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

Via stulti recta in oculis ejus;
비아 스툴티 렉타 인 오쿨리스 에유스;
qui autem sapiens est audit consilia.
퀴 아우템 사피엔스 에스트 아우디트 콘실리아.

우리에게는 책 말고도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며 가르침을 청할 선생이 필요합니다. 위대한 선생은 엄청난 학위와 스펙으로 무장한 사람이 아니라 나의 가치와 가능성을 열린 마음으로 정확히 읽어주는 이들이었습니다. 원석도 못 돼서 그저 흙속에 파묻혀 있던 정체불명의 나라는 사람을 원석의 형태만이라도 갖추게 해준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선생님을 만나 주고받은 대화를 떠올려보면 저도 모르게 "제가요?"라는 말을 제일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이 너는 이러이러한 가능성이 있는 아이라고 했을 때, 그 첫 반응은 언제나 "제가요?"였습니다. 그 말이 도통 믿기지 않았습니다.

너, 뭐가 그렇게 슬프냐?

Quid es tam tristis?
퀴드 에스 탐 트리스티스?

너, 뭐가 그렇게 슬퍼?
너, 뭐가 그렇게 힘들어?

이런 질문을 마주할 때, 저는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나 이래서 슬퍼’ ‘나 이래서 힘들어’라고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나 숨이 꽉 막힐 듯한 애잔한 슬픔만이 밀려왔습니다.
‘아! 나에게도 의지할 가족이 있다면, 마음놓고 말할 친구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숨을 곳도, 숨겨줄 사람도 없는 그 시절 나는 사막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세상엔 합당한 이유도 없이 나를 죽도록 방해하고 적의를 표하는 인간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 이유도 대가도 없이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선의 속에서 나는 그동안 쌓아온 수많은 벽을 허물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높은 담을 쌓아도 운명 같은 은인들은 그 벽 너머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희망이고 구원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왜 그때 가진 것 없이 웅크리고 있던 내게 선의를 베풀었을까. 이따금 생각해보지만 사실 저는 그 이유를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내게 ‘너, 뭐가 그렇게 슬프니?’ ‘너, 뭐가 그렇게 힘드니?’라고 캐묻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저 언제 도착했는지 모를 선물처럼 다가와 바위처럼 저를 짓뭉개고 있던 슬픔과 힘겨움을 조용히 들어올려줄 뿐이었습니다.

어리석은 이들은 운명을
두려워하나 지혜로운 이들은
운명을 가지고 다닌다.

Stulti timent fortunam,
스툴티 티멘트 포르투남,
sapientes ferunt.
사피엔테스 페룬트.

청년 시절 가까스로 제 마음을 추스르며 다짐한 것은, 될 수 있으면 나의 배경에 대해서 구구절절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운명은 두려워하거나 감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지고 가기 위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하는 순간과 떳떳이 밝혀야 하는 결정적 순간이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 운명은 사는 동안 내내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수치심도 허세도 없이.
허튼 곳에 흘리지도 않고, 괜스레 남몰래 꽁꽁 묻어두지도 않으면서.

인생에서 운명처럼 다가온 은인들은 갑자기 저절로 나타난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은인과의 인연은 닥쳐오는 것을 견뎌내고 고난 속에서도 무언가를 해낸 사람에게 오는 선물입니다. 올바르게 처신한 사람에게만 다가오는, 아니 스스로 간절히 불러낸 선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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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 유적•유물/백자

‘고려청자 조선백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조선시대 내내 다양한 백자가 제작됐다. <용재총화>에는 ‘세종 때에는 백자, 세조 때에는 청화백자를 어기로 사용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 전기에는 문양이 없는 순수백자와 청색 유약으로 무늬를 낸 청화백자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전반적인 경제 위기를 겪던 조선에서는 이전과 같은 수준으로 백자를 생산할 수 없었다. 이때 나타난 백자가 ‘철화백자‘다.
청색 안료에 비해 철화 안료는 값싸고 구하기 쉬웠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생산된다. 하지만 전란의 후유증이 회복되면서 다시 각종 백자가 만들어진다. 상대적으로 현재 남아 있는 철화백자의 수가 적기 때문에 최근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훨씬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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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 장소/남산

