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유적•유물/공편도시 유적전시관

종로 일대에는 매장 문화재 전시관이 많다. 청진지구 유적전시장, 공평도시 유적전시관 등이 그것이다.

공평도시 유적전시관은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특별한 공간이다. 종로타워 뒤편에 위치하고, 26층 고층 빌딩의 지하 전체를 현장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무려 108개 동의 건물지 그리고 건물을 둘러싼 길과 천여 점이 넘는 생활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아예 권역 전체를 보존하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도시의 생활 문화를 생생하게 알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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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이
망해 볼까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그 안에 포함된 사람은 물론이고 벗어난 사람에게도 특정 삶의 형태를 강제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미친다. 무엇보다 이성애 핵가족으로 상상되는 전형적인 생애 모델은 통계상으로도 더는 유의미하지 않다. 이른바 가족 하면 흔히 떠올리는 4인 가족 형태는 절반도 되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지금은 기혼자가 되었지만, 결혼하지 않았다면 마흔 즈음에 파티를 열 계획이었다. 파티의 이름도 진작 정해 둔 터였다. ‘혼자라도 괜찮아, 당신들이 있잖아.’
그동안 뿌린 축의금을 회수하는 이벤트랄까. 마흔까지 살아온 나를 격려하고, 비혼으로 사는 것도 썩 괜찮다는 걸 전시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결혼 제도 안에 편입된 건 결혼식을 치르고도 한참 후였다. 알면서도 모른 척, 미루고 미루다 제도 안에 진짜로 편입됐을 때, 그 일은 그 문서에 적힌 그대로 ‘사건’이었다. 짝꿍이 들고 온 혼인신고 증명서에는 ‘사건명: 혼인신고’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는 이제 헤어지려면 법정을 가야 하는 몹시 귀찮은 사이가 되어 버렸다.

누구나 특별한 사람을
가질 권리

따지고 보면 고작 4만 원 때문이었다. 짝꿍은 공무원 조직 안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이다. 결혼을 증명하는 문서를 가져가면 가족수당 4만 원을 추가로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이상하고 섭섭한 마음을 애써 돌려 말했다. "가족수당 4만 원 때문에 혼인신고를 하자고 말하지 말고, 좀 더 근사한 핑계를 대 줬으면 좋았을 텐데. 어쨌든 결혼을 정식으로 축하해."
마지막 말은 내가 나에게 해 주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렇게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다. 온갖 수선을 떨며 가족 결혼식도 하고, 친구들과 결혼 파티도 따로 하고, 신혼여행이라는 걸 다녀오고, 같이 살면서도 결혼이 실감 나지 않았던 터였다. 그 어떤 형식보다도 ‘법적 구속력’이라는 게 생각보다 대단하구나, 실은 조금 감탄했다. 하지만 ‘증빙’하지 않는 이상, 그놈의 복지 혜택마저도 받을 수 없다는 건 역시 이상했다. 4만 원을 복지라고 불러도 좋을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의문이다.

생애 주기가 길어지면서 다양한 결합을 경험하며 살 가능성도 이전보다 높아졌다. ‘정상가족’으로 엮이지 않으면서 함께 살기를 고민하고 시도하는 여러 실험들 역시 계속되고 있다. 그런 관계에서 가장 높은 허들은 결국 제도다. 국민의 삶이 변해 간다면 국가도 응당 그 변화에 응답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현실의 나는 왜 조심하거나 배려하는 사람이 됐을까.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건 우연일까.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조심하라’는 당부를 듣고 자랐다. 그 결과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건 다 내가 조심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 됐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나 때문일까" 먼저 자책했다. "좀 조심하지"라는 타인의 말에 담긴 염려를 모르지 않지만 그건 따져 보면 ‘내 잘못’이라는 소리였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사고는 생겼고, 살아갈수록 ‘살아남았다’는 감각만 자꾸 선명해졌다. 그저 운이 좋아서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자꾸만 삶에 쌓였다.

