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랑
필립 베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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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볼을 쓰다듬던 부드러운 태양도, 
 찬란한 빛도, 
 가볍게 흔들리던 나무도 끝이다. 
 넘어설 수 없는 암흑, 절대 암흑만이 남았다.

 이미 죽은 사람인 루카의 말로 시작되는 이야기. 어라?! 죽은 사람이 소설을 쓰고 있잖아?! 이런 전개는 새로 접하기도 했지만, 참 독특했다.

 강물에 빠져 죽은 루카. 그리고 그의 약혼녀 안나. 그리고 그의 연인 레오. 루카의 죽음을 둘러싼 이 세 사람의 이야기가 <이런 사랑>이다. 자신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정말 사소한 일인 듯 대하는 루카 때문에, 처음에는 루카가 정말 죽은 게 아니라 죽었을 때의 일을 상상하면서 쓴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가슴아파하며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는 안나와 레오.

 

 의심할여지 없이 굳게 믿고 있던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자신이 몰랐던 비밀을 알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루카와 같은 어두운 그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아직 이런 상황을 겪어보지 못했기에 그런 영원한 빈자리에 대해서는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지만 정말 가슴 아프고 어떤 것으로도 위로받지 못할 거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이런 사랑>은 세 사람 각각의 사랑이야기라기 보다는 사람의 고독과 단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루카와 안나의 회상만 해도 아주 뜨거운 사랑이기보다는 고독과 외로움을 감싸 안아줄 서로를 갈구했던 것임이 보인다. 루카가 자신의 죽음을 별 것 아닌 양 풀어나가는 것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문체적 장치(?)가 아니었을까.

 동성애라는 문제에 있어서 아직 나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랑>에서 동성애는 그저 평범한 일상으로 느껴진다. 그건 아마도 동성애보다는 고독이라는 문제를 부각시킨 작가의 힘이 아니었을까.

 희한하게도 
 지금 내가 가장 못 견디게 그리운 것은 
 바로 이 순간들이다. 
 아무것도 아닌 이 순간들, 
 그러나 우리 삶의 전부가 담겨 있는 순간들. 

 모두가 관조적으로 사건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는 독백조의 전개가 처음에는 견딜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의욕이 없나 싶어 답답하게 느껴졌다. 철저한 고독과 조용함 속에서 가만히 책을 읽어나갈 수도 없었다. 점점 책을 읽어나가면서 어느 정도 그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행복은 바로 아무것도 아닌 이 순간, 
 떨리는 이 찰나, 
 상쾌한 이 포근함, 
 이 여유, 
 하는 일 없이 한가로이 보내는 하루하루에 있을지도 모른다. 
 때로 행복과 불행은 신기할 만치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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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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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학기 수업시간에 ‘바리공주’무가를 배웠다. 일곱 공주중에 막내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은커녕 환영조차 받지 못한 채 함 속에 버려진 바리공주. 버려진 것도 억울한데 15년이 지난 후에야 아비의 병 치료를 위해 부모의 부름을 받고 생명수를 찾아 길을 떠나 9년 동안 고생하는 효녀 바리공주. 전형적인 효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바리데기>라는 제목을 봤을 때, 최인훈의 구운몽이 문득 떠올랐고, 바리공주 이야기의 패러디인가?? 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는 권정생 작가의 <몽실 언니>가 계속 생각났다.

 주인공 바리. 바리 역시 바리공주처럼 일곱 딸 중에서 막내로 태어났고 역시 버림받게 된다. 바리에게도 비극적인 삶이 펼쳐질 것을 출생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강아지 칠성이 덕분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바리는 할머니의 능력(?)을 이어받아 영혼들과, 그리고 흰둥이와도 무언의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김일성의 죽음은 북한에서 태어난 바리의 인생에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아버지와의 이별과 함께, 다른 식구들과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바리가 가장 의지하고 기댔던 할머니의 죽음도 겪게 되고,.

 작가는 이런 이별과 비극들을 통해서 우리 민족이 겪었던 가슴 아팠던 수난을 대신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분단을 겪었던 우리 민족의 경험, 그 자체를 넘어선 어떤 다른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일까. 끊임없는 이별과 떠돌아다녀야 하는 삶. 정착하지 못하고 어디론가 떠나야만 하는 삶. 바리공주가 아버지를 위한 생명수를 찾기 위해 9년의 고통을 견뎌냈듯이. <바리데기>의 주인공 바리 또한 끊임없는 유랑을 겪고 큰 바다를 건너 런던에까지 가게 된다. 지치고 고될 때마다 바리의 꿈에는 칠성이와 할머니가 나타나 버팀목이 되어주고 나아갈 길을 밝혀준다.

