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무지개 그림을 여러번 그리면서

그 후 2년 사이에 내 상상력에 불을 지핀 기획전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예술계에서 가장 크게 이름을 날린 사람이 주인공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예술가라 생각하지도 않았을지 모를 무명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전시였다. 하나는 16세기 기독교 세계의 중심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다른 하나는 20세기한 흑인 공동체가 모여 사는 앨라배마주 시골로 우리를 데려간다. 거기 사는 사람들의 삶이 펼쳐지는 현장이라는 사실을 빼면 뵬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다.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의 소묘 작품들과 지스 벤드 지역 퀼트 제작가들의 작품을 각각 선보인 두 전시는 예술과 예술품의 제작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모든 노력을 허사로 만들어버리기 일쑤인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을 만드는 행위 자체에 관한 나의 이해를 돌아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만일 어떻게든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미켈란젤로가 그랬듯이 높게 쌓아 올린 비계 위에 서서 턱을 치켜들고 설 수 있다면 거장이 하루에 얼마만큼의 작업을 했는지 정확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아침 미켈란젤로와 그의 조수들은 새로 바른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날 완성해야 할 부분에 대한 밑작업을 했다. 이것을 이탈리아어로 ‘하루의 일‘이라는 뜻의 조르나타라고 하는데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는 사실 이렇게 작고 불규칙한 모양의 작은 성취들이 경계선이 거의 보이지 않는 모자이크처럼 모여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비스듬히 누워 있는 아담은 조르나타 네 개, 팔을 뻗고 있는 신도 조르나타 네 개 조각들을 세어보면 미켈란젤로가 붓과 물감통과 모래, 회반죽 자루를 가지고 흙손으로 그 높은 곳에서 570일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시는 <미켈란젤로: 신이 내린 소묘 화가이자 디자이너>라는 제목을 내걸었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그 주인공이 하나의 인간에 불과했다는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예술사 최고의 거장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날마다 그날 해야 할 일을마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데 더없이 전념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에게 심한 매질을 당했다. 부오나로티 가문은 빈털터리였지만 귀족이었고 그의 아버지 로도비코는 아들이 손을 쓰는 일을 하는 것을 몹시 괴로워했다. 그물처럼 교차하는 선들로 세심하게 공을 들여 음영을 표현한 작품을 보면서 로도비코가 한 가지면에서는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업은 육체노동이었다. 반복적이고 지루하며 몸을 쓰는 노동, 숙련이 가능한 노동인 것은 확실하지만 지름길도 없고, 인내심을 가지고 한 획 한 획긋는 것 말고는 일을 진척시킬 다른 방법이 전혀 없는 겸허한 작업인 것이다.

그토록 불만으로 가득했던 사람이 그린 그림이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한편으로는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한 근면성의 산물이다. 그는 긴시간을 바쳐 모델의 등과 팔의 모든 근육에 음영을 줬다. 미켈란젤로는 천장화 전체에 걸쳐 약 430명의 인물을 그려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시빌의 발이 너무도 흥미로워서 엄지발가락이 땅을 짚은 모양을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그렸고, 그마저도 아름답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종이 위의 무엇 하나 그냥 그린 건 없다. 한 획 한 획마다 어려운 임무를 완수하고자 하는 에너지와 야심과 헌신이 깃들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빈 종이 한 장만 있으면 모든 근심을 잊고 혼신의 힘을 바쳐 주어진 과제를 해냈고, 씁쓸한 불평 따위는 일이 끝난 후에나 하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어려운 일을 해내는데 이보다 나은 방법이 또 있을까?

4년의 작업 끝에 천장화가 완성되자 "온 세상이 그 작품을 보려고 몰려오는 소리가 들린다"라고 그의 동시대인은 전하지만 미켈란젤로는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그동안 그려오던 예배당 천장화 작업을 끝냈습니다. 교황이 매우 만족했습니다"라고 그의 아버지에게 편지로 전했을 뿐이다. 그런 다음 덧붙였다. "다른 일들은 바랐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건 제가 시대를 잘못 타고 난 때문인 듯합니다. 지금은 제가 하는 예술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시대예요."
오늘날 우리는 이 "호의적이지 않은" 시대를 하이 르네상스 혹은 전성기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그가 대성당의 거대한 돔 지붕을 그린 가로세로 25센티미터 가량의 종이를 들여다본다. 로마의 지붕들 위로 높이 솟아오른 돔을 짓는 것은 초인간적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고, 바로 그래서 우리가 미켈란젤로라는 인물이 초인간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인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소박한 그림에서 그는 그저 무지개 모양을 거듭해 그리면서 마음에 드는 곡선을 찾으려 하고 있다. 아무리 위대하다 칭송을 받는 그일지라도 결국 어린아이 같은 연습 과정을 건너뛸 수는 없는 사람인 것이다.

