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나라

문화와 역사와 말이라는 것은 지층이나 암석의 결처럼 단단히 형성되어 있는 것이라, 불만족스럽기 짝이 없더라도 바꾸기 어렵다. 그러니 못생긴 지층의 표면만 슬쩍 가리듯 타협안으로 여기저기 임시 공사를 한다.

정말 문화와 역사와 말(써놓고 보니 세 가지의 정체는 사실 ‘일상생활’ 그 하나이다) 안에 내재하는 성적 불평등을 아이와 함께 뚫고서 만족스러운 삶에 도달하기는 매우 어렵다. 딸아이가 어렸을 때 읽을 만한 동화책을 골라보려니, 정말 못 읽을 것투성이였다. 안 그럴 것 같지만 이른바 고전 명작일수록 더 그랬다.

기껏 지위가 높아봐야 아버지의 보호를 받는 공주, 왕자로 인해서만 수동적으로 행복해지는 여자, 왕자 구해주는 조연으로 만족하기, 마녀로 몰아 왕따 시키기, 효녀의 아버지 뒷바라지, 현모양처라는 이름의 끝 모를 노동, 식민지 개척자 백인 청년과 토착민 유색인 소녀의 사랑 등등. 동화는 남자의 판타지가 신나게 점령한 식민지인가? 한마디로 모두 아이에게 읽힐 게 못 되었다. 문화가 길이 아니라 꼭 장애물 같았다. 우리가 고전으로 알고 있는 것들 가운데는 지금은 폐기되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고전이 되기 위한 좁은 관문을 지키는 평가의 시선 역시 다 남자들의 눈으로부터 나왔기에 그러리라.

이런저런 곡절 끝에 든 생각은, 성적 불평등의 해소는 현재적인 입법의 문제(물론 이게 가장 중요하다)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악습을 지우는 문제에 그치지도 않는다. 성적 불평등의 해소는 ‘신화’, ‘종교’, ‘고전’, ‘명작’ 등의 긍정적 이름으로 암석의 결처럼 오래 굳어진 문화 그 자체와 싸우는 일이다. 유전되는 나쁜 형질이 있다면 그것은 핏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 역사, 말 안에 있다. 인간의 지혜는 인간의 어리석음도 함께 가져가는 까닭에 문화, 역사, 말 자체가 싸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을 것이다. 이게 싸움이 되나? 우리가 니체냐? 모든 가치의 전도 후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기대하는 거냐? 대답은 단순하다. ‘그렇다’이다.

바보와 천재

‘천재’는 흔한 말이 되어버렸다. ‘먹방’ 천재도 있고, 탄막 게임을 ‘원코인 클리어’하는 천재도 있다. 좀 더 과학적인 듯한 기준도 있을 것이다. 아이큐가 얼마 이상이면 천재라고 한다와 같은 것. 그런데 인간이 발휘하는 거의 무한하다고 할 만큼 다채로운 능력에 비추어 볼 때 아이큐 같은 기준은 임의적일 뿐이라서 별다른 유의미한 척도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천재의 창조성, 규칙을 발명해내는 능력을 미학의 영역에서 해명한 이가 바로 18세기의 칸트Immanuel Kant이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천재의 네 가지 근본 면모를 이야기하는데, 규칙을 창조하는 저 능력이 첫 번째 온다. "천재란 어떠한 특정한 규칙도 주어지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는 ‘재능’이다. 즉 그것은 어떤 규칙에 따라 배울 수 있는 것에 대한 숙련의 소질이 아니다."2 예술은 인간의 생산품이지만, 여느 기성품과 달리 획일적인 규칙에 따라 생산되지 않는다. 각각의 작품은 저마다 고유한 규칙(질서)을 가지고 있다. 이 규칙은 천재로서의 예술가에 의해 작품마다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다.

두 번째, 아무리 독자적인 생산물이더라도 무의미한 것을 천재의 소산이라고 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생산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범형範型’이 되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 천재의 작품은, 다른 작품들이 좋은 작품인지 좋지 않은 작품인지 판정할 수 있는 표준 역할을 할 수 있는 ‘범형’이다.

