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에는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이라는 수식이 자주 붙는다. ‘맑은 바람에 밝은 달’이라는 이 청명한 이미지는 산은 아름답고 물은 맑다는 산자수명(山紫水明)과 함께 어우러진다. 충청북도의 상징적인 대처(大處)는 청주와 충주이고, 유명한 명산대찰은 보은의 속리산 법주사이고, 대표적인 서원(書院)은 괴산의 화양동구곡에 있는 화양서원이지만, 충북이 내세우는 청풍명월의 고장은 제천과 단양이다.

청풍이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유서 깊은 고을로서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이 한벽루가 있기 때문이고 내가 사군산수 답사의 첫 번째 고장으로 청풍을 찾은 것도 이 한벽루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벽루 하나만을 보기 위해 청풍에 온다 해도 수고로움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누정을 수리하는 것은 한 고을의 수령 된 자의 마지막 일거리〔末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잘되고 못됨은 실로 다스림, 즉 세도(世道)와 관계가 깊은 것이다. 세도가 일어나고 기욺이 있으매 민생의 편안함과 곤궁함이 같지 않고 누정의 잘되고 못됨이 이에 따르니, 하나의 누정이 제대로 세워졌는가 쓰러져가는가를 보면 그 고을이 편안한가 곤궁한가를 알 수 있고 한 고을의 상태를 보면 세도가 일어나는가 기우는가를 알 수 있을지니 어찌 서로 관계됨이 깊지 않겠는가.

우리나라는 정자(亭子)의 나라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자가 있어 그저 일반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유럽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의 정자 문화와는 완연히 다르다.

한국의 산천은 부드러운 곡선의 산자락이나 유유히 흘러가는 강변 한쪽에 정자가 하나 있음으로 해서 문화적 가치가 살아난다며 이처럼 자연과 친숙하게 어울리는 문화적 경관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의 표정이라고 했다.

정자는 누마루가 있는 열린 공간으로 2층이면 누각, 단층이면 정자라 불리며 이를 합쳐 누정(樓亭)이라 하는데 흔히 정자로 통한다. 정자는 사찰·서원·저택·마을마다 세워졌지만 그중에서도 관아에서 고을의 랜드마크로 세운 것이 규모도 제법 당당하고 생기기도 잘생겼다. 정자는 생김새보다 자리앉음새가 중요하다. 그래서 강변에 세운 관아의 정자에 명작이 많다.

우리나라 정자의 미학은 이웃 나라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과 비교할 때 확연히 드러난다. 중국의 정자는 유럽의 성채처럼 위풍당당하여 대단히 권위적이고, 일본의 정자는 정원의 다실로서 건축적 장식성이 강한 데에 반하여 한국의 정자는 삶과 유리되지 않은 생활 속의 공간으로 세워졌다. 그 친숙함이야말로 우리나라 정자의 미학이자 한국미의 특질이기도 하다.

일찍이 일본인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한·중·일 3국의 미술적 특성을 비교하면서 중국미술은 형태미가 강하고, 일본미술은 색채 감각이 뛰어나며, 한국미술은 선이 아름답다며 중국 도자기는 권위적이고, 일본 도자기는 명랑하고, 한국 도자기는 친숙감이 감도는 것이 특징이라고 했다. 그래서 중국 도자기는 멀리서 감상하고 싶어지고, 일본 도자기는 곁에 놓고 사용하고 싶어지는데 한국 도자기는 손으로 어루만져보고 싶어진다고 했다. 그런 친숙감이 우리나라 정자에도 그대로 어려 있다.

권위적이지도 않고, 뽐내지도 않는 평범한 형식 속에 깊은 정감이 서려 있는 친숙감과 생활 속에서 은은히 일어나는 미감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한국미의 특질이다. 이런 우리 도자기의 미적 특질은 우리나라 정자 건축에도 그대로 대입된다. 확실히 정자는 한국의 이미지를 대표할 만한 우리 문화의 자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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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 인물/정조

정조(1752년~1800년)는 조선의 22대 군주로, 1776년부터 1800년까지 재위했다. 할아버지 영조와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을 어린 시절 경험했고, 붕당 간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영조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적극적인 지지로 국왕이 될 수 있었다.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독서와 활쏘기에 힘썼던 것으로 유명하다. 대단한 독서가였고 사신을 중국에 파견할 때면 큰돈을 들여 중요한 서적을 다량으로 구매하게 했다.
그는 조선 후기의 어떤 군주보다 개혁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펼쳤던 인물이다. 초계문신 제도와 규장각 제도로 개혁 인사들을 길렀다. 초계문신 제도는 젊은 관료들의 재교육 과정, 규장각은 원래 왕실 도서관 정도의 기능이었으나 이곳에서 정조와 뜻을 같이하는 여러 개혁 인사들과 교류하며 정력적인 활동을 벌여나갔다.
규장각 검서관에 서얼 출신인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을 등용하여 서얼들에게도 일정 정도 기회를 줬다.

