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축


살면서 무엇을 만들고,
갈고닦고, 쌓아야 할까?

성장의 세 번째 기둥은 ‘구축’이다. 영어, 독일어, 산스크리트어에서 "구축하다, 쌓다, 갈고닦다"를 뜻하는 동사는 "있다, 되다, 일어나다"라는 뜻의 단어를 어원으로 한다. 삶을 ‘구축하는’ 행위는 자기 자신이 ‘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경청에 열린 마음이 필요했던 것처럼, 구축에는 노력, 일관성, 의지가 필요하다.

한 사람의 삶을 구축한다는 것은 노력과 사랑과 헌신을 통해의식적으로 존재를 가꾸어간다는 뜻이다. 자기만의 삶이라는 작품을 창조하려면 크고 작은 노력이, 체계와 질서가 필요하고 때로는 막대한 신념과 신뢰도 필요하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구축하려면 일관성과 집중력이 필요하고, 피로가 쌓이거나 내적 한계에 부딪혀도 밀고 나가야 한다. 때로는 자기 자신을 향한 불신과 더 나은 삶은 가능하지 않다는 회의감을 상쇄하기 위해 장기적인 과제에 매달려야 하고,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실현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해야 한다. 삶과 미래 구축을 위한 작업은 단조롭고 어려울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작업은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고 한 사람을 새로이 거듭나게 해줄 수 있다.

모험과 위험 감수는 쿼터라이프의 핵심적인 부분이지만, 삶을 구축하기 위한 내적?외적 작업은 전형적인 모험 이야기보다는 반복적인 과제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구축하기 위해 세심하게 공들이고, 피로해도 한 걸음씩 나아감으로써 쿼터라이퍼는 새로운 한계를 설정하고, 새로운 능력을 배우고, 그 과정에서 회복력을 얻는다. 그 모든 것을 통해 한 사람의 정체성과 성격이 빚어지고 형성되며, 자긍심이 깊이 뿌리내리게 된다.

지금까지 대니는 자신의 신체적 욕구에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싶은 소망에 귀 기울이는 법을 연습했다. 이제는 미래를 구축하고 싶다는 마음이 절실했다. 무언가를 이뤄내고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 싶었다. 경청이 자기 자신과 비언어적 실마리에 깊이 파고들어야 하는 일이라면, 구축은 조금 더 실제적인 작업이었다.

수많은 의미형은 스스로 원하는 삶을 구축하려면 때로는 거의 종교에 헌신하듯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 ‘시시하다’거나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삶의 안전성을 강화해줄 장기적 노력에 헌신해야 한다. 의미형은 ‘각고의 노력’을, 마침내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느낌을 즐기기도 하지만, 자신이 ‘돈에 넘어갔다’거나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걱정은 의미형이 사로잡혀 있는 저변의 두려움과 이어져 있다. 그건 바로, 삶에 오롯이 헌신하기 시작하는 순간 영혼 없고 개성 없는 일벌 같은 존재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의미형에게 삶을 구축하는 작업은 망망대해에서 목적지 없이 둥둥 떠다니다가 섬을 하나 발견하는 것과 비슷하다. 혼란, 우울, 압도감만 존재했던 과거를 뒤로한 채 안전한 공간에서 몸을 말리고 안정적인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쿼터라이퍼는 자신이 제대로 밀어붙이지 않을 때 그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한다. 외부에 헤쳐나가야 할 장애물이 있는 만큼 내면에도 보이지 않는 허들이 있어 그것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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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문화/운동권

대학생 운동권의 등장은 1980년대 상황과 관련이 있다.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이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민주화를 열망하는 정치인, 재야 지도자들이 등장했고1970년대 후반에 대학가에서 언더서클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0.26 사태를 통해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민주화가 당연시되는 분위기였으나 곧장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그리고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급격히 바뀐다. 일명 ‘서울의 봄‘이 무너진 것이다. 특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잔혹한 진압은 1980년대 대학생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입혔다. 대학생이된 후 학내 비밀 상영회를 통해 비디오테이프로 ‘광주 학살‘을 직접 목격한 학생들이 가두 투쟁에 나서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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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평범한 가난

한동안 입술만 깨물던 엄마가 결심한 듯 내 손을 꽉 부여잡았다. 정작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나를 홀로 밖에 세워 뒀다. 아무렴, 나는 ‘심심하다’라는 말을 모르는 아이였다. 글자라면 무엇이든 읽었다. 식당 유리에 코를 대고 메뉴판을 보려 애썼다. 유리에서는 은은하게 돼지갈비구이 냄새가 났다. 고개를 조아리는 엄마가 보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밀린 월급 30만 원을 달라고 하는 중이었다.
눈치 없이 배가 고팠다. 엄마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양념치킨을 사 줄 것이다. 자식 입에 들어갈 치킨 값을 계산할 때면 어딘가 당당해지곤 했던 엄마 얼굴을 떠올렸다. 고개를 돌려야 한다는 걸 알았다. 아예 몸을 돌려 전봇대에 나붙은 전단지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숙식 제공, 100만 원, 아가씨 같은 글자가 또렷했다.

그날 이후였다. 하굣길마다 신발주머니를 빙글빙글 돌리며 언제쯤 아가씨가 될 수 있을지 생각했다. 나는 100만 원만큼의 미래를 꿈꿨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보다 더 큰 돈은 내 상상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 미래에는 엄마가 30만 원 때문에 작아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았다. 지금도 여전히 꿈에 나오는 장면들이 있다. 초록색 슬립을 걸친 여자가 남자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골목으로 끌려간다. 비쩍 마른 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맨발은 검다. 그런 장면을 숨도 못 쉬고 목격한 날은 또 생각했다. ‘아가씨는 되지 말아야겠구나.’

언제쯤 아가씨가 될 수 있을까 골몰하던 10대와 이미 아가씨였던 10대가 고작 육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는 사실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가진 손톱만큼의 운 덕분에 나는 그곳에 닿지 않았다.