세 번째, 천재는 독창적인 규칙의 새로운 작품을 창시하지만 어떻게 그런 작품이 나왔는지 설명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도 그런 작품을 창작하도록 가르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천재는 학자가 아니며, 천재의 산물은 학문에 속하지 않는다. 학자는 자신의 학문적 생산물이 어떻게 나왔는지 설명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동류의 성과물을 얻도록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재는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일일이 인식하고 있기보다는, 꼭 자연의 일부처럼 창조한다. 마치 과실나무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경이로운 열매를 생산하듯 말이다.

그러므로 천재의 네 번째 면모를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자연은 자연 속의 모든 것들을 자신의 규칙(가령 자연과학의 법칙)에 따라 생산한다. 그러나 자연은 독특한 산물인 예술작품에 대해선 ‘천재를 사용해’ 규칙을 부여한다.

천재 개념은 의미 있는 생산물을 모두 주체가 가진 능력의 소산으로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되어 오기도 했다.

이제 바보에 대해 이야기하자. 바보라는 말은 남에게 주저 없이 쓰면 안 되는 말임을 우리는 안다. ‘바보’는 그저 욕이다. 그런데 바보는 그렇게 나쁜 것일까? 바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까?

바보는 늘 매력적이었고, 그 때문에 오래전부터 문학의 주인공으로 흔적을 남겼다.

바보의 순수성은 사람들이 쫓는 가치를 뒤쫓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가치를 무심히 건너뛰어 버린다. 사람들이 매달리는 기존 가치에 반응하지 않는 바보의 등장 자체가 세상을 지배해온 그 가치들을 의문에 부치고 초라하게 만든다. 이런 바보의 방식으로 기존의 세상을 허무하게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발판을 마련한 이들이 있다. 석가가 그렇고, 그리스도가 그렇다.

결국 바보가 물정 모르는(즉 순수한) 바보인 까닭은 세상을 지배하는 기존의 가치와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재가 새로운 규칙을 창조해 기존에 없던 것을 만들어낸다면, 바보는 그 순수성으로 세상에 통용되는 규칙과 가치를 무력화해 세상을 텅 비워낸다. 둘 다 세상이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길을 연다. 결국 바보와 천재는 서로 전혀 다른 인물들이고 전혀 다른 길을 가지만, 궁극적으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늑대인간

고대 이래 늑대만큼 인간 정신에 깊이 파고들어온 동물도 없다. 늑대인간을 뜻하기도 하고, 자신을 늑대로 여기는 정신장애를 뜻하기도 하는 ‘lycanthropy’(라이칸트로피)는 문자 그대로 늑대를 일컫는 그리스어 ‘lykos’와 인간을 의미하는 ‘anthropos’가 결합한 말이다. 이런 질환이 가능한 배경에는 인간 정신의 회로처럼 자리 잡은 늑대 변신 신화가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늑대 변신 신화는 여러 국가와 민족에 퍼져 있는 매우 보편적인 이야기이다. 늑대는 신이 되어서도 출현하는데, 늑대가 많은 고대 그리스의 아르카디아 지방에서는 늑대 제우스를 숭배하기도 했다.

인간의 정신 깊숙이 늑대 변신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면, 현대 정신분석과 철학이 늑대인간을 통해 사상을 전개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우리는 사회정치적 맥락에서도 늑대인간을 발견한다. 늑대는 사회 안에 적합한 자리를 가질 수 없는 자가 출현하는 경로이기도 하다.