적극적인 탕평 정책을 통해 붕당 간 대화를 모색했고 신해통정책을 통해 무허가 상인으로 불리던 난전 상인들의 자유로운 상행위를 허락했다. 또 문체반정을 통해 천주교를 받아들인 남인에 대한 노론의 공세를 막아내기도 했다. 천주교에대한 정책은 대부분 온건하게 처리했지만 제사를 부정하는 등 유교 질서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면 엄격하게 대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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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느껴질 때

내가 말한다. 경제적으로 실패하였다면 저 아래 낮은 곳으로 내려가라. 체면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그 체면에 "흠집을 내라scratch". 출발점을 저 낮은 곳에 다시 "그어라scratch". 당신이 놓치려고 하지 않는 생활수준이라는 것을 "지워 버리고scratch" 새로운 "출발점scratch"에서, "무에서from scratch", "근근이 살아가면서scratch along" "돈을 모아라scratch up". 그러면 "돈scratch"이 쌓이게 된다. 이것이 실패로부터 탈출하는 비결이다. 스크래치하라!

-실패하면 제로 점으로 내려가라 中에서

삶이 그대를 속이면 분노하라

서진규. 그녀는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읽어라―에서 ‘이만큼 성공하기까지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반항심과 복수심이다.’라고 쓰고 있다.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벌레처럼 나는 먹고 싸고 먹고 싸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었으며 내일은 다시 어제였다. 조그마한 차이도 없었다. 나는 내가 혐오스러웠다. 내가 분노하여야 할 대상은 세상이 아니었다. 나 자신이었다. 나는 혐오스러운 나의 삶이 너무나도 한심하였고 끝내는 저주스러웠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분노하였다. 내가 나를 죽이고 싶었던 것도 어쩌면 그런 혐오감과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절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나는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나는 5월의 찬란한 햇살 밑에서 향긋한 꽃 내음을 그대로 들이마시며 어깨를 펴고 살고 싶었다.

인생은 자전거와 같다. 뒷바퀴를 돌리는 것은 당신의 발이지만 앞바퀴를 돌려 방향을 잡는 것은 당신의 손이며 눈이고 의지이며 정신이다. 당신의 발이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움직여는 주지만 정작 당신의 손은 호주머니 속에 깊이 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정작 당신의 눈은 당신 앞에 놓인 길을 바라보지 않고 옆에서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오토바이들과 스포츠카만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볼지도 모른다. 때문에 비록 열심히 페달을 밟고는 있지만 당신이 탄 자전거는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그렇게 삶에 질질 끌려다니며 제자리를 맴도는 사람들이여. 이제는 그 삶을 정면에서 바라보아라. 비겁하게 외면하지 말라. 그 삶이 자랑스러운가? 이제는 그 삶에 대해 분노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파충류와 포유류의 차이 중 하나는 파충류는 본질적으로 화를 내거나 기쁨을 내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뇌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변연계가 퇴화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이 분노할 대상임에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이미 당신의 뇌는 썩어 버린 것이다. 차라리 강물에 빠져 죽어 버려라. 하지만 이제라도 삶이 당신을 속인다고 생각되면 그 삶을 던져 버려라. 내동댕이쳐라. 삶은 한 번뿐이다. 삶에 비굴하게 질질 끌려가지 마라. 명심해라. 당신이 분노하여야 할 대상은 이 세상이 아니다. 당신의 현재 삶에 먼저 슬퍼하고 분노하면서 ‘No!’라고 말하라. Say No! 그리고 당신의 삶을 스스로 끌고 나가라. 당신이 주인이다.

현재의 삶이 절망스럽고 괴롭고 암흑에 싸여 있는 것같이 보이는가? 그렇다면 이제 분노하라. 분노를 느끼는 사람만이 닫힌 문을 세게 쾅쾅쾅 두드릴 수 있다. 용수철처럼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당신의 삶을 이 거친 세상에서 우뚝 홀로 세울 수 있도록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피 튀기듯 노력하라. 그리고 이제는 자전거 손잡이를 제대로 잡고 정면을 바라보고 페달을 밟아라. 그렇게 하기 시작할 때 당신은 당신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며 그때 비로소 돈이 당신의 노예가 되어 당신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인생역전은 당신 스스로 현재의 삶에 분노하여 그 삶을 뒤집어 버릴 때 이루어지는 것이지 ‘수백억짜리 복권에 이번에는 내가 당첨될지도 모른다.’는 달콤한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돈독이 올라야 부자가 되는 줄 아는가? 투자 기법을 몰라서 부자가 못 되는 줄 아는가? 절대 아니다. 일확천금의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꿈 깨라. 쇠고랑을 찰 기회만 있을 뿐이다. 인터넷에서 광고만 보아도 돈을 벌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여. 메일만 보내면 수억 원을 벌 수 있다고 떠드는 자들이여. 편안하게 빨리 돈 벌고 싶어서 애를 태우는 자들이여. 평생 가난의 괴로운 숯불이 이마 위에 올려지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나는 그대들이 한시라도 빨리 그 허황된 몽상에서 깨어나기를 바란다. 피와 땀과 눈물과 시간 없이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가.

