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라와 내가 결혼을 한 지 정확히 5년이 지난 후, 그리고 나의 형이 떠난 지 거의 딱 5년이 지난 때에 나는 다시 침대 곁을 지키고 있다. 이번에는 산부인과 병동이다. 전과 마찬가지로 단조로운 분위기의 병실에는 정적이 흐른다. 간호사들이 타라의 상태를 확인하러 가끔 들르긴 하지만 특별히 걱정을 하거나 뭔가를 기대하는 것 같진 않다. 물론 우리는 기대로 가득하지만 막상 겪어보니 이런 상황은 영화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작은 병실 안에서 그야말로 중대하고 신비로우면서도 평범한 일이 일어나기를 기자리는 시간의 대부분은 그냥 앉아서 어리둥절하며 침묵 속에서 견뎌내는 기나긴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것도 전과 마찬가지다.

올리버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신생아는 품에 안기에도 연약한존재이고, 잘못하면 부러져버릴까 두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두텁고, 강력하고, 강건한 느낌을 주는 생명력으로 가득 찬 부대 자루, 수십억 개에 달하는 세포 더미였다. 톰이 그토록 찬양하던 경이롭고 엉망진창인 세포생물학이 떠오르고 더 나아가 생명 자체를 생각하게 한다. 자연은 단순함보다 대담하고 강한 것을 선호한다. 그런 것들은 아름답긴 하지만 항상 예술적이거나 명료하지는 않다. 경험상 내 삶도 그렇다.
이제 단순한 삶은 끝났다. 그러나 아기 덕분에 이제 내 삶도 더 아름답고 강건해지는 여정을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임금을 거의 받지 못한 3개월의 육아 휴가 동안 내 일터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 3층이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한 번에 담당하는 구역보다 작은 공간이었다. 고요하고 말끔한 전시실 대신 고물상 같은 방들이 내 일터가 되었다. 하지만 7만평이 넘는 메트에서보다 20평짜리 이곳에서 할 일이 훨씬 많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다. 지금까지는 사소한 것에 거의 신경 쓰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그 삶에서는 내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세상을 그냥 둘러보기만 하면 됐다. 그러니 부모노릇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수없이 많은 사소한 일을 해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가 받았을 충격을 상상해보라. 산더미 같은 빨래, 계속되는 병원 출입, 끝없이 반복해서 기저귀 가방을 쌌다 풀었다 해야 하는 일상. 나는 농부들이 느꼈을 법한 기분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노동이 너무 고단해서 그 결실을 음미할 여유조차 없는 느낌 말이다.

일과에 다시 익숙해지면서 내게 웃음이 나올 정도로 시간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한다. 팔짱을 끼고 주변을 둘러보고 그냥 자리에 서서 하고 싶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 내가 아는 모든 성인은 자신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주장하지만 이곳에서의 나는 바빠서는 안 된다. 긴 시간을 조용히 보내다가 가끔 "이봐요, 이거 원화 맞아요?" 같은 질문에 대답하고 어린아이가 그림 액자를 잡아당기거나 그 비슷한 일이 생기면 가끔 개입해야 한다. 그러나 정적을 음미할 시간은 충분하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한 시간이 정확히 한 시간으로 느껴질 때 그 시간이 얼마나긴 시간인지 깨닫는다. 집에서 올리버를 돌볼 때도 한가한 시간이 있긴 했지만, 그 시간과 이 빈 시간은 다르다. 전자는 소비하고, 쓰고, 낭비하고, 텔레비전을 보느라 사라지는 시간이어서 그냥 시간만 죽이는 게 아니라 몸도 해치울 수 있다. 후자는 옛날식으로 보내는 시간이라 여름날 포치에 앉아 바람이 부는 걸 바라보는 것 같은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경비원 근육이 약해졌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서 있는 건 끊임없이 연마하지 않으면 녹스는 기술이다. ‘서 있는 것‘이 실은 서 있고, 기대어 서 있고, 서성거리고, 스트레칭을 하고, 다 쓴 잉크 카트리지처럼 다리를 터는 것을 모두 포함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늦은 오후로 접어들 무렵이 되자 에너지는 탈탈 털리고 여기저기가 쑤셔왔지만, 아이를 돌볼 때 오는 미친 듯한 기진맥진의 상태가 아니라 기분 좋은 단순한 피로감이다.
‘그러니까 바로 이게 내 삶이군.‘ 나는 생각한다. 앞으로 록콘서트 무대 코앞의 객석만큼 떠들썩한 세계와 수도원처럼 고요한 세계 두 곳을 오가게 될 것이다.