대학시절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나는 나와 내 주변 여성들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할 언어를 얻었다. 페미니즘은 내게 입이 되어 주고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외면하고 싶은 고통이었다.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적당히’ 정체화하고 10년 넘게 살아온 나 역시 강남역 사건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 무엇보다 내 뒤에 오는 여성들이 나보다는 덜 울퉁불퉁한 길을 걷길 바라게 됐다. 그러려면 지금 내 몫으로 주어진 싸움을 피해서는 안 됐다.

우리는 여자애들이 야망을 가질 때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꺾어 버리고 길들여 왔는지 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우리고 나니까. 나는 유력 정치인과 바람 난 적 없고, 과도한 사이버 불링을 당한 적도 없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비슷한 일을 무수히 겪으며 깎여 나가고 작아졌다. 실수나 실패로 내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실패나 실수를 이전보다 덜 두려워하게 됐다. ‘내가 해도 될까’ ‘잘할 수 있을까’ ‘못 할 것 같아’라는 생각을 물리치는 데 저 문장만 한 부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래희망도 생겼다. 모건 부인처럼 ‘같이 망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실패하고 실수해야 잘하는 방법도 알 수 있게 된다고, 두렵다면 함께 망해 주겠다고, 그러니 우리 더는 조심하지 말자고 손 내밀 수 있는 사람. 그렇게 나이 먹는다면 뒤에 오는 여성들에게 지금보다는 조금 덜 미안할 것 같다.

여러 개의
진실 앞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종교가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종교가 있는데 왜 엄마는 하필 개신교를 택했을까. 왜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종교를 믿어야 할까. 다만, 그런 마음이 당장은 크게 불편하지 않았고, 교회 울타리 안의 사람들은 다정했으며, 그때의 나에게는 그 울타리가 필요했다. 나는 ‘우리’를 벗어나는 방법을 몰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연약한 믿음을 탓하며 기도하는 일이었다. 의심하지 않는, 흔들림 없는 사람들의 믿음과 맹목이 부러웠다.

교회라는 건물 밖에 ‘진짜 믿음’이 있다면? 교회에 매주 출석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면? 나의 질문 역시 자꾸만 교회 바깥을 향해 뻗어 나갔다. 습관으로 믿음을 유지하고 싶지 않았고, 교회 안에서 만들어진 관계 때문에 믿는 ‘척’을 한다는 사실이 점점 용납하기 힘들어졌다. 앎은 실천되어야 했다. 삶이 내게 준 충동 앞에 똑바로 서자고 마음먹었다.

교회와의 단절은 예상보다 쉬웠지만 그로 인해 생긴 엄마와의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내가 조금만 아파도, 내게 조금의 무슨 일이 생겨도, 엄마는 그게 내가 교회에 가지 않기 때문에 받는 ‘벌’이라고 퍼부었다. 정확히 내가 교회를 벗어난 그 이유로, 엄마는 나를 비난했다. 지긋지긋한 기복신앙이었다. 나는 교회라는 껍데기를 버린 거지 신앙을 포기한 게 아니라는데도 엄마는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나도 엄마의 ‘무지’를 나무라며 함께 퍼부었다. 그땐 돌려줄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인 것 같았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성경 구절을 줄줄 외던 딸, 성가대에 서고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던 딸의 난데없는 변심과 반항 앞에 엄마도 당황하지 않았을까. 교회와 교회 커뮤니티는 엄마에게 예나 지금이나 전부와 다름없었다. 그걸 부정하는 딸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 같지 않았을까. 나는 그런 엄마의 괴로움과 상실감을 못됐지만 조금은 즐겼다.

