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몬 찬가 - 진화 심리학으로 풀어 가는 호르몬 지능의 비밀
마티 헤이즐턴 지음, 변용란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자주 들은 이야기는 '망할 호르몬'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뱃 속에 다른 생명체가 들어차며 같이 얻게 된 감정기복과 예민해진 감각은 출산을 하며 상실감이 컸는지 끝없는 우울을 향해 달려갔다. 별 것 아닌 일에 서럽고 툭하면 눈물이 났다. 평소 둔한 편이었던 나도 호르몬에 속수무책으로 지배 당한 것 같았다. 그때 호르몬은 나를 나답지 못하게 하는 사악한 마법 같았다.



배란 주기가 여성의 색슈얼리티에 미치는 영향을 집요하게 연구한 세계적인 과학자 마티 헤이즐턴이 쓴 <호르몬 찬가>는 부정적인 이미지에 갇힌 여성 호르몬의 실체를 과학적으로 재평가하는,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접근한 진화심리학 책이다. 그간 진화 생물학과 진화 심리학은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에 과학적 증거를 보여주며 의도치 않게 남성 중심주의와 가부장제를 보다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해왔다. 때로는 남성의 성 충동은 본능적이라며 남성이 가해자인 성폭력이 더 많은 이유에 면죄부를 부여하기도 했다. 그런 진화 생물학과 진화 심리학을 여성 관점에서 연구했다는 점부터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은 높았다.



저자는 호르몬에 쉽게 지배당하는 여성은 자신의 행동에 통제력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편견을 이 책을 통해 타파하고자 했다. 저자는 '호르몬이 암컷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지만', 호르몬에 좌우되는 행동은 오랜 세월동안 여성의 몸에 축적되어 온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오래된 지식'이라고 말한다. 호르몬은 보다 번식에 앞서 더 괜찮은 유전자를 찾을 수 있게 유혹하기도 하지만 철저히 방어하기도 한다. 색슈얼리티에 있어 여성은 대체로 수동적으로 남성에 의해 선택 받는 존재처럼 인식되었다면, 왕성한 에너지를 가지고 짝을 찾는 호르몬은 여성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상대를 선택하는 존재임을 증명한다. 뇌과학 책에서 유사하게 접한 내용인데 배란기에 여성은 동공의 크기가 커지며 보다 매력적인 외형으로 변하는데, 그때 그 책은 선택 받는 입장의 여성을 서술했다면 <호르몬 찬가>는 더 괜찮은 짝을 찾기 위한 여성 호르몬의 고군분투로 그리고 있어 보다 여성 주체적인 서술이었다. 



이 책에는 수많은 상황에서 여성들의 몸에 나타나는 호르몬과 역할을 설명하는데, 인상 깊은 것은 엄마들이 가진 초인적인 힘의 원천 역시 호르몬이라는 사실이다. 일명 '엄마곰 효과'라 불리는 무엇이 위험인지 귀신 같이 알아내고 위험을 향해 맹렬하게 막아서는 엄마의 힘은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과거 시절 아이를 병균과 천적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매커니즘이 남아있는 탓이라는 것. 아이의 울음 소리에 남편보다 내가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런 호르몬 때문일 것이다. 호르몬 때문에 우울해진다 여겼는데, 호르몬 덕분에 아이를 지키는 강한 엄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내게 찾아온 감정 변화와 예민함이 운명처럼 이해되고, 받아들여졌다.



그간 과학계와 의료계 전반에 남성 연구원이 지배적이었고, 실험 역시 암컷 쥐의 생식현상이 통제 불가 변수였기 때문에 수컷 쥐로 대부분의 실험이 이뤄져 남성 중심의 연구 결과들만 차고 넘치는 데 반해 여성의 몸에 대한 과학적 연구와 이해는 미진했다. 최근 저자를 비롯해 많은 연구들이 여성 호르몬과 색슈얼리티의 관계를 밝히고 있고, 이런 연구가 여성의 몸을 정확하게 이해해 잘못된 편견을 바로 잡는 것 뿐만 아니라 남성들의 '비아그라'와 같이 여성 중심의 다양한 치료제를 만들어 내는데도 기여할 것이라 말한다.




"그 여자는 호르몬에 휘둘려.

