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사건/동학농민운동

1894년 전봉준(585878~1899)과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진행된 반봉건 반외세운동동작은 경주 몰락 양반 최제우에 의해 창도됐다. 유교, 불교, 도교는 물론 무속신말까지 받아들였고 서학(천주교)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했다. 동학 농민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져나가는 가운데 1대 교주 최제우는 이단으로 몰려 처형당했고, 2대 교수 최시형이 (동경대전>, <용담유사> 같은 경전을 편찬하면서 발전했다. 초기에논 억울하게 죽은 교주 최제우의 신원을 회복하라는 운동(교조신원운동)으로 시작했예만 점차 사회 배역 외서 배격 같은 당시 농민들의 보편적인 의식과 궤를 같이하며 무장 저항운동으로 발전했다.

동학농민운동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사태를 수습하러 왔던 안사 이용태가 조병감의 편을 들면서 사태가 악화냈다. 이에 반발하면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김개남 등 각지의 동학 지도자들과 농민들이 합세, 백산에 집결하여 조선왕조에 대항하는 거대한 농민운동이 시작된다. 황토현과 황동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전라북도의 중심지 전주를 점령했고 전라 감사 김학진 동화에 크게 강화가 돼 전봉준과 함께 전라도 개혁 정치를 주도하고 무기를 지원하는 등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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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완전히 건강하고 완벽하지만 몸에 작은 상처가 있거나 아니면 통증이 있는 경우에는 몸 전체의 건강보다는 상처 부위의 통증에만 관심이 쓰이기 때문에 삶에게 느낄 수 있는 전반적인 편안한 기분이 사라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이 우리의 의도대로 잘 진행되더라도 한 가지가 마음먹은 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아무리 작은 일이더라도 계속 그것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계속 그 일만 생각하게 되고, 뜻대로 진행되는 다른 일은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이럴 경우 손상되는 것은 우리의 의지이다. 하나는 신체적으로 객관화된 의지이고, 다른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객관화된 것이다. 두 가지 경우 우리의 의지의 만족은 항상 부정적인 영향만 미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기껏해야 성찰의 단계에서 의식된다. 반면에 의지의 억제는 긍정적이고 그렇기에 적극적이다. 모든 즐거움은 단지 이 억제의 제거, 그것에서 해방하는 데 있기 때문에 수명이 짧다.

그렇다, 행복론은 그 이름 자체가 완곡한 표현일 뿐이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덜 불행하게 사는 것, 즉 참을 정도만큼 산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시작해야 한다. 물론 인생은 실제로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견디고 끝내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렇다, 삶의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노년에는 위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커다란 고통 없이 인생을 보내는 것이 가장 행복한 운명을 가진 것이지, 가장 큰 기쁨이나 엄청난 즐거움을 누린 것이 아닌 것이다. 최고의 기쁨을 누린 것으로 인생의 행복을 측정하려는 사람은 잘못된 기준을 선택한 것이다. 쾌락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인생의 기쁨을 좇다가 자신이 배반당한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재앙을 피한다.

