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예술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이해하려고 할 때

기둥 받침대에서 묻어난 둥그런 녹 자국들이 남은 바닥을 보면서 이 기둥들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러다 근처 하얀 벽에 구름처럼 희미하게 번져 있는 푸른색 무늬를알아본다. 이것은 소위 "경비원 자국"이라고 불리는데 값싼 폴리에스테르 근무복을 입은 수백 명의 경비원들이 아픈 발을 쉬기 위해 벽에 기대면서 탄생한 작품이다.

이 전시실의 유명 인사가 ‘뉴욕‘ 쿠로스Kouros(그리스어로 ‘청년‘을 뜻하며, 청년의 나체를 표현한 고대 그리스 조각의 장르)라고 불리는 <쿠로스 대리석 조각상 MarbleState of a Kouros>이라는 사실이 이 모든 배경과 아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유명한 쿠로스들과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의례적인 이름일 뿐이지만 나는 내 나름의 이유로 뉴욕 쿠로스라는 이름을 좋아한다. 그 이름은 마치 이 호리호리한 아테네 청년이 고국을 떠나 아스토리아의 아파트에 세 들어 살며 우리들처럼 지하철을 타고 메트로 출퇴근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나는 같은 이주자로서, 또 미술관에 매일매일을 서 있는 사람으로서 이 <쿠로스 대리석 조각상>과 동질감을 느낀다.

<쿠로스 대리석 조각상>에서는 차갑고 단단한 돌로 생명체의 형태를 빚는 작업의 대담함이 잘 드러난다. 조각가는 신과 같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동시에 풋풋하고 벌거벗은 연약한 모습을 담아내는 데에도 성공했다. 조각상 앞에 서서 나는 두 가지 사실을 쉽게 받아들였다. 이 코우로스가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나와 같은 인간의 손을 가진 예술가에 의해 조각되었다는 사실이다. 코우로스를 낳은 대리석의 시간관념으로 본다면 고대 아테네는 심장이 한 번 뛰는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30분간의 휴게 시간 동안 종이와 펜을 들고 사물함 앞에 앉아서 <쿠로스 대리석 조각상>에 담긴 의미가 무엇일지 적어두려고 용을 쓰며 미친 듯이 단어들을 짜냈다. 쉽지 않다. 조각상의 완벽한 수직성에 대해 쓰면서 볼링 핀에 비유하기까지 한다.
그것은 직립보행을 하는 종들의 특별함을 자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어깨를 쫙 편 오만함... 살아 있다는 것이 제일이라는 것을 아는 생명"이라고 적는다. 이건 분명 과거의 무덤을 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일한 사실이다. 조각상의 벌거벗은 모습도 기록한다. 어떤 화살이라도 꿰뚫을 수 있을 것처럼 연약한, 무방비 상태의 말랑함. 무덤의 주인은 어린 청년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옷을 벗기면 다 똑같은 몸뚱이를 지닌, 이 청년과 동류인 당신과 나, 우리 모두에 관해 적어두려고 애를 쓴다.

나는 16세기 수피파의 더비시를 그린 그림 앞에 앉는다. 더비시는 고행을 통해 수행하는 인물로 수도사와 다소 비슷하다. 종이에 그린 이 초상화는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에서 그려졌다. 그림 속 주인공은 주황색 망토와 독특한 골무 모양의 모자를 쓰고 땅 위에 낮게 웅크려 있고 시선은 구부러진 코의 능선을 타고 아래를 향한다. 손에 들린 염주는 신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기 위해 매일 의식처럼 행하는 그의 노력을 상기시킨다. 쿠란은 신이 우리의 경정맥보다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고 조언한다. 수피즘의 사상이란 이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예술 작품 앞에 ‘앉아‘ 있다니, 너무 좋다! 그림에 적힌 아랍어 문구를 번역한 캡션을 찬찬히 읽는다.

그렇다면 나는 왜 내게 영혼을 준 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바로 그 영혼을 고통스럽게 하는 슬픔의 원천을 하늘이 내 안에 만들었는데도.

신을 향한 이 비난에 얼마나 날이 서 있는지 믿기지 않아 문장을 두세 번 반복해서 읽는다. 반대로 그림은 너무 절제되고 웅장해서 더비시의 애처로운 말투가 나의 허를 찌른다. 초상화의 얼굴에서 이제야 발견한 침울함이 내가 고민하던 몇 가지 질문들을 인간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나 뚜렷하게 느껴지는 이 남자의 번뇌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븐 아라비에게는 뭔가 아주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그는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거듭 주장하며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지식을 얻어야 한다고, 또 그에 필요한 도구도 이미 우리에게 있다고 말한다.

이븐 아라비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매우 다른 시각이 있다. 첫 번째는 현실을 인식하도록 세밀하게 조정된 의식의 일부로서 마음 한가운데 자리한 인지 능력이다. 이 거칠 것 없는 능력은 우리가 세상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깨달아 진실이 (혹은 신이) 노골적이고 가깝게 느껴지도록 한다. 이슬람 전시관의 미흐라브가 내게 일깨우는 바와 같은 시각이다.
하지만 우리는 논리적인 두뇌도 가지고 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의 얼마나 작은 부분밖에 보지 못했는지, 그 궁극적인 또는 다면적인 현실을 해독하는 데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얼마나 제한적인지 상기시킨다. 이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보면 우주의 진리는 멀리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이고 진실은 불가해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븐 아라비는 위의 두 가지 시각을 조화시킬 방법은 없다고 말하며, 그것은 마치 사람의 얼굴에 두 개의 다른 눈이 있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펼친다. 우리에겐 두 가지 시각이 모두 필요하며, 심장이 뛰는 것에 맞춰 각각의 시각으로 초점을 전환할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에게는 스스로 보거나 생각하거나 느낄 것 없이 그저 기도문을 암송하는 유령 같은 기계가 되는 편이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더비시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더비시는 때로는 고통과 극도의 피로가 기다리는 극한까지 자신의 지각 능력을 밀어붙였으리라. 곧 그가 기운을 되찾고 스스로를 다시 밀어붙이기 시작할 것 같은 왠지 모를 확신이 든다.
한쪽 눈으로 그를 보며 이 신비로운 종파의 16세기 추종자와 친밀해짐을 느낀다. 다음 순간 내 심장이 한 번 뛰자, 그는 또 멀고 낯설게 느껴진다. 한 번 더 심장이 뛰고, 내 앞에 놓인 그림처럼 그는 다시 가까이 있다.

너무 많은 방문객들이 메트를 미술사 박물관이라고 생각하면서 예술에서 배우기보다는 예술을 배우려 한다. 또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는 모든 정답을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있고,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이 감히 작품을 파고들어 재량껏 의미를 찾아내는 자리가 아니라고 넘겨짚는다. 메트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나는 이곳의 주된 역할이 미술사 박물관이 아니라는걸 더욱 확신하게 된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관심 영역은 하늘 높이 솟았다가 지렁이가 기어다니는 지하 무덤까지 내려가고, 그 둘 사이의 세상에서 사는 것이란 어떤 느낌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거의 모든 측면과 맞닿아 있다. 그런 것에 관한 전문가는 있을 수 없다. 나는 우리가 예술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가까이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비로소 예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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