다음번에 또 이런 말을 듣거나 하게 된다면, '그 여자'는 할머니이고, 어머니이고, 자매이고, 친구이고, 딸임을 명심하라. '그 여자'는 현재를 통해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우리 조상들이자, 각자 호르몬 주기를 지닌 채 태어나 장차 어른이 될 여성들이 이어 온 끊어지지 않는 사슬의 한 고리이다."



 


책 속에는 흥미로운 실험 결과와 동물의 습성, 인류사의 이야기 등 다채로운 이야기가 넘쳐난다. 같이 지내는 여자들끼리 생리일이 같아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생리일 동시성의 신화,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이유, 임신 단박에 성공하는 법 등 듣기만 해도 궁금했던 주제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해주는 박스 속 이야기는 책을 읽는 또다른 재미였다.



여성의 호르몬이 발동하는 상황들은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 하나하나 알아가다보니, 내 변덕과 감정 기복이 생존을 위한 지혜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여성의 호르몬은 통제 불가능한, 까다로운 존재가 아니라 나와 내 아이를 보호해주는 고마운 시그널이다. 알게 되니 달리 보이는 게 이런 것이구나, 앎의 힘을 전해준 즐거운 독서였다.  




 ※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 받아 솔직하게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장난 - 2022년 제4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손보미 외 지음 / 문학사상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해외 작가보다 한국 작가들이 빚어내는 서사와 그 속에 녹아있는 동시대의 문제의식, 한국만의 감성들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은 호흡이 긴 장편보다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고조시키는 단편에 더 잘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떠오르는 신예 작가는 이름을 기억해뒀다가 단편집부터 찾아 읽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국문학과 담을 쌓고 지냈다. 아예 안읽은 것은 아니지만(가장 최근에 읽은 문학상 수상집은 2020년 젊은작가상 수상집이다) 요즘 핫하다는 몇몇 작가들의 이름은 낯설었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문학보다 진짜 현실을 그대로 마주하는 논픽션에 더 끌렸던 것 같기도 하다.



2022 제4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내가 아는 작가는 강화길 뿐이었다. 2년 전 읽은 젊은작가상 대상작이 었던 작가의 단편 <음복>이 다뤘던 젠더 문제- 가부장제 속에서 남성의 무지는 권력이 되고, 여성의 앎은 폭력처럼 대물림되는 불평등한 상황-와 일상의 흔한 상황을 스릴러처럼 긴장감있게 그린 점이 무척 인상 깊었는데, 우수작으로 선정된 강화길 작가의 <복도> 역시 당시 느꼈던 긴장감을 그대로 간직한 채 임대 아파트에 들어와 묘한 차별을 받는 신혼부부의 이야기를 그린다. 존재하지만 지도에는 없는 미스터리한 집,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경계에 머무는 아파트에 살고 있는 신혼부부는 매번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설명하고 또 설명해야한다. 다만 마무리에서 이야기가 갑자기 훅 튀어버리는 느낌이라 조금 아쉬웠다.



눈에 띄는 건 동시대의 문제를 소재로 삼아 실험적인 문장과 서사로 그려내는 작품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층간소음 문제와 이웃간의 소통을 힙합 가사에 실어 유쾌하게 그린 서이제의 <벽과 선을 넘는 플로우>는 낯설었지만 충분히 흥미로웠고, 영끌로 내 집 마련을 한 입장으로 너무 공감하며 읽은 염승숙의 <믿음의 도약>은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장으로 영양제로 대변되는 뭔가를 채워야한다는 강박과 강박이 심해질 수록 더 잘못된 선택으로 치닫는 과정이 그야말로 롤러코스터가 천천히 상승하다가 급하강해 착치할 때 남기는 얼얼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빈 페이지를 펼쳤다.

무언가가 쓰고 싶었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마음을 들여다보세요"

강사는 수업시간에 그렇게 말하곤 했다.

글을 쓰기 위해선 마음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하지만 마음을 들여다보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지, 너무 무서워."

