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장소/남영동 대공분실

경찰청 산하 대공 수사 기관. 1976년 5층규모로 만들었다가 1983년 7층 규모로 증축돼 현재의 모습이 됐다. ‘해양연구소‘라는 위장 기관으로 운영됐고 국가 안보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수많은 시민과 대학생을 빨갱이로 몰고 고문과 가혹 행위를 벌인 독재 정권의 하부 기관이자 인권 유린 장소였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김수근에 의해 설계됐다. 그러나 보통 김수근의 건축을 이얘기할 때 남영동 대공분실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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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인물/윤봉길

윤봉길(1908년~1932년)은 홍커우 공원 투탄 의거를 성공시킨 독립운동가로, 윤봉길의 의거는 당시 중국의 지배자 장제스를 크게 감동시킨다. 이후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광복군을 결성하는 등 임시정부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한다.

윤봉길 의거의 성과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931년 말부터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은 일본의 점령 지역에서 광범위한 의열 활동을 전개한다.
1931년 10월에는 난징에서 만주철도회사(일본이 만주국을 세운 후 일대를 경영하기 위해만든 회사)의 총재를 처단하려 했다. 1932년 1월에는 이봉창 의거가 있었고, 2월에는 상해 일본 조계지를 관할하는 이즈모호를 폭파하고자 했고, 3월에는 윤봉길과 여러 지사들이 상해 비행장 폭파를 시도했다. 같은 달 이덕주, 유진식 등은 국내로 잠입해 조선총독 처단을 시도했다. 그리고 4월에 윤봉길 의거가 성공했고, 5월에 최흥식, 유상근 등은 만주에 잠입해 관동청 폭파를 시도했다. 알려진 것이 이 정도로, 이 밖에 각종 거사가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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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사건/의열단

1919년 김원봉 등이 주도하여 만들어진 단체다. 김원봉 등은 만주 길림에서 폭탄제조법을 배웠고 사상적으로는 아나키즘을 신봉했다. 1920년대 초반은 의열단의시대였다. 수많은 의열단원이 거사를 실행에 옮겼고, 그중 김상옥과 나석주 의거가 제일 유명하다. 김상옥은 종로경찰서,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다.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를 잡아서 혹독하게 고문하던 곳으로 유명했고,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농민들의 토지를 약탈하는 악명 높은 기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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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순간마다 다시 연필을 듭니다
Vincent van Gogh
빈센트 반 고흐

밤의 카페 테라스
Caf Terrace at Night, 1888

고흐는 불안의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 힘을 통해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한 화가다. 그는 때로는 동생에게 재정적으로 의지해야 했을 만큼 넉넉지 않은 경제 형편 속에서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고, 끝내 그림 속에서 자신의 평온을 찾아냈다. 그만큼 그의 그림 속에서는 언제나 고독하지만 따뜻한 길을 발견할 수 있다.

고흐는 특히 밤하늘의 아름다움에 깊이 천착했다. 치열한 삶과 고독이 주는 슬픔을 잊게 하는 그의 안식처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었다. 밤하늘의 아름다움이 생생하게 담긴 그림, 밤의 카페 테라스는 고흐가 화가 공동체를 위해 임대한 노란 집을 꾸미며 오랜만에 포근한 안락함과 행복감에 젖어 있던 시절 그린 작품이다. 파리 한 귀퉁이에 있는 작은 카페를 둘러싼 평화로움과 따스함에 매료된 그는 자신의 눈에 비친 이 순간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내기로 했다. 이 그림을 그릴 때의 기분을 고흐는 이렇게 표현했다.
"사람들의 소음을 들으며 밤하늘에 별을 그려넣는 일은 정말 기분 좋았단다."

"밤은 낮보다 색채가 더 풍부하고
가장 강렬한 보라색, 파란색, 초록색으로 물든단다."

테오에게 보낸 고흐의 편지, 1889년 4월

오직 나만이 나를 구할 수 있기에
Gustav Klimt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The Kiss, 1908

1908년, 오스트리아 황제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미술전에서 가장 큰 화젯거리는 단연 클림트의 키스였다. 관능적인 곡선과 황홀한 장식, 정교한 금세공 기술이 어우러진 독보적인 이 작품을 통해, 클림트는 빈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았고 황금의 화가로 불렸다. 그러나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 4년 전만 해도 사회적인 비난에 시달리다가 주문받은 계약을 자진 반납하고 빈의 중심에서 떠나야 했다. 당시 추악한 예술이라고까지 불렸던 클림트 작품의 평판이 찬사로 바뀌게 된 것은 그동안 그가 사람들의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을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극복해 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신경 쓰지 마세요.
더 나은 당신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매일 당신의 기록을 깨뜨리면 됩니다."

윌리엄 보에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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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명문장/잃어버린 30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리웠던 30년 세월
의지할 곳 없는 이 몸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우리 형제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못 다한 정 나누는데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메이게 불러봅니다

내일일까 모래일까 기다린 것이 눈물 맺힌 30년 세월
고향 잃은 이 신세를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우리 남매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못다 한 정 나누는데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메이게 불러봅니다

가수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 노래 가사다. 1983년 KBS에서 처음으로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한다. 단순한 특별 프로그램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방송사에 연락하고 직접 KBS가 있는 여의도 일대에 쏟아져 나왔다. 이때부터 수개월간 이산가족 찾기를 통해 전쟁 중에 잃었던 가족을 찾았다.
방송은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약 5개월간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세계 방송 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세계 최초, 최대 규모의 이산가족 프로그램은 기네스북을 넘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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