신앙이 엄마를 버티게 했다는 건 조금 뒤늦게 깨달았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할머니 덕분이었다. 2011년 최저 생계비 취재를 위해 한 달간 서울 달동네에 들어가 살았을 때였다.
바로 옆방인 노부부의 집에서는 자주 나지막한 찬송가가 들려왔다. 얇디얇은 벽을 타고 무람없이 공유되는 소리야말로 가난의 맨얼굴이었다. 여름의 끝이었고, 한 달 간의 취재가 끝나고 짐을 싸던 내게 할머니는 미숫가루 한 사발을 들고 왔다. "아가씨, 교회 다녀? 교회 다녔으면 좋겠다." 대답 대신 나는 물었다. 엄마에게 묻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왜 교회에 다니세요?" 할머니가 지긋이 웃었다. "교회에서는 내가 평생 들어 보지 못했던 예쁜 말만 해 줘." 맥이 풀렸다. 그 할머니도, 어쩌면 엄마도 교회가 아니었다면 삶의 비참을 견딜 수 없었겠구나. 나는 할머니에게 교회에 다니겠다는 약속 대신 "저도 예수를 믿어요"라고 대답했다.
다만 나는 할머니도, 엄마도 아니었기 때문에 삶의 비참을 다르게 견디고 싶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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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다가도 슬픔이 묵직하게 방문하면 마음 둘 곳을 몰라 서성인다. 가능하면 몰려오는 감정을 피하지 않고 맞선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굉장한 재능 중 하나다. 꼭 그만큼 삶이 넓고 깊어진다. 싫어하는 것들은 금방 잊어버리고,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늘려 가면서 살고 싶다.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이 늘어날 때마다 싫어하는 것들이 나를 침범해 올 때 숨거나 도망갈 수 있는 요새를 짓는 기분이 든다.

내 마음에는 할머니 무덤도 있고, 아빠 무덤도 있고, 종현의 무덤도 있다. 살아 있는 일은 마음에 그렇게 몇 번이고 무덤을 만드는 일임을, 슬픔은 그 모든 일을 대표하는 감정이되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인사하고 돌아서는 내 등을 뾰족한 것이 지그시 눌러 왔다. 두꺼운 점퍼를 입었지만 느낄 수 있는 날카로움이었다. 아저씨는 나긋한 목소리로 그것이 칼임을 알렸다. 본관 건물 뒤쪽으로 나를 몰았다. 죽일 수 있지만, 죽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했다. 바지와 속옷이 차례로 벗겨지는 동안 나는 오줌을 지렸다. 나지막한 소리로 욕하는 그에게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시늉을 했다. 너무 무서우면 목소리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동시에 찾아왔던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토막 쳐진 기억 속에서도 지금까지 또렷하게 기억나는 이 수치심은 오랜 시간 내게 벌어진 일을 해석하는 데 방해가 됐다.

발도 키도 크는데, 몸무게만큼은 좀체 늘지 않았다. 2차 성징은 더디게 왔다. 차라리 남자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남자가 아닐까 상상했다. 생리를 하지 않는 건 그때의 경험 때문일까 싶었다

‘지나간다’는 말 안에는 얼마나 많은 고통이 웅크리고 있는지. 몇 번쯤 죽음을 결심했다. 고등학교 2학년 봄방학을 앞두고 생리가 시작됐을 때, 나는 그걸 작은 신호로 받아들였다. 나는 망가지지 않았다고, 나도 정상 범주 안에 속해 있다고 안도했다.

계절이 거듭되는 동안 반복되던 악몽도 잦아들었다. 살아남았으므로 살아 보기로 했다. 이왕이면 ‘잘’ 살고 싶었다. 뒤늦게 진학한 대학에서 만난 페미니즘은 문자 그대로 복음이었다. 별생각 없이 신청한 페미니즘 교양 수업 하나가 삶의 지축을 바닥부터 흔들었다. 교수 이름을 검색창에 넣어 보고 나온 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교수는 과거 부천 성고문 사건 속 ‘권 양’이었다. 내 눈앞에 권인숙 교수가 되어 강단에 서 있었다. 자신의 삶이 빠뜨린 함정에서 걸어 나와 마침내 살아남은 사람.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 앞에 서 있었으므로, 나는 처음으로 과거가 나를 반드시 망가뜨리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 뒤에도 내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부인과 도망이 필요했다. 여성으로 사는 일은 일상의 크고 작은 성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페미니즘 덕분에 삶에서 아주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다. 페미니즘은 내게 입이 되어 주고,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생존자’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을 때 몇 번이고 발음하며 입 안에서 굴려 봤다.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라니 감격스러웠다. 내가 경험한 폭력을 입 밖으로 꺼내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어느 것도 사소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를 둘러싼 풍경도 달라졌다. 나는 혼자가 아니고, 내가 당한 일은 내 잘못이 아니며, 나는 이 고통을 ‘자원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고통과 더불어 살아갈지, 어디에 서서 고통을 바라보아야 할지에 따라 고통은 다르게 해석된다."

