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의 은밀한 사생활 - 탐미의 시대 유행의 발견, 개정판
이지은 지음 / 지안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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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만으로도 웬지 호기심이 느껴졌다. 같이 퇴근하는 회사 동료가 책제목을 보더니 묻는다. ’이거 19금책 아니에요?’ ㅎㅎ 물론 나도 호기심에 고른 책이지만 19금은 절대 아니다. 우리가 평소에 접해보지 못한 역사 속 감춰진 진실 또는 귀족들만 누렸던 어떤 은밀한 특권 같은 것들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을 것을 기대하고 본 책이었지만 솔직히 나의 기대에는 살짝 못미쳤다. 그냥 가구나 유행의 변천으로 본16~18세기 프랑스의 역사서 같다고 할까?

작가는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며 미술과 오브제 아트를 공부한 사람으로 앤틱 가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단다. 그래서 책의 서술 방식도 남겨진 미술작품을 통해 그당시 생활상을 엿보고 그림 속에 들어있는 다양한 형태의 가구들을 통해 예술과 유행의 변천 과정을 유추한다. 주로 프랑스 왕족과 귀족 중심으로 설명되어 있으며 가구 중에서도 특히 의자의 모양과 형태의 변천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관심있게 본 것은 의자나 가구의 변천 과정은 아니었고, 오만하고 도도해 보이는 프랑스 귀족들의 생활과 왕족들의 생활사와 역사였다. 루이 14세에서부터 루이 17세..그리고 프랑스 혁명기까지 시대순으로 잘 나와있었다.

기억에 남는 몇가지를 소개하면, 16세기 왕족들의 생활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우아하지 못했다는 거다. 우선 추운 겨울이 되면 성 전체가 꽁꽁 얼어붙었기 때문에 시녀를 포함한 시종, 기사들과 함께 다시말해 남녀 여러명이 모두 섞여 혼숙을 했다는 거다. 공주가 시종 기사들과 함께 자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영화 속에서 늘 보던 로맨틱한 공주의 환상은 단번에 깨진다. 왕과 왕비가 여행을 할 때면 의사, 약사, 요리사, 시종, 난장이를 포함한 모든 궁정인들이 뒤따랐고 애완동물은 물론이고 목에 자물쇠를 채운 곰, 공작새까지 데리고 다녔단다. 가구들은 물론이고 왕족의 취미생활을 위한 사치품과 귀족들에게 줄 선물, 무도회를 열기 위한 도구들까지..하여간 궁정 전체를 통째로 들고 다녔다 한다.

프랑스에서 특히 향수가 발달했던 이유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으나 새삼 다시 읽으니 정말 웃겼다. 물이란 자체를 몹시 불경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목욕이라는 것을 평생 한번도 안하고 죽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태양왕 루이 14세는 평생 20번 정도 목욕을 했다는데, 이마저도 당시 사람들에겐 매우 놀라운 기록이라고... 용모가 하얀 것을 미덕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백분가루를 뿌렸으며 얼굴에는 두터운 화장을 했는데, 한번 화장을 하면 최소한 일주일 동안 지우지 않고 계속 덧칠만 한다고 한다. 목욕을 안하니 당연히 몸에서는 냄새가 나고 화장을 한 얼굴을 지우지 않고 계속 떡칠을 해대니 그 덧칠한 물질들이 피부와 엉겨붙어 썩는 것은 당연했다. 얼마나 악취가 날까? 진한 향으로 그 악취를 가리고자 향수가 발달할 수 밖에 없었다고...

또한 그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옷을 입고 어떻게 화장을 하며, 또 어떻게 볼일을 봤는지에 대한 일들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기존 역사서에서는 알기 어려웠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흥미로웠다. 또한 후대 사람들이 섣불리 잘못 평가하고 있는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풍퐈드루나 비운의 왕비 마리앙투와네트에 대한 이야기들도 그들의 지극히 사적인 관점을 통해 다시 재조명해보니 매우 안타까운 부분이 많았다.