경복궁을 마주보고 있는 산으로, 목멱산으로도 불렸다. 현재는 중구와 용산구의 경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난 100년간 남산은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모두 감당한 슬픈 공간이었다. 이곳에는 총독부의 전신인 통감부 건물이 세워졌고,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그를 기리는 박문사(오늘날 신라호텔 자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925년에는 조선 신궁이 들어섰다. 일본 신화의 시조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을 주신의로 삼은 최고급 신사였다. 해방 후에는 이곳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졌다. 하지만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로 쫓겨나자 시민들이 직접철거했다.
과거 독재 정권 시절, 남산은 이름만으로도 두려움을 자아내던 곳이었다. 중앙정보부 건물이 이곳에 있었는데, 지금의 서울 유스호스텔, 서울종합방제센터, 서울시청 남산 별관 등이 모두 관련 건물들이다. 1964년에는 한국반공연맹 자유터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지금은 한국자유총연맹 본부가 들어서 있다. 남영동대공분실을 설계한 김수근이 지은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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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가난한 집 중고등학교 학생이라면 일단은 코피 터지도록 공부해라. 돈이 없어 과외를 못 받고 학원을 못 다닌다고 서러워하지 말라. 교육 방송이나 인터넷 과외에 관심을 가져라.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으면 선생님을 붙들고 늘어져라. 집안이 제아무리 콩가루 집안이라고 해도 신경 쓰지 마라. 부모가 이혼을 했건, 한쪽에서 소주병이 난무하건, 한쪽에서 통곡 소리만 들리건 간에 귀를 막고 이를 악물고 공부만 해라. 엉엉 울고 싶은 상황이라면 울어라. 하지만 5분 이상 울지 말고 삼켜 버리고 하늘을 향해 ‘으악!’ 크게 한 번 외치고 다시 공부해라. 친구들이 무엇을 갖고 있건 간에 그것을 부러워하지 말라. 휴대폰이 없다고 해서 우울해하지 말고 그것이 없음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라. 돈이 없어서 누군가로부터 괄시와 모멸을 당했다면 그것을 잊지 말아라. 그리고 네가 받은 모멸감과 네가 흘린 눈물로 날카로운 비수를 만들어 마음속에 ‘나, 죽어도 죽어도 이날을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고 진하게 난도질하고 다시 공부해라.
집안이 어려워서 학비라도 벌겠다는 생각에 아르바이트하겠다고 깝죽대지 말고 그냥 죽어라고 공부만 해라. 공부는 궁극적으로 엉덩이 무거운 사람이 이기는 게임임을 명심해라. 그리고 최고의 학교에 들어가거나 최고의 장학금을 반드시 타라. 그게 아르바이트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짭짤한 좋은 돈벌이라는 것을 기억해라. 이성 교제? 개소리하지 말고 시간을 아깝게 여기고 바보처럼 공부만 해라. 명심해라. 이 사회는 학벌 사회이고 이 학벌 사회에서 출세하는 가장 손쉬운 길은 일단은 최고의 학교를 나오는 것이다. 나를 믿어라. 일단은 공부하는 것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생존 방식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렇게 공부를 1~2년 해도 도저히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면 너희는 공부하고는 안 맞는다. 그러나 학교를 그만두지는 말아라. 형편이 허락하는 데까지는 다니고 학교 공부 대신 닥치는 대로 일하는 방법과 장사나 사업에 대한 책을 읽어라. 아르바이트도

나도 소설 속의 그 부자 아버지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살펴볼 것을 권유한다. 내가 부자가 된 것은 부자들에 대한 정보도 없었던 시절에 부자들을 따라 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따라 하지 않으려고 기를 썼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백만장자들의 특성만 배우려고 하는가. 가난한 자들에게도 공통적 특성이 있다. 그 특성들은 ‘가난이 세습되는 이유’에서 설명하였듯이 부모로부터 주로 영향을 받게 되지만 부모와는 상관없이 사회에서 보유하게 되는 경우도 많은 듯하다.
첫째, 돈 받는 것 이상으로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둘째, 아무 일이나 하려고 하지 않는다.