 그럼 바리가 찾던 생명수는 무엇일까.

 사람의 마음도 밥과 같아서 
 오래가면 쉬게 마련이라 
 자꾸 폐를 끼치면 
 나중에 정말 도움이 긴요할 때는 
 냉정하게 돌아선다고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이 소설은 책 두께에 비해 정말 빨리 읽어나갈 수 있었다. 술술 넘어가는 책장들이 아쉬울 정도로.. 구수한 바리 할머니의 사투리도 약방의 감초처럼 따스함을 자아내는데 일조했다는 생각이 든다. 바리에게 바리공주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머니. 세상의 모든 할머니들은 이렇게 따뜻한 분이신가보다.

 그리고 타국에서 만난 할아버지. 달관한 모습의 할아버지는 바리가 지칠 때마다 끊임없이 희망을 심어준다. 그리고 동시에 이 책을 읽은 내게도 희망이라는 단어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어주었다. 

 아아. 
 사람의 인연은 하늘에서 미리 짜놓은 줄에 
 서로 연결되고 엮이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미리 짜여진 모양이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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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토벨로의 마녀
파울로 코엘료 지음, 임두빈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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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금술사>를 읽고 나서 파울로 코엘료에 반했다. 그런 파울로 코엘료가 신작을 냈다고 하기에 책 소개조차 보지 않고 냉큼 집어든 책. <포르토벨로의 마녀>다.

 처음에 프롤로그를 보고서 이 책이 마녀사냥이야기인가? 했다.

 아테나라는 한 여인. 평범하지 않은 이 여인을 알고 있는 그녀의 주위 사람들을 작가가 직접 인터뷰한 형식으로 소설은 진행된다. 각각 다른 시선으로 아테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어떻게 읽어 나가야 하는 건가 했는데,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금방 빠져들게 되었다. 이것도 포르토벨로의 마녀, 아테나의 매력이 아니었을까?? 

 아테나는 출생부터 우여곡절을 겪기 시작한다. 그녀의 출생이 이미 그녀의 운명을 결정짓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집시의 딸로 태어나 버림받고, 입양되고,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운명. 사랑과 질투, 버림과 떠남 등을 반복하면서 아테나는 인생의 스승도 만나고 제자도 만난다. 그녀만의 춤과 음악으로 사람들의 마음도 움직이며, 그러는 한편 자신의 기원을 끊임없이 찾아 헤맨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너무 종교적인 색채를 진하게 담아 아테나를 그려낸 것 같기도 했다. 역시 모든 소설은 작가의 삶이 고스란히 담길 수밖에 없는 것인가.. 파울로 코엘료 역시 예수회 가정에서 태어나 엄격한 신앙을 강요받으며 자랐다는 배경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 같다.

 성인(聖人)이란 자신의 삶에 존엄을 부여하는 사람이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고, 
 그것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뿐이오. 
 그래야 우리에게 닥치는 크고 작은 고통들을 향해 웃을 수 있지. 
 그리고 모든 일에는 다 주어진 의미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는 거요. 

 

 흔히 알고 있는 마녀라고 하면 뾰족한 코를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을 홀리고 다니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이 책, 파울로 코엘료가 그린 마녀의 이미지는 신격화된 여성으로, 마녀보다는 성녀의 느낌이 더 강하게 다가왔다. 보통의 마녀에게는 없을 법한 사랑과 애정, 그리고 모성과 감성들이 내게 와 닿았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차이는 단 하나다.  
 스승이 제자보다 덜 두려워한다는 것. 
 그래서 스승은 제자와 함께 탁자에 앉거나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앉을 때, 
 “한 번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절대로 “이렇게 하면 나처럼 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만의 유일한 길과 목적지가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스승은 제자가 이미 맞닥뜨린 것뿐이다.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나올지까지 두려워하더라도, 
 자기 세계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도록 용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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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김관오 옮김 / 아르테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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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만 보고 내용이 참 궁금했던 책이다. 표지의 짤막한 소개에는 “쉰네 살의 수위 아줌마 르네와 열두 살 천재소녀 팔로마” “프랑스의 베스트셀러 1위”등등 충분히 시선을 끌만한 것이었다.

