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돌고 돈다. 영원한 것은 없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좋은 것을 따라가면, 막차를 탈 가능성이 높다. 지금 좋은 것이지, 앞으로도 좋을 것이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달이 차면 기우는 법이다.
지나온 과거에 대한 색다른 해석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이류, 삼류였다고 해서 지금 탄식할 이유가 없다. 지금부터 앞서나가기 위해 그토록 치열한 숨고르기를 해온 것이라고 해석해보자. 게다가 지금은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다.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는 게임이다. 오르는 게임에서는 뒤처졌지만 내려가는 게임에서는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다.
일류와 이류의 차이는 도전에 한계를 두느냐 아니면 한계에 도전하느냐로 갈린다. 이류들은 도전하기 전에 한계를 먼저 그어놓는다. 그 한계는 물리적 한계가 아니라 심리적 한계다. 도전을 해보기도 전에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부터 내리는 것이다. 심약한 결론 뒤에는 두려움이 놓여 있다. 그보다 깊은 내면에는 아예 도전해보고 싶다는 의욕조차 없다. ‘어렵다’는 생각 뒤에는 ‘사실은 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숨어 있다.
자세를 낮추는 것은 비굴이 아니다. 그것은 내려갈 수 있는 바닥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솟구쳐오를 무한한 가능성을 여는 것이기도 하다. 바닥은 신념이다. 바닥에 도달하면 신념이 바뀐다. 그리고 사람이 변한다. 겸손한 ‘낮음의 미학’이 거들먹거리는 ‘높음의 어리석음’을 무너뜨린다. 바닥을 찍은 사람만이 흐름을 타면서도 자기중심을 잡을 수 있다.
앞문으로 나가는 길이 막혀 있으면 뒷문이나 옆문으로 탈출하자. 새로운 관문을 만나는 기쁨을 포기하지 않으면 삶에는 그런대로 여전히 살 만한 의미와 가치가 존재한다. 하지만 가능성을 찾기도 전에 포기하는 순간, 고집스러운 기쁨은 사라진다. 고집스러운 기쁨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도 나쁘지는 않아!’라는 태도, 막다른 벽에 부딪혔을 때 희망의 종류를 바꾸는 용기다. 그럴 때, 삶의 또 다른 기쁨이 열린다.
이류는 일류를 흉내 내려 한다. 일류가 떠나는 것을 보고 따라 내려간다. 하지만 높은 곳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가끔씩 뒤돌아본다. 그러다가 바람의 흐름을 놓친다. 완급을 조절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 맞바람 때문에 고생을 한다.
지금은 내려가는 길이다. 모두가 오르는 연습에만 열중해왔다. 그래서 내려가는 길은 누구에게나 낯설다. 지금은 우리들을 위한 역전의 찬스다.
내려가는 것, 그것은 패배해서 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속의 심연을 찾아서 떠나는 새로운 출발이자 여행이다. 무엇인가를 바라는 걸음이 아니다. 욕심과 공포, 질투, 집착 같은 과거를 비우는 걸음이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려갈 때마다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이제는 내려가는 것이 행복하다. 내려가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보고 느끼고, 흐름에 맞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다시 오를 것이다.
반문(反問)을 통해 반전(反轉)을 시도하자. 당연하게 여겨온 것에 대해 ‘왜’라고 묻자. 대답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왜 안 돼?’ 우리는 역전의 명수들에게 감동한다.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이미 졌다고 생각할 때, 모두가 졌다면서 포기할 때, 그 최후의 순간에 역전 드라마는 시작된다. 짙게 깔렸던 어둠의 절망을, 찬란한 한줄기 희망의 빛이 강렬하게 뚫고 나온다. ‘반전’은 ‘반문’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절호의 찬스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역전’의 기적을 만들어낸다. 그 눈물겨운 스토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적신다. 우리가 인생의 반전을 결심할 때, 우리 삶의 역전 드라마도 시작된다. 반전과 역전 드라마는 반문을 통한 도전에서 비롯된다. 지금,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그동안 못 이룬 것에 대해서. ‘왜 안 되는데?’
일류와 이류의 차이는 흐름을 타느냐, 흐름을 놓치느냐로 갈린다. 삼류와 사류는 흐름에 맞선다. 안목이 없기 때문이다.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자세를 낮추고 고개를 숙인다. 무능은 겸손이 아니다. 실력 있는 사람만이 겸손할 자격을 얻는다. 겸손은 땅에서 멀어질수록 없어진다.
우리는 너무 유행에 민감하다. 역전에 성공하려면 지금 남들이 좋다고 하는 방향으로 부화뇌동해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서는 절대 남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들 가는 방향으로 물밀듯이 따라간다. 그래서 똑같은 결과를 얻는다. 현명한 어머니들은 자식을 남들처럼 만들지 않으려고 각별한 신경을 쓴다.
빨리 가는 ‘도로(road)’보다 굽이 돌아가는 ‘길(way)’이 아름답다. 틀린 길은 없다. 다만 풍경이 다른 길이 있을 뿐이다. 모든 길은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자주 뒤집힌다. 어제는 최고였던 것이 오늘은 최악이 된다. 어제는 별 볼일 없던 것이 오늘은 최고가 된다. 대한민국처럼 냄비 끓듯 하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정상을 앞두고 포기했다고 해서 너무 아쉬워하지 말자.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다시 도전하기 위해 내려가는 것이다. 실패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냉소주의다. 분노에 투항하지 말자.