‘추방’은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법으로부터 배제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법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일이 아니다. 추방된 자는 법과 무관해지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 버려지는 방식으로 법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는 이런 법의 작동방식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늑대인간에 집중하자. 늑대인간은 합리적인 법적 질서의 바깥 지점에 법의 진실이 있음을 표시한다. 법이란 자신의 명시적인 통치 바깥에서, 즉 법으로부터 추방된 법적 예외의 자리에서 통치한다는 사실을 늑대인간은 몸소 드러낸다. 프로이트에게 늑대인간은 이성적 세계 이면의 진실을 가리켜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 늑대 변신 이야기를 둘러싼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보편적 관심이란, 인간이 자신의 합리성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바라보고자 하는 욕구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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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 없는 사회를 향하여

14세기에 페스트가 프랑스 북부 지방을 휩쓸 무렵 광기에 가까운 여론이 형성되었다. 떠돌던 사악한 유대인들이 식수에 독약을 풀어 사람들을 살해한다는 것이다. 이런 뉴스는 곧 유대인 학살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일어났다.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소문을 물고 악의적인 여론이 형성되었다. 조선인이 폭동과 방화를 하며, 우물에 독을 탔다는 것이다. 소문은 곧바로 조선인 대학살로 이어진다.
희생양 이야기는 반복된다.

이 이야기들이 알려주듯, 희생양이 되는 것은 폭력을 행사해도 저항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이다. 이것이 희생양 문제의 첫 번째 특성이다. 희생양은 오늘날에도 곳곳에 있다. 학교, 회사, 정치 어디든. 조직은 목숨을 빼앗는 고대의 물리적 폭력 이상의 폭력으로 한 사람의 희생양을 겨냥한다. 여러 성추행 사건들에서 쉽게 예를 발견할 수 있듯 피해자에서 희생양으로의 이행은 물 흐르듯 이루어진다.
희생양이 체험하는 당혹감은 이렇다. 주변 사람들은 문제 발생을 귀찮아한다는 것, 자신의 문제 제기와 처지가 다수결이나 회의 등 합리적이라고 위장된 절차를 통해 터무니없이 우스꽝스러운 꼴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심하거나 공평한 시선을 지닌 양하지만, 실은 이 시선 자체가 피해자를 뼈아픈 희생양의 처지에 놓이게 한다.

이것은 희생양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두 번째 특성과 관련이 있다. 희생양은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다양한 이해관계의 사람들을 결집시킨다.

가해자들은 신념, 정치적 성향, 가치관 등이 통일되어 있어서 한 사람을 희생제물로 삼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았을 때 얻게 되는 이득이 비로소 이들을 통일적으로 만들어준다. 그 이득이란 기득권에 대한 보호, 희생양의 것이었던 자리를 대신 차지하기 등과 같은 것이리라.

이런 희생양 만들기는 어떻게 일어날까? 아마도 ‘설계자’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이 희생양의 세 번째 특성이다. 물론 사건의 인과적 흐름 전체를 예견하는 전능한 계산자 같은 것은 없겠지만, 희생양을 계획하는 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보는 설계자가 ‘설령’ 있다고 한들, 희생양 만들기는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참여 속에 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이런 자발적인 참여가 가능할까? 악한 마음을 품고 누군가를 부당하게 박해해 희생양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몇 명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한 조직 또는 사회 구성원 전체가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악행을 의도적으로 저지른다고 간주하는 것은 불합리해 보인다.

사람들은 희생양을 박해하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것을 모른다. 이것이 희생양 문제의 네 번째 특성이자, 가장 악마적인 특성이다.

이제 희생양 문제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특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문명은 희생양을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번제에 바쳐진 희생양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신뢰 속에 엮어주었다.

그러나 이제 희생양에 대해 필요한 것은 인류학적 분석이 아니라 ‘계몽’이다. 희생양은 더 이상 문명의 일부여서는 안 되고, 계몽의 칼날이 사회로부터 추방해야만 하는 것이다.

희생양은 구세주에 관한 고대 신화를 지탱할 만큼 오래된 개념이지만, 어떤 이유로도 희생양은 정당화될 수 없고 희생양을 가졌던 문명은 교정되어야만 한다. 이제 인간의 모든 이야기는 희생양 없는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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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를 엮은 편집자의 주석은 ‘⚫️’으로,
한국어판 옮긴이의 주석은 ‘*‘으로 표기하였습니다.