 책을 열자마자, 다른 외국소설들과는 달리 ‘한국의 독자들에게’라는 작가의 편지글이 담겨 있었다. 작가의 남다른 애정을 느끼고서 왠지 이 책, 그리고 이 독자에게 더 호감이 생겼다. 그런 호감과 믿음을 갖고서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몇 장 읽고 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마르크스 얘기가 나오지를 않나, 철학 얘기들이 나오지를 않나, 책을 잘못산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산돈이 아까우니까 끝까지나 우선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어나갔다. 

 한 아이, 그러니까 팔로마의 철학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된다. 자살을 계획하고 있는 열두 살 소녀 팔로마와 같은 아파트에서 수위로 일하고 있는 르네, 그리고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어른들은 겉으로는 가끔, 
 자기들 삶의 참담함에 대해 차분히 앉아서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곤 이해도 하지 못한 채 통탄하고, 
 마치 늘 같은 창문에 부딪치는 파리처럼 행동하고, 
 고통 받고 쇠약해지고 의기소침해지고, 
 그들이 가고 싶지 않았던 곳으로 그들을 이끌었던 
 톱니바퀴에 대해 생각한다. 
 아주 똑똑한 자들은 심지어 이것으로 종교를 만든다. 
 아, 부르주아의 경멸스런 허망함이여!

-이게 열두 살 소녀의 머릿속에서 가능한 생각이라니.

 나는 열두 살, 팔로마의 나이였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부분은 수위 아줌마 르네의 이야기였다. 자신의 유식함(?)을 철저하게 숨기면서 어려운 책들을 모조리 섭렵하고, 우아함과 품격을 지닌 사람, 르네 아줌마. 사소하다면 사소할 뿐인 수위의 일상들을 르네 아줌마만의 박식함으로 분석해내는 게 탄성을 자아낸다.

 이 책의 첫 부분을 장식한 지루한(?) 철학 이야기는 물론 소설의 중간 중간에도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이 책을 다 읽을 때쯤엔 오히려 부르주아도, 마르크스도, 반가웠다.

 그리고 성장소설을 연상케 하는 그 둘만의 따뜻하고 깊은 우정. 딱히 무슨 말이 필요 없는 둘의 우정은 소름 돋도록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지나가는 것을 우리가 포착하는 것이다. 
 그건 우리가 사물의 아름다움과 죽음을 
 동시에 보는 순간에 일어나는, 사물의 찰나적인 배열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기 생을 끌어가야 하는 것일까? 
 난 그렇게 생각했다. 
 아름다움과 죽음 사이에서, 움직임과 움직임의 소멸 사이에서 늘 균형 있게? 
 아마 이것이 살아있는 것이리라. 
 죽어가는 순간들을 추적하는 것이.

 

 신기했다. 
 짜증남으로 시작했지만, 감동과 탄식으로 끝을 맺게 하는 책이었다. 이런 게 바로 진정한 반전이 아닐까.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마르크스’가 내게 일으킨 곤란함과 어쩔 줄 모름은 결국에 가서는 내 영혼의 순수를 찾아 헤매도록 만들었다. 순수함과 아름다움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고슴도치의 우아함> 이었다.

 르네 아줌마, 아니 미셸 부인. 그녀는 진정으로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지니고 있었다.

 겉보기엔 무감각한 듯하지만,
 고집스럽게 홀로 있고 지독하게 우아한 작은 짐승
 고슴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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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암살자
데이비드 리스 지음, 남명성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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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안에서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처음 읽었을 때와 같은 반응이 일었다. 마르크스라, 이데올로기라,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암살자가 도덕적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거지? 옳은 일을 위한 암살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게 소위 정당하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도덕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까?

 렘 엘틱, 멜포드 킨, 데지레, 비비, 짐 도, 갬블러, 보비, 스콧, 로니 닐, 바스타드, 캐런, 치트라, 그리고 등등.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서로 다른 개별적인 장소에서 각각 등장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인물들처럼 보이지만, 책을 읽어나갈수록 그들의 인간관계도 살인과 돈, 그리고 마약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켜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점점 그것은 실타래가 풀려가듯이 하나둘씩 정체를 드러낸다.

 소설 속의 ‘나’라고 볼 수 있는, 렘 엘틱은, 대학등록금을 모으기 위해 백과사전 영업을 하는, 소년이자 청년이다. 영업을 빠르게 배운 터라, 상사인 보비에게 인정받고 비교적 수월하게 일을 해 나간다. 이런 그가 영업을 하러 들어간 이동주택에서 살인의 목격자라는 감투 아닌 감투를 쓰면서, 그의 생활은 급격하게 변화를 겪는다.