런던에서 서울까지 약 8,000km를 건너 내 앞에 도착한 《가난 사파리》를 넘기는 동안 나는 다른 문화권에 살며 다른 언어를 쓰는 저자와 내가 경험한 가난이 너무 가깝고 때로 겹친다는 ‘당연한’ 사실에 자꾸 몸서리를 쳤다. 우리가 해 왔던 분노의 다짐과 잦은 실패와 달라지는 신념이 비슷한 뿌리를 지녔다는 게 신기했다. 대런 맥가비의 말마따나 "가난은 정치적 논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세계적 현상"이기 때문일 테다.

어린 시절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는 ‘가족’이 전부였다. 나의 엄마는 사남매의 둘째딸이다. 엄마와 엄마 형제들이 낳은 자녀는 나를 포함해 아홉 명이다. 그중 전문대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아이는 셋뿐이었다. 정규직 역시 세 명뿐이며, 나머지 여섯 명은 불안정 비정규 노동을 전전한다. 1980~1990년대생인 우리는 대학 진학률 80%의 시대에 살고 있었다. 나는 세 명에 속하고 나의 남동생은 여섯 명에 속한다. 가까이는 우리의 차이를 숙제처럼 끌어안고 살았다. 내가 만나는 세상의 접점이 넓어질수록 숙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상업고등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의 가정환경과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의 가정환경은 극과 극이어서 때로 어지러웠다.

어딘가 단단히 고장 난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다. 이 멀미 나는 격차들이 어디서 오는지 궁금했다. 기자라는 직업은 그 숙제를 얼마간 해결해 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 ‘지식인’ 세계에 진입했을 때 나는 그들과 되도록 최대한 비슷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게 가난을 이해하고 싶은 게 아니라 벗어나고 싶은 것이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새로운 세계에서 좌불안석하면서도 나는 안도했다. 물론 나는 지금도 가난으로 인해 어딘가 부서지고 망가진 내면이 언젠가는 사고를 치고 말 것이라고 긍긍한다.

상업고를 나온 사람이 드물고, 기초수급을 오랫동안 받았던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회사에서 내가 지나온 가난은 ‘자원’이었다. 다른 시각을 가졌으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나는 내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기까지는 내 어린 시절이 힘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기 시작하기까지는 내 인생이, 또는 실로 내가 어떤 식으로든 흥미롭다거나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난은 이 사회의 많은 문제가 시작되는 저수지였다. 가난과 관련된 아이템은 흔하고 넘쳤다. 그래서 의미 없을 때가 많았다. 오만함과 절박함과 희망이 범벅된 진창에서 구르는 동안 ‘글’ 따위는 몇 번이고 무참히 패배했다.

생각지 못한 지출이 반복되며 내 삶도 일부분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외면했던 가난의 그림자는 이런 식으로 내 발목을 잡곤 했다. 내가 잘못하며 살지 않아도 책임을 져야 했다. 부채가 있었다. 우리 두 사람 중 나만 고등교육을 이수할 수 있었던 건 그 애가 공부를 못한 까닭도 있지만, 그 이유로 그 애가 돈을 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집안 생계를 책임진 덕분에 나는 내 앞가림만 하며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누나, 나는 잘해 보려고 했던 일인데 매번 이런 식이야."
나는 그 말에 아직도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세상은 모르는 그 애의 최선을 나는 안다. 다만 공업고등학교를 나와 비정규 노동의 틈새를 전전해 온 30대 중반의 남성은 ‘작은 성공’조차 쉽지 않았을 뿐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뭔가를 하려 할 때 대단히 많은 벽에 부딪친다"는 점은 가난이 가진 질긴 속성이다. 온라인 도박 사이트는 드물게 장벽이 없는 공간이었다. 가끔이긴 하지만 성취감을 줬다. 청소년기에는 게임이 그 역할을 했었다. 나는 내 동생의 노동을 딛고 공부할 수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동생 삶에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글만 바쁘게 쓰고 있다는 자괴가 몰려왔다. 세상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아서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동생이 2012년 첫 아이를 낳았을 때 나는 주변이 모두 당혹해할 정도로 오래 통곡했다. 2.9kg의 조그만 아이를 처음 안고서 터뜨린 울음을 한동안 나조차 해석하지 못했다. 그건 단순한 기쁨이 아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깨달았다. 나는 그 아이가 살아갈 많은 날이 안쓰러웠다. 앞으로 ‘당할’ 일들이 떠올라 고통스러웠고, 무서웠고, 서러웠다. 이 아이가 자라는 동안 경험해야 할 모든 일들이 먼저 경험한 내게 무게로 다가와 나를 짓눌렀다. 가장 무서운 것은 아이 부모의 가난이었다. 나는 우리의 가난을 늘 대수롭지 않아 했지만, 그건 사실 가난이 삶의 많은 것을 결정하는 대수로운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핏덩이’는 내가 가난 때문에 늘 상처받는 사람이라는 걸 상기시켰다.

나는 한때 바랐듯이 정치권력이나 체제가 바뀌기를 ‘순진하게’ 기대했다. 이제는 그저 일정 부분 망가진 울퉁불퉁한 길을 일단 걸어가 본다. 내면의 힘을 발견하고 기르는 편에 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려 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힘은 누군가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빈곤은 이런 방식으로 산업화되었다) 나에게도 있다는 걸, ‘가난한’ 우리도 이 세계의 일부이고 책임 있는 구성원이자 시민이라는 걸 믿으면서

실패는 안팎으로 계속됐다. 다정한 적 없던 가족과 친척은 때로 남보다 멀고, 이제는 각자의 짐을 지며 살고 있지만 애경사로 드물게 만나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네가 사는 세계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는 말을 꼭 한번씩은 듣곤 한다. 내가 그 ‘다른 세계’에서 얼마나 자주 이방인이 되는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자꾸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에서 상대가 의도치 않았던 냉소와 비난을 읽는다. 때로는 왜 나를 구분하느냐고 반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난은 돈의 많고 적음으로만 구별되지 않는다. 문화와 교양과 취향으로도 드러난다. 나는 그 말에서 내가 빠져나온 세계를 본다. 그리하여 안온한 세계에서 구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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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 지각마의
지각을 위한 변명

취재팀에서 편집팀으로 옮긴 지 한 달 뒤쯤이었다. 팀장과 나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나의 잦은 지각 때문이었다. "늦지 마라." "죄송합니다." 따위의 대화로 시작하는 하루가 즐거울 리 없다. 그때 우리는 둘 다 불행했다.