대부분의 관람객이 미켈란젤로가 70년 정도 걸려 완성한 작품들을 ‘끝내는데‘는 한 시간가량이 걸린다. 비난하는 건 아니지만, 미켈란젤로의 성미를 아는 나로서는 그가 이 사실을 알면 꽤 짜증을 낼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전쟁 관련 소묘만 해도 수백 시간을 소비한 작업들이었지만 우리에게는 그냥 재미있는 여흥에 불과하다.

사랑과 경건함 그리고 기진맥진한 몸과 마음을 표현한 그 소묘들을 다시 바라본다. 그리고 머리와 심장의 요구에 손으로 부응하려 애를 쓰며 하얀 종이 앞에 구부정한 몸으로 앉아 있는 노인을 상상한다. 미켈란젤로를 미켈란젤로로 만드는 건 그 다음에 그가 한 일이다. 습작을 해본 다음 그는 일어나서 그 스케치를 현실화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는 죽기 며칠 전까지도 말을 잘 듣지 않는 대리석을 망치와 끌로 두드리고 있었다.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내 손바닥 정도 되는 너비의 ‘바‘라고 부르는 수직 줄무늬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정도로 파도치는 것을 바라본다. 왼쪽과 오른쪽 가장자리는 짙은 청색 데님 천이고 대부분의 줄무늬는 보라색이다. 그리고 서로 가깝지만 닿지는 않게 놓여 있는 하얀 천으로 된 두 개의 줄이 중앙에서는조금 벗어나 있지만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은 <게으른 아가씨 바>라고 부른다. 나는 수평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상상을 해본다. 이렇게 보면 박음질 자국으로 구획이 지어진 일련의 재빠른 트랜지션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천천히 작품을 바라보면서 기다란 줄무늬를 따라여유 있게 시선을 옮기다가 깜짝 놀라고 만다. 다른 것들보다 색깔이 밝은 두 개의 줄

무늬가 광선 모양의 천사, 기쁘게 몸을 곧추세우고 있는 천사들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퀼트의 기하학적 패턴뿐만 아니라 그 불완전함에 감동한다. 살짝 헤매는 듯한 구불구불한 선, 복잡하지 않고 간결한 바느질 자국, 즉흥적으로 구성된 재료들. 거기에는 근면성과 영감을 비롯해서 예술의 위력 중 가장 희망을 주는 것들이 넘치도록 들어 있다.

앨라배마강을 상징하는 한편의 푸른 줄무늬는 진흙으로 된 강둑을 표현한 두 개의 붉은 줄무늬 사이를 흐르고 있다. 다른 한쪽에는 패턴이 있는 캘리코로 목화밭이 묘사되어 있다. 퀼트의 나머지 부분은 동심원처럼 늘어선 정사각형 블럭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지붕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하우스톱 패턴에서는 온갖 종류의 패턴과 색이 가능하지만 이 작품에서만큼은 글자 그대로 진짜 지붕들을 상징하고 있다.

큰 집 한 채와 작은 집 네 채를 위에서 내려다본 광경이다. 이 풍경을 더 멀리까지 보이도록 줌아웃할 수 있다면 말굽 모양을 그리며 극적으로 구부러진 강이 지스 벤드의 세 면을 감싸고 흐르면서 세상으로부터 이 지역을 고립시키는 지형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더 가까이 가서 페트웨이가 묘사한 집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지역의 역사를 더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가장 큰 집은 옛날 페트웨이 플랜테이션의 ‘큰 집‘이고, 다른 작은 집들은 노예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혼자 생각에 잠긴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처럼 세계적으로 장대한 곳에서 얻는 깨달음치고는 좀 우습긴 하지만, 바로 의미라는 것은 늘 지역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은 자신의 상황에 갇힌 사람들이 아름답고, 유용하고, 진실된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조각조각 노력을 이어 붙여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교훈까지 말이다.