 자신을 살인자가 아닌 암살자라고 소개하는 멜포드 킨. 그는 암살자이자, 동물애호가이자, 채식주의자이면서, 기자다. 비록 렘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살인을 한 사람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렘은 그를 인간적인 모델로 삼는다.

 렘도, 멜포드도, 비비의 비서인 데지레도, 저마다 과거의 상처-그것이 크든 작든, 대단하든 대단하지 않든-를 안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의 동료인 스콧과 로니 닐, 멜포드에게 죽임을 당한 바스타드와 캐런, 백과사전 영업의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갬블러, 부패한 경찰 짐 도, 렘이 사랑하는 치트라.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가 어떻게든 서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나도 렘처럼, 점점 멜포드에게 빠져들었다. 엉뚱하고, 순수하기도 하고, 독특하면서도, 신비롭고, 위기에 처해도 차분하고 담담하게 상황을 현명하게 이끌어나가는 모습이 부러웠다. 방법적인 측면에서 허세와 거짓을 좀 사용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게 꼭 ‘잔머리 대왕’같았다. 무엇보다 사람을 설득시키는 능력이 정말 대단했다. 사람을 설득시키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일텐데, 그는 어려움 없이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만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위의 동조가 없더라도 신념을 가지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 그것 역시 멜포드를 멋지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내가 소설 속의 인물이었다면, 분명 지금쯤 사랑과 존경을 담아 그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이 책 <도덕적 암살자>가 영화로 나온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어쩌면 영화화하기에는 좀 어려운 주제를 담고 있는 것도 같고, 이 복잡한 사건들을 영화 속에 온전하게 담아낼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영화로 나온 <도덕적 암살자>를 떠올려본 이유는, 소설의 초반에 있다. 플로리다를 배경으로 렘 엘틱을 등장시켜 그려내는 작가의 묘사에서, 그리고 순식간에 또 다른 배경을 보여주는 것에서, 마치 머릿속으로는 영화의 커트, 장면 전환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역시 내게는 어려운 외국 이름들 때문에, 게다가 한둘이 아닌 여럿이었던 탓에 그들의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헤맬 수밖에 없었지만, 갈수록 흥미진진해지는 이야기의 전개 덕분에 헤맬 때의 수고스러움은 금세 잊혀졌던 것 같다.

 그리고 비록 암살과, 그것의 추리에 대한 소설이지만, 렘이 성장해가는 소설이기도 했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무기력한 렘을 억누르고 
 대신 스스로 인생을 책임지고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렘을 찾아냈다.

 렘 스스로도 자신의 성장을 느꼈던 것이다. 멋진 일이다. 멜포드를 만나고 나서, 렘 역시도 멜포드처럼 상황을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겼고, 그런 평정과 책임감, 용기를 통해 그동안 짝사랑하던 치트라와의 사랑도 이루어낼 수 있었다. 내가 이 자리에서 렘과 같이 살인을 목격하고 혼자서는 감당해내기 어려운 일들을 동시다발적으로 겪는다면, 이토록 잘 받아들이고 헤쳐 나갈 수 있었을까.

 역시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소설 속에 담는다는 것을 <도덕적 암살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리스는 플로리다에서 자랐고, 렘 엘틱처럼 백과사전 영업을 했던 적이 있으며, 멜포드처럼 엄격한 채식주의자라고 한다. 자신의 경험을 반영해 소설을 그려내면서, 소설 아닌 소설을 쓰면서, 작가는 자신을 등장인물들 속에 투영시키는 걸까. 그럴 때면 어떤 기분이 들까. 또 한 번, 작가라는 직업에 대해 매력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멜포드가 렘 엘틱에게 이해시키는 바로 그것, 이데올로기. 나를 혼란에 빠뜨린 이데올로기.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내 이해력의 부족을 누굴 탓하겠냐마는, 솔직히 어렵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멜포드와의 대화 속에서 렘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렘에게 이데올로기를 설명하기 위해 멜포드가 선택한 대화법이 정말 탁월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는 
 특정한 방식으로 세상을 보도록 
 훈련을 받는 거야. 
 그 방식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며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어 보이지.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며 진실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봐야할 것만 보는 거야. 

 이유 없이 생기는 일은 없으며, 
 우연한 사건들 역시 온갖 사물이 가진 이치의 일부다.
 우연한 일들도
 구조적으로 돌아가는 우주의 법칙 가운데 일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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