출근 시간은 오전 10시. 나도 의아했다. 다른 회사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파격적인 출근 시간인가. 러시아워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출근하는 동안 하루치 기운을 다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선배…… 저는 10시까지 출근 못 하겠습니다."

더는 죄송하기 싫었다. 경험상 이럴 때는 차라리 솔직한 게 낫다. 문제의 성격을 막론하고 문제를 푸는 실마리는 솔직함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그날, 선배도 웃고 나도 웃었다. 선배는 어이없어서 웃었고, 나는 그 말을 기어이 해 버린 내가 대견해서 웃었다. 남들이 다 할 수 있어도 나는 못 할 수 있다고, 못 하는 부분은 인정하고 ‘다르게’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직 생활인 만큼 선배의 염려를 인정하고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 이후에도 몇 번쯤 더 지각했지만 그 횟수는 현저히 줄었다. 마음의 자유를 얻으니, 몸이 적응하기 시작했다.

바뀐 건 단 한 가지뿐이었다. 팀이 바뀌었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팀이 바뀌는 문제가 아니었다. 일의 방식이 바뀌었고, 시간 쓰는 법 자체가 달라졌다. 기다림은 편집팀 업무의 거의 전부다. ‘내 글’을 쓰는 일에서 ‘남의 글’을 기다리는 일이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세운 계획대로 일할 수 없었다. ‘연쇄 지각마’는 그 시스템에 적응하고 싶지 않은 내가 만들어 낸 또 다른 나였다.

가난한 언론사가 월급으로 최고 대우를 해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 대책 없는 양반들이 내세운 최고 대우라는 건 ‘양심에 따라 쓸 수 있는 자유’였다.

그 자유만큼이나 마음에 들었던 건 실질적인 근무 조건이었다. "돈 많이 못 주는 대신 근무 조건이라도 좋아야지." 창간 주역인 한 선배는 신입 기자 앞에서 이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그 조건이라는 게 별건 아니다. 이를테면 ‘법이 정한 대로’ 휴일을 쓸 수 있는 정도였다. 명절에 쉴 수 있고 되도록 주5일제를 보장하는 것도 다른 언론사라면 꿈꾸기 어려운 일이다. 그야말로 업계 최고의 대우다.

감시하는 사람이 없으면 편할 거 같지만 많은 일이 그렇듯 기자도 결국 결과, 즉 기사로 말하는 사람들이다. 허투루 일한다는 건 내 이름뿐만 아니라 이 매체가 쌓아 온 신뢰에 먹칠하는 일이었다. 불안을 밥 먹듯 먹으며 시간을 쌓는 동안 나는 ‘나만의’ 일하는 스타일과 리듬과 호흡을 가지게 됐다. 그러므로 나에게 내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졌다는 건 엄청난 변화였다.

기자로 일하는 것이 언제나 좋은 건 아니다. 기자의 일이란 ‘나’와 ‘일’을 완벽히 분리하지 못할 때가 많고, 여러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경우가 왕왕 있으며, 완벽에 가까운 책임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고강도 스트레스에 늘상 노출돼 있는 기자들은 빨리 죽는다. 원광대 보건복지학부 김종인 교수팀 조사에 따르면 11개 직업군별 평균 수명 조사에서 언론인의 수명이 67세로 제일 짧았다.
편집팀 발령은 나에게 일과 시간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만들었다. 첫 직장을 다닐 당시에는 대학 진학이라는 출구가 있었다. 하지만 삼십 대의 직장인은 출구를 만들 의무가 있다. 원하지 않았지만 어느덧 나도 이 사회에 책임이 있는 ‘어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른의 고민이라면 책임감에서 출발해야 하는 법이다.

한국에서 건물주로 태어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노동을 해야 한다. 시간은 돈이 되고, 우리는 그 돈으로 ‘아슬아슬’ 입에 풀칠하며 산다. 살아 보려고 하는 일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때로 우리 삶을 위협한다. 노동에 대한 다종다양한 책이 증명하고 있듯 다행히(?) 나만 불행한 건 아닌 것 같다.

다만 내가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시간’이다. 우리의 일이 불행한 이유는 내가 그랬듯이 일의 과정에서 내 시간을 통제할 수 없다는 데 기인하는 건 아닐까. 우리는 회사에 단지 노동력을 파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노동에 대한 통제권과 자율성도 저당 잡힌다. 대부분 9시까지는 출근해야 하지만 퇴근 시간은 기약할 수 없는 곳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말이다.
장시간 노동에 대한 고민은 사치라는 듯, 세상은 그나마 있는 일자리도 불안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책 속에 길이 있을까? 적어도 길의 흔적은 더듬을 수 있다.

갑이 우리의 노동에 대해 다른 방식을 상상하지 못하고(혹은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 개혁’처럼 나쁜 방향으로만 머리를 굴리고) 있다면 자주 필사적으로, 그보다는 조금 대충이라도 계속 떠드는 수밖에. 우리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내 의지로 행복하게 일할 권리가 있다. 그편이 훨씬 이익이 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례도 여럿이다. 역사가 발전하는 게 사실이라면 이게 제대로 된 방향이다. ‘10시 출근 불가’를 선언하며 내가 얻은 깨달음이다.

