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문화/봄처녀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
행여 내게 오심인가

<봄처녀>는 가곡으로 유명하다. 원래 가사는 이은상이 쓴 시조로, <봉선화>, <고향의 봄>으로 유명한 홍난파 작곡했다. 1932년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토속적이면서도 낭만적인 감상이 잘 어우러져 여전히 애창되고 있는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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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상실을 표시하는 의식들을 통해 모호함을 수용하는 문화의 지표를 엿볼 수 있다

미국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주류의 견해가 사회 지배적인 경향을 보인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노력과 결과가 일치하는 공정하고 논리적인 장소라고 가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운명까지 스스로 지배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좋은 일은 착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반대로 나쁜 일은 우리가 잘못했거나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 때만 일어날 것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사람들이 모호한 상실과 같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과중한 스트레스를 초래한다.

되돌릴 수 없는 상실과 직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결국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람들이 직면하는 상실 가운데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것이 모호한 상실이다.

그들의 정체성, 역할, 그리고 관계성은 모호하고 불분명한 것보다 분명하고 확실한 게 좋다고 한다. 그들은 가족 간에 지켜야 할 규칙이나 의식들이 명확하기를 갈망한다.

가족 스트레스 관점 연구는 모호한 상실 속에서도 삶을 관리하는 법을 배우는 가족들을 위해 예방 차원의 모델이 된다.

첫째, 스트레스는 단순히 변화 또는 변화의 위협으로 가족 안에서 발생한다. 이 변화는 평범할 수도 있고 치명적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대부분의 개인과 가족들은 자신들이 놓인 상황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아 대처 과정을 진행할 수 있다면 스트레스를 관리하거나 심지어 위기에서 회복할 수도 있다.

전문 심리상담사들은 가족들이 아픈 게 아니라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반드시 말해주어야 한다.

둘째, 지속적인 스트레스는 개인이나 가족 모두에게 당연히 좋지 않지만, 모호함이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스트레스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배운다면 누구나 회복하고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세 번째로 가정하는 것은, 모호한 상실을 겪고 있는 가족과 상담할 때에는 서로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 정보가 ‘어떠한 결과를 낳을지’ 모른다 할지라도 서로 알고 있어야 한다

넷째, 모호한 상실은 정신적 충격을 줄 수 있다. 이런 해석은 해결되지 않은 슬픔의 증상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매우 흡사하다고 볼 수 있는 지점이다.

모호한 상실은 일반적으로 장기적인 상황이고 정신적 충격을 주며 그 상태로 굳어지는 것이지, 플래시백 효과가 있는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도움을 줄 누군가에게 말함으로써, 애도의 과정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얻는다. 그들의 믿음이나 가치 또는 선호하는 이론과 상관없이 그들에게 적절한 소통의 방식을 취한다면, 모호한 상실로 고통받더라도 잘 이겨내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의 죽은 몸을 눈으로 직접 봐야 상실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인다. 대부분의 실종자 가족들은 죽음에 대한 그러한 검증을 통과한 적이 없으므로 부재나 존재에 대한 그들의 인식 변화 과정에서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한다.

해결되지 않은 상실의 원인?이민, 전쟁, 이혼, 재혼, 입양?이 무엇이든 상실의 증상들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불안, 우울, 육체 질병, 가족 갈등은 종종 적응하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괴롭힌다. 어떤 식의 종결이 없다면, 부재하는 자는 현재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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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유적•유물/화암사지

회암사는 고려 시대에 창건됐으나 정확한 시기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고려 말부터 조선 전기까지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위세를 자랑했다. 인도 출신의 원나라승려 지공선사가 고려에 찾아와 수년간 전국의 사찰을 돌다가 이곳의 지형이 인도의 유명 사찰 아란타사와 같아서 사찰 창건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 제안에 따라 그의 제자 나옹선사가 주도해 절을 크게 지었다고 한다. 고려 말에는 전국 사찰의 총본사 역할을 했고 특히 선종의 본찰이었다. 이성계의 막역지우였던 무학대사도 이곳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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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장소/용산

남산에서 한강에 이르는 일대 지역.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산업화를 거치면서용산은 신용산 일대까지 확대됐다.
용산 일대는 요충지다. 현재는 수중보를 설치했기 때문에 한강이 서해 쪽으로만 흘러가지만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서해에서 밀물 때가 되면 한강이 역류해 용산 일대까지 흘러들어왔다. 따라서 수많은 배가 강화도와 김포 일대에 머물다가 밀물 때를 맞춰 내륙으로 올라왔다. 용산 일대의 한강을 ‘용산강‘이라고 불렀는데, 용산강은 전국의 쌀이 모이는 곳으로 유명했다. 이곳은 군사 주둔지로 적당해서, 조선 태종 때에는 군수물자를 비축하는 군자감이라는 큰 창고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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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인물/김마리아

김마리아(1892년~1944년)는 2.8 독립선언과 3.1 운동을 주도했고, 임시정부 대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한 독립운동가다.

지금은 여성 독립운동가하면 유관순을 떠올리지만 일제 강점기 때는 김마리아만큼 유명한 인물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유관순은 해방 이후 <동아일보>, 개신교, 민족주의 진영에 의해 뒤늦게 알려진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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