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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암살자
데이비드 리스 지음, 남명성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내 안에서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처음 읽었을 때와 같은 반응이 일었다. 마르크스라, 이데올로기라,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암살자가 도덕적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거지? 옳은 일을 위한 암살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게 소위 정당하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도덕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까?
렘 엘틱, 멜포드 킨, 데지레, 비비, 짐 도, 갬블러, 보비, 스콧, 로니 닐, 바스타드, 캐런, 치트라, 그리고 등등.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서로 다른 개별적인 장소에서 각각 등장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인물들처럼 보이지만, 책을 읽어나갈수록 그들의 인간관계도 살인과 돈, 그리고 마약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켜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점점 그것은 실타래가 풀려가듯이 하나둘씩 정체를 드러낸다.
소설 속의 ‘나’라고 볼 수 있는, 렘 엘틱은, 대학등록금을 모으기 위해 백과사전 영업을 하는, 소년이자 청년이다. 영업을 빠르게 배운 터라, 상사인 보비에게 인정받고 비교적 수월하게 일을 해 나간다. 이런 그가 영업을 하러 들어간 이동주택에서 살인의 목격자라는 감투 아닌 감투를 쓰면서, 그의 생활은 급격하게 변화를 겪는다.
자신을 살인자가 아닌 암살자라고 소개하는 멜포드 킨. 그는 암살자이자, 동물애호가이자, 채식주의자이면서, 기자다. 비록 렘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살인을 한 사람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렘은 그를 인간적인 모델로 삼는다.
렘도, 멜포드도, 비비의 비서인 데지레도, 저마다 과거의 상처-그것이 크든 작든, 대단하든 대단하지 않든-를 안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의 동료인 스콧과 로니 닐, 멜포드에게 죽임을 당한 바스타드와 캐런, 백과사전 영업의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갬블러, 부패한 경찰 짐 도, 렘이 사랑하는 치트라.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가 어떻게든 서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나도 렘처럼, 점점 멜포드에게 빠져들었다. 엉뚱하고, 순수하기도 하고, 독특하면서도, 신비롭고, 위기에 처해도 차분하고 담담하게 상황을 현명하게 이끌어나가는 모습이 부러웠다. 방법적인 측면에서 허세와 거짓을 좀 사용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게 꼭 ‘잔머리 대왕’같았다. 무엇보다 사람을 설득시키는 능력이 정말 대단했다. 사람을 설득시키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일텐데, 그는 어려움 없이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만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위의 동조가 없더라도 신념을 가지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 그것 역시 멜포드를 멋지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내가 소설 속의 인물이었다면, 분명 지금쯤 사랑과 존경을 담아 그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이 책 <도덕적 암살자>가 영화로 나온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어쩌면 영화화하기에는 좀 어려운 주제를 담고 있는 것도 같고, 이 복잡한 사건들을 영화 속에 온전하게 담아낼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영화로 나온 <도덕적 암살자>를 떠올려본 이유는, 소설의 초반에 있다. 플로리다를 배경으로 렘 엘틱을 등장시켜 그려내는 작가의 묘사에서, 그리고 순식간에 또 다른 배경을 보여주는 것에서, 마치 머릿속으로는 영화의 커트, 장면 전환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역시 내게는 어려운 외국 이름들 때문에, 게다가 한둘이 아닌 여럿이었던 탓에 그들의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헤맬 수밖에 없었지만, 갈수록 흥미진진해지는 이야기의 전개 덕분에 헤맬 때의 수고스러움은 금세 잊혀졌던 것 같다.
그리고 비록 암살과, 그것의 추리에 대한 소설이지만, 렘이 성장해가는 소설이기도 했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무기력한 렘을 억누르고
대신 스스로 인생을 책임지고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렘을 찾아냈다.
렘 스스로도 자신의 성장을 느꼈던 것이다. 멋진 일이다. 멜포드를 만나고 나서, 렘 역시도 멜포드처럼 상황을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겼고, 그런 평정과 책임감, 용기를 통해 그동안 짝사랑하던 치트라와의 사랑도 이루어낼 수 있었다. 내가 이 자리에서 렘과 같이 살인을 목격하고 혼자서는 감당해내기 어려운 일들을 동시다발적으로 겪는다면, 이토록 잘 받아들이고 헤쳐 나갈 수 있었을까.
역시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소설 속에 담는다는 것을 <도덕적 암살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리스는 플로리다에서 자랐고, 렘 엘틱처럼 백과사전 영업을 했던 적이 있으며, 멜포드처럼 엄격한 채식주의자라고 한다. 자신의 경험을 반영해 소설을 그려내면서, 소설 아닌 소설을 쓰면서, 작가는 자신을 등장인물들 속에 투영시키는 걸까. 그럴 때면 어떤 기분이 들까. 또 한 번, 작가라는 직업에 대해 매력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멜포드가 렘 엘틱에게 이해시키는 바로 그것, 이데올로기. 나를 혼란에 빠뜨린 이데올로기.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내 이해력의 부족을 누굴 탓하겠냐마는, 솔직히 어렵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멜포드와의 대화 속에서 렘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렘에게 이데올로기를 설명하기 위해 멜포드가 선택한 대화법이 정말 탁월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는
특정한 방식으로 세상을 보도록
훈련을 받는 거야.
그 방식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며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어 보이지.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며 진실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봐야할 것만 보는 거야.
이유 없이 생기는 일은 없으며,
우연한 사건들 역시 온갖 사물이 가진 이치의 일부다.
우연한 일들도
구조적으로 돌아가는 우주의 법칙 가운데 일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