우리 몸의 구멍이
굴욕이 되지 않도록

병원이라는 장소는 ‘어쩔 수 없음’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그곳은 웬만해서는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다. 여느 병원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가기 꺼려지는 병원은 산부인과였다. 지금이야 정기적으로 산부인과를 다니지만 그렇다고 심리적 문턱까지 낮아진 건 아니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어 갈수록 성경험 여부를 묻는 칸을 ‘없음’으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없음 칸에 체크할 때마다 내 인생의 결여에 대해 생각하며 속을 끓였다. 성폭행 경험을 성경험 ‘있음’으로 여기고 싶지 않았다. 그 경험이 가져온 트라우마는 긴 세월 애인들에게 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평생 ‘없음’ 칸이나 채울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래도록 나를, 내 몸을 부정하면서 살았다. 그냥, 여자가 되고 싶었다. 평범한 여자. 나는 안다. 평범이나 평균은 허구라는 걸. 평범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모두들 평범을 바라는 거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랐다.

짝꿍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서른두 살이었다. 나를 지나간 몇 명의 다른 애인들처럼 그가 섹스를 청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전 애인들에게는 못 했던 이야기를 꺼내기로 결심했다. 그와 함께 ‘있음’의 세계로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꼭 그가 아니어도 상관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있음의 세계를 열망하던 그즈음 그가 내 곁에 있었다는 것, 이런 타이밍을 운명이라고 해도 좋다면 그건 그런대로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먼저 묻거나 ‘더’ 묻지 않는 사람이었다. 몸 왼쪽을 가로지르고 있는 손가락 한 마디 길이의 상처도, 성폭력 경험에 대해서도. 그는 그저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나도 마침내 긴 시간(과 돈을 들인) 끝에 나를 ‘돕는’ 산부인과 의사를 만났다. 사소한 질문을 귀찮아하지 않았고, 내 몸에 대해 먼저 꼼꼼히 묻는 사람이었다. 그는 검사를 하는 와중에도 이 검사는 왜 하는지, 어떤 걸 확인할 수 있고 없는지 등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해 줬다. "긴장 풀라고 해도 긴장되죠? 당연해요." "조금 아플 건데, 이 검사를 하려면 조직을 조금 긁어내야 해서 그래요. 칫솔질하는 거 같달까요." 병원 안에는 요란한 미용이나 성형 광고도 없었다. ‘기본’을 하지 않는 병원을 여럿 경험한 탓에 나는 ‘쉽게’ 이 산부인과에 반해 버렸고 내 맘대로 주치의 삼아 버렸다.

때로 망치더라도
아주 망친 것은 아닌

앞에 놓인 일들을 한번씩 가늠할 때마다 막막해서 차라리 사라지고 싶었다. 다짐이 아니라 결과로 증명되는 쓸모란 얼마나 무서운가. 일을 잘하고 싶다는 바람과 잘할 수 없을 거라는 낙담은 단짝이라, 내가 나인 게 싫어지는 시간만 성실했다. 일과 일상이 구분되지 않은 채 한 몸처럼 지낸 지 오래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생활이 불규칙해졌다. 닥친 마감과 기획안으로 엉킨 생각이 밤새 몸을 들쑤셨다. 아침에 눈떠 보면 죄 시답잖았다. 모든 게 나처럼 시시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 한 반의 정원이 30명이라면 15~16등쯤 하는 학생 같은, 뭐 하나 빼어나게 잘하는 건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못하는 것도 없는. 나는 이 세계에서 주로 ‘그런 애’를 맡아 왔다. 나 하나만 잘 수습하면 그럭저럭 괜찮았던 시절이 그렇게 끝났다. 선배의 선택과 판단을 무의미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짓눌렸다. 실망시킬까 봐 무서웠다. 실은, 누구보다 나를 실망시키기 싫었다. 해 봤다면 해 봤고 안 해 봤다면 안 해 본 일들을 맞닥뜨리게 될 거라는 곤란한 예감은 적중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업무 압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일하는 친구들에게 당부하게 되는 건 언제나 결과보다는 태도다. 내가 잊지 않으려 하는 건 이런 것들이다. 기자는 기본적으로 2차 생산자라는 점. 우리 일은 기본적으로 사건과 사람에서 출발한다. 누군가에게 빚지지 않고 쓸 수 있는 기사는 없다. 기사란 대부분 누군가의 불행과 불편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때로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현실에 개입하게 된다.

"기자가 되고 싶다"는 친구들을 만나면 습관처럼 말하곤 했다. "에이, 이거 말고 딴거 해." 반쯤은 진심이었다. 일과 일상이 구분 없이 한데 뭉쳐 굴러다니기 시작하면 생활은 불규칙해지고, 몸은 망가진다. ‘기레기’로 뭉뚱그려 호명될 때마다 가까스로 쥐고 있던 긍지마저 사그라든다.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레 ‘기자질’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이야기로 번졌다. 하지만 우리가 이 일을 포기하지 않는 건, 이 일이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기여하는 일이라는, 분명한 보람과 자부 때문이다.

자신은 원하는 직업을 가졌으면서 내가 하는 일을 원하는 후배의 ‘앞길’ 막는 얘기는 왜 자꾸 하게 되는 걸까. 모든 일이 그렇지만 이상은 현실보다 늘 앞서간다. 내가 그러했듯, 뒤에 오는 사람들이 그 낙차에 실망할까 지레 겁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기대도 실망도 당사자 몫이다. 선배는 그 모든 걸 온전히, 하지만 나보다는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겪게 해 주는 사람이어야 하는 게 아닐까.

만화가 이종범 씨가 쓴 ‘청소의 요정’이라는 제목의 글을 인상 깊게 읽었다.(<ize>, 2014년 10월 2일) 이씨가 ‘거지 같은 만화판’에 대한 이야기만 주구장창 듣던 지망생 시절, 선배인 《덴마》의 양영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화가가 되면 너무 좋아. 빨리 만화가 해." 그 글을 읽은 이후 나 역시 기자 지망생을 만나면 "기자가 되면 정말 좋아. 빨리 기자 해"라고 말하는 사람으로 살자고 다짐했다.

