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장난 - 2022년 제4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손보미 외 지음 / 문학사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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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외 작가보다 한국 작가들이 빚어내는 서사와 그 속에 녹아있는 동시대의 문제의식, 한국만의 감성들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은 호흡이 긴 장편보다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고조시키는 단편에 더 잘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떠오르는 신예 작가는 이름을 기억해뒀다가 단편집부터 찾아 읽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국문학과 담을 쌓고 지냈다. 아예 안읽은 것은 아니지만(가장 최근에 읽은 문학상 수상집은 2020년 젊은작가상 수상집이다) 요즘 핫하다는 몇몇 작가들의 이름은 낯설었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문학보다 진짜 현실을 그대로 마주하는 논픽션에 더 끌렸던 것 같기도 하다.



2022 제4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내가 아는 작가는 강화길 뿐이었다. 2년 전 읽은 젊은작가상 대상작이 었던 작가의 단편 <음복>이 다뤘던 젠더 문제- 가부장제 속에서 남성의 무지는 권력이 되고, 여성의 앎은 폭력처럼 대물림되는 불평등한 상황-와 일상의 흔한 상황을 스릴러처럼 긴장감있게 그린 점이 무척 인상 깊었는데, 우수작으로 선정된 강화길 작가의 <복도> 역시 당시 느꼈던 긴장감을 그대로 간직한 채 임대 아파트에 들어와 묘한 차별을 받는 신혼부부의 이야기를 그린다. 존재하지만 지도에는 없는 미스터리한 집,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경계에 머무는 아파트에 살고 있는 신혼부부는 매번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설명하고 또 설명해야한다. 다만 마무리에서 이야기가 갑자기 훅 튀어버리는 느낌이라 조금 아쉬웠다.



눈에 띄는 건 동시대의 문제를 소재로 삼아 실험적인 문장과 서사로 그려내는 작품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층간소음 문제와 이웃간의 소통을 힙합 가사에 실어 유쾌하게 그린 서이제의 <벽과 선을 넘는 플로우>는 낯설었지만 충분히 흥미로웠고, 영끌로 내 집 마련을 한 입장으로 너무 공감하며 읽은 염승숙의 <믿음의 도약>은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장으로 영양제로 대변되는 뭔가를 채워야한다는 강박과 강박이 심해질 수록 더 잘못된 선택으로 치닫는 과정이 그야말로 롤러코스터가 천천히 상승하다가 급하강해 착치할 때 남기는 얼얼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빈 페이지를 펼쳤다.

무언가가 쓰고 싶었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마음을 들여다보세요"

강사는 수업시간에 그렇게 말하곤 했다.

글을 쓰기 위해선 마음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하지만 마음을 들여다보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지, 너무 무서워."

백수린 <아주 환한 날들> 중




백수린의 <아주 환한 날들>은 가족들을 건사한다고 억척스레 살아온 70대 독거 노인이 사위가 맡기고 간 앵무새를 돌보며 맞이하는 변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뻔한 소재같은데 더 이상 자신을 강하게 몰아붙여야 할 어떤 목적도 없어졌는데도 자신을 돌볼 시간이나 생각할 틈도 없이 빡빡한 스케줄에 자신을 내모는 주인공이 앵무새와 교감하며 삶을 돌아보고 추억을 곱씹는 모습이 부모님을 생각하게 만들어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 당시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건, 불장난에서 느꼈던 그 아연실색할 만큼의 쾌감과 과민할 정도의 선명한 감정들, 분명히 실체를 가지고 있었던 그 감각들(불장난과 관련된 그 모든 기승전결!)이 그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허상? 아니다. 허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았고, 앞으로의 삶에 항구적 영향을 끼치리라고 호들갑스럽게 기대했던 순간들이 그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나는 어쩌면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중략)...


때때로 삶에서 가장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건, 바로 그런 착각과 기만, 허상에 기꺼이 내 몸을 내주는 일이라고. 그런 기만과 착각, 허상을 디뎌야지만 도약할 수 있는, 그런 삶이 존재한다고. 언젠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이켜 보는 눈 속에서 어떤 사실들은 재배열되고 새롭게 의미를 획득한다. 불가피하게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며, 허구가 사실이 되고, 사실이 허구가 되는 그런 순간들!"

손보미 <불장난> 중에서





표제작인 대상 수상작 손보미 작가의 <불장난>은 사춘기 시절로 나를 소환시켰다. 가족보다는 자신의 삶을 선택한 엄마, 그리고 젊은 선생과 바람이 나 재혼한 아빠, 아빠에게 빠져 교직 커리어를 다 포기하고 주부가 되어 주인공의 가정에 들어온 그녀. 불안정한 애정 속에서 내적 상처를 입은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너무나 탁월했다. 사실 그때는 불안의 실체를 알 수없고, 자신의 상처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지만, 마음 속에는 차곡차곡 쌓여 어느 순간 폭발하게 된다. 그게 바로 사춘기가 아닐까. 성숙한 무리에게 가지는 호기심과 별것 아닌 일탈에도 압도되어 도망쳐버리는 마음도 무엇인지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쌓인 흔들리는 자아는 불장난으로 타버리고, 새로운 '작가'로서의 자아가 탄생하는 클라이막스는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서사가 탁월해서 읽는 내내 벅차올랐다.



대상작만큼 같이 실린 손보미 작가의 자선 대표작 <임시 교사>도 좋았다. 임시 교사였던 P부인이 젊은 부부의 아이 보모 일을 하며 겪게 되는 일화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서글픈 차이를 서사적으로 잘 표현했다. 정규직과 같은 책임과 소속감을 강요하고, 어느새 그 속에 녹아들어 헌신하지만 결국 '임시직'이라는 한계를 똑똑히 절감하게 되는, P교사의 외로움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한국문학의 정통성을 이어 온 이상문학상, 그렇기에 지금 시대를 이야기하고 한국 현대소설의 현재를 대변하는 다양한 작가들을 한 권에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 받아 솔직하게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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