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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보았네
올리버 색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2년 12월
평점 :
1880년 벨은 주장했다. 청각장애인에게 수화를 가르치며 안 된다. 수화를 배우게 되면 구화법(口話法. 독순술. 입술 읽기. 입술 모양을 보고 말을 알아듣는 기술)이나 말하는 법을 익히지 않게 된다. 결국 청각장애인끼리만 어울리게 되고, 비장애인과는 영원히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된다. 말을 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게 수화를 금지해야 한다.
벨의 반대편에는 ‘갤러데트’가 있었다. 청각장애인에게 말을 가르치는 것이 워낙 힘들어서 1주일에 수십 시간을 쏟아야 하고, 그 기간 동안 일반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것 때문에 말하기의 이점이 묻혀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결국 기껏해야 말하는 법을 흉내 내는 수준에 불과한 문맹자를 키워내는 꼴이 되지 않을까? 청각장애인에게 수화는 언어다. 수화로 그들에게 고등학문을 가르치면 청각장애인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
두 명 모두 청각장애인 어머니를 두었고, 둘 다 수화에 대한 경험이 풍부했다.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틀려 보이지 않는다. 두 의견의 절충적인 방법은 없을까? 혹시 절충을 하면 두 방법의 단점만 나타나진 않을까? 나라면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청각장애인을 우리는 농아(聾兒)라고 부른다. 농(聾)은 귀머거리란 뜻도 있고 어리석다는 뜻도 있다. 영어의 deaf도 귀머거리와 멍청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시각장애인을 예언자나 점쟁이로 여기는 것과는 사뭇 다른 취급이다. 그 이유는 귀가 들리지 않으면 뇌에 ‘언어 영역’이 발달하지 못하게 되고 언어 없이 성인이 되면 청각장애인은 언어 없는 인간이 된다.
언어가 없다고 해서 인간이 머리가 없는 존재가 되거나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가 되지는 않는다. 대신 생각의 범위가 심하게 제한되고, 자기 주위의 아주 작은 세계만 지각하며 살아간다. 성장기 때 언어를 접하지 못한 청각장애 어린이는 질문이나 의문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바로 자기 앞에 있는 사물의 명칭에만 집착한다. 즉, A사과, B사과를 각각으로 여길 뿐 사과라고 일반화시키지 못한다. 나아가 사과와 배는 과실의 일종이라는 상위의 범주로 도달하지 못하고 감각적인 세계에 머문다. 어제와 1년 전도 구분하지 못한다. 수화를 배우지 못한 청각장애인에게는 지금 이 순간에만 삶이 존재할 뿐이다. 시간적인 요소, 일반화, 범주화를 시키는 능력이 부족하니 가설을 만들지 못하고, 이는 자연히 인과관계를 정리하거나,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떨어지게 만든다.
수화는 언어다. 그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고등한 언어다. 우리가 어떤 말을 들었을 때는 전후 상황을 파악해서 그 말의 의미를 판단한다. 특히나 어린 시절에는 의미를 대략적으로만 파악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평생 이렇게 대략적인 이해만으로 만족한다.
하지만 청각장애인에게 수화를 통해 받는 교육은 다르다. 수화를 통해 개념을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은 하나뿐이다. 개념을 분석하면서 청각장애인이 수화를 사용하는 선생님과 함께 개념을 분석하게 만드는 것. 그렇게 해서 감각적인 개념에서부터 추상적인 생각으로 청각장애인들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다.
1880년대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주장이 승리하며 미국에서 수화 교육은 금지되었고, 청각장애인은 암흑의 시간을 보냈다. 이후 1950년대가 되어서야 수화는 다시 청각장애인에게 허용되었고, 청각장애인 중에서 대학교 교수도 나오고 학장도 나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