감정이란 얼마나 변화무쌍한 것인지를 배우고 있다. 어린아이가 맑음과 폭풍우 사이를 얼마나 예상치 못하게 빠른 속도로 왔다갔다 할 수 있는지, 어른도 얼마나 그와 비슷한지를 깨우친다. 그래서 가령 고대 로마 전시관에 전시된 귀족들의 두상을 보면서 그 근엄한 가면에 드러나지 않는, 어쩌면 그들이 말도 안되게 웃기는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곤 한다.
다부진 인상의 카라칼라 황제가 떼를 쓰는 아이처럼, 어머니 말씀을 빌리자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뚜껑이 열리는‘ 장면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언짢았던 기분이 아무 이유 없이 다시 좋아지고 자신감이 넘치고 살아 있다는 것이 행복해지면서 찌푸렸던 눈썹이 풀어지는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다.

메트에서 일하기 시작한 후 첫 몇 달을 돌이켜보면 내가 한때 날이면 날마다 말없이 뭔가를 지켜보기만 하는 상태를 그토록 오래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아마 그것은 커다란 슬픔이 가진 힘을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날마다 수많은 밀고 당기기를 해야 하는 요즘 같아서는 그렇게 뭔가에 집중해서 사는 삶을 상상하기가 힘들다. 이제는 더 이상 처음 미술관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처럼 단순한 목표만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 살아나가야 할 삶이 있다.

완벽한 외양을 갖춘 완성품만으로는 예술에 대한 배움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작품들이 탄생하는 과정에 들어간 고통을 잊지 않아야 한다. 자기 자신이 무언가를 어떻게 만들어낼지 궁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창작물을 보는 데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사실 평생 처음으로 나도 뭔가를 만들어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엄청나게 무질서하고 즉흥적인 과정을 밟으면서 두 명의 작은 인간과 그들이 살아갔으면 하는 작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결코 완벽하지도, 완성할 수도 없는 프로젝트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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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장소/제주도

제주도는 고려 중기 때 편입됐고, 조선 시대 때 비로소 관리가 파견돼 전라도에 속한 지역으로 관할됐다. 위치상 한반도의 주류 문화에서 벗어난 지역이었던 만큼 독특한 문화유산이 많이 남겨져 있다. 일본 오키나와나 규슈 지역과 가깝기 때문에 이들 지역과의 문화 교류도 활발했다.

제주도는 다양한 신화, 특히 여성 신화가 풍성한 곳이다. 그중 설망대할망 이야기가 가장 유명한데, 할망이 경기도의 토사를 한 줌 손에 쥐고 바다에 뿌리니 제주도가 생겼다고 한다. 할망이 매우 컸기 때문에 한라산 꼭대기 백록담의 물로 머리를 감았다고도 하고 물장오리오름에 가서 지팡이로 이 산 옆구리를 두들겼더니 물이 난데없이 솟아나와 호수가 생겨 그곳에 몸을 담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제주도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계란을 풀어놓은 것처럼 퍼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마을도 산촌, 양촌, 해촌으로 나뉜다. 산쪽에 몰려 살면 산촌, 바다 쪽에 몰려 살면 해촌이고 그중 양촌은 가장 좋은 땅을 차지하고 농사짓는 지역을 의미한다. 양촌에는 양반들이 살았고 유교 문화의 영향이 강했다. 해촌에서는 물질을 하면서 살았고 잠녀라고 불렸던 해녀들이 이곳에서 경제를 주도했기 때문에 가난하고 천시되던 지역이었다. 토지가 없어도 생존이 가능하다는 특성 때문에 해촌에서는 독립적으로 생계를 꾸리는 여성들이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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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애도의 끝을 애도해야 하는 날들

