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지막 막부의 쇼군이다.

2.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개혁적, 존왕양이, 막부내부에서 왕따)의 일곱째 아들로 가까스로 쇼군이 되었으나 막부 내부에서 비주류이어서 그 기반은 안정적이지는 못했다.

3. 대정봉환으로 상황을 반전시키는 상당한 전략가(판을 뒤집는 승부사)이며, 천황의 신임(역량도 충분히 검증된 인물)도 있었으며 교토의 3만명 이상 동원할 수 있는 정규군이 있었다.

4.죠슈마와 싸쓰마번이 쿠데타(영국의 지원)를 일으켰을때 상당한 막부군과 프랑스의 지원의사가 있었음에도 내전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진정한 지혜는 물러날 때를 안다는 것이다. 범부의 가장 큰 착각을 피하는 행운을 일본은 결과적으로 누렸다.

5.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조선 고종의 갑오개혁등 방향은 비슷하였으나 핵심적인 가장 큰 차이는 외세를 끌여들렸는냐의 차이로 보인다. 동학농민혁명으로 청 일을 끌어들인 조선은 몰락(고종이나 대원군 민씨세력이 이때 그들의 운이 다한것을 알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과연 ?)했고, 일본은 700년간 유지되온 막부 최후 쇼군 요시노부가 저문 해를 보고 그 때를 알아(이게 기적이 아닐까? 이런일이 실제로 일어나다니 놀랍다!), 물러나 메이지 유신의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오 히로부미등 능력있고 젊은 친구들의 메이지유신을 완성시켰다.(사무라이의 나라, 무신의 나라 어쩌면 메이지 유신은 그 무신들이 갖을 수 있는 긍정적 실용성. 신속한 의사결정, 위기에 대한 생존감이 그 성공에 영향을 미친게 아닌가 싶다.) 그들도 19세기 중반부터 우리 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메이지 유신 삼걸인 사카모토 료마와 오쿠모 도시미치는 암살, 사이고 다카모리는 할복자살할 정도로 일본이라는 사회는 사실 엄청난 사회적 스트레스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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