"굳은 것이라고 다 불변의 것"은 아니며 "출렁인다고 해서 다 부질없는 것"도 아님을 깨닫고 "굳은 땅에서 패이고 갈라진 것들"과 "슬픔으로 허물어진 상처들"로 가득 찬 "잘못 살아온 세월"을 지우고 "다시 출발하고 싶은 세월"을 시작하여라.
종종 자기혐오에 빠져 죽고 싶다고 말하는 독자 메일을 받는다. 고통 없이 죽는 방법을 물어보는 독자들도 있다. 이런 독자들에게는 언제나 이렇게 답장하곤 하였다: "너 자신을 죽이고 싶다면 그 죽이고 싶은 인간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어 제삼자 입장에서 살펴보아라. 불쌍하고 가련한 모습이 아마 하나둘이 아닐 것이다. 길거리에서 그런 사람을 만났다고 치자.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칼로 찔러 죽이겠냐? 아니면 이런 사람도 있구나, 불쌍하구나, 생각하면서 뭔가 이끌어 주고 도와주고 싶어질까?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바로 그 마음을 너 자신에게 가져라. 너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보살펴라."
"난 내가 혐오하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어요. 그래서 수면제를 먹었죠. 하지만 내 안에 내가 사랑할 수도 있는 다른 베로니카가 존재한다는 걸 모르고 있었어요."―파울로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 정신병원에 갇힌 베로니카가 간호사에게 하는 말이다. 나는 믿는다. 누구에게나 그 내면에는 그 육체의 주인이 사랑할 수도 있는 그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이다. 당신 자신을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조금씩 바꿔 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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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는 휴식처이자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다. 한가할 때 홀로 거기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마음을 정리해보기도 하고, 때로는 여럿이 오붓하게 모여 정서를 교감하고 흥을 돋우던 장소다.

마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유행가를 부르듯이 그들의 시작(詩作)은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옛 정자는 문학의 산실이기도 했다. 이것이 곧 우리 정자 문화의 내용이다.
이러한 정자를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사항은 말할 것도 없이 위치 설정이었다. 마을 어귀 사람들이 편안히 모일 수 있는 한쪽 켠, 전망이 좋은 언덕, 강변의 한쪽…… 우리가 지나가다 잠시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곳에는 어김없이 정자가 세워져 있다.

정원이 일반적으로 도심 속의 주택에서 인위적인 조경 작업을 통하여 동산〔園〕의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면, 원림은 교외?옛날에는 성 밖〔城外〕?에서 동산〔園〕과 숲〔林〕의 자연 상태를 그대로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집칸과 정자를 배치한 것이다. 그러니까 정원과 원림에서 자연과 인공의 관계는 정반대다. 우리가 찾아갈 소쇄원과 명옥헌은 정원이 아닌 원림이다.

인간은 사물을 통하여 언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반대로 언어를 통하여 사물을 인식한다. 그리하여 어휘력은 인간 정신의 고양과 정서의 함양에 크게 기여한다. 이뿐만 아니라 풍부한 어휘력은 사물에 대한 관찰과 인식이 남다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양산보가 원림의 이름을 소쇄원이라 하고 사랑채와 서재가 붙은 집을 ‘제월당(霽月堂)’, 계곡 가까이 세운 누정을 ‘광풍각(光風閣)’이라고 한 것은, 송나라 때 명필인 황정견이 주무숙의 인물됨을 "흉회쇄락 여광풍제월(胸懷灑落如光風霽月)," 뜻을 풀자면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밝은 날의 달빛과도 같네"라고 한 데에서 따왔다.
그리고 「처사공실기」에는, 양산보가 어렸을 때 이곳 계곡에서 놀다가 물오리가 헤엄치는 대로 따라 올라가게 되었는데 지금 소쇄원 자리에 이르자 작은 폭포와 못을 이루며 계곡이 깊어지고 주위의 풍광이 너무도 수려하여 거기에서 미역도 감고 이리저리 뛰놀며 언젠가는 여기에 와서 살 뜻을 세웠다고 전한다.

