 우리가 가진 잠재적인 능력은 무한하며, 생각하는 대로 현실도 재창조된다고 말한다. 

결국 더 큰 가능성을 인식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면, 내 주변의 현실을 재창조할 수 있다는 것인데...그것을 양자이론까지 거론하며 거시적이고, 체계적이며, 아주 골치아프고, 힘들고, 어렵고, 지겹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이책 전반부에서 설명하는 뉴턴물리학과 양자물리학 쪽은 평소에 흥미롭게 생각하는 부분이라 즐겁게 읽었는데, 정작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책의 중후반부 내용은 어찌나 지루했던지, 내 의식이 책말마따나 우주 밖으로 몇번이나 들락날락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한가지 말하고 싶은 건, 어설픈 자기계발서를 읽느니 차라리 이 책 한권을 추천하고 싶다. 내 존재의 근원과 의미 그리고 내 앞에 펼쳐진 의식과 현실을 우주론적 관점에서 거시적으로 되뇌어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와 우주 그리고 내면의 힘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다.  넘 거창한가?? ㅎㅎ 그래도  양자물리학이란 분야의 새로운 관점의 접근과 과학적 지식의 확장이란 측면에서 굉장히 만족스럽다. 

 

참, 이 책의 내용은 <블립>이란 이름의 다큐멘터리로 더 유명하단다. 기회가 된다면 영상으로 다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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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느끼는 낙타
싼마오 지음, 조은 옮김 / 막내집게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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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마오(三毛).. 내겐 생소한 이름이지만 중국사람들에게 꽤 사랑받는 유명한 작가란다. 사실 그녀의 이름을 첨 들었을 때 난 그녀의 유명세보다도 이름이 '털세개'가 모야? 라며 재미있어 했다. (이건 작은 사설이고...)

 

책을 가까이하다 보니 여러 책블로거들에게서 좋은 책 이야기를 많이 주워듣는다. 물론 여러 사람들이 많이 읽고 저마다 좋은 평을 남기는 책은 주로 베스트셀러가 많긴 하지만, 개 중에는 꼭 베스트셀러가 아니더라도, 알음알음 입소문을 통해 괜찮다는 책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정말 좋은 책은 바로 그런 책 중에 있다. 싼마오란 이름과 이 책 두권<사하라 이야기> <흐느끼는 낙타>는 그렇게 알게 되어 내 손에 들어왔다.

 

이 책 두권은 그녀가 스페인 남편 호세와 결혼하여 사막에서 사는 이야기를 담았다. 얼핏 식상한 여행 에세이 내지는 시시껄렁한 신혼 이야기쯤으로 예상하기 쉽겠지만, 그보다 한층 깊고 주옥같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사하라 이야기>에서는 주로 그들 부부가 사막에 정착하여 다른 문화 환경에 적응해 가는 삶과 이웃과의 우정을 그렸고, <흐느끼는 낙타>에서는 전란으로 서사하라 정세가 변화하고 변화하는 정세 속에서 희생되는 안타까운 인물들과 인연들의 이야기한다. 인간관계 속에서 드러난 사회 변화와 정세, 문화까지도 이야기하는 이 책은 가벼운 에세이라기보다는 70년대 사하라의 생생한 문화 인류학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다 읽고 난 지금은 말할 수 없는 애잔한 여운이 남았다. 거친 사막의 그것도 오지에서 생활을 하며, 이들 부부는 문화, 종교, 인종, 사회적 풍습 등에서 오는 많은 갈등을 겪게 되는데, 그것이 때론 웃지 못할 해프닝이기도 했지만, 때론 위험천만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 때론 가슴아픈 일도 있었다. 이들 부부의 경험담은 그 어떤 소설보다도 흥미로웠고, 글 한줄한줄이 모두 흡입력 있게 다가왔다.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겪은 여러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 책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이들 부부의 다른 문화와 인류에 대한 존중과 배려였다. 존중과 배려는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이들 부부 사이에서도 느껴졌다.

 

국가도 인종도 성격도 문화도 완전 각각인 호세와 싼마오... 쉽게 융화될 것 같지 않은 이들 부부가 결혼하여, 그것도 외진 사막 구석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꽤 흥미롭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서로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라 해도, 인류를 사랑하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근본적인 사랑의 마음은 통하기에, 그런 험난한 여정과 삶을 함께 지탱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이들 부부의 행복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으로 안다. 호세는 1973년 결혼 5년만에 잠수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산마오 또한 1991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단다. 자살설이 나돌고 있는 걸 보면,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만큼이나 죽음 또한 큰 이슈가 되었음에 분명하다. 이들 부부의 사랑이 호세의 죽음으로 짧게 막을 내렸다는 데에 마음 한켠이 저려온다. 그녀의 생생한 대화체 속의 호세와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면서, 그녀의 글 하나하나가 다시금 애잔하게 다가온다.




"나는 잘 알고 있어. 인생은 단 한 번뿐이라는 걸,

아주 진실한 한 번뿐이라는 걸......

그래서 날이 갈수록 안타까워.