어떤 직업을 좋은 일, 필요한 일로 만드는 힘과 책임은 그 직업군에 속한 사람에게도 있다. 내가 하는 일을 뒤에 오는 사람에게 권할 수 있으려면 내가 선 땅이 좋아지도록 부지런히 일궈야 한다. 저 짧은 두 문장을 자신 있게 건네려면 그만큼 스스로를 담금질해야 한다. 일의 조건과 환경을 바꾸는 일을 게을리해서도 안 된다. 어디 기자만이 그럴까. 세상의 많은 일이 그런 노력에 힘입어 나아진다고 믿는다. 그 과정에서 때로 망친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아주 망친 일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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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까지는 원하지 않는
삶에 대하여

엄마는 지금도 ‘남의 주방’에서 일한다. 제 한 몸이 가진 것의 전부인 사람에게 건강 문제는 생계에 앞설 수 없는 부차적 문제가 된다. 따지고 보면 엄마는 늘 어딘가 아팠다. 불이나 기름에 데거나, 대형 솥을 반복적으로 옮기는 동안 생기는 근육통을 달고 살았다. 그런 상처는 연고와 밴드와 파스 따위로 임시 처방하면 그만이었다. 엄마의 몸에 오래 기대 살았던 나는 해외 출장이나 여행 갈 때면 그 지역의 유명하다는 파스 제품을 종류와 크기별로 사다 나르곤 했다.

수술 일정을 잡고 나오던 어느 날, 엄마가 물었다. 정말 아이를 낳지 않을 거냐고. 지겹도록 듣고 답했던 질문 앞에서 나는 입을 닫았다. 엄마가 체념한 듯 혼잣말을 했다. "너는 딸도 없고 불쌍하다." 그날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나는 엄마의 그 말이 아주 좋다고. 그건 엄마가 나로 인해 불행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무엇보다 짝꿍은 ‘다음 과제’를 완수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대학에 가고, 졸업하면 취업하고, 취업하면 결혼하고, 결혼하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당위’와 ‘정상’에 대한 압력을 거스르고 자기 의지로 살고 싶어 했다. 그는 지금의 기쁨과 당장의 만족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이다.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그 기쁨과 만족 안에 내가 포함되었다. 결혼 전 자녀 계획에 관해 대화할 때 그의 전제 조건은 하나였다. "나는 원하지 않지만,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는 임신과 출산에 있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전무함을 알고 있었고,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인 만큼 내 의지와 생각이 결정의 전부여야 한다고 말했다

나의 ‘비합리’와 ‘비이성’으로 둘 다 고통받던 즈음, 우리는 일정 기간을 정하고 임신을 우연에 맡겨 보기로 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1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자주 조바심이 났다. 아이가 생겨도 문제, 안 생겨도 문제였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에 자주 휘청였다. 통상 피임을 하지 않은 부부가 1년 이내 임신이 되지 않는 걸 난임이라고 한다. 아이를 ‘안’ 갖는 것과 ‘못’ 갖는 것은 달랐다. 키울 자신도 없으면서, 막상 아이를 키울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니 손 안의 사탕을 뺏긴 느낌이었다.

때로 그 말이 몹시 서운하고 외로웠다. 나 역시 일찌감치 아이를 내 인생에 포함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해 왔다. 아이를 통해 미래를 사는 게 두려웠다. 내가 어쩔 수 없이 끌어안고 살아온 가난을 내 세대에서 끊어 낼 방법은 비출산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태어나지도 않은 내 아이가 살아야 할 미래를 예상할 때마다 몸을 떨었고, 내가 자라면서 경험한 고통을 그때마다 새롭게 곱씹었다.

취재하며 친구가 된 사람이 있다. 그도 우리처럼 아이가 없었다. 그와 만난 자리에서 나는 오랫동안 그의 ‘사적인 삶’에 관해 궁금했던 것을 조심스레 물었다. 술잔이 오가고, 그와 나 사이에 떡볶이가 끓고 있었다. 질문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아이는 일부러 갖지 않으셨나요?" 그는 주저 없이 답했다. "안 생겼다는 게 정확하죠. 같이 사는 친구랑 얘기를 해 봤어요. ‘의학적인 조치를 취해서라도 아이를 갖고 싶은가.’ 근데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고요."
나는 출산과 비출산 사이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내가 가진 정답이 무엇이든 이유와 입장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 내가 분명히 느끼는 슬픔과 상실은 충분히 설명이 안 됐다. 그래서 ‘당연히’ 중간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내 삶도 좀 더 가뿐해졌다. ‘그렇게까지는’ 원하지 않는다. 내 마음 역시 거기에 좀 더 가까웠으니까. 그제야 나는 현재 주어진 삶의 조건에 보다 집중하게 됐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복잡한 마음의 결을 나눌 필요를 느꼈다.

《엄마됨을 후회함》은 《아이 없는 완전한 삶》의 ‘짝꿍 책’이라 할 만하다. 책은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다양한 사회 계층 여성들을 만나 이들이 엄마가 된 경로를 추적한다. 그리고 여성을 ‘엄마가 되는 길’로 몰고 있는 사회를 여성의 목소리로 폭로한다. 《엄마됨을 후회함》의 저자 오나 도나스는 말한다. "고통당하지 않고자 기꺼이 논쟁에 휘말리는 여성과 엄마들은 언젠가, 어떻게든, 무언가를 바꾸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그럴 만하다." 중요한 건 이 문장을 기억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여성에 의해 태어났다. 하지만 여성은 엄마로 태어나지 않았다.

한 사람이 다음 사람을
이 세계에 데리고 오는 일

그날도 피곤에 절어 겨우 집에 도착했다. 가방을 푸는 동안 책상 위에 얌전히 놓인 임신테스트기가 눈에 들어왔다. 약국 가는 걸 자꾸 까먹는다고, 갈 시간도 없다며 지나가는 말로 툴툴대던 걸 그가 기억한 결과였다.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 ‘우리’의 문제라는 걸 확인하는 경험은 언제나 든든하고 유쾌하다. 그러니까 저이와 함께라면 임신·출산·육아가 아주 나쁜 일만은 아닐 거라고 착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고, 실제 상황과 별개로 그 순간은 무척 소중해진다. 그래서였다. 간만에 깔깔대며 웃었다.