말하고 난 후에야 ‘다음’을 꿈꿀 수 있었다. 다음으로 가고 싶었다.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의 자리로 온전히 이동하고 싶었다. 말하는 동안은, 글로 적는 동안은 그럴 수 있었다. 11살 어린이를 성폭행하고 암매장한 사건으로 떠들썩하던 2006년이었다. 그즈음 나는 용서라는 단어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있어요’라고 일기장에 적고 또 적었다. 그건 내가 다시 쓰는 역사였다. 그 안에서 과거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사소한 일이 됐다. 비참을 기어코 안도할 수 있었다. 내게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큰 숙제였다. 나는 그 해석을 몇 번이고 고쳐 썼다. 증오를 연민으로 바꾸기 위해 애썼다. 그래야 내가 살 것 같았다. 평생 그 기억에 갇혀 살 수는 없었다. 계속 도망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는 것’과 ‘사는 일’은 별개였다. 먼지 쌓인 묵은 기억은 편히 쉬지 못했다. 몸이 기억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성폭력 관련 기사를 가능하면 피해 다녔다. 혹시나 내가 관련 사건을 취재하게 될까 봐 어디선가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내려앉곤 했다.

가해자 이름을 가리면 구분조차 어려운, 판에 박힌 듯한 크고 작은 성폭력 피해 사례를 기어코 직시해 겹쳐 보고 모아 보며 알게 됐다.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살아 있는’ 일이다. 고통의 원인은 내가 아니라 사회다. 수치심은 비밀 안에 싸여 있을 때에나 존재한다. 성폭력 생존자를 위한 가이드북 《아주 특별한 용기》의 저자들 역시 ‘침묵 깨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많은 생존자들은 다른 생존자들이 보여 주는 용기를 보면서 동기 부여가 된다. 생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친구에게 드러내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책을 쓰고, 가해자(혹은 기관)를 고소할 때 그녀는 다른 생존자들에게 침묵을 깨라고 자극하는 중이다. 많은 여성들이 다른 생존자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치유를 결심하게 된다." 성범죄 특성상 가해자가 피해자의 수치심과 침묵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피해가 가시화되면 추가 피해를 막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도 타인을 살리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를 포함해 많은 여성이 그 깨달음의 폐허 위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지치지 않고 증언을 이어 가고 있다.

존재가 있어야 부정도 할 수 있다는 말, ‘아니’라는 이름 안에 담긴 분명한 존재감은 우리의 삶을 바꿨다. 그해 여름, 불쑥 내 삶에 연루된 고양이 ‘아니’는 여러모로 내 삶을 흔들었다.

이렇게까지 무언가를 강렬히 그리고 속속들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존재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를 기르는 일은 전전긍긍을 동반한다. 그것이 고양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나는 약하고 작은 존재인 아니와 함께 살면서 어린 사람과 함께 사는 타인의 기쁨과 보람과 고단함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사랑은 피곤을 동반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는 일임을 배웠다.

나 역시 아니를 통해 ‘현재’를 산다. 무엇보다 내가 구한 줄 알았던 고양이는 나를 구했다. 불현듯 암 환자가 되었을 때 특히 그랬다. 지독하게 이어지는 치료에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나는 간신히 아니를 떠올렸다. 그리고 아니의 남은 시간을 세어 보곤 했다.

우리는 기적 같은 ‘완치’라는 단어를 좋아하지만, 암은 완치되지 않는다. 비관할 일이 아닌 의학적 사실일 뿐이다. 다만 진단 이후 5년 이상 생존한 환자는 병증이 호전되는 기간을 의미하는 관해기remission에 접어드는 것으로 본다. 5년 이상 살면 무엇이 좋은가. 골몰하는 사이 아니가 내게 다가와 제 머리를 콩콩 들이밀며 부볐다. 고양이의 ‘헤드 번팅’은 집사에게 자신의 페로몬을 묻히는 것으로, 집사를 자기 영역이라고 선언하는 애정 표현이다. 내가 병과 함께 5년을 버티면 우리 고양이는 아홉 살이 된다. 오래 사는 고양이는 스무 살까지도 살 수 있다고 하니, 아마도 자기 생의 절반쯤 되는 나이가 되는 셈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날이면 나는 가라앉는 몸과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 애쓸 수 있었다. 아니를 마지막까지 내 손으로 책임지고 싶다는 생각은 부족한 ‘생의 의지’를 앞질렀고, 끝내 나를 구했다.