간혹 프랑수아즈 사강의 손글씨를 알아볼 수 없어
해석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이 베로니크 캉피옹에게 써 보낸 이 편지들은 신기하다. 다른 글들이 특종과 스캔들이 난무하여 불행의 새들이 쪼아대는 먹잇감이라면, 이미 발행 서간집에서 발견하는 것은 또 다른 면의 ‘센세이셔널함‘이다. 절대적으로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의, 웃고 지루해하고 유쾌함의 예술을 키우고 어리석은 장난만 생각하는 스무 살 프랑수아즈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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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관계는 평생의 학습을 요구한다

모든 인간관계는 어렵고, 세심함을 요구한다. 남녀관계 역시 당연히 그렇다.

남녀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고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자기 머릿속에 머물고 있는 지극히 사적인 생각, 자기만의 신념 등이 자신과 상대방, 즉 남녀 전체를 위한 절대적 가치라고 착각하는 자이다. 자신은 전체를 대표하고 이끄는 주연이며, 상대방은 이 전체에 기여해야 하는 조연이다. 상대방은 자기를 이해해주어야 하고, 자신의 쾌락을 위해 기여해주어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괴로운 일도 결국 전체에게(그러나 사실 그 자신에게만) 좋은 즐거움, 적어도 용인되어도 괜찮은 쾌락이라고 착각한다.

당연히 우리는 전체의 일부가 아닌 개별자들이다. 전적으로 서로 다른 자들이, 각자의 고유함 때문에 합쳐지지 못하고 계속해서 서로 다른 자들로 남아 있는 것이 남녀관계이다.

남녀관계 속에서 인간은 결코 상대방의 소유물이 되지 않는다. 줄곧 상대방을 위해 미소 짓지도 않는다. 각자는 상대방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며 더 많이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서로에게 영원히 들어맞지 않는 퍼즐 조각들이며, 전체 그림 같은 것은 결코 맞추어지지 않는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길은 무엇인가? 오로지 상대방의 고유성, 서로 다름, 하나의 전체로 합일하려 하지 않는 상대방의 필연적인 고집을 존중하는 길밖에 없다.

어리석은 인간은 자기 앞의 한 사람을 순응시키려 하고, 자신의 식민지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모두와 다른 고유함’이라는 타인의 본성이 이를 허용하지 않는 까닭에 그의 시도는 결국 좌초하고 만다. 타인은 그가 있는 바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각자의 본성에 따라 살도록 놔두기. 이것이 자유인의 공동체가 제일로 삼는 교육이다.

동물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사람들은 동물을 보호한다. 동물이 활용 가치가 높은 자원이라서 그런가? 인간은 살기 위해 환경을 필요로 하고, 동물은 그 환경의 일부이기에 보호하는가? 결국 인간을 위해서? 아니면 우리는 동물에 대해 정말 순수한 도덕적 책임을 지니는가? 인간은 거의 책임을 지지 않고 수많은 세월을 보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지구의 주인으로 행세해왔고, 같은 맥락에서 동물을 지배하고 사용해왔다. 이런 일의 기원에는 적지 않게 유대·기독교적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우리의 삶을 보라. 그 삶의 핵심은 우리가 대체 가능한 살아 있는 장난감과 논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고유한 영혼과 교류한다는 것이다.

동물은 우리에게 동물의 권리에 대해 생각하고 실천하도록 만들지만, 동물 그 자신은 신이나 인간이 만든 어떤 법 아래에도 놓이지 않는다. 법 아래 놓이는 동물도 있긴 한데, 그것은 인간적 삶의 은유에 불과하다.

오히려 동물은 신과 인간이 부과하는 초월적 법을 파괴하고 생명 그 자체를 구가할 수 있는 길을 인간에게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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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기만,영혼의 질병

책임지지 않는 것,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것, 이것이 자기기만이다.

쾌락을 즐기면서도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변명하는 것,이것이 자기기만이다.