어떤 사람이 행복의 관점에서 그 상태를 평가하고자 한다면 무엇이 그를 행복하게 하는지 묻지 말고, 무엇이 그를 슬프게 하는지 물어야 한다. 사소한 일에 민감하려면 행복한 상태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불행한 상태이면 그러한 사소한 것들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다른 일반적인 건물이 바탕이 넓을수록 견고한 것과 달리 우리의 행복이라는 건물은 반대다. 그러므로 스스로 가진 모든 종류의 수단에 균형을 맞추어 요구 수준을 적정하게 낮추는 것이 커다란 불행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미래를 위한 계획과 걱정에만 몰두하거나 과거에 대한 그리움에 빠지는 대신 현재만이 유일하게 실재하는 것이고,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만이 진실된 것이고 실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성취된 시간이며, 우리의 존재는 전적으로 그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를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직접적인 고통이나 불쾌감 없이 견딜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을 즐겨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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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훌륭한 것들이 천천히 성숙하듯이, 일반적으로 명성도 늦게 나타나는 것이 더 오래 지속된다. 사후에 얻는 명성은 씨앗일 때 아주 천천히 자라는 참나무와도 같다.
반면에 일시적인 명성은 빨리 자라는 일년생 식물과도 같고, 거짓된 명성은 빠르게 자랐다가 금방 제거되는 잡초와도 같다. 이러한 과정은 어떤 사람이 후세, 실제로는 일반적인 인류에 속하게 될수록 그 당시에는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명성은 원래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고 상대적인 가치를 가진다. 나머지 사람도 그와 같은 명성을 가지게 된다면 그 명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타인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에 따라 한 인간의 가치와 무가치가 결정된다면 그 존재는 아주 비참할 것이다. 모든 존재는 오히려 그 자체를 위해 살고 존재한다. 그 때문에 홀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방식이든, 어떤 종류이든, 어떤 사람을 이루는 것은 그 자체의 존재이다. 여기에 큰 가치가 없다면 그는 별 가치가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의 생각에 비친 그 존재의 이미지는 부차적이고 파생적인 것이며 우연에 따른 것이라 진정한 본질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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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이 실제 존재하는 시간에 포함되는 내적인 전체 내용, 즉 우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깊게 생각한 모든 자산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자신의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반면 타인의 것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의식 속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타인에게 비치는 형태이며, 그러한 형태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개념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에 대한 타인의 행동이 그러한 개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 그 자체도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꾸도록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때만 실제로 생각될 뿐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을뿐더러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가벼우며, 시각이 협소하고 태도가 경박스럽고, 잘못된 의견과 오류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면 다른 이들의 생각은 아무렇지 않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의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타인의 의견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통찰을 얻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행복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그와 반대의 망상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 "명예가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와 안녕은 가치가 없으며, 우리에 대한 다른 이의 생각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명예, 즉 우리에 대한 타인의 생각이 종종 반드시 필요하다’는 단순한 진실이 근거로 삼는 과장된 말로 간주될 수 있다.

우리가 말하려는 주제인 인간 자신의 행복과 관련해보면 이러한 문제는 상당히 다른 것이며, 오히려 다른 사람의 의견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분명하게도 우리의 행복은 마음의 평화와 만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행복을 더하기 위해서는 명예욕이라는 태엽을 합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아마 현재의 50분의 1 정도로 낮추는 것이, 즉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가시를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불합리함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키투스도 이것에 대해 "현자도 없애버리기 가장 힘든 것이 명예욕이다"라고 말한다.
(<역사> 5장)

자존심은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우월한 가치를 가진 것에 대해 굳건한 확신이다. 하지만 허영심은 이러한 확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지도록 하려는 욕망이며, 그 결과로 그러한 확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은밀한 희망을 동반한다.

이것으로 보면 자존심은 내부에서 나오는 자존감이자 직접적인 것이지만 반면에 허영심은 외부에서, 즉 간접적으로 그것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을 의미한다

자존감은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간절히 자존감을 가지길 원할수록 그런 척만 할 뿐 곧 그러한 역할에서 벗어나 버리게 될 것이다. 우월한 장점과 특별한 가치에 대한 내적인 강건한 확신과 흔들림 없는 신념만이 사람에게 진짜 자존감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자존감의 가장 최악의 적이자,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허영심으로, 자신에 대한 높은 평가를 근거로 다른 사람들의 찬사를 구하려 애쓰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찬사를 토대로 자기 자신을 높게 평가하려 하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호의적인 의견을 듣거나 다시 확실성을 얻는 것보다 그의 삶에 대한 용기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 이것이 다른 모든 사람들이 힘을 모아 자신을 보호하고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도움은 자신이 만든 것보다 인생의 재앙에 대해 무한히 더 큰 방어벽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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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명문장/이번 일은 참으로 하늘이 도우셨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했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 엄하게 약속했다.
(・・・) 곧 모든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들을 둘러쌌다. 여러 장수들은 양쪽의 수를 헤아려보고는 모두 도망하려는 꾀만 내고 있었다. (…) 나는 노를 빨리 저어 앞으로 나아가며 지자, 현자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았다. 탄환이 폭풍우같이 날아갔다. 그러자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쳐들어왔다 물러갔다 했다. 그러나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형세가 어찌 될지 헤아릴 수 없으니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니며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
(…) 이번 일은 참으로 하늘이 도우셨다.

- 이순신, 난중일기 중

《난중일기》에 나온 명량해전 기록이다. 12척의 배밖에 없는 상황에서 울돌목이라는 좁은 해협의 물길을 이용하여 10배가 넘는 적을 기적적으로 물리친 유명한 승전이다. 하지만 당일의 기록을 보면 전략은 기본이요, 이순신의 탁월한 리더십과 결단력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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