따로 자던 고양이가 이불 속으로 들어오면 그때부터 가을이다. 사람이 없는 집에도 고양이는 있기 때문에 한여름에는 에어컨이, 한겨울에는 보일러가 쉬지 않고 돌아간다. 나는 더는 전기료 5400원을 내던 가구원이 아니다. 무엇보다 고양이 몸에서 가장 추워 보이는 귀가 따끈따끈하면 마음이 누긋해진다. 나는 잠든 고양이의 귀 끝을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특히 고양이 귀 끝 주름을 만질 때면 초보 집사 시절이 떠올라 매번 웃는다. 고양이 귀 끝은 마치 찢어진 것처럼 보인다. 초보 집사였던 나는 매끈하지 않은 고양이 귀가 찢어진 거라고 생각하고 울면서 병원에 간 적이 있다. 인간이 있든 말든 침대 위로 올라와 가로로 길게 누워 버리는 고양이를 볼 때면 ‘역시 잘 키웠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고양이가 이렇게 제멋대로인 것이 안심이 된다.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제대로 한 일은 없는 긴 하루들의 반복 속에서 나는 자주 일을 좋아하는 건 역시 조금 슬프고 쓸쓸하다고 여긴다. 그런 삶이지만 고양이와 누울 수 있는 하루 몇 시간 덕분에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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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장소/목포

전라남도 서남단에 있는 시. 남해의 많은 도시가 그렇듯 목포 역시 이순신과의 연관이 깊다. 정유재란 때 목포 앞바다 고하도에서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유달산이 유명한데, 유달산 노적봉도 이순신이 군량미를 쌓아둔 것처럼 활용하여 적군을 물리치는 데 기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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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은 감정을 떠안고 살아서, 상담실에 오자마자 순식간에 허물어지고는 한다.

그레이스와 스테이시는 전형적인 의미형과 안정형의 조합 같았다. 상대를 통해 균형을 찾고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싶어서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을 것이다. 스테이시는 삶의 체계와 외부 세계의 법칙을 잘 알고 있으니 그레이스에게 그런 면에서 모범을 보여주었을 테고, 그레이스는 풍부한 정서와 창의적인 성향이 있으니 스테이시는 감탄하고 때로는 질투했을 터였다. 하지만 쿼터라이프 시기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이런 무의식적인 교환 관계는 각자 성장하면서, 혹은 성장하려 애쓰면서 손상을 입을 수 있다.

나는 첫 번째 상담에서는 공식적인 ‘정보 섭취’를 지양하는 편이다. 정보를 모으는 것보다 관계 형성에 중점을 둔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혹시 위험한 상태는 아닌지 알아두기 위해 몇 가지를 물어보고 싶었다. 그레이스의 심리적 건강을 확인하려는 목적으로 식사는 잘 하고 있는지, 잠은 잘 자는지, 혹시 약물을 복용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레이스는 음, 하고 생각에 잠겼다. 꼭 나와 어디까지 공유할지 머릿속에서 자기 자신과 논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리화나랑 담배를 자주 피우긴 하는데, 그게 전부예요."
"얼마나 피우는데 자주 피운다고 해요?"
"음, 보통 일하러 가기 전 한낮에 피우고, 다녀와서 밤에도 피워요. 잠자는 데 도움이 되거든요."
"잠이 잘 안 와요?"
"네. 어렸을 때부터 잠을 잘 잔 적이 없어요."
"어렸을 때부터 쭉?"
"네, 정말이에요. 엄마도 그러던데요. 아기 때부터 잠을 통 안 잤다고요."
"왜 그런지 알아요?"
"악몽 때문에요…." 그레이스는 또 얼굴을 찌푸렸다. "항상 악몽을 꿔요. 어린 시절부터."
어렸을 때부터 줄곧 악몽을 꿨다니, 그런 삶이 얼마나 힘들지 나는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보아하니 그레이스는 두려움 없이 잠들기 위해 마리화나를 사용하는 것 같았다. 나는 훗날을 위해 이 사실을 유념해두었다.