임신 중지와 임신 유지 사이에는 ‘선택’과 ‘생명’이라는 단어가 다 대표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고민과 결단이 존재한다. 오랫동안 이 문제를 ‘죄’로 다뤄 온 문화에서 성장해 온 사람에게는 특히 그렇다. 임신 사실보다 유산 사실을 먼저 알았던 날이 떠올랐다. 의사는 전체 임신에서 자연 유산 비율이 20% 정도 된다며 나에게만 일어난 불행이 아니라고 위로했다. 정작 내가 그 ‘불행’을 무척이나 안도했다는 걸 의사는 끝내 알지 못했다.

그 일을 겪으며 나는 예상치 못했던 죄책감에 시달렸다. 죄책감이라니 가당치 않아서, 오래 괴로웠다. 고작 ‘세포’를 보내고 눈치 없이 긴 애도를 건너는 동안 기존 사회의 통념에서 내가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 사람인지 실감했다. 생명은 설명이 필요 없는 너무나 강력한 프레임이다. 이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얼마간의 망설임 앞에 반드시 서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 각자가 구성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전제를 끌어안고 산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몸에서 시작하지만 여성의 몸에서 끝나지 않는다. "재생산은 어느 사회에서든 단지 구성원을 수적으로 충원한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으며,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 가치 등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결국, 재생산권이야말로 ‘낙태죄’를 둘러싼 문제의 본질이다. 평등하게 성적 관계를 맺을 권리, 출산 여부를 결정할 권리, 자녀를 건강하게 양육할 권리 등을 포괄하고 있는 재생산권을 보장할 때만이 생명권 역시 온전히 보장될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가 낙태를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충돌로 이해했다면, 이제는 그동안 국가가 통제해 왔던 재생산권을 되돌려 받는다는 의미로 논쟁을 가져와야 한다.

문제는 ‘앞으로’다. "낙태가 ‘합법’이 되는 것과 임신 중단이 여성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여지는 것 사이의 거리를 메우기 위해서는 또 다른 투쟁이 필요하다." 사회경제적 사유로도 임신 중지를 가능하게 한다거나, 주수를 제한하는 방법은 일견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계속해서 여성을 처벌하고 차별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낙태죄 폐지 운동은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을 없애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을 새로 만들고, 기존의 법을 여성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과정을 동반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거머쥔 승리의 경험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 앞으로의 싸움은 고되겠지만 이 ‘출발선’을 여성들이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걸 지금은 마음껏 축하하고 싶다. 대체 입법은 2022년 10월 현재도 이뤄지지 않은 채 논쟁의 영역에 남아 있다. 입법 공백은 인터넷 검색과 자본이 메운 채로.

아픈 게 자랑입니다

왼쪽 팔에 간단한 신상 명세가 출력된 종이가 채워졌다. 장일호, F/36세, A(RH+). 닳지도 젖지도 않는 유포지 위에 새겨진 글자를 나는 자주 멍하게 바라봤다. 흔하고 쉬운 암이라고 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애썼다. 쉽지는 않았다. 모든 게 처음 하는 경험이고 하나같이 어려웠다. 하루에도 환자 수십 명을 봐야 하는 의료진들은 종종 그 사실을 잊었다. 각종 검사 전 이름을 확인하기 위해 무성의하게, 동의 없이 몸에 붙여지는 식별 스티커를 볼 때면 마음 어딘가 작게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사라지고 ‘환자’만 남았다. 수술이 끝났지만 병은 끝나지 않았다. 여덟 차례에 걸친 항암과 방사선, 수년에 걸친 약물 치료가 기다리고 있었다. 생이 그다지 살 만한 것이 아님을 지난 1년 사이 나는 매일 새롭게 배웠다.

건강검진에서 암 의심 소견이 나온 직후, 모든 치료 과정은 당연하고 신속하게 결정됐다. 마치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을 것처럼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거쳤지만, 다른 방법은 사실상 없었다. "질문 있느냐"라는 의사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울거나 소리 지르고 싶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자꾸만 고꾸라졌다.

수술이 가장 쉬웠다고 기억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항암을 시작한 이후 속눈썹이 없는 눈은 자주 염증을 앓았다. 염증으로 찌걱거리는 눈 때문에 무엇 하나 집중하기 어려웠다. 피부는 거무죽죽하거나 허물 벗었다. 병원에서는 소독약 냄새 때문에 물마저 제대로 마시지 못했고 입맛은 좀체 돌아오지 않았다. 3주 사이에 7㎏이 빠지는 일도 예사였다. 부종과 가려움으로 손발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손끝은 물 닿으면 칼에 베인 것처럼 아팠고, 발끝은 아무리 수면양말을 신어도 얼얼했다. 왜 손발톱 뽑기가 고문의 일종이었는지 깨달았다. 거의 다 빠지고도 일부 살점에 붙어 덜렁거리는 손발톱은 고작 옷 단추를 꿰거나 신발을 신는 단순한 일로도 고통을 줬다. 마약성 진통제도, 수면제도 듣지 않는 밤에는 그저 줄줄 우는 수밖에 없었다. 의사에게 들고 간 고통은 처방전으로 돌아왔다. 항암 부작용은 또 다른 약으로 덮었다. 카드 돌려막기 하듯 약 돌려막기를 했다. 정말 이 방법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통증이 익숙해지면서 다루는 법도 알게 됐다. 어느 정도 아프고 나면 괜찮아질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견뎌졌다. 하지만 씻고, 먹고, 싸는 기초적인 일상이 누군가의 돌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건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아픈 몸은 내 자존감을 끊임없이 시험했다. 고통보다는 무력감이 컸다. 수술, 항암, 방사선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표준 치료’를 다 끝내고 약물 치료를 하고 있는 요즘도 여전히 컨디션은 제멋대로 날뛴다. 특히 체온 조절이 잘 되지 않아서 땀을 비 오듯 흘리거나 갑자기 오한에 시달린다. 치료 부작용 중 하나인 조기 완경의 대표적 증상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빠진 손발톱과 머리카락이 기어이 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몸이 보이는 ‘생의 의지’에 조금 감탄했다.