미켈란젤로 시대의 피렌체, 심지어 미켈란젤로 시대의 로마마저 이런 면에서는 로레타 페트웨이가 살던 시절의 지스 벤드와 다르지 않다. 이제 더 이상 전성기 르네상스와 같은 개념을 빌어 생각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새로 만든 회반죽을 바르고, 거기에 그림을 그리고, 회반죽을 조금 더 바르고, 거기에 그림을 조금 더 그리는 한 사람을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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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유적•유물/경천사 십층석탑

1348년에는 경천사 십층석탑이 만들어지는데 탑의 규모가 매우 크고 모양도 독특하다. 원나라 장인이 만든 탑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원나라에서 티베트의 라마 불교가 유행해서 라마형 석탑 양식이 많이 깃들어 있었지만 목조 지붕 형식은 라마탑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경천사 십층석탑은 우리나라 최초로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화강암에 비해 돌이 무르기 때문에 좀 더 화려하고 정교한 제작이 가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랜 시간이흐르며 훼손되어 복원, 재조립 끝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의 길 말미에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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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와 내가 결혼을 한 지 정확히 5년이 지난 후, 그리고 나의 형이 떠난 지 거의 딱 5년이 지난 때에 나는 다시 침대 곁을 지키고 있다. 이번에는 산부인과 병동이다. 전과 마찬가지로 단조로운 분위기의 병실에는 정적이 흐른다. 간호사들이 타라의 상태를 확인하러 가끔 들르긴 하지만 특별히 걱정을 하거나 뭔가를 기대하는 것 같진 않다. 물론 우리는 기대로 가득하지만 막상 겪어보니 이런 상황은 영화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작은 병실 안에서 그야말로 중대하고 신비로우면서도 평범한 일이 일어나기를 기자리는 시간의 대부분은 그냥 앉아서 어리둥절하며 침묵 속에서 견뎌내는 기나긴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것도 전과 마찬가지다.

올리버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신생아는 품에 안기에도 연약한존재이고, 잘못하면 부러져버릴까 두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두텁고, 강력하고, 강건한 느낌을 주는 생명력으로 가득 찬 부대 자루, 수십억 개에 달하는 세포 더미였다. 톰이 그토록 찬양하던 경이롭고 엉망진창인 세포생물학이 떠오르고 더 나아가 생명 자체를 생각하게 한다. 자연은 단순함보다 대담하고 강한 것을 선호한다. 그런 것들은 아름답긴 하지만 항상 예술적이거나 명료하지는 않다. 경험상 내 삶도 그렇다.
이제 단순한 삶은 끝났다. 그러나 아기 덕분에 이제 내 삶도 더 아름답고 강건해지는 여정을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임금을 거의 받지 못한 3개월의 육아 휴가 동안 내 일터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 3층이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한 번에 담당하는 구역보다 작은 공간이었다. 고요하고 말끔한 전시실 대신 고물상 같은 방들이 내 일터가 되었다. 하지만 7만평이 넘는 메트에서보다 20평짜리 이곳에서 할 일이 훨씬 많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다. 지금까지는 사소한 것에 거의 신경 쓰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그 삶에서는 내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세상을 그냥 둘러보기만 하면 됐다. 그러니 부모노릇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수없이 많은 사소한 일을 해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가 받았을 충격을 상상해보라. 산더미 같은 빨래, 계속되는 병원 출입, 끝없이 반복해서 기저귀 가방을 쌌다 풀었다 해야 하는 일상. 나는 농부들이 느꼈을 법한 기분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노동이 너무 고단해서 그 결실을 음미할 여유조차 없는 느낌 말이다.