중요한 점은 사회를 절망에 빠트리는,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많은 상황들은 바로 이런 자기기만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직장에서, 이런저런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정치의 영역에서 불의를 목격하고, 또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음모를 목격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난처하고 귀찮은 정의의 요구를 피하기 위해서 자기기만이라는 달콤한 이불 속으로 피신해왔다.

인류에 대한 책임을 지는 데 직책이 필요한가? 직무에 따라서만 타인을 지키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직무에 따라서만 정의에 헌신하는 자가 어디 있는가? 정의에 대한 헌신은 내가 자리한 어떤 사회적 직책에도 제한받지 않는다.

서양의 본질, 우울과 여행:바다 이야기 1

우울(멜랑꼴리아melancholia)을 떨쳐버리기 위해 바닷바람을 쐬고 있는 여행자는 일상과 영화 속에, 현실과 허구 속에 흔하고 흔하다. 무거운 마음을 지닌 이 여행자의 뒤에는 장대한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멜랑콜리아라는 성향은 고대부터 연구되었으며, 의학, 철학, 문학 등의 관심이 교차되는 영역에 놓여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선 네 가지 체액, 즉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에 따라 사람의 성향이나 질병의 원인을 파악했다. 그리고 우울한 성향은 흑담즙, 다시 말해 ‘멜랑melan(검다) 콜레chol?(담즙)’에서 발생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멜랑콜리아는 질병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뒤러와 동시대를 살아간 신비주의자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Heinrich Cornelius Agrippa von Nettesheim는 멜랑콜리아를 3단계, 즉 ‘상상력과 예술가의 단계’, ‘이성과 과학자의 단계’, ‘직관적 사유와 신학자의 단계’로 구분했다. 뒤러의 <멜렌콜리아Ⅰ> 속 주인공이 예술가와 과학자와 신학자에게서 볼 수 있는 강렬한 지적 눈빛을 가진 것은 바로 멜랑콜리아가 저런 창조적 능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우울의 원천은 무엇인가? 멜랑콜리아는 서구 종교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종교개혁 시대, 자발적 선행이 아니라 신의 은총에만 의존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운명 종속의 사상이 "위대한 인물들의 마음속에는 우울함을 심어놓았다"고 쓰고 있다.

이 ‘공허한 세계’의 명칭이 바로 ‘우울’이다. 그리고 현대의 염세주의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자기 내면에서 이 우울을 발견해왔다.

철학의 중심을 내면에 대한 탐구로 옮겨놓은 자는 파스칼과 동시대를 살아간 데카르트Rene Descartes였다. 그러나 데카르트와 달리 파스칼에게 내면은 이성적 통찰의 대상이기보다 ‘비참’, ‘불행’, ‘권태’로 가득 차 있으며, 그것들은 ‘우울’의 또 다른 이름들이다. 이 우울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 자체와 대면하는 데서 생기는 정서이다.

내면이 안식의 장소가 아니라 못 견디게 만드는 재앙의 장소라면, 인간은 자기 바깥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다. 바로 ‘여행’을 하는 것이다.

죄의식으로 가득한 영혼이 유럽에서 탄생했고, 구원받지 못할 자기 운명의 가능성을 내면에서 우울하게 응시하던 이 영혼으로부터 여행의 꿈이 탄생했으며, 그 꿈이 우울한 유럽을 벗어나 우연히 신대륙 발견으로까지 이어졌다고 한다면 과장된 생각일까? 물론 이 모든 일은 신대륙의 황금이 강력한 자석처럼 곁에서 이끌어주어야 했지만 말이다. 유럽은 원죄와 죄의식과 말세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우울은 유럽을 자신의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싶게 만들었다. 그것이 콜럼버스, 마젤란Ferdinand Magellan, 다 가마Vasco da Gama 같은 여행가들을 탄생시켰다.

물과 바다의 철학:바다 이야기 2

물은 태곳적부터 인간의 삶에 개입해왔다. 자연으로서뿐만 아니라, 도덕적 징벌이나 존재론적 개념 또는 경제적 환경으로서 말이다.