나는 금세 눈치챘다. 그레이스는 다양한 감정에 불편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울다가도1분 만에 웃음을 터뜨리고 자신의 감정을 돌아볼 줄 알았다.

어린 시절에 그레이스는 보수적인 사회 속의 퀴어이자 항상 가난 근처를 맴도는 가족의 딸이었고, 삶은 쉽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혼까지 겹쳤다.

몇 차례 상담을 진행해보니 그레이스가 굉장히 외향적인 사람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레이스는 친구들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함께 어울리는 친구 모임은 규모가 큰 데다가 줄곧 새로운 일원이 들어왔다. 그레이스는 친구들과 즐겁게 웃으며 놀거나 함께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고,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정서적으로 지지해주었다. 그레이스가 포틀랜드에서 살고 있는 삶은 어렸을 때 즐기지 못한 충만한 사랑과 즐거움을 기반으로 했다. 그런 공동체를 찾아낸 것은 훌륭한 일이었다. 그레이스와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한 다른 여성은 안정형이 되어 막대한 업무와 책임에 자신을 파묻어버리기도 했다. 실제로 어린 시절의 그레이스는 열다섯 살에 처음으로 일자리를 구해 줄곧 생활비가 쪼들리는 어머니를 도와주면서 가정의 안정에 한몫했으나, 자신이 "책임과 스트레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의미형은 외부의 기대보다는 자기 내면에 집중한다. 만약 의미형이 바깥세상에 집중하고 있다면, 자기 삶의 안정보다는 타인의 고통과 부정의에 민감할 가능성이 높다. 본능적으로 세상의 거대함을 의식하기에, 문화적?사회적 기대 같은 것은 무의미하고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의미형은 돈이나 계획 같은 것을 ‘허구적’이고 ‘인공적’이라고 인식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자신이 야행성이라고 느끼는 의미형도 있다. 밤에는 외부의 기대가 거의 느껴지지 않고, 바깥세상에 나가야 하는 압박이 없으니 더 편안해하는 것이다. 그레이스가 이런 경우였다.

의미형은 고대 그리스에서 ‘카이로스’라고 부르던 비선형적인 시간이나 시간 감각이 없는 상태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나는 그레이스가 상담 시간에 늦는 법이 없어서 놀랐는데, 알고 보니 그레이스는 절대 늦지 않으려고 거의30분이나 일찍 와서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으나 상담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늦지 않으려고 특별히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중요한 점은 상담이 일관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된 덕에 그레이스가 더 쉽게 나를 신뢰하고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상담을 했으며, 대기실에 가면 항상 차 한 잔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정해져 있었다. 그 덕에 그레이스는 매주 의지할 수 있는 안정의 틀을 얻을 수 있었다. 상담은 지켜야 할 일정이기도 했지만 일종의 의식이었다. 그레이스의 의미가 확장할 수 있도록 충분한 공간을 제공하는 일관적인 행위였고, 그레이스를 숨 막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쏟아부을 수 있게 만드는체계였다. 이는 앞으로 우리가 함께 해나갈 작업에 관한 암시였다.

그레이스는 삶의 체계가 절실했다. 체계가 없으니 친구에게도 직장 동료에게도 자신을 끝없이 내주기만 해서, 결국에는 자신이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가는 물웅덩이 같은 마구잡이의 존재라고 느끼고 말았다. 그레이스는 주변 사람의 기분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아주 멀리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 공감력이 있었다.

하지만 금세 녹초가 되었다. 지나치게 외향적인 생활을 이어가다가, 극단적이고 병적인 내향성으로 과도하게 보상했다. 몇 주 동안 끝없이 타인을 보살피다가, 며칠, 몇 주 동안 휴대폰도 확인하지 않고 스테이시를 제외한 그 누구도 만나지 않으면서 지나친 자극을 차단한 채로 사실상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레이스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몰랐고, 자신을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몰랐기 때문에 줄곧 양극단을 오가곤 했다.

