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이는 대개 어른들 특히 가장 가까운 부모의 생각이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기 마련이다. 어린 아이의 모방 능력은 어른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나다. 우리가 무의식 중에 내뱉는 말이나 행동들도 어린아이는 그대로 흡수해 자기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책 속에 나오는 '악녀'는 열네살 어린 소녀이다. 악녀라고 하기엔 너무 순진해서 그녀가 하는 당연한 듯히 저지르는 악행들이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다. 그녀가 하는 생각이나 행동들은 분명 나쁜 짓이고,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끔직할 정도로 잔인하지만 그녀가 '악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어른들과 시대 상황이 안타깝다. 이 책은 19세기 수리남에 사는 열네살 소녀의 일기이다. 수리남은 그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소녀는 백인 농장주의 딸로 어릴 때부터 흑인 노예들의 시중을 받으며 공주처럼 살았고, 그녀의 부모나 주위의 백인들이 흑인을 부리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물론 여느 10대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빨리 숙녀가 되고 싶어했고, 자신의 외모에 관심이 많았으며, 좋아하는 소년 루카스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우리가 생각하는 평범한 소녀와 다르다. 열네살 때 생일 선물로 큰 쟁반위에 뚜껑을 덮은 채 올려진 꼬꼬와 채찍을 선물로 받았다.(꼬꼬는 흑인소년이다.) 노예를 선물로 주는 어른들....어릴 때부터 노예를 길들이는 법을 봐왔던 그녀에게 우리는 어떤 행동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노예를 어떻게 부리는지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순진한 소녀의 일기를 통해 너무나 자세히 그려져있다. 말을 안들으면 팔아버린다고 협박을 했고, 맘에 안들면 마구 채찍을 휘둘렀다. 어른들은 그녀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누구하나 가르치거나 타이르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네것이니 정 싫으면 팔아버려'라고 아이의 의견에 지지까지 해준다. 노예 시장에서 물건처럼 거래되는 노예들을 봤고, 아빠의 성적 노리개로 이용되는 노예도 봤다. 노예의 아기가 운다고 물속에 집어넣어 죽였다고 이웃집 아줌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고, 바깥에서 노예가 맞아죽는 비명 소리를 들으면서 식탁에서 후식이 맛있다고 먹는다. 그녀는 '악녀'임에 분명하지만 그녀를 그저 '악녀'라고 하기엔 주위 사회와 현실이 너무 뒤틀려있다. 여기 나오는 모든 백인들에게 양심의 가책이라든가 동정심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잘못된 관습이 오래전부터 당연하다는 듯 세습되어온 역사적 치부이다.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소녀의 눈을 통해 본 현실이 더 찹찹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 이야기는 2백년도 더 된 이야기고 노예제도가 폐지된지는 오래되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도 유색인종의 차별에 대한 이야기는 종종 들려온다. '아름다운 해피앤딩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불편한 책이 될 것이다' 라고 도입글에 쓰여 있듯이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심각한 문제가 더 없이 무겁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