일과에 다시 익숙해지면서 내게 웃음이 나올 정도로 시간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한다. 팔짱을 끼고 주변을 둘러보고 그냥 자리에 서서 하고 싶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 내가 아는 모든 성인은 자신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주장하지만 이곳에서의 나는 바빠서는 안 된다. 긴 시간을 조용히 보내다가 가끔 "이봐요, 이거 원화 맞아요?" 같은 질문에 대답하고 어린아이가 그림 액자를 잡아당기거나 그 비슷한 일이 생기면 가끔 개입해야 한다. 그러나 정적을 음미할 시간은 충분하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한 시간이 정확히 한 시간으로 느껴질 때 그 시간이 얼마나긴 시간인지 깨닫는다. 집에서 올리버를 돌볼 때도 한가한 시간이 있긴 했지만, 그 시간과 이 빈 시간은 다르다. 전자는 소비하고, 쓰고, 낭비하고, 텔레비전을 보느라 사라지는 시간이어서 그냥 시간만 죽이는 게 아니라 몸도 해치울 수 있다. 후자는 옛날식으로 보내는 시간이라 여름날 포치에 앉아 바람이 부는 걸 바라보는 것 같은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경비원 근육이 약해졌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서 있는 건 끊임없이 연마하지 않으면 녹스는 기술이다. ‘서 있는 것‘이 실은 서 있고, 기대어 서 있고, 서성거리고, 스트레칭을 하고, 다 쓴 잉크 카트리지처럼 다리를 터는 것을 모두 포함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늦은 오후로 접어들 무렵이 되자 에너지는 탈탈 털리고 여기저기가 쑤셔왔지만, 아이를 돌볼 때 오는 미친 듯한 기진맥진의 상태가 아니라 기분 좋은 단순한 피로감이다.
‘그러니까 바로 이게 내 삶이군.‘ 나는 생각한다. 앞으로 록콘서트 무대 코앞의 객석만큼 떠들썩한 세계와 수도원처럼 고요한 세계 두 곳을 오가게 될 것이다.

감정이란 얼마나 변화무쌍한 것인지를 배우고 있다. 어린아이가 맑음과 폭풍우 사이를 얼마나 예상치 못하게 빠른 속도로 왔다갔다 할 수 있는지, 어른도 얼마나 그와 비슷한지를 깨우친다. 그래서 가령 고대 로마 전시관에 전시된 귀족들의 두상을 보면서 그 근엄한 가면에 드러나지 않는, 어쩌면 그들이 말도 안되게 웃기는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곤 한다.
다부진 인상의 카라칼라 황제가 떼를 쓰는 아이처럼, 어머니 말씀을 빌리자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뚜껑이 열리는‘ 장면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언짢았던 기분이 아무 이유 없이 다시 좋아지고 자신감이 넘치고 살아 있다는 것이 행복해지면서 찌푸렸던 눈썹이 풀어지는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다.

메트에서 일하기 시작한 후 첫 몇 달을 돌이켜보면 내가 한때 날이면 날마다 말없이 뭔가를 지켜보기만 하는 상태를 그토록 오래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아마 그것은 커다란 슬픔이 가진 힘을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날마다 수많은 밀고 당기기를 해야 하는 요즘 같아서는 그렇게 뭔가에 집중해서 사는 삶을 상상하기가 힘들다. 이제는 더 이상 처음 미술관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처럼 단순한 목표만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 살아나가야 할 삶이 있다.

완벽한 외양을 갖춘 완성품만으로는 예술에 대한 배움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작품들이 탄생하는 과정에 들어간 고통을 잊지 않아야 한다. 자기 자신이 무언가를 어떻게 만들어낼지 궁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창작물을 보는 데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사실 평생 처음으로 나도 뭔가를 만들어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엄청나게 무질서하고 즉흥적인 과정을 밟으면서 두 명의 작은 인간과 그들이 살아갔으면 하는 작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결코 완벽하지도, 완성할 수도 없는 프로젝트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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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장소/제주도

제주도는 고려 중기 때 편입됐고, 조선 시대 때 비로소 관리가 파견돼 전라도에 속한 지역으로 관할됐다. 위치상 한반도의 주류 문화에서 벗어난 지역이었던 만큼 독특한 문화유산이 많이 남겨져 있다. 일본 오키나와나 규슈 지역과 가깝기 때문에 이들 지역과의 문화 교류도 활발했다.

