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슈테판 츠바이크..
그는 내게 역사가 내지는 전기 작가로서 더 익숙하다. 세계사 특히 유럽 역사와 왕족사에 관심이 많았던 난 일찌감치 츠바이크의 책들을 알았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 너무 흥미로와 도서관에서 다른 책들을 찾아 읽었던 것 같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 <마리앙투와네트> <에라스무스 평전>... 등등... 단지, 그 작품의 작가가 츠바이크란 사실만 인식 못했을 뿐이다.;; 그 당시엔 어떤 역사적 사실을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욕구로만 책을 탐독했기 때문에, 한 작품에 대한 문학적 가치라던가 작가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 그 책들은 어떤 소설보다도 재밌었다. 최근에 읽었던 <메리스튜어트>도 정말 재밌다.

츠바이크가 역사나 인물 외에 뛰어난 소설도 썼다는 것은 얼마 전 읽은 <연민>이란 작품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인간의 '연민'이란 감정 하나로 그렇게 치밀하고 탄탄한 작품을 쓸 수 있는 그의 기량에 놀라웠다. 그는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인간의 내밀한 심리까지도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알고보니 츠바이크는 프로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단다. 이 책에 나와 있는 단편  <체스 이야기>와 <낯선 여인의 편지>도 인간의 심리를 심도 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중 <낯선 여인의 편지>에 대한 감상만 조금 남겨 본다. 
 

<낯선 여인의 편지>는 제목 그대로 한 여인의 편지글로 이루어진 단편이다. 40대 초반 주인공 남자에게 어느날 "결코 저를 모르는 당신께"란 제목의 편지가 온다. 스물네장이나 되는 두툼한 이 편지를 주인공은 당혹스러움과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한다. 
 

여인은 자신의 아들이 죽었다는 내용으로 편지를 시작한다. 그리고 열세살 때부터 사랑해 온 한 남자를 향한 고백의 글을 풀어낸다. 내막을 알고보니 바로 주인공 남자를 평생 사랑해 온 자신의 구구절절한 고백이었다. 소녀시절 첫 만남에서 시작해서, 격정적인 사흘간 사랑, 그리고 이후 또 다시 스처 지나갔던 만남에 대해 자신의 모든 감정을 풀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주인공 남자만을 가슴에 품고 그가 자신을 알아봐주길 바라며, 평생 남자의 주위를 맴돌았지만, 남자는 끝까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남자는 기껏해야 그녀를 거리에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여자들 중 하나이거나, 가벼운 하룻밤 상대의 매춘부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았다. 소녀시절 그녀와 만났던 기억도, 그녀와 하룻밤 열정을 나눈 기억도, 그 남자에겐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숯한 인연 중 하나에 불과했다. 애써 떠올릴 가치도 없는 하찮은 것이었다.

답답한 것은 그녀는 결코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남자에게 밝히지 않았다. 그저 그 남자가 자신을 알아봐주길 바라면서 끊임없이 그 남자 주위를 맴돌았다. 그 남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아들이 죽고, 그와 더불어 자신도 죽어가기 일보 직전에서야 긴 고백의 글을 남자에게 보낸 것이다. 
 

현대를 사는 나의 관점으로 그 여자를 지켜보면, 도저히 말도 안돼는 사랑이다. 답답하고 지겹다. 평생 자신을 알아주지도 않는 한 남자를 향한 순정적인 사랑만 하다가 죽기 직전에서야 고백을 한다는 게....이해가 안갔다. 게다가 그 남자의 아이까지 키우지 않았던가? 다시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 숨겼다는 여자의 고백이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그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 순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이도 죽고, 자신도 죽기 직전에 고백하는 이유는 뭘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죽은 아이와 자신의 사랑을 기억해 달라고?

이런 느낌은 얼마 전 읽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의 베르테르에게 느꼈던 감정과 유사하다. 자신의 지독한  감정에 못이긴 나머지 이 여자는 병들어 죽고, 베르테르는 자살을 택한 것이다. 지독한 열정이다. 지독한 순정이다. 아니 이건 열정도 순정도 뭣도 아니다. 자기 감정에 못이겨 자신을 희생시키고 끝낸 것이다. 왠지 난 무섭다. 한간에선 영혼을 울린 순정적 사랑이라 칭송하지만, 내가 볼 때 그건 정신병적인 집착이다.  
 

주인공 남자는 죽음을 앞 둔, 아니 지금쯤이면 벌써 이세상 사람이 아닐 여자의 긴 편지를 읽은 후에 비로소 그녀를 생각하게 된다. 눈으로 볼 수 없게 된 순간에야 그녀를 떠올려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니 마음 속에 짠한 여운이 남는다기보다 그냥 화가 나고 짜증스러워졌다. 절대 공감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베르테르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난 이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 짜증나고 싫고 공감할 수 없는 데, 마음에 든다는 나의 생각이 이상하지만, 난 이 작품이 좋다. 공감할 수 없는 사랑에 욕을 하면서도 내 스스로 이 여자의 감정에 몰입했었다. 짧은 단편이었지만 이 작품 속에 완전히 빠져 들었었다. 역시 츠바이크의 흡입력 있는 문장력은 대단한 것 같다. 그의 다른 소설들도 찾아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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