프랭클린 씨 스타일 알지? 말투가 항상 지루하게 들려서 정말 공격적으로 말해도 괜찮은 거. 아무도 그건 못 배기지. 드디어 남자의 기세가 꺾였는데, 그가 전시실을 나서다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어. 자기 아들을 보고는 ‘작은사람들한테는 작은 힘이 어울리지... 인생이 그래."
기대했던 것만큼 사람들은 웃지 않는다. 이야기의 마지막이 무겁게 끝나자 사람들은 엄숙하게 고개를 젓고 "빌어먹을.."이라고 중얼거리며 이런 차원의 도덕적 부패에 대해 곱씹어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신발 바닥에 붙은 껌 같은 취급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 한 번씩 당신은 경비원 따위일 뿐이라는 걸 아주 확실하게 상기시켜주는 녀석들을 겪지 않고는 경비원으로 일할 수 없다. 기분이 괜찮을 때는 이런 건 모욕으로 간주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기분이 바닥일 때는 때때로 이 불량배들이 의도하는 것처럼 작고 힘이 없다고 느끼고 만다. 그래도, 적어도 이런 날에는 그들을 우리가 술집에서 늘어놓는 무용담에 등장하는 악당으로 만들 수는 있다.

나는 시끄럽고 눅눅한 바 안의 작은 친밀함의 보금자리인 그곳으로 가 친구들과 합류한다. 오랫동안 뿌리쳤지만, 나는 결국 혼자가 아닌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비슷한 결의 젊은 무리를 발견했다. 우리는 모두 서른 전후로 친구들에게 하는 잘난 척은 그만두고 서로에게 기대어 격려를 받기 시작하는 나이다. 어쩌면 어려운 나이이기도 하다. 어른이 되기 위한 견습기간이 끝나가고 진정한 의미의 성인기가 다가오고 있다. 다시 한번, 그리고 아마 이번에는 진짜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우리 넷 중 일부러 미술관 경비원이 된 괴짜는 나뿐이다.

밤이 깊어지고 취기가 오르면서 우리는 덜 어리석고, 더 진지해지며, 덜 조심스럽고, 더 연약해진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우리끼리는 훌륭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오늘과 그 후의 수많은 일요일에 벌어진 술자리에서 우리는 부모님의 죽음이나 건강 같은 주제들로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우리는 문예지에 루시의 시가 실린 것을 기념하며 축배를 들 것이다. 우리는 블레이크가 오픈 마이크의 밤 공연에 출연하기 전에 미리 흥에 취할 것이다. 사이먼과 루시는 바로 이런 자리에서 사랑에 빠질 것이고, 그들은 친구 사이로 돌아간 후에도 여전히 서로를 사랑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이먼은 자기가 한 여자를 만났고 그녀와 함께 유타로 이사할 거라는 소식을 전할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결국 우체부 일자리를 찾고 개 몇 마리와 함께 산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게 진짜 인생이다. 프라이버시라고는 없는 이 왁자지껄한 바에서 우리는 진짜 인생을 논하고 있다.