그레이스는 스테이시가 훌륭하게 해낸 것처럼 삶의 틀을 구축해야 했다. 의미를 잡아줄 체계, 포도주를 담아줄 술잔이 필요했다. 더 명확하게 자신의 경계를 설정하기 전에는 내면에 있는 모든 의미를 담아내지 못할 것이었다.

그레이스를 비롯한 의미형이 쿼터라이프에 진입하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보호벽을 쌓지 못해 제각각의 어려움을 겪는다. 체계를 개발하는 작업을 힘겨워하거나, 삶의 체계에 집착하는 건 ‘영혼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그레이스는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정해서 삶의 안정성을 다질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 혼자서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어 관계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레이스의 상담 목적은 삶의 균형에 집중한 자기 내면의 발달이어야 했고, "정신 차리라"든지 "철들라"는 등의 조롱 섞인 문화적 서사에 순응하라는 암시는 피해야 했다.

그레이스는 성인으로서 존중받고 자유를 누리고 싶었으나 자기 자신을 잃기는 싫었다. 어린 시절 동안 극심한 스트레스와 고립을 겪었지만, 마침내 자신의 가치와 부합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욕구가 "배가 불렀다"라거나 "비현실적이다"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레이스에게 아직 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뻤다.
그레이스의 삶에 더 탄탄한 기반과 안정성을 다지는 것이 지속 가능한 성인기를 구축하기 위한 주요 작업이 될 것이었다. 우리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할 계획이었고, 그중에는 그간 그레이스가 얼마나 많은 아픔을 이겨냈는지 알아보는 트라우마 기반의 치료도 포함되어 있었다. 힘든 작업이 되겠지만, 단순히 ‘철들기’ 혹은 ‘정신 차리기’가 목표는 아니었다. 그레이스는 술잔이 필요했으나 그 대가로 포도주를 버릴 수는 없었다.

모로코에 있는 창작촌 같은 곳에 살면서, 온종일 지중해 해변에서 빈둥거리거나, 연필을 씹으며 시구를 고민하느라 엷은 갈색 피부가 더 짙게 그을린 듯한 모습이었다. 대니는 종종 자기 머릿속에서 길을 잃은 채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만 했다. 철학적이고 낭만적인 생각에 몰두했고, 혼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상담을 시작한 것도 벌써 몇 달 전이었다. 대니는 첫 상담부터 많은 것을 공유했다. 이를테면 자신에게 조울증이 있다는 것, 다양한 이유로 연애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 혼란스러운 신체적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 항상 피곤하다는 것 등등. 대니는 정말이지 피곤하다고 했다. 자신의 피로감과 소화불량에 관해, 해답을 찾기 위한 여정에 관해 길고 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대니가 알고 있는 또 다른 사실은, 자신의 인생에 중대한 변화가 생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체 증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서적인 문제가 얽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대니는 성별 이분법적 사고와 사회가 남성에게 기대하는 유독한 남성성에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바라는 것만큼 남성적이지 않은 자기 모습 때문에 주기적으로 침울해지고는 했다.

대니에게는 그 어떤 것도 칼로 자른 듯 명확하지 않았고, 우리가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성별 정체성이 화두가 되고는 했다. 인종 정체성도 마찬가지였다. 대니는 인종에 있어서도 여러 집단 사이에 끼인 듯, 불확실함에 얽매여 있는 듯 느꼈다. 대니는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혈통을 타고났지만 피부색이 밝았고, 신속하게 타인의 인종을 구분해내고 싶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했다.

대니가 자기 몸에 역겨움을 느낄 때 그 원인이 인종인 경우는 드물었고, 항상 자신의 부족한 남성성이 실망스러워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때로는 그가 느끼는 피로감과 관련이 있었지만, 그저 몸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였다. 대니가 자기 몸을 혐오하는 이유는 몸을 먹여야 하고 씻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일, 철학적인 고민이나 예술 작업에 매진해야 하는데 말이다. 대니는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침대맡에 올해 말까지 읽으려고 계획해둔 책이 두 줄로 쌓여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대니는 자기 몸이 요구하는 것은 전부 방해 요소처럼 느껴져 신경질이 났다.