어떻게 보면 역사적으로 가장 화려하게 느껴지는 16~18세기 귀족과 왕족들의 생활은 그들의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암울하고 지저분한 구석이 많았다. 현재 절대 권력의 상징인 화려한 베르사유 궁이 그당시 구석구석 지린냄새와 오물로 쌓여있었다는 것은 알게되었고...그 화려함의 극치는 귀족과 왕족들의 겉치례뿐이 아니었을까 하는 씁쓸함도 남는다. 물론 문화나 인식의 관점이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 많이 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대를 사는 난 미술 작품 속의 화려한 그들의 모습을 통해 다시한번 그당시 생활 모습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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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만경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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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을 집어 들었다. <퍼레이드>에 이후에 그에게 반해 그의 출간된 작품을 모두 사들였는데, 이 작품은 내가 읽은 그의 여덟번째 소설이다. 한 작가의 작품을 연속해서 읽다보면 어렴풋이 작가의 성향이나 느낌을 알 수 있다. 물론 내가 그의 작품을 몇 개 읽었다고 작가의 작품 성향에 대해 이러구저러구 논한다는 것은 정말 경솔한 일임을 안다. 그리고 작품의 느낌이라는 것이 항상 읽을 때마다 같은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감정 상태를 갖고 읽느냐 또 언제 읽었느냐에 따라 때때로 많이 다르긴 하더라.. 내가 훗날 또 다시 이 작품을 읽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 작품까지 읽고 난 슈이치에 대한 나의 인상은 웬지 모를 쓸쓸함이다. 따뜻한 봄의 느낌이라기보단 차가운 겨울의 느낌이랄까..그리고 해가 진 후의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하늘의 느낌이었다...

동경만경... 한남자와 여자의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남녀의 연애이야기를 하고 있음엔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소설에서는 여느 연애소설에서 느껴지는 사랑의 따뜻함이라던가 아니 꼭 밝은 감정만이 아니더라도 사랑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이라던가 슬픔이라던가 애닯픔...같은 것들을 느낄 수 없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는 바다의 부두 창고에서 육체 노동을 하는 다소 거친 느낌의 사람이고, 여자는 고층 빌딩의 대기업에서 일하는 미모와 지성을 갖춘 직장여성이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커플은 아니지만 웬지 통속 연애드라마에서 몇번쯤 나왔었던 것 같다. 대개 이런 설정에는 ’남녀가 서로 사랑하지만 서로 다른 신분과 주위 반대 때문에 아파하고 고뇌한다. 그러나 결국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고 행복해진다’ 이런 이야기가 전개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조금 다르다. 두 남녀의 만남부터 이메일로 알게되어 소위말하는 ’번개’로 시작된다. 쉽고 빠르게 만난 남녀이기에 서로의 만남도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살아가는 환경도 다른 남녀였기에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되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만나서 바로 섹스하고, 그저 그 순간의 즐거움만 생각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의 본명과 직업도 솔직히 말해주지 않는다.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진정한 자신을 보여주는 것을 두려워했고, 마음을 열면 상처받으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늘 한결갖지 만은 않다고 알고 있기에 그들은 마음을 닫아둔 채 서로의 육체에만 탐닉한다.

마치 인터넷이란 공간을 통해 익명의 남녀가 서로 즉흥적으로 만나 즐기고 바로 헤어지는 우리 사회의 사악한 단면을 조금 엿본 것 같았고, 급변하는 사회에 인간의 마음마져도 쉽게 변해버리고 결국 누구에게도 진실한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삭막한 현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소설이 그렇게까지 막장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서로에 대해 이해를 하고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다소 희망적인 둘의 관계를 예견하면서 이 소설은 끝을 맺는다.

현대 사회는 인터넷의 급속한 발달과 함께 온라인 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서로 서로 관계를 맺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쉽게 사람을 알게 되고 쉽게 헤어지는 일회성 관계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온라인 상의 익명성이라는 것이 인간관계를 진지하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읽은 독일 소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가 기억났다. 이 작품도 남녀의 이메일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동경만경과 다른 점은 그들은 만남 자체에 관심을 두기 보단 이메일로서 서로에 대해 차츰 알아가고 그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며, 결국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만날 수 없게 되는 상황까지 가게 된다. 두 작품 모두 똑같은 온라인 상의 만남으로 시작되고 있지만 분위기는 짐짓 다르다.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남녀는 현대 사회의 다소 쓸쓸하고 개인주의적인 인간관계를 대변하는 듯한 주인공들이 많이 등장했다.(최소한 내가 읽은 그의 소설은 대부분 그렇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가슴 따뜻하고 진정한 마음을 표현하는 정직하고 열정적인 사람들이 많다. 나 또한 비록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오랫동안 온라인으로 친분을 쌓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가 아직까지는 그렇게까지 쓸쓸하고 삭막한 사회는 아님에...또 내 주위에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좋은 온라인 친구들이 있다는 것에 뿌듯한 행복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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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6
돌프 페르로엔 지음, 이옥용 옮김 / 내인생의책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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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는 대개 어른들 특히 가장 가까운 부모의 생각이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기 마련이다. 어린 아이의 모방 능력은 어른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나다. 우리가 무의식 중에 내뱉는 말이나 행동들도 어린아이는 그대로 흡수해 자기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책 속에 나오는 '악녀'는 열네살 어린 소녀이다. 악녀라고 하기엔 너무 순진해서 그녀가 하는 당연한 듯히 저지르는 악행들이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다. 그녀가 하는 생각이나 행동들은 분명 나쁜 짓이고,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끔직할 정도로 잔인하지만 그녀가 '악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어른들과 시대 상황이 안타깝다.