삶에서 물이 근본적임을 알려주는 것이 홍수 신화만은 아니다. 최초의 철학자라 불리는 기원전 6세기의 탈레스Θαλ??는 만물의 원천이 ‘물’이라고 했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이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를 등장시켜 이렇게 말하게 한다.

만물은 물에서 생겨났도다!
만물은 물로써 생명을 유지하도다!

이런 강물의 이야기를 넘어서 인류는 ‘바다’라는 더 큰 물과 조우하게 된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 중 배를 타야 했는데, 심한 멀미가 그를 괴롭힌다. 그러다 그는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감동적인 체험을 하게 되고, 이를 《이탈리아 기행》에 기록했다. "어디를 둘러보나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세계를, 그리고 자신과 세계와의 관계를 진정으로 파악할 수 없다."2 이 말은 괴테의 경험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바다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세계를 넓혀나갈 수 있었던 인간의 보편적 경험을 표현한다.

땅의 경영에 못지않은 바다의 경영을 이야기하면서, 서구의 대항해시대와 이후 근현대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대항해시대 이후, 바다로 나가는 일 자체에 엄청난 가치가 부여되었다는 것은, 예컨대 19세기 철학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다음 구절들만 읽어봐도 잘 알 수 있다. 니체는 자신이 동경하는 바를 바다 너머의 ‘지복의 섬’에 투영했다.

함성을 치듯, 환호를 지르듯 나는 저 드넓은 바다를 넘어가겠다. 내 벗들이 머물고 있는 저 지복의 섬을 발견해낼 때까지.(…) 이제 나는 내 아이들의 나라, 아직 발견되지 않은, 멀고 먼 바다에 있는 그 나라만을 사랑한다. 나는 내 돛에 명하여 그 나라를 찾고 또 찾는다.(…) 아득히 먼 바다에 있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땅! 이 땅을 찾고 또 찾으라고 나는 그대들의 돛에 명한다!5

이런 구절들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드물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바다는 유럽인들에게 새 땅을 안겨주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실제 역사 속에서 유럽은 바다를 지배한다. 유럽의 바다 지배는 서구의 번영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식민지가 된 다른 세계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땅과 바다라는 대조적인 두 축을 중심으로 현대 유럽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20세기 카를 슈미트Carl Schmitt의 《땅과 바다》는 얼마간 헤겔의 착상을 이어받는다. 슈미트는 말한다. "세계사는 땅의 힘에 대한 대양의 힘의 투쟁, 대양의 힘에 대한 땅의 힘의 투쟁의 역사란다."

유럽의 대지가 수많은 국가에 의해 분할된 데 반해, 바다에선 오로지 영국이 주도적이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아는 바처럼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전 지구에 식민지의 고통을 안겨주는 국가가 된다. 이것이 최종적인 "유럽 전체의 약진의 결과"라는 것이다. 요컨대 영국의 성공 이전에, 또는 그와 맞물려 유럽 전체가 바다에 나가 나름의 힘을 겨루었고, 그 힘겨루기의 결과란 식민지 쟁취였다.

슈미트는 유럽이 합리성 측면에서 다른 세계보다 우월하고, 그래서 다른 민족들에게 명령하는 지위를 누리며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다고 이해한다.

헤겔의 눈에나 슈미트의 눈에나 바다는 오로지 서구인의 역사에 속한 것일 뿐이었다. 당연히 오늘날의 바다는 그럴 수도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오늘의 바다는 세계 시민의 것이고, 또 무엇보다 난민들을 위한 바다이다.

아이네아스,
보트피플의 로마 건국:바다 이야기 3

《아이네이스》는 호메로스의 완성된 퍼즐을 엎었다가 그림을 어색하게 다시 맞추어놓은 듯한 인상을 숨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고전끼리 키재기를 시키는 독법이 무슨 소용인가? 고전을 대할 때 관건은 진열장의 상품처럼 가격을 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어떻게 일깨우는지 깨닫는 것이다

《아이네이스》의 후반부는 정복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고, 전반부는 보트피플의 방황 이야기이다. 그래서 후반부는 전쟁의 서사시인 《일리아스》를 모범으로 삼고, 전반부는 바다에서의 방황 이야기인 《오뒷세이아》를 모범으로 삼는다. 작품의 골격은, 트로이 멸망 후 여신 비너스의 아들이자 트로이 왕족인 아이네아스가 트로이 유민들과 함께 온갖 방황을 거쳐 이탈리아에 상륙해 로마의 선조가 되는 이야기이다. 작품 중간중간 아이네아스와 그 후손인 미래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등의 연관성을 제시함으로써 로마인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해주는 로마의 민족 서사시가 《아이네이스》이다.