수술과 입원을 마친 후 돌아온 집에서 나는 보험회사 제출용으로 뗀 조직검사 결과지를 해석하기 위해 애썼다. 사전을 이용해 단어 자체는 번역할 수 있었지만 의미를 해석할 수는 없었다. "수술이 잘됐다"라든지 앞으로 어떤 치료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결과론적 이야기가 아닌, 더 자세한 상태를 알고 싶었다. 결과지를 붙잡고 밤을 꼬박 새운 다음 날, 결국 의사 친구에게 연락했다. 그는 한 줄 한 줄 짚어 가며 내 몸 상태를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듣는 내내 어쩐지 부끄러웠다. 한편으로는 왜 이게 ‘치료 과정’의 일환일 수 없는지 생각했다. 환우회 카페에는 조직검사 결과지를 해석해 달라며 찍어 올리는 이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개인 의료 정보가 노출되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알고자 하는 마음들이었다.
좋은 질문은 ‘앎’에서 나온다. 의료 지식이 없는 보통 사람의 질문은 구체적이기 어렵다. 매뉴얼처럼 "질문 있나요?"를 외는 의사의 말에서 환자는 ‘묻지 말라’는 뉘앙스를 읽는다. "저 괜찮나요?"가 최선의 질문이 된다. ‘아는 의사’를 찾거나 인터넷에 개인 의료 정보를 올리지 않고도, 치료의 일환으로 쉽고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는 없는 걸까. 없었다. 한국의 대형 병원에는 그 무엇보다 시간이, 없다. 의료진은 친절했지만 너무 바빴거나 바빠 보였고, 나는 그 앞에서 어쩐지 자주 주눅 들었다. 드디어 질문이 생겼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질문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임에도 그랬다.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를 쓴 양창모는 의사이기 이전에 ‘손님’이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는 환자를 살리는 일cure만큼이나 돌보는 일care에 절박함을 느낀다. 진료실에만 머물렀다면 얻을 수 없는 마음이었다. 환자를 ‘증상’이 아닌 ‘사람’으로 대할 수 있었던 건 수없이 환자 집 문턱을 넘나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곳에서 살고 무엇을 하는지와 같은 삶의 맥락은 진료실에 들어온 순간 모두 사라진다. 모든 것이 마술처럼 사라지고 오직 한 가지, 증상만 남는다. 이것이 의사가 경험하는 첫 번째 마술이다. 하지만 왕진을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단 거기에는 ‘한 사람’이 자신의 방에 앉아 있다. 그 모습이 의사에게 주는 정서적인 변화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그는 자기 삶의 맥락 속에 앉아 있으므로 나는 그를 ‘한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양창모는 왕진을 통해 환자의 자리에 자신을 놓아 보는 경험을 한다. 환자가 다 말하지 못한 사정과 상황을 헤아리는 법을 배운다. 진료실을 지키며 "주지 않아도 될 약을 처방하거나 해 줘야 할 얘기를 빼먹은 분들"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마음속으로 처방전을 끊임없이 수정"하던 그는 결국 병원이라는 ‘하드웨어’ 바깥으로 삐져나온다. "‘없어서’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구체적인 얼굴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냉기가 사라지지 않은 봄 산에 올라가 나물을 캐 온 할아버지의 손에서 돈이 대신하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배웠다. 시계가 세 개나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시간 맞는 시계가 없었던 집에서는 언어가 되지 못한 사정을 읽었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일상이 있다는 걸 헤아렸다. 그 과정에서 ‘증상의 뿌리’가 사회임을 마주한다. 그는 ‘내가 아프다’는 것이 곧 ‘우리가 아프다’는 일임을 알게 된다. 전문가에게 부족한 것이 "자기 지식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의 지식을 바라보는 태도"임을 깨닫는다.

"답이 없다 말하는 순간 답은 사라진다. 나는 무관하다 말하는 순간 답은 없어진다." 그래서 양창모는 ‘하나의 답’이 되기로 했다. 제도는 언제나 사후적이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내는 변화는 거저 오지 않는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애써 일궈 가야 한다. "질문들의 대부분은 정답이 없다. 정답을 찾아가는 최선의 과정이 있을 뿐"이라 양창모는 구멍 난 의료 시스템을 메우고, 넓히고, 나아간다. 시스템을 탓하는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찾고 안 되는 이유는 고치고 개선하면서, 부족하지만 할 수 있는 꼭 그만큼을 해낸다. 그의 말마따나 "새로운 세상이란 장소가 아니라 행동"이다.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는 그 행동 위에서 써 내려간 기록인 동시에 초대장이다. 국가보다 중요한 ‘단 하나의 이웃’이 서로에게 되어 주자고, 그렇게 "연대의 그물망"을 함께 짜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행간마다 빼곡하다.

그는 모든 의사가 ‘양창모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강권하지 않는다. 다만 다르게 사는 모습으로 필요를 증명한다. 그리하여 독자는 가능하다면 양창모의 삶의 기록이 ‘양창모들’을 만들 수 있길 바라게 된다.

노인이 되는 건 그의 말마따나 "운이 좋아야" 하는 일이라, 요즘 나의 장래희망은 ‘할머니 되기’다. 나는 어쩔 도리 없이 현대 의학을 신뢰한다. 하지만 현대 의학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기를 또한 바란다. "병은 삶을 바꾸는 질문"이 되어야 하는가, 혹은 될 수 있는가. 나는 절반만 동의한다. 병은 내 삶을 흔들어 대고 일정 부분 바꿨지만, ‘나라는 사람’ 그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다. 나는 병의 원인을 내가 살아온 삶을 반성하는 일로 갈음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내가 살아온 삶을 바꾸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아픈 몸을 대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가 바로 그런 다정한 세계라고 믿는다.

제 장례식에 초대합니다

10년을 일하면 한 달을 유급으로 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연차도 다 소진해 본 적 없었다. 안식월 요건을 채우고도 쓸 수 있다는 생각조차 안 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일이 좋아서 그랬다. 좋았다기보다 불안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잘하고 싶어서 안달했다는 것도. 그 모든 것은 ‘좋아한다’ 안에 뒤죽박죽 담겨 있는 감정이기도 했다

건강검진 결과 유방암이 의심된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놀라지 않았다. 처음 들었던 감정은 안도였다. ‘쉴 수 있다’는 생각이 먼저 찾아왔다.

