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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몬 찬가 - 진화 심리학으로 풀어 가는 호르몬 지능의 비밀
마티 헤이즐턴 지음, 변용란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2년 2월
평점 :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자주 들은 이야기는 '망할 호르몬'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뱃 속에 다른 생명체가 들어차며 같이 얻게 된 감정기복과 예민해진 감각은 출산을 하며 상실감이 컸는지 끝없는 우울을 향해 달려갔다. 별 것 아닌 일에 서럽고 툭하면 눈물이 났다. 평소 둔한 편이었던 나도 호르몬에 속수무책으로 지배 당한 것 같았다. 그때 호르몬은 나를 나답지 못하게 하는 사악한 마법 같았다.
배란 주기가 여성의 색슈얼리티에 미치는 영향을 집요하게 연구한 세계적인 과학자 마티 헤이즐턴이 쓴 <호르몬 찬가>는 부정적인 이미지에 갇힌 여성 호르몬의 실체를 과학적으로 재평가하는,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접근한 진화심리학 책이다. 그간 진화 생물학과 진화 심리학은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에 과학적 증거를 보여주며 의도치 않게 남성 중심주의와 가부장제를 보다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해왔다. 때로는 남성의 성 충동은 본능적이라며 남성이 가해자인 성폭력이 더 많은 이유에 면죄부를 부여하기도 했다. 그런 진화 생물학과 진화 심리학을 여성 관점에서 연구했다는 점부터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은 높았다.
저자는 호르몬에 쉽게 지배당하는 여성은 자신의 행동에 통제력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편견을 이 책을 통해 타파하고자 했다. 저자는 '호르몬이 암컷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지만', 호르몬에 좌우되는 행동은 오랜 세월동안 여성의 몸에 축적되어 온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오래된 지식'이라고 말한다. 호르몬은 보다 번식에 앞서 더 괜찮은 유전자를 찾을 수 있게 유혹하기도 하지만 철저히 방어하기도 한다. 색슈얼리티에 있어 여성은 대체로 수동적으로 남성에 의해 선택 받는 존재처럼 인식되었다면, 왕성한 에너지를 가지고 짝을 찾는 호르몬은 여성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상대를 선택하는 존재임을 증명한다. 뇌과학 책에서 유사하게 접한 내용인데 배란기에 여성은 동공의 크기가 커지며 보다 매력적인 외형으로 변하는데, 그때 그 책은 선택 받는 입장의 여성을 서술했다면 <호르몬 찬가>는 더 괜찮은 짝을 찾기 위한 여성 호르몬의 고군분투로 그리고 있어 보다 여성 주체적인 서술이었다.
이 책에는 수많은 상황에서 여성들의 몸에 나타나는 호르몬과 역할을 설명하는데, 인상 깊은 것은 엄마들이 가진 초인적인 힘의 원천 역시 호르몬이라는 사실이다. 일명 '엄마곰 효과'라 불리는 무엇이 위험인지 귀신 같이 알아내고 위험을 향해 맹렬하게 막아서는 엄마의 힘은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과거 시절 아이를 병균과 천적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매커니즘이 남아있는 탓이라는 것. 아이의 울음 소리에 남편보다 내가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런 호르몬 때문일 것이다. 호르몬 때문에 우울해진다 여겼는데, 호르몬 덕분에 아이를 지키는 강한 엄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내게 찾아온 감정 변화와 예민함이 운명처럼 이해되고, 받아들여졌다.
그간 과학계와 의료계 전반에 남성 연구원이 지배적이었고, 실험 역시 암컷 쥐의 생식현상이 통제 불가 변수였기 때문에 수컷 쥐로 대부분의 실험이 이뤄져 남성 중심의 연구 결과들만 차고 넘치는 데 반해 여성의 몸에 대한 과학적 연구와 이해는 미진했다. 최근 저자를 비롯해 많은 연구들이 여성 호르몬과 색슈얼리티의 관계를 밝히고 있고, 이런 연구가 여성의 몸을 정확하게 이해해 잘못된 편견을 바로 잡는 것 뿐만 아니라 남성들의 '비아그라'와 같이 여성 중심의 다양한 치료제를 만들어 내는데도 기여할 것이라 말한다.
"그 여자는 호르몬에 휘둘려.
다음번에 또 이런 말을 듣거나 하게 된다면, '그 여자'는 할머니이고, 어머니이고, 자매이고, 친구이고, 딸임을 명심하라. '그 여자'는 현재를 통해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우리 조상들이자, 각자 호르몬 주기를 지닌 채 태어나 장차 어른이 될 여성들이 이어 온 끊어지지 않는 사슬의 한 고리이다."


책 속에는 흥미로운 실험 결과와 동물의 습성, 인류사의 이야기 등 다채로운 이야기가 넘쳐난다. 같이 지내는 여자들끼리 생리일이 같아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생리일 동시성의 신화,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이유, 임신 단박에 성공하는 법 등 듣기만 해도 궁금했던 주제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해주는 박스 속 이야기는 책을 읽는 또다른 재미였다.
여성의 호르몬이 발동하는 상황들은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 하나하나 알아가다보니, 내 변덕과 감정 기복이 생존을 위한 지혜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여성의 호르몬은 통제 불가능한, 까다로운 존재가 아니라 나와 내 아이를 보호해주는 고마운 시그널이다. 알게 되니 달리 보이는 게 이런 것이구나, 앎의 힘을 전해준 즐거운 독서였다.
※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 받아 솔직하게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