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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자의 아내 1
오드리 니페네거 지음, 변용란 옮김 / 살림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바로 여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리고 어딘가에 ‘과거’의 내가 있을 테고, 또 다른 어딘가에는 ‘미래’의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겠지. 누구나 한번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혹은 미래로 날아가 나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적이 있을 거다. 생각할수록 신비롭고 새로운 세계인 것 같다.
오랜만에 정말 슬픈 영화가 개봉을 했다. 여기에는 시간여행을 하는 한 남자와 그를 사랑하는 여자의 이야기가 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펑펑 울 수밖에 없었다. 영화관은 그야말로 울음바다였다. 과거, 그리고 가까운 미래로의 시간여행을 그린 이야기지만 절대 공상과학 영화가 아닌 슬프고 애절한 로맨스였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시간일탈장애’라는 소재를 가지고 그린 남녀의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공간을 넘나드는 ‘장애’를 갖고 있는 헨리. 때로는 장점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단점이 되기도 하는 바로 ‘그것’ 덕분에 헨리는 과거의 어린 헨리의 친구이자 보호자가 되어주기도 하고, 미래의 어른 헨리의 동지가 되기도 한다. 미래의 나와 친구처럼 이야기도 나누고 함께 활동도 한다는 것, 생각만 해도 정말 신나는 일일 것 같다.
그리고 헨리의 그런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클레어.
어느 날, 여섯 살 클레어의 눈앞에 벌거벗은 헨리가 나타난다. 헨리는 이십여 년을 거슬러 과거로 날아왔기 때문에 클레어에게 비쳐지는 그는 까마득한, 그리고 웬 이상한 아저씨다. 게다가 벌거벗은 모습으로 ‘짠!’하고 나타났으니 놀랄 수밖에. 그렇게 한편으론 두렵고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기도 한 둘의 첫 만남은 시작되었다. 클레어는 미래에서 자신을 보기 위해(?) 날아오는 헨리를 점점 믿고 의지하게 되며, 결국엔 그와 사랑에 빠진다. 클레어를 ‘키운 것’이 어쩌면 헨리, 라는 생각을 해보면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자신의 남편이 어려서부터 자신과 시간을 함께 보내며, 숙제도 도와주고 외국어도 가르쳐주고, 슬플 땐 위로를 해주고, 부모님처럼 이끌어준다는 생각만 해도 내 가슴이 다 벅차오른다.
시간 여행을 이야기로 담은 책이기 때문에,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철저하게 시간, 즉 날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날짜, 헨리의 나이, 그리고 클레어의 나이가 이들 이야기의 흐름을 좌지우지한다. 클레어가 지금 미래의 헨리와 함께하는 시간을, 현재의 헨리는 전혀 모르고 있다. 이 부분이 이해 속도가 느린 내게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많이 버벅거렸다. 그렇지만 헨리의 시간 여행 원리를 이해하게 된 순간부터는, 정말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 이야기 속에 푹 빠져버렸다. 정말 천재적인 작가다!
둘은 정말 끔찍이도 서로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 모습은 때로는 귀엽기도 때로는 사랑스럽기도 했으며, 때로는 가슴 저릴 듯 속상하고 애절하기도 했다. 순식간에 옷가지만을 남겨두고 어디론가 알 수 없는 시간 여행을 떠나버린 헨리를 기다리면서 클레어는 얼마나 막막하고 무서웠을까. 함께 자다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의 잠옷만이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을까. 때로는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는 헨리를 보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언제 현재로 돌아올지 모르는 헨리를 기다리면서 클레어는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또 한편으로 헨리는 얼마나 더 두려웠을까. 어느 시간대로 어떤 곳으로 시간 여행을 한 지도 모르고 벌거벗은 채 ‘쿵’ 떨어진다는 건 정말 상상도 하기 힘든 괴로움일 것이다. 항상 두려움과 긴장을 안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나 도사리고 있는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헨리는 스스로에게 도둑질을 가르쳤고 싸움의 기술을 익히게 해야 했으며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주어야만 했다. 이것들은 오직 생존을 위해 헨리가 체득해야만 했던 것이었다. 그러지 못하면 영영 온전하게 돌아오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의 끝이 언제인지를 알고 산다는 건 어쩌면 좋은 건지도, 또 어쩌면 비극적인지도 모르겠다. 헨리와 클레어에게 시간이라는 것은 조금은 남달랐을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일분일초 소중히 어루만지고 아꼈던 시간, 그리고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열렬히 쏟아 부었던 열정과 사랑을 함께 지켜보면서 기다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 더불어 릴케의 시 구절도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정말 뜬금없이, 나도 다음 주로 날아가 로또번호를 외워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