이 책은 19세기 수리남에 사는 열네살 소녀의 일기이다. 수리남은 그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소녀는 백인 농장주의 딸로 어릴 때부터 흑인 노예들의 시중을 받으며 공주처럼 살았고, 그녀의 부모나 주위의 백인들이 흑인을 부리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물론 여느 10대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빨리 숙녀가 되고 싶어했고, 자신의 외모에 관심이 많았으며, 좋아하는 소년 루카스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우리가 생각하는 평범한 소녀와 다르다. 열네살 때 생일 선물로 큰 쟁반위에 뚜껑을 덮은 채 올려진 꼬꼬와 채찍을 선물로 받았다.(꼬꼬는 흑인소년이다.) 노예를 선물로 주는 어른들....어릴 때부터 노예를 길들이는 법을 봐왔던 그녀에게 우리는 어떤 행동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노예를 어떻게 부리는지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순진한 소녀의 일기를 통해 너무나 자세히 그려져있다. 말을 안들으면 팔아버린다고 협박을 했고, 맘에 안들면 마구 채찍을 휘둘렀다. 어른들은 그녀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누구하나 가르치거나 타이르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네것이니 정 싫으면 팔아버려'라고 아이의 의견에 지지까지 해준다. 노예 시장에서 물건처럼 거래되는 노예들을 봤고, 아빠의 성적 노리개로 이용되는 노예도 봤다. 노예의 아기가 운다고 물속에 집어넣어 죽였다고 이웃집 아줌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고, 바깥에서 노예가 맞아죽는 비명 소리를 들으면서 식탁에서 후식이 맛있다고 먹는다.

그녀는 '악녀'임에 분명하지만 그녀를 그저 '악녀'라고 하기엔 주위 사회와 현실이 너무 뒤틀려있다. 여기 나오는 모든 백인들에게 양심의 가책이라든가 동정심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잘못된 관습이 오래전부터 당연하다는 듯 세습되어온  역사적 치부이다.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소녀의 눈을 통해 본 현실이 더 찹찹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 이야기는 2백년도 더 된 이야기고 노예제도가 폐지된지는 오래되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도 유색인종의 차별에 대한 이야기는 종종 들려온다.

'아름다운 해피앤딩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불편한 책이 될 것이다' 라고 도입글에 쓰여 있듯이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심각한 문제가 더 없이 무겁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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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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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어느날 갑자기 무언가를 쓰고 싶어져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가 늘 무언가를 읽고 싶어서 책을 드는 것 처럼... 매일매일 몇권씩의 책을 손에 들고다니는 나를 보며, 주위 사람들은 묻는다. 책이 그렇게 재밌냐고.. 내 동생은 또 이렇게 말한다. 언니가 매일 그렇게 책 속에만 파묻혀 지내니깐 현실과 허구를 구별 못하고 지금까지 이 상태로 있는 거란다. 내가 로맨스 소설을 즐겨 읽으며 소설 속의 멋진 남성상을 꿈꾸는 것도 아니고 소설과 현실을 구별 못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지만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에서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고 싶은 곳이 책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무언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에 어떤 목적이나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좋다는 것, 마음에 든다는 것으로 족하다. 단지 읽고 싶은 마음으로 너무 가볍게 읽어서 일까, 다 읽고 나니 도대체 이 작품이 무슨 이야기인지 뭘 말하고 싶은 것이지 알 수가 없었다. 하루키 자신이 글 쓰는 것에 많은 영향을 받은 데릭 하퍼필드에 관해 그의 작품을 비롯해 여러가지 상세하게 그려냈지만 정작 그것이 하루키가 꾸며낸 이야기였다는 것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는 것 뿐....뭔가 허무하다는 여운이 가슴 속에 확 퍼지는 것 같았다. 책장을 뒤로 넘겨 다시한번 읽었다.

이 글은 1970년 여름 주인공이 21살 대학생 시절의 18일 동안의 일들을 마치 일상의 일들을 기록하 듯이 가볍게 그린 소설이다. 그는 부자이지만 부자를 몹시 경멸하는 ’쥐’와 제이스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지낸다. 어느날 손가락이 한개없는 소녀을 알게되고...쥐와 그 그리고 그녀와의 일상이 특별한일 없이 그냥 흘러간다. 이것 저것 의미없는 일들이 중구난방으로 나열되어 있어 처음에는 책의 줄거리나 감정의 흐름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저 하루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마구 풀어논 듯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속내를 한번 쯤 잘 생각해보면 그리 가볍지만은 않은 껄끄러운 것이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이는 그들이지만 각자에겐 결코 순탄하지만 않은 과거가 있었다. 그 과거마저도 너무 맹숭맹숭하게 지나치 듯이 나열되어 있어 책을 읽는 나 조차 별 생각없이 지나쳐버렸다. 또한 그들 각각 상처 입은 내면을 결코 아프다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 서로가 상처받은 내면을 모르듯이 나또한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사람들의 일면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늘 사람의 겉모습만으로 그들은 다 알았다고 섣불리 생각하지는 않는지.... 마치 내가 이 소설을 아무생각 없이 후루룩 읽고 난 첫 느낌처럼...
"한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겠는가." <p.147>

