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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평점 :
아마도 서부영화였던 것 같다. 안개가 자욱한 새벽녘 숲속을 덩치가 큰 인디언 여자가 홀로 걸어 들어간다. 한곳에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가 쓰러져있고... 여자는 그 나무의 가지를 붙잡고 조용히 움츠려 앉는다. 잠시 후 숨막히는 적막을 깨고 울러퍼지는 아기의 울음소리... 그리고 끝까지 묵묵하게 아기를 품에 안고 걸어나오는 인디언 여자... 어릴적 TV에서 보았던 제목이 생각나지않는 이 영화의 한 장면은 아직도 내 머릿속 한곳에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다. 여자... 그 끝을 알 수 없는 강인함... 그리고 숭고함...
이 작품은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스밀라라는 이름의 여자...
한 소년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이웃에 살던 스밀라가 그 원인에 의문을 품고 사건을 파헤쳐간다는 비교적 단순한 스토리처럼 보이는데, 막상 한꺼풀 벗겨보면 작가가 말하고자 내용이 그리 단순하지가 않음에 놀라게 된다. 자신의 삶과 정체성에 대해 별다른 자각을 하지못했던 한 여자가 우연한 사건에 본능적으로 뛰어들면서 서서히 자신의 내면 속에 숨어있던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어렵다. 상당히 어렵게 읽히는 책이다. 챕터마다 등장하는 형이상학적인 서론들은 학술논문을 읽는 것처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의 패턴에 조금씩 적응이 되면 등장인물들의 격조있는 대사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무심하게 펼쳐지는 차가운 얼음장같은 서스펜스에 전율하게 되고, 마지막장을 덮고나면 마침내 특별하면서도 묘한 여운을 음미할 수 있게 된다. 마치 수리공이 스밀라를 위해 정성스레 만들어주던 특별한 음식처럼...
그린란드의 이누이트인 어머니와 덴마크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스밀라는 책의 제목 그대로 눈과 얼음에 관한 특별한 감각을 가진 여자다. 그렇다보니 아무래도 그린란드라는 거대한 섬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덴마크와의 상관관계 등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해진다. 덴마크의 자치령이자 지구상에서 가장 큰 섬으로 분류되어있는 그린란드란 대체 어떤 곳인가... 집에 있던 지구본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그리고 아직까지 내가 모르는 세계가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캐나다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그린란드. 저 거대한 땅이 어떻게해서 덴마크의 영토가 되었을까...
작가 피터 회는 1957년생이라 하니 1992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불과 30대 중반에 쓰여졌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끝을 헤아리기 힘든 학문적 깊이와, 마치 세상의 이치를 통달한 것 같은 전지자의 시선이 느껴지는 압도적인 필력은 경이롭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다. 움베르토 에코라도 30대에 이런 글을 쓰지는 못했을 것 같다. 수학과 기하학, 물리학, 지질학, 생물학, 문화인류학, 거기에 항해학과 클래식과 째즈를 망라한 음악적 깊이까지...
등장인물들의 대화는 허튼 소리가 없고, 함축적이며, 격조가 있다. 한마디의 대사를 내뱉기위한 인물의 심리상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작가의 독특한 서술방식은 그야말로 지적호기심을 극대화시켜 준다. 특히 중반부 스밀라와 수리공과의 성애묘사 부분에선 여자가 남자의 몸 속으로 들어간다는 식의 상상을 초월하는 표현법에 깜짝 놀랐는데, 작가가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라고 했던가... 셰익스피어가 햄릿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여자의 또다른 일면일 뿐... 피터 회가 스밀라를 통해 보여주는 여자의 모습은 강하고도, 고귀하고, 숭고하다.
1997년에 개봉된 동명의 영화는 역시 덴마크의 명장 '빌 어거스트'에 의해 만들어졌다. 빌 어거스트... 아카데미와 칸 영화제를 석권한 '정복자 펠레'와 '최선의 의도' 같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대학시절 부산에 살면서도 기어코 서울의 대한극장까지 찾아가서 감명깊게 보았던 '영혼의 집'이라는 영화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 이름만으로도 무한한 신뢰를 보낼만큼 훌륭한 감독이지만, 아쉽게도 이 작품 '센스 오브 스노우'는 그다지 인상깊은 완성도를 보여주지 못한다.
소설의 방대한 내용을 세세하게 영상으로 표현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보니 사건 위주로 축약을 한 탓에, 책을 읽지않고 영화만 보아서는 스토리를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가 되고 말았다. 그만큼 이 소설은 겉으로 보여지는 사건보다 눈과 얼음으로 대변되는 자연의 본질, 그리고 인간의 내면에 관한 심도깊은 묘사가 핵심이라는 반증이리라...
스밀라 역의 줄리아 오몬드는 '가을의 전설'과 '카멜롯의 전설' 등, 9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여배우다. 이 역할에 있어 다른 여배우는 쉽게 떠오르지 않을 만큼, 섬세하면서도 강인한 소설 속 스밀라의 이미지와 비교적 잘 어울린다.
수많은 영화의 주조연으로 낯이 익은 분위기있는 배우 가브리엘 번이 수리공 역을 맡았는데, 소설에서 묘사된 것처럼 거구의 체격에 우직스런 이미지가 아니라 그런지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모든 사건의 열쇠를 쥐고있는 퇴어크 역의 리처드 해리스는 언제나 그러하듯 멋진 은발을 흩날리며 영화에 무게감을 실어준다. 하지만 나이가 너무 많다보니 소설 속의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보여주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사족> 추리소설로 분류하기에는 턱없이 난해한 문장으로 인해, 이 작품은 번역의 완성도가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국내에는 1996년에 처음으로 번역소개 되었다가 절판된 후, 2005년에 번역자가 바뀌어 새롭게 재출간된 것으로 나온다. 이 책의 번역가인 박현주씨도 작품의 무게감을 고려하여 상당히 공들여 작업한 듯한데, 그래도 명확하게 이해되지않는 표현들이 무수하다보니 다 읽고나서도 뒷맛이 그리 개운치가 않다. 아무래도 정영목씨가 번역했다는 구판을 구해서 한번은 더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분명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