이런 다락방 느낌이 나는 곳에서라면 물건들의 수집 과정이 궁금해지는 건 당연지사다. 어느 날 나는 메트가 처음으로 취득한 그림 몇 점을 발견했다. 그림들의 취득 번호, 작품의 캡션 라벨 하단에 나오는 일련 번호 같은 것을 보고 눈치를 챈 것이다.
취득 번호는 대개 ‘2008.11.413‘처럼 길지만, 내가 발견한 것은743‘으로 이건 메트가 영구적으로 터를 잡기 6년 전인 1874년에 컬렉션의 일부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림들은 미술관의 설립자중 한 명인 존 프레더릭 켄셋ohn Frederick Kenset이 그린 사랑스럽고 절제된 느낌의 풍경화다. 풍경화가가 아직 제대로 된 직업이아니었던 초창기 미국에서 자란 그는 동판공 훈련을 받아 지폐를 찍어내는 판을 새기며 생계를 이어갔다. 켄셋의 일생 동안 뉴욕은 급속도로 성장했고 그는 허드슨 리버 스쿨의 예술가들과 함께하며 미국 최초의 위대한 미술관을 세우기 위한 노력에 동참했다.

하지만 시작은 그렇게 위대하지 않았다. 루브르 같은 박물관은 왕실 소장품을 기반으로 설립되었지만 메트는 일반 시민들, 즉 첫 번째 이사회의 구성원인 상인, 금융가, 개혁운동가, 예술가들의 수집품을 기반으로 삼아야 했다. 상당 기간 동안 메트는 전시할 가치가 큰 유물들을 소장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계획보다는 우연에 더 가까운, 기증이나 유증과 같은 뜻밖의 횡재에 의존했다.

어쨌든 이 전시관을 사랑할 이유는 충분하다. 운 좋게도 이곳은 바로 이웃인 아메리카 전시관의 컬렉션에서 빠진 부분들을 메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악기 중 하나는 나이아가라 폭포근처에서 만들어진 이로쿼이troquisite 부족의 늑대거북 등딱지 셰이커다. 손잡이 부분에 달린 뼈가 드러난 머리와 야구 글러브 정도 크기의 등딱지가 훌륭하다. 그러나 이 셰이커에서 중요한 것은 악기 자체의 특징보다도, 신성한 의식을 행하는 동안 무용수와 하나가 되어 때로는 점점 빠르게, 때로는 점점 느리게, 때로는 시간 자체를 뒤틀기도 하면서 박자를 조절하던 악기의 기능이다. 나에게 그 악기는 장난스러운 동시에 극도로 진지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실제로는 아기들의 딸랑이와 다를 바 없이 체리씨로 속을 채운 것일 뿐이지만, 그런 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기타도 진동하는 줄이 달린 나무 상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악기에는 유명한 라틴어 경구인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가 잘 어울리는 듯하다. 악기의 제작자가 거북의 부드러운 살을 잘라내고 파내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기묘하게도 이 두 가지 측면은 서로 연관된 것처럼 느껴진다. 당신의 죽음이 곧 도착할 것이다. 모든 것을 잊고 맘껏 흔들어라.

이 일을 거의 5년 동안 하다 보니 몇 가지 습관이 생겼다. 친한친구들이 생겼고, 내가 일하기 좋아하는 전시실과 별로 선호하지 않는 전시실을 구별하게 됐다. "인상파 그림은 왜 항상 그렇게 흐릿해 보이는 거 같아?"처럼 익숙한 대화를 엿듣게 되면 언제, 어떻게 내 의견을 말해야 하는지 안다. 달리 말하면 나는 이제 베테랑이 됐고이 일이 익숙하고 편안해졌다. 나에게 맞는 리듬에 따라 움직이며 그것을 유지하는 데는 큰 노력이 들지 않는다. 대부분의 날에 내가 맡은 일은 그저... 여느 직장의 일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이 상태가 나를 그리움과 후회로 가득 채운다.

이제 이런 순간들은 예전만큼 자주 오지 않고 그 사실을 인정하며 슬퍼진다. 위대한 그림은 경외감, 사랑 그리고 고통 같은 잠들어 있던 감정들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메자닌의 골동품들에 대한 호기심과는 다르다. 이상하게도 나는 내 격렬한 애도의 끝을 애도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내 삶의 중심에 구멍을 냈던 상실감보다 그 구멍을 메운 잡다한 걱정거리들을 더 많이 생각한다. 아마도 그게 옳고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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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인물/나혜석