암의 존재를 알았을 때 나는 암 덕분에 내가 앞으로 쓰게 될 글이 넓고 깊어질 가능성을 떠올렸다. ‘의료화’된 사회의 최전선에서 질병 경험이 한 개인을 어떻게 바꾸는지, 또 암 경험자가 어떤 낙인과 차별을 경험할지 등을 글이 아니라 몸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그러자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조금은 기대되기도 했다.

투병을 결정하고 알게 된 가장 괴로운 일 중 하나는 내가 아프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었다. 나는 가능하면 병과 관련된 많은 일을 혼자 감당하려고 했다. 코로나19는 좋은 핑계였다. 그럼에도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사람이 놀랍도록 많았다. 병원 대기실에서 예상치 못한 얼굴을 만나는가 하면, 한동안은 거의 매일 택배와 봉투를 받았다. 아픈 몸으로 사는 일은 어쩌면 긴 장례를 치르는 일 아닐까. 은유 선생님 덕분에 나는 내게 벌어지는 일들을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픔은 너무도 혼자의 일인데 투병은 다행히 모두의 일"이라는 것을.

안식월을 다짐한 건 수술 이후 지난하게 이어지던 항암과 방사선 치료가 끝난 몇 달 뒤였다. 제주에 와서 제일 처음 한 일은 꽃집 찾기였다. 다이소에서 2000원짜리 작은 병을 사서 꽃집에 들고 갔다. 병에 맞춰서 꽃을 꽂아 달라고 부탁했다. 아침에 눈뜨면 상한 가지를 솎아 내고 물을 갈아 주었다. ‘찰나’와 ‘무용함’을 생각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제주에서 지낼 집은 카페공드리 사장 부부가 미리 알아봐 줬다. 머무는 동안 드는 각종 비용은 회사 선배들이 앞다퉈 댔다. 그러고 보면 내가 회사에서 배운 가장 큰 것은 기사나 취재가 아니었다. 선배들은 선배가 베푼 것은 선배에게 갚으려 하지 말고 후배에게 갚으라고 당부하곤 했다. 나는 선배들을 통해 마음은 정확하게 셈해 갚는 게 아니라 흐르는 것임을 배웠다. 고마워하되 미안해하지 않고, 받은 마음을 아직 서툰 타인을 위해 내어 주는 법도 함께 익혔다.

제주는 지천에 무덤이 있다. 밭 한가운데, 길가에, 집 옆에. 삶의 자리마다 죽음을 끌어안고 있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늘상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나는 그 모습이 몹시 보기 좋았다. 적어도 제주에서 죽음은 추상이 아니었다. 버젓이 물리적 형태를 갖고 일상에 있었다. 죽음을 삶에서 격리시키지 않았다.

내가 편집자로 처음 기획하고 만든 책인 《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시사인북, 2021)는 제주에서 보낸 그런 시간 덕분에 묶을 수 있었다. 《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를 통해 나는 ‘존엄한 죽음’ ‘좋은 죽음’이라는 단어가 감추고 있는 현실을 보여 주고 싶었다. 죽음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사건임을, 우리 모두가 연루된 일임을 드러내 질문하고 싶었다. 한 사람이 사회에서 병들고 아프며 죽어 가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다. 많은 사람이 관여한다. 삶을 이야기하다 보면 질병이, 질병을 이야기하다 보면 돌봄이, 죽음과 섞여 들었다. 우리는 왜 아프면 ‘깨끗하게 죽어 버리는’ 미래를 상상할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애써 모른 척하면서. 존엄사를 허용하는 국가들은 사회복지가 잘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존엄사가 존엄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복지가 존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나의 죽음을 운에만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의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다. 죽음을 둘러싼 각자의 내밀한 경험이 더 많은 보편의 이야기로 나눠질 때 삶도 조금은 덜 잔인해진다.

‘운이 좋다면’ 살아 있을 때 장례식을 열고 싶다. 내 장례의 상주가 되고 싶다. 당신들 덕분에 살아서 좋았다고 눈을 마주치며 인사하고 싶다. 장례식에 오는 사람들은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어야만 입장할 수 있게 할 예정이다. 조문객들이 가져오는 사진은 모두 내 영정사진으로, 장례 기간 동안 벽에 전시해 두면 근사할 것 같다. 돌아가는 길에 가져갈 제철 꽃을 준비하는 것도 장례 계획의 일부다. 시간과 자연을 목적 없이 걸어 다닌 그해 여름, 나는 꽃이 주는 무용한 기쁨과 찰나의 순간이 삶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됐다. 가능하면 그 순간과 순간들을 정성껏 보내고 싶다.

책의 말이 허물어지는 자리에서
김애란

개인적인 고백을 덧붙이자면 40대는 ‘옳은 말’을 의심하고 싫증 내는 때이기도 하다. 그 말이 틀려서가 아니라 ‘너무 자주 들은’ ‘다 아는 말’이라 여기기 쉬워서다. 그러나 그 ‘다 아는 말’ 속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이 들어 있는지. 그리고 그 삶 하나하나는 얼마나 구체적이고 육체적인지. 우리가 지레 빤한 말이라 치부한 그 말이 누군가에는 목숨 줄이고, 실존의 테두리임을 다시 깨닫는다. 그 선이 비단 타인뿐 아니라 나도 지켜 주는 선이었음을 깊이 수긍하면서.

더불어 이 책은 사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다 아는 말’이란 없으며, 그런 ‘앎’은 앎이 아니라고, 그러니 이웃뿐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새 말이 지나가는 길을 함께 터 주고 넓혀야 한다고 일러 준다. 가끔은 그 일을 ‘독서’라 불러도 좋다고 조용히 끄덕이면서. 그 발화가 고맙다. 한두 번이 아닌 누군가의 일생에 걸친 발화라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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