더 용감하고 유쾌하게 인생과 대면하지 못한 게 참 아쉬워."

<사하라 이야기 p.8>

 

오랫만에 가슴저리는 그러면서도 행복한 책을 만나 반가웠다. 책속의 자세한 에피소드들은 하나도 적지 않았는데, 아마 그 이야기들은 이런 리뷰보다 직접 읽는 것이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이 책 두권을 책을 사랑하는 여러분들께 적극 추천하고 싶다. <사하라 이야기>를 먼저 읽고 연이어 <흐느끼는 낙타>까지 읽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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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0-05-18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보는 작가인데 꼭 읽어보고 싶네요.
좋은 소개 고맙습니다.
 
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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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란 상큼한 제목과 맞지 않게 시계태엽이란 암울한 소재와 흉기를 들고 썩소를 날리고 있는 표지를 보면 이 책 내용도 그다지 우아한 내용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표지를 자세히 보니 저 둥그런 것은 눈알일 듯 싶다.ㄷㄷㄷ

사실 이 책은 오래 전부터 눈여겨 보던 책이다.(눈여겨 보는 책이 이미 한타래를 넘어섰다......내 독서습관은 대부분 즉흥적으로 집어다 보는 책들이 대부분이지만, 이렇게 오래 전부터 읽으려 마음먹었다가 집어드는 책도 있다. 아마 비율로 따지면, 전자와 후자가 6:4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의 주인공은 열 다섯살 쯤 되는 소년이다. 평범한 소년은 아니고, 어릴 때부터 소년원을 제집 드나들 듯이 다녔던 불량 청소년이다. 소년원에서 나온 지금도 동네 불량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각종 못된 짓을 저지른다. 못된 짓이란 것이 소년들의 다소 불량끼 있는 짓거리를 넘어서, 약물, 절도, 강간, 폭행 등 이루말 할 수 없이 죄질이 무겁다. 결국 그들의 못된 짓은 심화되어 살인까지 저지르고, 그들의 리더격인 주인공 알랙스는 교도소에 수감된다.

 

하지만 교도소에서도 알랙스는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각종 범죄자들과 마주치며, 오히려 주인공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악은 더욱 심화된다. 교도소 내에서도 집단 폭행이 일어나고, 급기야 또 한사람이 살해된다. 교도소에서조차 알랙스가 교화되기 어렵다고 판단한 정부는 알랙스를 새로운 범죄 교화 수술에 시범적으로 참여시킨다. 루도비코 요법이라 불리는 이 술법은 일종의 조건반사 요법으로 강항 범죄영상을 보여주어 범죄자로 하여금 강한 정신적 충격을 준다. 일종의 정신적 세뇌를 시키는 이 요법은 범죄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온몸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악랄하고 교화되지 않을 것 같았던 주인공 알렉스는 이 요법으로 반쯤 넋이 나가 말잘듣는 바보 인형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순수하게 선을 위한 자발적 반응이 아니었다. 병적으로 정신적으로 억압된 상태이고, 인간으로서 자율적 의지가 강제적으로 통제된 상태였다.

 

문제는 이 요법이 순수하게 범죄자를 치료하는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인 요법으로 범죄율을 감소시키고, 포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데 있다. 또, 정부가 권력으로 아무리 범죄자라하지만, 개인의 인격을 함부로 침해하여 의지를 무력화시키고, 억압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라는 생각도 들게 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해봤다. 상습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 이하의 말종(?)들을 과연 인격이란 이름 하에 인간적으로 대해 주어야 하는가? 하는.... 내 생각이 다소 잔인하고 차갑다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가끔 뉴스에서 나오는 악질 범죄와 그 사후 처리 과정을 보면, 이 나라 법이 과연 누구를 보호하고, 누구의 인격을 먼저 생각하느냐에 의문이 들 때가 많았다. 물론 인격이란 것이 사람에 따라 차별이 있을 수는 없겠지만, 범죄자의 인격을 보호한답시고, 피해자에게 오히려 더 가혹하게 대하는 꼴을 많이 봐왔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조금 다른 곳으로 흘러 버렸는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범죄를 근절하기 위한 우리나라의 법이 많이 약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처럼 약물이나 정신적 충격으로 한 인격을 무력화시키는 것에 백퍼센트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범죄를 일으킨 한 범죄자가 다시는 같은 범죄를 일으키지 않을 만한 강력한 법제제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법제제로서도 통제 불가능하다면, 신체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미성년을 상대로 한 성범죄자들은 거세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공공을 위한 악의 퇴치이냐, 아니면, 범죄자라해도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느냐의 문제이다. 물론 인간의 자유의지의 존중이 중요하다고 대답해야겠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쉽지 않은 내용이다.

 

신은 무엇을 원하시는 걸까? 신은 선 그 자체와 선을 선택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 걸까?

어떤 의미에서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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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5-13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은 항상 뒤쫒아 가는 아이라 이정도면 충분하고 생각합니다..만 결국 적용은은 사람이 하는데 그! 사람이 잘 해야될텐데...한숨나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