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만경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오래간만에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을 집어 들었다. <퍼레이드>에 이후에 그에게 반해 그의 출간된 작품을 모두 사들였는데, 이 작품은 내가 읽은 그의 여덟번째 소설이다. 한 작가의 작품을 연속해서 읽다보면 어렴풋이 작가의 성향이나 느낌을 알 수 있다. 물론 내가 그의 작품을 몇 개 읽었다고 작가의 작품 성향에 대해 이러구저러구 논한다는 것은 정말 경솔한 일임을 안다. 그리고 작품의 느낌이라는 것이 항상 읽을 때마다 같은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감정 상태를 갖고 읽느냐 또 언제 읽었느냐에 따라 때때로 많이 다르긴 하더라.. 내가 훗날 또 다시 이 작품을 읽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 작품까지 읽고 난 슈이치에 대한 나의 인상은 웬지 모를 쓸쓸함이다. 따뜻한 봄의 느낌이라기보단 차가운 겨울의 느낌이랄까..그리고 해가 진 후의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하늘의 느낌이었다...

동경만경... 한남자와 여자의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남녀의 연애이야기를 하고 있음엔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소설에서는 여느 연애소설에서 느껴지는 사랑의 따뜻함이라던가 아니 꼭 밝은 감정만이 아니더라도 사랑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이라던가 슬픔이라던가 애닯픔...같은 것들을 느낄 수 없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는 바다의 부두 창고에서 육체 노동을 하는 다소 거친 느낌의 사람이고, 여자는 고층 빌딩의 대기업에서 일하는 미모와 지성을 갖춘 직장여성이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커플은 아니지만 웬지 통속 연애드라마에서 몇번쯤 나왔었던 것 같다. 대개 이런 설정에는 ’남녀가 서로 사랑하지만 서로 다른 신분과 주위 반대 때문에 아파하고 고뇌한다. 그러나 결국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고 행복해진다’ 이런 이야기가 전개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조금 다르다. 두 남녀의 만남부터 이메일로 알게되어 소위말하는 ’번개’로 시작된다. 쉽고 빠르게 만난 남녀이기에 서로의 만남도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살아가는 환경도 다른 남녀였기에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되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만나서 바로 섹스하고, 그저 그 순간의 즐거움만 생각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의 본명과 직업도 솔직히 말해주지 않는다.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진정한 자신을 보여주는 것을 두려워했고, 마음을 열면 상처받으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늘 한결갖지 만은 않다고 알고 있기에 그들은 마음을 닫아둔 채 서로의 육체에만 탐닉한다.

마치 인터넷이란 공간을 통해 익명의 남녀가 서로 즉흥적으로 만나 즐기고 바로 헤어지는 우리 사회의 사악한 단면을 조금 엿본 것 같았고, 급변하는 사회에 인간의 마음마져도 쉽게 변해버리고 결국 누구에게도 진실한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삭막한 현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소설이 그렇게까지 막장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서로에 대해 이해를 하고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다소 희망적인 둘의 관계를 예견하면서 이 소설은 끝을 맺는다.

현대 사회는 인터넷의 급속한 발달과 함께 온라인 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서로 서로 관계를 맺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쉽게 사람을 알게 되고 쉽게 헤어지는 일회성 관계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온라인 상의 익명성이라는 것이 인간관계를 진지하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읽은 독일 소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가 기억났다. 이 작품도 남녀의 이메일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동경만경과 다른 점은 그들은 만남 자체에 관심을 두기 보단 이메일로서 서로에 대해 차츰 알아가고 그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며, 결국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만날 수 없게 되는 상황까지 가게 된다. 두 작품 모두 똑같은 온라인 상의 만남으로 시작되고 있지만 분위기는 짐짓 다르다.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남녀는 현대 사회의 다소 쓸쓸하고 개인주의적인 인간관계를 대변하는 듯한 주인공들이 많이 등장했다.(최소한 내가 읽은 그의 소설은 대부분 그렇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가슴 따뜻하고 진정한 마음을 표현하는 정직하고 열정적인 사람들이 많다. 나 또한 비록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오랫동안 온라인으로 친분을 쌓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가 아직까지는 그렇게까지 쓸쓸하고 삭막한 사회는 아님에...또 내 주위에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좋은 온라인 친구들이 있다는 것에 뿌듯한 행복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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