셋째, 자신이 받았던 돈의 액수 이하로는 일하려고 하지 않는다.

넷째,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다섯째, 운명론을 받아들이고 사주팔자를 신봉한다.

여섯째, 세상을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쉽게 흥분한다

일곱째, 경험자의 이야기보다는 자기 판단을 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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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도 때로 자식을 타인으로 봐야 할 필요가 있지만, 자식 역시 자신의 부모를 타인으로서 정중하게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엄마’가 아니라 ‘어느 중년 혹은 노년의 여성’으로 바라본다면 측은지심을 느낄 것입니다.
부디 내가 가장 약하고 가난한 시절에도 다만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내 가족에게 약자의 패악을 부리지 않기를.

로마인들은 ‘말하다’라는 뜻의 동사 ‘for(포르)’의 과거분사 ‘fatum(파툼, ‘말하여지다’라는 뜻)’을 명사화하여 ‘운명’이란 단어로 사용했고, 여기서 바로 ‘운명’이라는 뜻의 영단어 ‘fate’가 유래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운명이란 신들이 천명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운명을 말할 때 ‘fate’보다는 ‘destiny(영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destiny는 ‘정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동사 ‘destino(데스티노)’에서 유래했는데, 무의식 가운데 운명은 정해진 것, 그래서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깔린 듯합니다. 혹시 오늘날 전복시키기 힘들어진 굳건한 계층사다리로 인해, 운명은 인간의 힘으로 돌릴 수 없다고 여기게 된 사람들의 열패감이 말에도 영향을 끼친 것일까요.
반면 그리스인들은 ‘운명’을 자신에게 할당된 ‘부분’으로 이해했습니다. 인간은 ‘부분’을 부여받으면서 태어나고, 바로 이 ‘부분’이 한 인간의 존재를 특징짓게 될 일련의 사건들을 결정지을뿐더러 죽음의 의미와 순간까지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빈 부분, 부재, 텅 빈 것’도 삶의 ‘부분’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없는 것’ ‘없는 부분’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평등합니다.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

Qui maledixerit patri suo vel matri,
퀴 말레디세리트 파트리 수오 벨 마트리,
morte moriatur.
모르테 모리아투르.

부모님을 생각하면 복잡하고 묘한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성장기에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던 그분들이 나이들수록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부모님이 달라졌다기보다는, 내가 나이들어가면서 철도 들어 어른의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이 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날은 문득 나의 부모가 그 험난한 세월 동안 부부의 연을 놓지 않고 끝까지 살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나의 부모를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 여긴다면 나 또한 ‘별 볼 일 없는 사람’의 소생에 지나지 않는가! 내가 타인 앞에서 내 부모님을 규정하는 만큼, 나는 꼭 그만큼의 인간, 그 정도의 아들이 되는 셈이지요.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깎아내리고 자학함으로써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모는 사형과 마찬가지이지요.

빨리 따라오는 사람들하고만
길을 걸어가야겠습니까?
더 늦게 오는 사람들을
버려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Sed numquid cum celerioribus
세드 눔퀴드 쿰 첼레리오리부스
tantum ambulamus viam?
탄툼 암불라무스 비암?
Et qui tardius ambulant,
에트 퀴 타르디우스 암불란트,
non sunt relinquendi.
논 순트 렐린쿠엔디.