소쇄원 원림은 결국 자연의 풍치를 그대로 살리면서 곳곳에 인공을 가하여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 공간을 창출한 점에 그 미덕이 있다.

소쇄원에 처음 가보는 사람들은 우선 길이가 50미터나 되는 기와 지붕을 얹은 긴 흙돌담의 아이디어에 놀라게 된다. 가지런하게 잘 쌓은 이 흙돌담은 소쇄원과 지석마을을 갈라놓는 경계 구실을 하고 있지만, 안에서 바라볼 때는 소쇄원을 더없이 아늑한 공간으로 감싸주는 기능을 한다. 본래 자연 그대로의 상태라는 것은 두려움 내지 무서움을 유발한다. 그러나 인간의 손길이 적절히 닿아 있을 때 우리의 정서는 안정을 찾는다. 그러니까 담장은 외부 공간과의 차단, 온화한 내부 공간의 조성, 자연에 가한 인간의 손길이라는 3중 효과를 갖고 있다.

그런데 담장에는 필연적으로 폐쇄감이 있기 마련이니 자연과 인공의 조화로움을 파괴할 소지가 거기에 도사리고 있다. 그 문제를 소쇄원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해결하였다. 하나는 대문이 없는 개방 공간, 이른바 오픈 스페이스로 풀어버린 것이다. 또 하나는, ㄱ자로 둘러친 담장의 북쪽 편은 계곡을 가로지르게 되어 있는데 마치 돌다리를 놓듯이 받침돌이 담장을 고이고 있어서 담장 밑으로 냇물이 자연 그대로 흐르게 해놓은 것이다. 절묘한 개방성이며, 자연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인공의 겸손이 바로 이런 곳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나는 이것을 조선시대 사대부 문화의 위대한 강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대부는 군자로서 살아가는 길을 끊임없이 반성하면서 삶을 영위하는 확고한 도덕률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이 지향한 바는 전문인·기능인이 아니라 총체적 지식인으로서 문사철(文史哲)을 겸비한 사람이었으며, 그리하여 그 지식으로 세상을 경륜하고, 그 안목으로 시를 짓고 거문고를 뜯고 글씨를 쓰고 집을 짓고 사랑방을 디자인하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전쟁조차도 전문성보다는 총체성에 입각하여 대처했다. 우리 시대의 전문인들이 잃어버린 바로 그 총체성을 우리는 이곳 소쇄원에서 배워야 마땅할 것이다.

명옥헌의 호수와 배롱나무 | 고목이 된 배롱나무가 늘어선 명옥헌은 한여름 꽃이 필 때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한다.

명옥헌은 가운데 섬이 있는 네모난 연못을 파고 그 위쪽에 정자와 서재를 겸한 건물을 지은 간단한 구성이지만 연못 주위에 소나무와 배롱나무를 장엄하고 넓게 심어놓고 언덕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시야를 끌어들임으로써 더없이 시원한 공간을 창출한 뛰어난 조경 설계를 보여주는 원림이다.

한국의 정원미는 중국 정원처럼 인공에 의하여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 정원처럼 자연을 주택의 마당에 끌어들여서 주인 행세를 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 정원의 이상은 소박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2021년 9월 2일, 문화재청은 명승으로 지정된 별서정원 22개소 중 11개소 정원의 만든 이와 소유자, 변화과정 등을 고증한 결과를 발표하며 소쇄원의 ‘소쇄(瀟灑)’라는 이름이 ‘맑고 깨끗하다’라는 뜻으로 송순이 지어준 이름임을 밝혔다. 이는 양산보와 교유했던 하서 김인후의 『하서전집(河西全集)』에서 "소쇄원의 이름을 하서가 지었다고 하기에 송신평(宋新平, 송순)에게서 나온 것임을 밝힌다"라는 새로이 발견된 구절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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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 사건/강제 징용

1937년 전개된 중일전쟁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 정책의 모든 것을 바꿨다. 전면전이 발발했기 때문에 국가총동원령을 발동했고 물자 수탈, 인력 수탈 등 각종 강제동원 정책을 펼쳤다.
강제 징용은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한 수단이었는데, 해외에 끌려가기도했지만 국내에서 진행된 경우도 많았다. 전투복을 꿰매거나 각종 노무에 동원된인력을 국내 약 550만 명, 해외 약 20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해외에 끌려가기 전에는 부산 일대에 머물면서 훈련을 받았는데 여기서부터 구타를 통한 길들이기가 시작됐다. 노동은 극도로 고됐고 식사와 거주 환경 등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사고 위험이 높은 곳일수록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을 감당했고 유사시에는 전투를 강요당하기도 했다. 목총을 들고 미끼가 되거나 수류탄을 짊어지고 전차에 뛰어들기를 강요하는 등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방직후에는 일본인들의 분풀이 표적이 돼 학살을 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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