나혜석(1896년~1949년)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며 특별히 글쓰기에서 발군의 재능을 발휘했던 인물이다. 나혜석은 신여성의 전형이다. 일본 도쿄사립여자미술학교 서양학부에 진학했고 이곳에서 여권 사상에 눈을 뜬다. 대부분의 여성 유학생들이 자수, 조화, 수예 같은 것을 전공했는데 나혜석은 서양화를 전공했고 여성 최초로 서양화 개인전을 서울에서 열기도 했다. 1921년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열린 개인전은 이틀간 5천여 명이 몰렸고 70점 중 20점의 작품이 팔렸다. 하지만 이때부터 아버지와의 갈등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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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예술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이해하려고 할 때

기둥 받침대에서 묻어난 둥그런 녹 자국들이 남은 바닥을 보면서 이 기둥들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러다 근처 하얀 벽에 구름처럼 희미하게 번져 있는 푸른색 무늬를알아본다. 이것은 소위 "경비원 자국"이라고 불리는데 값싼 폴리에스테르 근무복을 입은 수백 명의 경비원들이 아픈 발을 쉬기 위해 벽에 기대면서 탄생한 작품이다.

이 전시실의 유명 인사가 ‘뉴욕‘ 쿠로스Kouros(그리스어로 ‘청년‘을 뜻하며, 청년의 나체를 표현한 고대 그리스 조각의 장르)라고 불리는 <쿠로스 대리석 조각상 MarbleState of a Kouros>이라는 사실이 이 모든 배경과 아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유명한 쿠로스들과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의례적인 이름일 뿐이지만 나는 내 나름의 이유로 뉴욕 쿠로스라는 이름을 좋아한다. 그 이름은 마치 이 호리호리한 아테네 청년이 고국을 떠나 아스토리아의 아파트에 세 들어 살며 우리들처럼 지하철을 타고 메트로 출퇴근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나는 같은 이주자로서, 또 미술관에 매일매일을 서 있는 사람으로서 이 <쿠로스 대리석 조각상>과 동질감을 느낀다.

<쿠로스 대리석 조각상>에서는 차갑고 단단한 돌로 생명체의 형태를 빚는 작업의 대담함이 잘 드러난다. 조각가는 신과 같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동시에 풋풋하고 벌거벗은 연약한 모습을 담아내는 데에도 성공했다. 조각상 앞에 서서 나는 두 가지 사실을 쉽게 받아들였다. 이 코우로스가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나와 같은 인간의 손을 가진 예술가에 의해 조각되었다는 사실이다. 코우로스를 낳은 대리석의 시간관념으로 본다면 고대 아테네는 심장이 한 번 뛰는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30분간의 휴게 시간 동안 종이와 펜을 들고 사물함 앞에 앉아서 <쿠로스 대리석 조각상>에 담긴 의미가 무엇일지 적어두려고 용을 쓰며 미친 듯이 단어들을 짜냈다. 쉽지 않다. 조각상의 완벽한 수직성에 대해 쓰면서 볼링 핀에 비유하기까지 한다.
그것은 직립보행을 하는 종들의 특별함을 자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어깨를 쫙 편 오만함... 살아 있다는 것이 제일이라는 것을 아는 생명"이라고 적는다. 이건 분명 과거의 무덤을 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일한 사실이다. 조각상의 벌거벗은 모습도 기록한다. 어떤 화살이라도 꿰뚫을 수 있을 것처럼 연약한, 무방비 상태의 말랑함. 무덤의 주인은 어린 청년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옷을 벗기면 다 똑같은 몸뚱이를 지닌, 이 청년과 동류인 당신과 나, 우리 모두에 관해 적어두려고 애를 쓴다.