수많은 쿼터라이퍼가 자기 몸에, 자기 몸과의 관계에 깊은 의아함을 품고 산다. 자신의 생물학적 성별과 성별 고정관념에 온전히 동의하지 못하는 대니 같은 사람들에게 더 확연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자기 몸을 증오하는 이유는 더 근본적일 수도 있다. 그 이유가 성별이나 혼란스러운 인종 정체성 때문이든, 섹스와 친밀감을 향한 두려움이나 불편함 때문이든, 만성적인 질병이나 장애, 트라우마 이력, 음식과 식이 문제, 몸에 ‘갇혀’ 있다는 실존적 감각 때문이든, 쿼터라이프 시기에는 살아 있고 몸이 있다는 삶의 조건과 화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쿼터라이프는 자기 몸을 의식하고 사랑하면서 몸과 관계를 다져나가는 시기다. ‘결점’이 있거나 정확한 기능과 보호에 ‘실패’한 몸을 용서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몸의 크기나 형태, 색깔이 이상하다면서, 장애가 있고 완전하지 않다면서 조금씩 유해한 가르침을 주입해온 가부장제와 백인 우월주의적 가치관을 차단해내야 할 수도 있다. 자기 몸에 결점이 있다는 생각은 셀 수 없이 많은 심리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데, 역사적으로 지극히 소수의 인간이 만들어냈음에도 영구히 지속해온 유독한 가치 체계 때문이다.

나는 대니가 간편한 처치 하나로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고, 그러기를 장려하지도 않았다. 이는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과정이자 문화와 가족의 기대를 통해 내면화한 모든 것을 직면하는 장기적인 과정이었다. 대니는 남성성에 관해 고민하고, 신체적 증상을 해결하고, 자신의 인종 정체성이 미국에서 어떤 의미인지 탐구하는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대니에게 더욱 중요한 선택이 있다고 생각했다. "죽느냐 사느냐" 사이에서 갈등한 것으로 유명한 쿼터라이퍼 햄릿과 마찬가지로, 대니는 자기 내면의 중심에 있는 감정, 살아있다는 사실을 향한 모순적 감정을 직면해야 했다.

나는 의미형이 안정을 쌓아가는 과정을 ‘몸으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대니에게 필요한 것은 줄에 매인 소처럼 내키지 않는데도 시간과 시대에 질질 끌려다니는 기분으로 사는 대신, 삶에 참여하겠다는 의식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대니의 성장은 오직 그만이 누를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스위치를 눌러야 시작될 수 있다. 대니는 자기 몸 안에서 살아있기로결심해야만 하는 것이다. 온전한 삶을 이뤄내려면 자신의 두 발로 삶에 오롯이 뛰어들어야 한다.

의미형과 작업할 때는 삶에 참여함으로써 성장과 치유를 향한 노력이 시작되는 경우가 잦다.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안정을 이룩하기 위한 기반이 된다. 두 발로 삶에 뛰어들 수 있도록 응원하는 행위는 "원래 삶은 고통이야, 정신 차려!" 같은 말로 다그치는 것과는 다르다. 그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모순적인 감정 속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고통이 없어지지는 않아. 생에는 언제나 고통이 있고 우리 시대의 삶은 복잡하고 불확실하지만, 이곳에도 기쁨과 아름다움이 있어."

내가 제시하는 목표는 자신이 태어난 세상에, 시대에, 삶에참여하는 것이다. 삶의 힘겨움을 전부 겪어내고 살아내겠다는결심 없이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도 내면의 성장 스위치가 켜지지 않는다.

몸으로서 살겠다는 결심, 실체가 있는 몸 안에서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면 의미형은 자신에게 부족했던 의지와 헌신을 발휘하고 진정한 삶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살겠다고 선택함으로써, 지금이라는 역사 속특정한 순간을, 자신이 부여받은특정한 몸과 가족 등 다양한 조건을 전부 받아들일 수가 있다. 이러한 특정한 조건들에,지금 이 삶을 사는 일에 헌신하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 때가 많다. 의미형은 생각도 거대하고 감정도 거대해서, 무한한 우주의 일부가 되기를 꿈꾸거나 역사 속 다른 시대에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상상하기도 한다. 그러면 지금 이곳에 속하는 몸으로서의 삶은 답답하고, 제한적이고, 고통으로 가득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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