백수린 <아주 환한 날들> 중




백수린의 <아주 환한 날들>은 가족들을 건사한다고 억척스레 살아온 70대 독거 노인이 사위가 맡기고 간 앵무새를 돌보며 맞이하는 변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뻔한 소재같은데 더 이상 자신을 강하게 몰아붙여야 할 어떤 목적도 없어졌는데도 자신을 돌볼 시간이나 생각할 틈도 없이 빡빡한 스케줄에 자신을 내모는 주인공이 앵무새와 교감하며 삶을 돌아보고 추억을 곱씹는 모습이 부모님을 생각하게 만들어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 당시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건, 불장난에서 느꼈던 그 아연실색할 만큼의 쾌감과 과민할 정도의 선명한 감정들, 분명히 실체를 가지고 있었던 그 감각들(불장난과 관련된 그 모든 기승전결!)이 그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허상? 아니다. 허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았고, 앞으로의 삶에 항구적 영향을 끼치리라고 호들갑스럽게 기대했던 순간들이 그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나는 어쩌면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중략)...


때때로 삶에서 가장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건, 바로 그런 착각과 기만, 허상에 기꺼이 내 몸을 내주는 일이라고. 그런 기만과 착각, 허상을 디뎌야지만 도약할 수 있는, 그런 삶이 존재한다고. 언젠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이켜 보는 눈 속에서 어떤 사실들은 재배열되고 새롭게 의미를 획득한다. 불가피하게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며, 허구가 사실이 되고, 사실이 허구가 되는 그런 순간들!"

손보미 <불장난> 중에서





표제작인 대상 수상작 손보미 작가의 <불장난>은 사춘기 시절로 나를 소환시켰다. 가족보다는 자신의 삶을 선택한 엄마, 그리고 젊은 선생과 바람이 나 재혼한 아빠, 아빠에게 빠져 교직 커리어를 다 포기하고 주부가 되어 주인공의 가정에 들어온 그녀. 불안정한 애정 속에서 내적 상처를 입은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너무나 탁월했다. 사실 그때는 불안의 실체를 알 수없고, 자신의 상처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지만, 마음 속에는 차곡차곡 쌓여 어느 순간 폭발하게 된다. 그게 바로 사춘기가 아닐까. 성숙한 무리에게 가지는 호기심과 별것 아닌 일탈에도 압도되어 도망쳐버리는 마음도 무엇인지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쌓인 흔들리는 자아는 불장난으로 타버리고, 새로운 '작가'로서의 자아가 탄생하는 클라이막스는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서사가 탁월해서 읽는 내내 벅차올랐다.



대상작만큼 같이 실린 손보미 작가의 자선 대표작 <임시 교사>도 좋았다. 임시 교사였던 P부인이 젊은 부부의 아이 보모 일을 하며 겪게 되는 일화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서글픈 차이를 서사적으로 잘 표현했다. 정규직과 같은 책임과 소속감을 강요하고, 어느새 그 속에 녹아들어 헌신하지만 결국 '임시직'이라는 한계를 똑똑히 절감하게 되는, P교사의 외로움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한국문학의 정통성을 이어 온 이상문학상, 그렇기에 지금 시대를 이야기하고 한국 현대소설의 현재를 대변하는 다양한 작가들을 한 권에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 받아 솔직하게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지만 동시에 어머니는 그날, 그 모든 감각들이 하나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점 역시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정전과 비바람과 천둥소리를 뚫고자신에게 도달한 안도감과 해방감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삶이며 정해진 기간 이곳을 떠나기로 예정되어있기 때문에 자신이 그 모든 것을 완수할 수 있었다는 사실 역시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훗날 자신이 머물고 있던 공간을 임시 거처가아닌 ‘집‘이라고 마침내 지칭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이날을어떤 식으로 떠올렸을까? 떠올리긴 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길드 사회주의 고전의세계 리커버
G. D. H. 콜 지음, 장석준 옮김 / 책세상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한때 한번도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체제에 대해 의심해본 적이 없다. 의회가 국민을 대변한다는 대의민주주의와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 그 이상의 삶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계승해서 세워진 국가들은 대부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체제의 실패를 보여주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반도에서 대치하고 있는 또 다른 나라 북한의 가난과 봉건제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보이는 정치 체제는 나의 확신을 더욱 공고히 하게 만들었다. 한때 금서였던 마르크스주의는 더 이상 2000년 대를 맞이하는 대학생들에게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우리는 세계화라는 넓어진 무대에 서기 위해 더 치열하게 스펙을 갈고 닦아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내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물려받은 유산이 많은 사람은 너무나 손쉽게 부를 불려갔다. 치솟는 부동산 가격, 투기로 전락한 금융 투자 등으로 앉은 자리에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아질 수록 노동의 가치는 바닥을 쳤다. 정치는 어떤가? 선거철이 되면 국민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읍소하는 국회의원들은 과연 진정한 국민의 대변자인가? 청년도 없고 여성도 없다. 50대 이상의 연령대, 남성, 판검사, 변호사, 언론인 등이 장악한 국회. 나와는 완전히 계층이 다른 그들이 어떻게 나를 대변할 수 있나?