나는 16세기 수피파의 더비시를 그린 그림 앞에 앉는다. 더비시는 고행을 통해 수행하는 인물로 수도사와 다소 비슷하다. 종이에 그린 이 초상화는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에서 그려졌다. 그림 속 주인공은 주황색 망토와 독특한 골무 모양의 모자를 쓰고 땅 위에 낮게 웅크려 있고 시선은 구부러진 코의 능선을 타고 아래를 향한다. 손에 들린 염주는 신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기 위해 매일 의식처럼 행하는 그의 노력을 상기시킨다. 쿠란은 신이 우리의 경정맥보다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고 조언한다. 수피즘의 사상이란 이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예술 작품 앞에 ‘앉아‘ 있다니, 너무 좋다! 그림에 적힌 아랍어 문구를 번역한 캡션을 찬찬히 읽는다.

그렇다면 나는 왜 내게 영혼을 준 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바로 그 영혼을 고통스럽게 하는 슬픔의 원천을 하늘이 내 안에 만들었는데도.

신을 향한 이 비난에 얼마나 날이 서 있는지 믿기지 않아 문장을 두세 번 반복해서 읽는다. 반대로 그림은 너무 절제되고 웅장해서 더비시의 애처로운 말투가 나의 허를 찌른다. 초상화의 얼굴에서 이제야 발견한 침울함이 내가 고민하던 몇 가지 질문들을 인간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나 뚜렷하게 느껴지는 이 남자의 번뇌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븐 아라비에게는 뭔가 아주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그는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거듭 주장하며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지식을 얻어야 한다고, 또 그에 필요한 도구도 이미 우리에게 있다고 말한다.

이븐 아라비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매우 다른 시각이 있다. 첫 번째는 현실을 인식하도록 세밀하게 조정된 의식의 일부로서 마음 한가운데 자리한 인지 능력이다. 이 거칠 것 없는 능력은 우리가 세상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깨달아 진실이 (혹은 신이) 노골적이고 가깝게 느껴지도록 한다. 이슬람 전시관의 미흐라브가 내게 일깨우는 바와 같은 시각이다.
하지만 우리는 논리적인 두뇌도 가지고 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의 얼마나 작은 부분밖에 보지 못했는지, 그 궁극적인 또는 다면적인 현실을 해독하는 데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얼마나 제한적인지 상기시킨다. 이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보면 우주의 진리는 멀리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이고 진실은 불가해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븐 아라비는 위의 두 가지 시각을 조화시킬 방법은 없다고 말하며, 그것은 마치 사람의 얼굴에 두 개의 다른 눈이 있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펼친다. 우리에겐 두 가지 시각이 모두 필요하며, 심장이 뛰는 것에 맞춰 각각의 시각으로 초점을 전환할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에게는 스스로 보거나 생각하거나 느낄 것 없이 그저 기도문을 암송하는 유령 같은 기계가 되는 편이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더비시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더비시는 때로는 고통과 극도의 피로가 기다리는 극한까지 자신의 지각 능력을 밀어붙였으리라. 곧 그가 기운을 되찾고 스스로를 다시 밀어붙이기 시작할 것 같은 왠지 모를 확신이 든다.
한쪽 눈으로 그를 보며 이 신비로운 종파의 16세기 추종자와 친밀해짐을 느낀다. 다음 순간 내 심장이 한 번 뛰자, 그는 또 멀고 낯설게 느껴진다. 한 번 더 심장이 뛰고, 내 앞에 놓인 그림처럼 그는 다시 가까이 있다.

너무 많은 방문객들이 메트를 미술사 박물관이라고 생각하면서 예술에서 배우기보다는 예술을 배우려 한다. 또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는 모든 정답을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있고,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이 감히 작품을 파고들어 재량껏 의미를 찾아내는 자리가 아니라고 넘겨짚는다. 메트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나는 이곳의 주된 역할이 미술사 박물관이 아니라는걸 더욱 확신하게 된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관심 영역은 하늘 높이 솟았다가 지렁이가 기어다니는 지하 무덤까지 내려가고, 그 둘 사이의 세상에서 사는 것이란 어떤 느낌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거의 모든 측면과 맞닿아 있다. 그런 것에 관한 전문가는 있을 수 없다. 나는 우리가 예술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가까이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비로소 예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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