내려가는 길에 만나는 돌은, 우리가 딛기 나름이다. 잘 딛고 뛰면 디딤돌이다. 디딤돌로 이용해 몇 걸음을 아낄 수 있다. 미처 발견하지 못해서 걸려 넘어진다면 그것은 걸림돌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걸림돌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짙은 어둠의 터널 끝에는 천지가 ‘개벽’하는 ‘새벽’이 있는 법, 깊은 절망의 밑바닥에 숨 막히는 희망의 텃밭이 있는 법이다
삼류와 사류는 마지막까지 높은 곳을 포기하지 못한다. 본전이 아까워서 고집을 부린다. 그러다가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는 시기를 놓친다. 손해가 너무 막심해서 손절매를 할 수 없는 지경에 몰린다. 결국에는 끝까지 버티기로 한다. 그러나 세상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내려가는 길이 사라지고 추락의 위험이 높아진다. 쩔쩔매면서 내려간다. 사류는 세상을 원망하며 구시렁거린다.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한 걸음씩 차분하게 내려간다. 다른 사람들이 불가능이라고 여기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불가능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에 불과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의미를 만드는 사람은 의지가 있는 사람이다. 내 인생에서 의미를 찾으려면 의연해져야 한다. 의지의 칼날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은, 내려가다가 설혹 넘어져도 걸림돌을 탓하지 않는다. 그것을 디딤돌로 활용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할 뿐이다.
굽은 길은 ‘방황’이다. 곡선은 아름답다. 곡선에는 방황의 여정이 담겨 있다. 그 길을 가다가 넘어져 생긴 상처가 추억의 흉터로 남는다. 모든 길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천천히 걸으며 그 의미를 곱씹어볼 만하다. 누구든 예외일 수 없다. 자신만의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오랜 방황과 고뇌의 여정을 거쳐야만 한다. 성취는 오랜 과정을 거쳐 끊임없이 성숙하는 것이다. 사람은 어른이 된 이후에도 자랄 수 있다.
풀이 바람보다 먼저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날 수 있는 것은, 그래도 일어나야 한다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풀은 부드럽기 때문에 모진 비바람에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카리스마 중의 최고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부드러운 모성이 잔혹한 세월을 이겨낸다.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 말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 말한다. 걸림돌과 디딤돌은 동전의 양면이다. 한계는 피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할 디딤돌이다.
멈추지 말고 내려가자. 이 추위가 언제 끝날지, 희망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숲 모퉁이를 돌아 또 다른 내리막을 만나면 거기에서 희망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 걸음 내려갈 때마다 긍정과 낙관을 연습하자.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내려가자.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자. 그리고 희망을 나누자. 우리는 사랑해야 버텨낼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기회는 위기 ‘덕분’이고, 일류는 이류 ‘덕분’이고, 고귀함은 고생함 ‘덕분’이다. ‘덕분’에 운명도 바뀐다! 곤경 덕분에 풍경도 생기고 비극 덕분에 희극을 무대에서 연기할 수 있다. 좌절과 절망 덕분에 절치부심하고 시행착오를 경험하다 희망의 싹을 틔우면서 판단착오를 줄일 수 있는 비결을 알게 된다.
심호흡은 잠시 쉬는 것처럼 보이지만 쉬는 게 아니다. 기를 끌어모으기 위한 치열한 숨고르기인 것이다. 멀리 가기 위해서 때로는 뒤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장벽에 가로막혔다면 뒤로 돌아가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있다.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가 뛰어넘는 것도 방법이다.
사람들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는 ‘다 알았다’고 생각한다. 높은 곳에서 보면 세상이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자기가 본 것 이외에는 무시하는 속성을 보인다. 하지만 내려가다 보면 세상이 바뀌기 시작한다.
일류는 흐름을 파악하고, 내려가야 할 때임을 가장 먼저 깨닫는다. 감히 맞설 수 없을 때는 가장 먼저 포기한다. 먼저 내려가면서 바람의 흐름을 탄다. 골짜기를 휘몰아치는 칼바람에 몸을 맡긴다. 바람이 밀어줄 때는 힘을 빼고, 맞바람이 달려들 때는 자세를 낮추거나 옆으로 걸어 압력을 해소한다. 완급을 조절하면서 흐름을 타는 셈이다.
가장 절망적인 때가 가장 희망적인 때이고, 어두움에 질식할 것 같은 때가 샛별이 나타날 때다. 별은 저만큼 멀리 떨어져 있어 아름다운 것처럼, 축복도 조금 멀리 있어 보일 때 오히려 인생의 보약이 된다. 사투 끝에 맞이하는 ‘전화위복’이 가장 멋지고 풍성한 축복이다.
내려가보지도 않은 채, 왜 모든 것을 안다고 자만했을까. 그런 거드름 때문에 위기를 자초했던 것은 아닐까. 어쩔 수 없이 내려가기 시작했지만, 차라리 잘된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 속에서도 이렇게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내려가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장 도미니크 보비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흘러내리는 침을 삼킬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연스런 들숨과 날숨을 가진 것만으로도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불평과 원망은 행복에 겨운 자의 사치스런 신음이라고. 아침에 일어날 수 있는 것도 기적이고,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밥과 반찬 그리고 국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축복이자 행복이라고.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지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삶의 기적이라고. 이런 기적의 선물을 받고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제나 더 많이 가진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서 평생을 비참하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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