게다가 지역구를 기반으로 한 선거구 제도는 과연 효율적인가? 자기 지역에 제대로 된 건설 사업 하나 가져오는 걸 치적으로 여기며 벌어지는 난개발의 결과가 세금 도둑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모습을 얼마나 자주 접하지 않았나.



지금 한국의 자본주의와 대의 민주주의 체제가 심각한 불평등과 부의 세습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그 이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회주의라는 말은 왠지 이미 망한 체제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길드 사회주의 입장의 핵심은 사회가 모든 구성원에게 개인적 집단적 자기 표현의 기회를 가능한 최대로 보장하도록 조직되어야만 하며, 이는 능동적 자치를 사회의 모든 부분으로 확대함을 뜻한다는 신념에 있다."<길드 사회주의> p23




G.D.H 콜의 <길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넘어 국가 사회주의의 대안으로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 사상을 담고 있는 책이다. 길드 사회주의는 중세의 길드처럼 각 산업군 결사체가 각 산업의 자치를 책임지고 길드의 연합체인 전국길드가 국가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굉장히 혁신적인 개념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게 되었는데 사회주의도 여러가지 분파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길드 사회주의는 비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사회주의로 대중 자치를 기반으로 한 '경제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국가 주도의 공산주의 경제 체제를 이념으로 삼은 마르크스 주의와 대치된다. '경제 민주주의'라니, 몇년 간 한국 정치의 화두가 된 말이 아닌가?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재벌들이 쌓아 올린 부는 그들만의 것이다. 공적 자금을 투입해 망해가는 기업을 살려놨지만 그 후에 축적된 부는 사회에 환원되지 않았다. 그들의 부는 하나의 경제 권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정치 권력은 경계해도 자신들이 유리한대로 판을 짜기 위해 여론을 보수화시키고 있는 경제 권력은 무감하게 바라본다. 능력주의는 이를 강력하게 옹호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하는 경쟁이 공정할 리가 없다.




길드 사회주의는 하나의 강력한 집단이 집중적으로 가진 권력을 해체하는 사상이다. 모든 의사결정에는 대중의 참여가 필요하다 주장하는 사상이다. 길드로 연합된 조직이 정치, 경제 모든 분야에 관여해 대중 자치를 이끌어낸다. 얼핏 보면 이게 될까 싶을 정도로 이상적이지만, 책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은 제대로 된 시스템만 갖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체제가 될 것 같다는 희망을 품게 한다. 






하지만 지금의 국가적 형태를 완전히 전복시키는 발상이라서 이런 혁명이 과연 가능할까도 그렇지만 모두가 참여하는 의사결정의 가능여부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아마 내 상상력이 부족해서일지도 모르지만, 언제나 자기 집단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인간의 속좁은 본성은 각 길드 간의 합의를 제대로 이끌 수 있을지 회의감에 빠지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20세기 초반의 영국의 상황이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정치 경제적 상황과 너무나 유사해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혁명 이후 오랫동안 더 나은 사회로의 해답을 찾아가기 위해 진통을 겪어 왔던 유럽, 그리고 독자적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체계를 갖춰간 미국이 만들어간 시스템을 겉핥기로 가져온 압축성장의 표본인 한국에서는 더욱 새로운 체제를 꿈꾸는 비판적 사고가 결여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지금 우리는 뭔가 잘못된 사회로 가고 있다는 것을. 역자의 말대로 <길드 사회주의>는 '뒤늦게 도착한 고전' 이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다양한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들어주는 책을 접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 받아 솔직하게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권력의 심리학 - 누가 권력을 쥐고, 권력은 우리를 어떻게 바꾸는가
브라이언 클라스 지음, 서종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2년 1월
평점 :
일시품절