빨리 따라오는 학생들만 데리고 가려는 선생, 자신에게 경제적 정신적 지지를 수월하게 해주는 부모가 되어주지 못한다고 제 부모를 욕하는 자식, 이들은 모두 제 발등에 도끼를 찍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더디 따라오는 학생이나 뒷받침을 잘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부모들마저 존중하고 사랑하는 성숙한 인간이 되지 않으면, 자신과 연결된 그들의 결핍과 아픔을 모른 척 외면해버리고 나면, 그것은 평생의 상처와 얼룩이 되어 당신을 영영 따라다닐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날을 눈물과 복받치는 감정으로 보낸 어느 날, 머리가 아주 차가워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가 무엇이 될지, 어떠한 사람이 될지는 모르지만 내 안에 들끓고 있는 그 뜨거운 마음을 믿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도 나란 존재가 이 세상에 버려지듯 던져졌다가 사라지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때 나는 스스로를 소중히 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내가 나를 먼저 이해하고 나의 소중함을 받아들이자, 내 가장 가까운 이웃인 부모님도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식된 자로서 부모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 바라고 기대하기보다 먼저 가져야 할 마음은 부모를 향한 연민이었습니다. 처음 부모가 되어서 많은 것이 서툴고 힘겨웠을 텐데 부모 역할을 하시느라 수고하셨다고, 살아주셔서 감사하다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건네는 연민 말이지요. 부모도 자식도 서로를 선택할 수 없는 관계이기에 단지 한 세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완벽한 부모 노릇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부모에게도 그 윗세대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상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운명적이면서도 어찌 보면 그저 우연한 만남일 뿐입니다. 하필 나는 왜 이러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을까 생각하는 대신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아이를 키워야 했을 부모님에 대해 연민을 가져보십시오.
나는 세상 한구석에서 한탄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고 그저 내 몫을 살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이 세상 전부가 학교이고 선생입니다.

어떤 사람도 특정인을 자기 부모로 정해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어린 저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 번의 연민과 깨우침으로 저를 완전히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는 일상에서 보고 겪는 고통이 너무나 컸고, 그 고통은 가까스로 추어올린 나의 결심을 단번에 무너뜨렸습니다. 그때 나의 미숙한 삶은 마치 수용소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피할 수만 있다면 어디로든 피하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내 작은 몸을 숨길 곳도 피할 곳도 없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태어난 가난한 사람hominem pauperem de pauperibus natum;호미넴 파우페렘 데 파우페리부스 나툼. 그것이 바로 나였습니다. 그런 내가 선택할 수 있고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몸부림과 절규뿐이었습니다. 그 절규는 마치 구약성경 하바꾹 3장 10절의 표현과 같았습니다.
"산들이 당신을 보고 몸부림칩니다. 폭우가 휩쓸고 지나갑니다. 심연은 소리지르고 그 물줄기가 치솟습니다."
그런 가운데 나온 외마디 절규는 ‘살고 싶다’라는 외침이 아니라 ‘살려주세요’라는 호소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읊조렸습니다.
주님, 제가 온 마음으로 당신을 찬미하리다. 당신 종에게 선을 베푸소서. 제가 살아 당신 말씀을 지키오리다. 저는 몹시도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주님, 당신 말씀대로 저를 살려주소서.
Confitebor tibi, Domine, in toto corde meo: retribue servo tuo: vivam, et custodiam sermones tuos: vivifica me secundum verbum tuum, Domine.
콘피테보르 티비, 도미네, 인 토토 코르데 메오: 레트리부에 세르보 투오; 비밤, 에트 쿠스토디암 세르모네스 투오스: 비비피카 메 세쿤둠 베르붐 투움, 도미네. (시편 119, 17과 107 참조)

길을(계속) 걸어가다.

Insisto iter(viam).
인시스토 이테르(비암).

타인의 삶은
우리에게 스승이 된다.

Vita aliena est nobis magistra.
비타 알리에나 에스트 노비스 마지스트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그냥 하는 힘을 믿고 막연히 제 앞에 있는 길을 걸어갔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낯선 길을 걸어야 할 때 밀려오는 감정은 막연함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습니다. 어디까지만 가면 목적지가 있다고 알려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제겐 스승이 필요했습니다. 그 길에서 부모님이 스승이 되어주셨더라면 좋았겠지만, 모두가 그런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부모가 내게 스승이 되어주지 못하더라도 일단 타인의 삶이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스승이 될 만한 이들은 역시 내 가까이엔 없었습니다. 너무 유명하신 선생님들은 감히 다가갈 수도, 제 형편으로는 그분들의 강의를 들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책을 통해 타인의 삶을 만나고, 그 책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에게도 기꺼이 스승이 되어줍니다. 모든 책이 선생이 될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의 선생이 되어줄 인생책은 세상 어딘가에 꼭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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