그는 다시 도쿄로 돌아왔고, 손가락이 네개밖에 없는 여자와는 그 후 두번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1970년 짧막한 여름 그녀와 여러가지 일이 있었고, 그 이전 여자 친구와도 또 그 이전 여자 친구와도 여러 일이 있었지만 모두 과거로 흘러간 듯 했다. 
모든 건 스쳐 지나간다. 누구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p.143>

현재 20대 후반인 그는 21살 그때의 일을 다시 회상한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치 전혀 상처입은 것 같지 않은 듯 흘려버린 과거였지만 마음 속 깊게 지나간 모든 것이 새겨 있었다.  

나는 언제나 그녀와 함께 걷던 길을 걷고, 창고의 돌계단에 걸터앉아서 홀로 바다를 바라본다. 울고 싶을 때는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 법이다. <p.145>

이 책을 읽으면서 상처받은 그와 그녀 그리고 그들에 대해 생각했다. 상처하나 없이 늘 행복하기만 한 사람이 있을까? 물론 겉으로 대놓고 나 상처받았어요.슬퍼요 라며 맘껏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신의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현실이 되었다. 또한 날로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지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자신의 상처나 결점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더러 남의 감정에도 그렇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상투적인 위로의 말 외에는 해줄 수 없고 서로의 아픔에 대해선 무력해질 수 밖에 없다. 주인공 또한 공허함을 가득 담은 채 과거를 회상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모든 건 스쳐지나간다.. 그렇게 과거의 아픔도 상처도 바람처럼 희미하게 사라져버리길 바래야 하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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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빨개지는 아이
장 자끄 상뻬 글 그림, 김호영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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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놀이터에서 같이 흙장난을 치며 놀던 소꿉친구가 생각났다. 초등학교 때 전학을 가는 바람에 소식이 끊겼다. 학교다니고 졸업하고 취직하고 이십년 이상이 흘러버려 잊고 지내던 그 친구가 문득 그리워졌다. 아마 어딘가에서 결혼해서 잘 살고 있겠지...그 친구의 못생겼지만 귀여웠던 뭉툭한 코가 그립다. 아마 길가다 스쳐 지나가게 되더라도 서로 몰라볼 정도로 세월이 지났다. 우린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 아이에서 어른이 되었다.

상뻬의 글을 읽고 진정한 우정이란 것에 대해 생각했다.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마르슬랭은 그 외모 때문에 친구를 사귈 수 없었다. 그는 혼자 노는데 익숙해졌지만 그렇게까지 불행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얼굴이 왜 빨개지는지에 대해 궁금해했을 뿐이다. 어느날 시도 때도 없이 재채기를 하는 르네를 만나게 된다. 르네 또한 자신의 처지를 그렇게까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서로의 처지를 잘 이해하는 그 둘은 친구가 된다. 

마르슬랭은 감기에 걸릴 때마다 그의 친구처럼 기침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흡족해 했다. 그리고 르네 역시 햇볕을 몹시 쬔 어느 날, 그의 친구가 가끔씩 그러는 것처럼 얼굴이 빨개져 버린 것에 아주 행복해 한 적이 있었다. <p.62>

서로의 컴플렉스를 마음깊이 나누고 사랑하는 그 둘의 우정이 너무나 마음깊이 와 닿았다. 

하지만 어느날 르네가 이사를 가버려 그 둘은 헤어지게 된다. 세월은 흘러 어른이 되었지만 마르슬랭의 얼굴은 여전히 빨갰고, 르네의 재채기 역시 변함이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또 다시 예전처럼 우정을 쌓는다. 그들의 우정도 변하지 않았다. 단지 변한 것은 그들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것 뿐.....

비록 지금은 헤어져 소식을 모르지만 그 친구의 추억 속에 어린 시절 나는 어떤 모습으로 친구들에게 기억되고 있을까 참 궁금하다. 어릴 때의 나는 매우 조용하고 소심한 아이였기 때문에 그 존재감이 약해서 나란 존재가 잊혀졌을 수도 있겠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길 원하는 마음은 나만의 이기적인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따라 옛날 생각이 많이 너무 많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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