예전 회사에서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회삿돈을 횡령했던 팀장이 있었다. 그는 그 사건으로 강도 높은 감사를 받고 자진 퇴사했다. 워낙 좁은 업계여서 나는 그 팀장을 다시는 이 업계에서 볼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경쟁사의 임원급으로 스카웃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그는 업계에 유명한 설계자로 통하며 유용한 회삿돈을 윗선에 제공하면서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다고 했다. 오너가 아닌 이상 부패한 임원들은 그를 원했던 것이다. 그가 떠난 자리를 메운 이는 이전에 부하 직원들에게 폭언을 일삼던 네로 황제 같은 인간이었다. 매출과 직결된 부서였고, 그 자리에는 인성이 어떻든 우수한 실적을 내는 자가 필요했다.



아마도 이런 폭군 같은 상사 이야기는 책 저자의 말처럼 사무실의 '정수기'처럼 너무나 흔해서 새삼스러울 게 없다. 하지만 항상 의문이었다. 왜 그들은 그런 저질의 리더십을 가지고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걸까? 폭언과 닦달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을텐데, 왜 저런 사람들이 상사가 되는 걸까? 회사는 대체 실체도 파악하지 못하고 그를 그 자리에 앉히는 걸까?



정치인을 떠올리면 의문은 더욱 깊어진다. 최근에 집에 도착한 선거 공보를 보면 거대 양당의 후보들 공약이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보수와 진보의 경계도 전혀 없이 서로 복지를 늘리고 경제 위기를 타파하겠다 부르짖는다. 국민들이 원하는 바를 이뤄내겠다고 거듭 주장해야하기에 어쩔 수 없긴 하겠지만 정치는 이제 신념의 영역이 아니라 이미지에 올인하게 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이미지에 현혹되어 스스로 권력자의 됨됨이를 미리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은 과오를 저질렀으면서 자신의 기대와 다르면 배신감에 치를 떤다.


때로는 끔찍한 살육을 저지르는 괴물을 우리 손으로 뽑기도 한다. 히틀러 역시 선거로 당선됐다고 하지 않나.


권력이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걸까, 아니면 괴물 같은 사람이 권력자가 되는 걸까? 그리고 우리는 우리 손으로 그런 괴물을 뽑는걸까?



<권력의 심리학>은 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답이 없을 것 같은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4가지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아 나간다.



첫째, 더 악한 사람이 권력을 가지게 되어 있는가?

둘째, 권력은 사람을 나쁘게 만드는가?

셋째, 왜 우리는 우리를 통제할 권리가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이 우리를 통제하게 놔두는가?

넷째, 부패하지 않을 사람에게 권력을 주고 그 권력을 공정하게 행사할 수 있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권력과 위계질서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점을 저자는 분명히 한다. 권력과 위계질서는 지금과 같은 대규모 인구를 가진 국가에는 필연적인 시스템이다. 권력이 사람들을 착취하고 죽이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협력과 공동체가 생겨나는 데도 일조한다는 것이다. 권력이 '불'과 같다는 비유는 너무나 탁월했다. 하지만 왜 권력에는 나쁜 이미지가 씌워지게 되었을까? 아마도 대부분 부패하는 권력자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하며 권력이 사람을 폭군으로 만들었다고 믿는다.



이 점에 대해 저자는 완전히 뒤집힌 관점을 제시한다.