지배자가 옹호하는 국가의 창건 신화들이 그렇듯 《아이네이스》는 로마의 주류적 인물들에 대한 찬양을 담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이민족을 정복하는 이야기도 들어 있다.

《아이네이스》를 또 다른 관점에서 읽어볼 수 있을까? 영웅들의 눈부신 전쟁을 통한 국가 창건 신화가 아니라, 지리멸렬한 보트피플의 이야기로 말이다. 그야말로 《아이네이스》는 나라가 망하자 바다에 배를 띄우고 탈출한 보트피플의 수난사이다. 다음은 마치 21세기의 텔레비전 속에서 기자의 카메라와 마이크가 시리아 유민들의 절규를 따라가는 장면 같다.

트로이가 멸망한 후 두 사람의 항해자가 출현한다. 한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다 길을 잃은 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을 받아줄 정착지를 찾아 방황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서로 적이었다. 한 사람은 침략자 오뒷세우스, 다른 한 사람은 패배한 아이네아스. 트로이의 침입자도 트로이의 주인도 트로이를 떠나 방황하고 있다면 대체 트로이에는 누가 남았단 말인가? 파괴만 있었을 뿐 침입자도 거주자도 떠난 도시. 전쟁은 이런 어리석음으로 가득하다.

고대 세계의 이 여행자를 기다리는 것은 환대였고, 그것은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전쟁을 피해 바다에 배를 띄운 여행자들이 저 막막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애타게 기다리는 것이었다. 아이네아스와 스치듯이 지나치는 적수 오뒷세우스의 방랑에서는 이런 환대가 더욱 두드러진다.

이런 환대가 없었다면 오뒷세우스도, 아이네아스도 영원히 보트피플로 떠돌며 육지에 발을 디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육지에 발을 디뎠을 때 하나의 새로운 문명이, 로마가 이탈리아에 잉태된 것이다.

토착민의 이름과 이방인의 피가 한데 섞여 새로운 세계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바로 ‘로마’ 말이다. 아시아의 해안(트로이)과 유럽의 해안(이탈리아)은 각자 순수한 정체성을 고집한 채 서로를 외면하고 있지 않다. 아이네아스라는 보트피플의 항해와 정착이 알려주듯, 이질적인 자들에 대한 환대가 있고, 이 환대 속에 새로운 문명과 국가의 탄생이 준비된다.
문명 자체의 성격이 그렇다. 한 문명이란, 또는 문명의 울타리가 되곤 하는 국가란 순수한 혈통도, 순수한 전통도 담고 있지 않으며, 이질적인 것들의 마주침만을 담고 있다.

해안에서 해안으로의 이동, 곶에서 곶으로의 이동이 아이네아스의 보트를 따라가는 베르길리우스의 사념 속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대 사상의 중요한 관심거리이기도 하다. 가령 데리다Jacques Derrida의 《다른 곶》은 제목 그대로 해안에 대한 사유, ‘곶’에 대한 성찰이다. 이 작품은 유럽과 다른 곶, 즉 한 번도 유럽이었던 적이 없고 앞으로도 절대 유럽이 되지 않을 곶의 사람들, 바로 유럽의 타자가 어떻게 비로소 개방된 유럽을 가능케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보트를 타고 온 아이네아스가 환대받았듯, 그리고 그 환대가 결국 로마로 이어졌듯, 타자에 대한 개방으로부터 한 공동체는 새 길을 찾고, 새로운 영감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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