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도 때로 자식을 타인으로 봐야 할 필요가 있지만, 자식 역시 자신의 부모를 타인으로서 정중하게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엄마’가 아니라 ‘어느 중년 혹은 노년의 여성’으로 바라본다면 측은지심을 느낄 것입니다. 부디 내가 가장 약하고 가난한 시절에도 다만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내 가족에게 약자의 패악을 부리지 않기를.
로마인들은 ‘말하다’라는 뜻의 동사 ‘for(포르)’의 과거분사 ‘fatum(파툼, ‘말하여지다’라는 뜻)’을 명사화하여 ‘운명’이란 단어로 사용했고, 여기서 바로 ‘운명’이라는 뜻의 영단어 ‘fate’가 유래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운명이란 신들이 천명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운명을 말할 때 ‘fate’보다는 ‘destiny(영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destiny는 ‘정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동사 ‘destino(데스티노)’에서 유래했는데, 무의식 가운데 운명은 정해진 것, 그래서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깔린 듯합니다. 혹시 오늘날 전복시키기 힘들어진 굳건한 계층사다리로 인해, 운명은 인간의 힘으로 돌릴 수 없다고 여기게 된 사람들의 열패감이 말에도 영향을 끼친 것일까요. 반면 그리스인들은 ‘운명’을 자신에게 할당된 ‘부분’으로 이해했습니다. 인간은 ‘부분’을 부여받으면서 태어나고, 바로 이 ‘부분’이 한 인간의 존재를 특징짓게 될 일련의 사건들을 결정지을뿐더러 죽음의 의미와 순간까지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빈 부분, 부재, 텅 빈 것’도 삶의 ‘부분’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없는 것’ ‘없는 부분’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평등합니다.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
Qui maledixerit patri suo vel matri, 퀴 말레디세리트 파트리 수오 벨 마트리, morte moriatur. 모르테 모리아투르.
부모님을 생각하면 복잡하고 묘한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성장기에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던 그분들이 나이들수록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부모님이 달라졌다기보다는, 내가 나이들어가면서 철도 들어 어른의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이 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날은 문득 나의 부모가 그 험난한 세월 동안 부부의 연을 놓지 않고 끝까지 살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나의 부모를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 여긴다면 나 또한 ‘별 볼 일 없는 사람’의 소생에 지나지 않는가! 내가 타인 앞에서 내 부모님을 규정하는 만큼, 나는 꼭 그만큼의 인간, 그 정도의 아들이 되는 셈이지요.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깎아내리고 자학함으로써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모는 사형과 마찬가지이지요.
빨리 따라오는 사람들하고만 길을 걸어가야겠습니까? 더 늦게 오는 사람들을 버려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Sed numquid cum celerioribus 세드 눔퀴드 쿰 첼레리오리부스 tantum ambulamus viam? 탄툼 암불라무스 비암? Et qui tardius ambulant, 에트 퀴 타르디우스 암불란트, non sunt relinquendi. 논 순트 렐린쿠엔디.