권력은 선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힘이 아니라, 악한 사람을 끌어당기는 자석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런 악한 사람을 권력으로 끌어당기고, 검증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앉히는 시스템에 있다. 저자가 사례로 든 미국 경찰과 뉴질랜드 경찰의 비교는 흥미로웠다. 군에서 남은 군수 장비로 무장한 미국의 경찰은 지역 공동체 주민들을 통제하고 진압하는 자리처럼 보인다. 강한 힘과 법을 집행한다는 미명 하에 부리는 무소불위의 권력의 상징이다. 소수자가 경찰이 되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경찰은 신체적으로 우월한 백인 남성들에게 어울리는 직군이다. 그 결과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의 지원자들이 경찰 채용에 몰려들고, 민간인 폭행과 사살은 나날이 빈번해진다. 반면 뉴질랜드는 경찰을 지역공동체에 대한 끝없는 관심으로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직군으로 보고 여성, 유색인종 등 소수자들에게도 열린 이미지를 만들어왔다.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가장 효과적이고 권력 남용이 적은 경찰 중 하나로 거듭났다고 한다. 우리나라 국회위원들을 생각나게 만드는 사례였다. 실제 행해야 하는 본분은 국민의 대변인인데 권위와 힘을 과시하며 대접받는 자리로 인식되는 그들. 북유럽처럼 국회위원이 국민을 위한 봉사직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을까? 이 사례를 타산지석삼아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권력을 추구하는 '질 나쁜 불나방'을 걸러내는 시스템을 정비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다수가 투표를 통해 선출하는 권력자는 어떻게 해야할까?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석기시대 조상들의 본성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키가 크고, 남성적이며, 힘이 세보이는 자를 더 적절한 권력자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혐오와 배제에서도 외적 요인이 주는 영향이 크다고 한다. 학연, 지연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닌게, 우리는 자신과 동일시 할 수 있는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어야 그 사람을 신뢰하고, 우리와 다르면 의심한다. 이게 엄청나게 비합리적일 때도 그렇다고 한다. 우리도 지역감정에 휩쓸려 오랫동안 선거를 치뤄왔다. 마치 동서로 분단된 국가처럼 판이하게 다른 지지를 보일 때도 있었다. 이런 분열을 없애기 위해서는 저자가 제안하는 개선안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성차별과 인종차별이 만연한 미국의 채용과정에 한정되어 보이는 대안이지만 블라인드 채용 및 평가를 모든 경우에 활용할 것을 권한다. 또한 익명화와 공정한 평가 시스템과 같은 종류의 개입을 훨씬 이른 나이의 학생들이 삶에서 체화할 수 있도록 해서 어린 시절부터 겪는 심각한 불평등을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선거에서 익명화는 어렵겠지만 개개인이 보다 공정한 평가를 내리는 의식화는 필요할 것 같다.



우리 인간은 석기 시대적 뇌와 관련된 비이성적인 이유로 잘못된 지도자들을 따르는 데 이끌린다. 나쁜 시스템은 모든 것을 악화시킨다.



내가 언급한 전 회사의 사례처럼 효율중심의 조직문화가 부패한 관리자를 승승장구하게 만들어주었듯, 잘못된 방향의 시스템은 마치 곰팡이가 생기기 쉬운 따뜻하고 습한 온도처럼 권력이 부패하는 너무나 좋은 환경이 된다. 그래서 저자는 '더 나은 사람을 끌어 들이는' 좋은 시스템에 대한 제안을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 중에서 나는 나쁜 정치인들을 뽑지 않으려면 '결과 뿐만 아니라 의사결정 과정까지 검토한다'는 제안과 권력자가 가지는 책임의 무게를 지속적으로 상기시켜줄 강력한 감시 시스템에 대한 제안을 새겨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이야 국민 욕받이로 시행하는 정책 하나하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만 우리는 내 손으로 뽑은 국회의원, 심지어 당만 보고 뽑은 지방의회 의원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관심이 거의 없다. 내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려면 투표만 하는게 다가 아니다. 선출직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그 과정들을 하나하나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한다.



수렵채집민의 역사부터 동물의 본성, 부패한 자들과 그들을 겪은 자들에 대한 생생한 인터뷰, 권력에 대한 수많은 연구들 등 다양한 이야기를 오가며 권력의 본질을 파헤치는 흥미로운 책이었다. 잘 쓰여진 논픽션물이 가진 문학성도 탁월했다. 사례를 볼 때는 흥미진진한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다만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명료하지는 않았다. 권력의 부패는 나쁜 시스템이 초래한다는 강력한 결론에서 곁가지로 새는 내용들도 더러 있어서 약간 혼란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우리 정치 시스템에 대해, 조직 문화에 대해 더 나은 방향을 고민하게 되는, 인사이트를 주는 책이었다. 나 역시 권력자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않는 깨어있는 시민이 되어야 겠다고 다짐해본다.



※ 네이버카페 '책좋사'에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한 솔직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