제주도는 다양한 신화, 특히 여성 신화가 풍성한 곳이다. 그중 설망대할망 이야기가 가장 유명한데, 할망이 경기도의 토사를 한 줌 손에 쥐고 바다에 뿌리니 제주도가 생겼다고 한다. 할망이 매우 컸기 때문에 한라산 꼭대기 백록담의 물로 머리를 감았다고도 하고 물장오리오름에 가서 지팡이로 이 산 옆구리를 두들겼더니 물이 난데없이 솟아나와 호수가 생겨 그곳에 몸을 담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제주도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계란을 풀어놓은 것처럼 퍼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마을도 산촌, 양촌, 해촌으로 나뉜다. 산쪽에 몰려 살면 산촌, 바다 쪽에 몰려 살면 해촌이고 그중 양촌은 가장 좋은 땅을 차지하고 농사짓는 지역을 의미한다. 양촌에는 양반들이 살았고 유교 문화의 영향이 강했다. 해촌에서는 물질을 하면서 살았고 잠녀라고 불렸던 해녀들이 이곳에서 경제를 주도했기 때문에 가난하고 천시되던 지역이었다. 토지가 없어도 생존이 가능하다는 특성 때문에 해촌에서는 독립적으로 생계를 꾸리는 여성들이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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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애도의 끝을 애도해야 하는 날들

프랭클린 씨 스타일 알지? 말투가 항상 지루하게 들려서 정말 공격적으로 말해도 괜찮은 거. 아무도 그건 못 배기지. 드디어 남자의 기세가 꺾였는데, 그가 전시실을 나서다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어. 자기 아들을 보고는 ‘작은사람들한테는 작은 힘이 어울리지... 인생이 그래."
기대했던 것만큼 사람들은 웃지 않는다. 이야기의 마지막이 무겁게 끝나자 사람들은 엄숙하게 고개를 젓고 "빌어먹을.."이라고 중얼거리며 이런 차원의 도덕적 부패에 대해 곱씹어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신발 바닥에 붙은 껌 같은 취급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 한 번씩 당신은 경비원 따위일 뿐이라는 걸 아주 확실하게 상기시켜주는 녀석들을 겪지 않고는 경비원으로 일할 수 없다. 기분이 괜찮을 때는 이런 건 모욕으로 간주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기분이 바닥일 때는 때때로 이 불량배들이 의도하는 것처럼 작고 힘이 없다고 느끼고 만다. 그래도, 적어도 이런 날에는 그들을 우리가 술집에서 늘어놓는 무용담에 등장하는 악당으로 만들 수는 있다.

나는 시끄럽고 눅눅한 바 안의 작은 친밀함의 보금자리인 그곳으로 가 친구들과 합류한다. 오랫동안 뿌리쳤지만, 나는 결국 혼자가 아닌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비슷한 결의 젊은 무리를 발견했다. 우리는 모두 서른 전후로 친구들에게 하는 잘난 척은 그만두고 서로에게 기대어 격려를 받기 시작하는 나이다. 어쩌면 어려운 나이이기도 하다. 어른이 되기 위한 견습기간이 끝나가고 진정한 의미의 성인기가 다가오고 있다. 다시 한번, 그리고 아마 이번에는 진짜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우리 넷 중 일부러 미술관 경비원이 된 괴짜는 나뿐이다.

밤이 깊어지고 취기가 오르면서 우리는 덜 어리석고, 더 진지해지며, 덜 조심스럽고, 더 연약해진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우리끼리는 훌륭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오늘과 그 후의 수많은 일요일에 벌어진 술자리에서 우리는 부모님의 죽음이나 건강 같은 주제들로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우리는 문예지에 루시의 시가 실린 것을 기념하며 축배를 들 것이다. 우리는 블레이크가 오픈 마이크의 밤 공연에 출연하기 전에 미리 흥에 취할 것이다. 사이먼과 루시는 바로 이런 자리에서 사랑에 빠질 것이고, 그들은 친구 사이로 돌아간 후에도 여전히 서로를 사랑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이먼은 자기가 한 여자를 만났고 그녀와 함께 유타로 이사할 거라는 소식을 전할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결국 우체부 일자리를 찾고 개 몇 마리와 함께 산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게 진짜 인생이다. 프라이버시라고는 없는 이 왁자지껄한 바에서 우리는 진짜 인생을 논하고 있다.