빨리 따라오는 학생들만 데리고 가려는 선생, 자신에게 경제적 정신적 지지를 수월하게 해주는 부모가 되어주지 못한다고 제 부모를 욕하는 자식, 이들은 모두 제 발등에 도끼를 찍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더디 따라오는 학생이나 뒷받침을 잘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부모들마저 존중하고 사랑하는 성숙한 인간이 되지 않으면, 자신과 연결된 그들의 결핍과 아픔을 모른 척 외면해버리고 나면, 그것은 평생의 상처와 얼룩이 되어 당신을 영영 따라다닐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날을 눈물과 복받치는 감정으로 보낸 어느 날, 머리가 아주 차가워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가 무엇이 될지, 어떠한 사람이 될지는 모르지만 내 안에 들끓고 있는 그 뜨거운 마음을 믿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도 나란 존재가 이 세상에 버려지듯 던져졌다가 사라지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때 나는 스스로를 소중히 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내가 나를 먼저 이해하고 나의 소중함을 받아들이자, 내 가장 가까운 이웃인 부모님도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식된 자로서 부모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 바라고 기대하기보다 먼저 가져야 할 마음은 부모를 향한 연민이었습니다. 처음 부모가 되어서 많은 것이 서툴고 힘겨웠을 텐데 부모 역할을 하시느라 수고하셨다고, 살아주셔서 감사하다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건네는 연민 말이지요. 부모도 자식도 서로를 선택할 수 없는 관계이기에 단지 한 세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완벽한 부모 노릇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부모에게도 그 윗세대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상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운명적이면서도 어찌 보면 그저 우연한 만남일 뿐입니다. 하필 나는 왜 이러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을까 생각하는 대신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아이를 키워야 했을 부모님에 대해 연민을 가져보십시오. 나는 세상 한구석에서 한탄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고 그저 내 몫을 살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이 세상 전부가 학교이고 선생입니다.
어떤 사람도 특정인을 자기 부모로 정해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어린 저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 번의 연민과 깨우침으로 저를 완전히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는 일상에서 보고 겪는 고통이 너무나 컸고, 그 고통은 가까스로 추어올린 나의 결심을 단번에 무너뜨렸습니다. 그때 나의 미숙한 삶은 마치 수용소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피할 수만 있다면 어디로든 피하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내 작은 몸을 숨길 곳도 피할 곳도 없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태어난 가난한 사람hominem pauperem de pauperibus natum;호미넴 파우페렘 데 파우페리부스 나툼. 그것이 바로 나였습니다. 그런 내가 선택할 수 있고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몸부림과 절규뿐이었습니다. 그 절규는 마치 구약성경 하바꾹 3장 10절의 표현과 같았습니다. "산들이 당신을 보고 몸부림칩니다. 폭우가 휩쓸고 지나갑니다. 심연은 소리지르고 그 물줄기가 치솟습니다." 그런 가운데 나온 외마디 절규는 ‘살고 싶다’라는 외침이 아니라 ‘살려주세요’라는 호소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읊조렸습니다. 주님, 제가 온 마음으로 당신을 찬미하리다. 당신 종에게 선을 베푸소서. 제가 살아 당신 말씀을 지키오리다. 저는 몹시도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주님, 당신 말씀대로 저를 살려주소서. Confitebor tibi, Domine, in toto corde meo: retribue servo tuo: vivam, et custodiam sermones tuos: vivifica me secundum verbum tuum, Domine. 콘피테보르 티비, 도미네, 인 토토 코르데 메오: 레트리부에 세르보 투오; 비밤, 에트 쿠스토디암 세르모네스 투오스: 비비피카 메 세쿤둠 베르붐 투움, 도미네. (시편 119, 17과 107 참조)
길을(계속) 걸어가다.
Insisto iter(viam). 인시스토 이테르(비암).
타인의 삶은 우리에게 스승이 된다.
Vita aliena est nobis magistra. 비타 알리에나 에스트 노비스 마지스트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그냥 하는 힘을 믿고 막연히 제 앞에 있는 길을 걸어갔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낯선 길을 걸어야 할 때 밀려오는 감정은 막연함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습니다. 어디까지만 가면 목적지가 있다고 알려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제겐 스승이 필요했습니다. 그 길에서 부모님이 스승이 되어주셨더라면 좋았겠지만, 모두가 그런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부모가 내게 스승이 되어주지 못하더라도 일단 타인의 삶이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스승이 될 만한 이들은 역시 내 가까이엔 없었습니다. 너무 유명하신 선생님들은 감히 다가갈 수도, 제 형편으로는 그분들의 강의를 들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책을 통해 타인의 삶을 만나고, 그 책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에게도 기꺼이 스승이 되어줍니다. 모든 책이 선생이 될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의 선생이 되어줄 인생책은 세상 어딘가에 꼭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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