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슴푸레?"
"이 세상 것이 아닌, 허무한 느낌이라고 할까? 오색딱따구리가 빨간 머리로 나무를 쪼고 있으면 머리에 피가 올라와서 이상해진 사람 같지만, 같은 딱따구리라도 쇠딱따구리는 담담하고차분하다고 할 수 있어요." - P121

"먹고 자고 사는 곳이라고 한 것은 참 적절한 표현이야. 이들은 뗄 수 없는 한 단어로 생각해야 돼. 먹고 자는 것에 관심 없이 사는 곳만 만들겠다는 것은 그릇만 만들겠다는 얘기잖아? 그러니까 나는 부엌일을 안 하는 건축가 따위 신용하지 않아. 부엌일, 빨래, 청소를 하지 않는 건축가에게 적어도 내가 살 집을 설계해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어." - P106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은 효율이라든가 쓰임새 같은 것을 고려해서 기존의 사물을 개량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어. 프로테스탄트의 원점은 애당초 그런 것이었으니까.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유럽에서 급속하게 확대시킬 수 있었던 것은 범용성을철저하게 생각한 개혁이기 때문이지.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인쇄라는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면 한 글자 한 글자 손으로 베끼던 사본보다 몇백 배 빨리, 대량으로 인쇄하는 것이 가능했지.
게다가 그때까지 터무니없이 크고 무거웠던 탁상용 성경을 루터는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사이즈로 바꿨어. 또 대부분의 사람이 읽지도 못하고 읽으려고도 하지 않은 라틴어가 아니라, 책의 세계에서는 천시되던 독일어로 번역했지. 덕분에 성경은 급속히 널리 읽히게 된 거야. 프로테스탄트들의 실용성에 대한 감각과 신뢰는 이런 데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어." - P113

중요한 것은 놓치기 쉬울 만큼 평범한 말로 얘기되는 법이다. - P119

인간이 차음 본 평평한 것. 바람 없는 날의 호수, 파도가 쓸고 간 모래사장, 얼어붙은 물웅덩이. 내 청바지와 티셔츠에는 주름이 가고, 풀이랑 잎사귀의 초록색 파편이 달라붙어 있다. 예초기 엔진을 끄고 헬멧을 벗는다. 숲의 소리가 귀에 돌아온다. - P16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밤에 손톱을 자르면 부모 임종을 못 지킨다고들 하잖아? 여기서는 연필도 안 깎아. 미신이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고." - P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러나 나는 그 시절의선생님 건축을 십 년, 이십 년 뒤에 직접 보고 돌아다니면서 무라이 슌스케라는 건축가가 묵묵히 계속해온 일의 비범함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고도경제성장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안이한 자기과시욕에 구애되지 않고, 실질적이면서도 시대에 좌우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러면서도 사용하기 편리한 건물을 무라이 슌스케는 하나하나 만들어내고 있었다. - P16

목소리란 참 이상하다. 목적도 마음도 그대로 드러난다. 유키코의 온갖 것이 목소리에 깃들어 있는 것 같고 그 모든 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목소리는 사람을 잘설득한다. 귀에 쉽게 들어오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도없는데, 그래도 여전히 설명으로는 다 할 수 없는 부분이 조금남는다. 그 조금 남아 있는 것이 사람을 매료시킨다. 말의 의미그 자체보다도 소리로서의 목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게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유키코의 목소리가 들리면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유키코의 목소리를 모아두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 P6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4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몇 번이고 가나와 이야기하자. 집이 완성되고 나서도 늦지 않다. 우아하다는 말은 이제 그만 듣고 싶다. - P2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이층 단독주택, 그것도 지하실 포함. 쓸 수 있을지 아닐지는 아직 모르지만 벽난로까지 있다. 오랜 아파트 생활 동안 난로에 장작을 때는 게 은밀한 꿈이었다. 바닥 아래는 다른 집이 없이 그냥 땅이고 지붕 위에는 하늘밖에 없다. 머릿속으로 그리던 것이상의 해방감이 느껴졌다. - P38

그래도 가나의 눈 표정에는 그녀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의 부분에서 소리 없이 떠오르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의 진짜 매력은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비롯된다. 화장도 웃음소리도 완벽하게 통제되는 것은 재미없다. - P52

새는 바람을 많이 피운다고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새끼의DNA를 검사하면 다른 수컷의 새끼가 육십 퍼센트씩이나 된다는 모양이다. 원앙 한 쌍이 늘 같이 있는 것은 사이가 좋아서가아니라 바람피우지 못하게 암컷이 감시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정말일까. - P63

눈이나 입처럼 움직이지는 않아도 잠자코 남에게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도 차양과 귀는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 - P64

"오래된 걸 이것저것 손보는 게 즐겁거든.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정원도 업자를 부르면 되살아나고, 다다미도 이불도 손질하면 새것이 되고, 장지도 덧문도 마찬가지야. 부엌 공사도 그랬어. 어둡지, 간장 냄새 나지, 전체적으로 기름때가 묻어 있었지만, 물론 그건 그것대로 운치가 있었지만, 싹 고쳤더니 몰라보게좋아졌어. 수명이 다해가던 게 되살아나는 게 뭐라 말할 수 없이기쁜 거야." - P85

우연히 호감 가는 여자가 나타난다 해도 그 뒤 식사에 초대하고, 두 사람의 개인사며취향, 사고방식, 라이프스타일을 맞춰보고, 메일 등등을 주고받으며 호의를 전할 생각을 하면 다소 귀찮다. 타인과 한 지붕 밑에서 살아갈 자신도 별로 없다. 나는 가족이 아니라 좋은 집을 원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 P120

나는 마음 편히 쉴 수 없었던 주말을 그리워하는 걸까. 아니면 지금 이렇게 그저 멍하니 있는 나 자신을 용서하려는 걸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수증기처럼 사라져가는 의문. - P149

이 집에 군림하는 왕은 텔레비전이 아니라, 하물며 라디오도 아니고, 벽난로일 터였다. 불을 피우면 저절로 시선이 모이는 위치에 무게 있게 자리하고 있다. 오랜 세월 불을 잊은 벽난로는 지금은 차갑게 식어 커다란 입을 벌린 채 죽은 것 같은 상태다. 그래도 불이 뻘겋게 타오르면 되살아날 것이다. 그럴 터였다. - P1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