이런 다락방 느낌이 나는 곳에서라면 물건들의 수집 과정이 궁금해지는 건 당연지사다. 어느 날 나는 메트가 처음으로 취득한 그림 몇 점을 발견했다. 그림들의 취득 번호, 작품의 캡션 라벨 하단에 나오는 일련 번호 같은 것을 보고 눈치를 챈 것이다.
취득 번호는 대개 ‘2008.11.413‘처럼 길지만, 내가 발견한 것은743‘으로 이건 메트가 영구적으로 터를 잡기 6년 전인 1874년에 컬렉션의 일부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림들은 미술관의 설립자중 한 명인 존 프레더릭 켄셋ohn Frederick Kenset이 그린 사랑스럽고 절제된 느낌의 풍경화다. 풍경화가가 아직 제대로 된 직업이아니었던 초창기 미국에서 자란 그는 동판공 훈련을 받아 지폐를 찍어내는 판을 새기며 생계를 이어갔다. 켄셋의 일생 동안 뉴욕은 급속도로 성장했고 그는 허드슨 리버 스쿨의 예술가들과 함께하며 미국 최초의 위대한 미술관을 세우기 위한 노력에 동참했다.

하지만 시작은 그렇게 위대하지 않았다. 루브르 같은 박물관은 왕실 소장품을 기반으로 설립되었지만 메트는 일반 시민들, 즉 첫 번째 이사회의 구성원인 상인, 금융가, 개혁운동가, 예술가들의 수집품을 기반으로 삼아야 했다. 상당 기간 동안 메트는 전시할 가치가 큰 유물들을 소장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계획보다는 우연에 더 가까운, 기증이나 유증과 같은 뜻밖의 횡재에 의존했다.

어쨌든 이 전시관을 사랑할 이유는 충분하다. 운 좋게도 이곳은 바로 이웃인 아메리카 전시관의 컬렉션에서 빠진 부분들을 메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악기 중 하나는 나이아가라 폭포근처에서 만들어진 이로쿼이troquisite 부족의 늑대거북 등딱지 셰이커다. 손잡이 부분에 달린 뼈가 드러난 머리와 야구 글러브 정도 크기의 등딱지가 훌륭하다. 그러나 이 셰이커에서 중요한 것은 악기 자체의 특징보다도, 신성한 의식을 행하는 동안 무용수와 하나가 되어 때로는 점점 빠르게, 때로는 점점 느리게, 때로는 시간 자체를 뒤틀기도 하면서 박자를 조절하던 악기의 기능이다. 나에게 그 악기는 장난스러운 동시에 극도로 진지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실제로는 아기들의 딸랑이와 다를 바 없이 체리씨로 속을 채운 것일 뿐이지만, 그런 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기타도 진동하는 줄이 달린 나무 상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악기에는 유명한 라틴어 경구인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가 잘 어울리는 듯하다. 악기의 제작자가 거북의 부드러운 살을 잘라내고 파내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기묘하게도 이 두 가지 측면은 서로 연관된 것처럼 느껴진다. 당신의 죽음이 곧 도착할 것이다. 모든 것을 잊고 맘껏 흔들어라.

이 일을 거의 5년 동안 하다 보니 몇 가지 습관이 생겼다. 친한친구들이 생겼고, 내가 일하기 좋아하는 전시실과 별로 선호하지 않는 전시실을 구별하게 됐다. "인상파 그림은 왜 항상 그렇게 흐릿해 보이는 거 같아?"처럼 익숙한 대화를 엿듣게 되면 언제, 어떻게 내 의견을 말해야 하는지 안다. 달리 말하면 나는 이제 베테랑이 됐고이 일이 익숙하고 편안해졌다. 나에게 맞는 리듬에 따라 움직이며 그것을 유지하는 데는 큰 노력이 들지 않는다. 대부분의 날에 내가 맡은 일은 그저... 여느 직장의 일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이 상태가 나를 그리움과 후회로 가득 채운다.

이제 이런 순간들은 예전만큼 자주 오지 않고 그 사실을 인정하며 슬퍼진다. 위대한 그림은 경외감, 사랑 그리고 고통 같은 잠들어 있던 감정들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메자닌의 골동품들에 대한 호기심과는 다르다. 이상하게도 나는 내 격렬한 애도의 끝을 애도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내 삶의 중심에 구멍을 냈던 상실감보다 그 구멍을 메운 잡다한 걱정거리들을 더 많이 생각한다. 아마도 그게 옳고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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