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관계는평생의 학습을 요구한다

모든 인간관계는 어렵고, 세심함을 요구한다. 남녀관계 역시 당연히 그렇다.

남녀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고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자기 머릿속에 머물고 있는 지극히 사적인 생각, 자기만의 신념 등이 자신과 상대방, 즉 남녀 전체를 위한 절대적 가치라고 착각하는 자이다. 자신은 전체를 대표하고 이끄는 주연이며, 상대방은 이 전체에 기여해야 하는 조연이다. 상대방은 자기를 이해해주어야 하고, 자신의 쾌락을 위해 기여해주어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괴로운 일도 결국 전체에게(그러나 사실 그 자신에게만) 좋은 즐거움, 적어도 용인되어도 괜찮은 쾌락이라고 착각한다.

당연히 우리는 전체의 일부가 아닌 개별자들이다. 전적으로 서로 다른 자들이, 각자의 고유함 때문에 합쳐지지 못하고 계속해서 서로 다른 자들로 남아 있는 것이 남녀관계이다.

남녀관계 속에서 인간은 결코 상대방의 소유물이 되지 않는다. 줄곧 상대방을 위해 미소 짓지도 않는다. 각자는 상대방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며 더 많이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서로에게 영원히 들어맞지 않는 퍼즐 조각들이며, 전체 그림 같은 것은 결코 맞추어지지 않는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길은 무엇인가? 오로지 상대방의 고유성, 서로 다름, 하나의 전체로 합일하려 하지 않는 상대방의 필연적인 고집을 존중하는 길밖에 없다.

어리석은 인간은 자기 앞의 한 사람을 순응시키려 하고, 자신의 식민지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모두와 다른 고유함’이라는 타인의 본성이 이를 허용하지 않는 까닭에 그의 시도는 결국 좌초하고 만다. 타인은 그가 있는 바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각자의 본성에 따라 살도록 놔두기. 이것이 자유인의 공동체가 제일로 삼는 교육이다.

동물은 우리에게무엇인가

사람들은 동물을 보호한다. 동물이 활용 가치가 높은 자원이라서 그런가? 인간은 살기 위해 환경을 필요로 하고, 동물은 그 환경의 일부이기에 보호하는가? 결국 인간을 위해서? 아니면 우리는 동물에 대해 정말 순수한 도덕적 책임을 지니는가? 인간은 거의 책임을 지지 않고 수많은 세월을 보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지구의 주인으로 행세해왔고, 같은 맥락에서 동물을 지배하고 사용해왔다. 이런 일의 기원에는 적지 않게 유대·기독교적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우리의 삶을 보라. 그 삶의 핵심은 우리가 대체 가능한 살아 있는 장난감과 논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고유한 영혼과 교류한다는 것이다.

동물은 우리에게 동물의 권리에 대해 생각하고 실천하도록 만들지만, 동물 그 자신은 신이나 인간이 만든 어떤 법 아래에도 놓이지 않는다. 법 아래 놓이는 동물도 있긴 한데, 그것은 인간적 삶의 은유에 불과하다.

오히려 동물은 신과 인간이 부과하는 초월적 법을 파괴하고 생명 그 자체를 구가할 수 있는 길을 인간에게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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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기만,영혼의 질병

책임지지 않는 것,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것, 이것이 자기기만이다.

쾌락을 즐기면서도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변명하는 것,이것이 자기기만이다.

중요한 점은 사회를 절망에 빠트리는,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많은 상황들은 바로 이런 자기기만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직장에서, 이런저런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정치의 영역에서 불의를 목격하고, 또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음모를 목격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난처하고 귀찮은 정의의 요구를 피하기 위해서 자기기만이라는 달콤한 이불 속으로 피신해왔다.

인류에 대한 책임을 지는 데 직책이 필요한가? 직무에 따라서만 타인을 지키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직무에 따라서만 정의에 헌신하는 자가 어디 있는가? 정의에 대한 헌신은 내가 자리한 어떤 사회적 직책에도 제한받지 않는다.

서양의 본질, 우울과 여행:바다 이야기 1

우울(멜랑꼴리아melancholia)을 떨쳐버리기 위해 바닷바람을 쐬고 있는 여행자는 일상과 영화 속에, 현실과 허구 속에 흔하고 흔하다. 무거운 마음을 지닌 이 여행자의 뒤에는 장대한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멜랑콜리아라는 성향은 고대부터 연구되었으며, 의학, 철학, 문학 등의 관심이 교차되는 영역에 놓여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선 네 가지 체액, 즉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에 따라 사람의 성향이나 질병의 원인을 파악했다. 그리고 우울한 성향은 흑담즙, 다시 말해 ‘멜랑melan(검다) 콜레chol?(담즙)’에서 발생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멜랑콜리아는 질병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뒤러와 동시대를 살아간 신비주의자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Heinrich Cornelius Agrippa von Nettesheim는 멜랑콜리아를 3단계, 즉 ‘상상력과 예술가의 단계’, ‘이성과 과학자의 단계’, ‘직관적 사유와 신학자의 단계’로 구분했다. 뒤러의 <멜렌콜리아Ⅰ> 속 주인공이 예술가와 과학자와 신학자에게서 볼 수 있는 강렬한 지적 눈빛을 가진 것은 바로 멜랑콜리아가 저런 창조적 능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우울의 원천은 무엇인가? 멜랑콜리아는 서구 종교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종교개혁 시대, 자발적 선행이 아니라 신의 은총에만 의존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운명 종속의 사상이 "위대한 인물들의 마음속에는 우울함을 심어놓았다"고 쓰고 있다.

이 ‘공허한 세계’의 명칭이 바로 ‘우울’이다. 그리고 현대의 염세주의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자기 내면에서 이 우울을 발견해왔다.

철학의 중심을 내면에 대한 탐구로 옮겨놓은 자는 파스칼과 동시대를 살아간 데카르트Rene Descartes였다. 그러나 데카르트와 달리 파스칼에게 내면은 이성적 통찰의 대상이기보다 ‘비참’, ‘불행’, ‘권태’로 가득 차 있으며, 그것들은 ‘우울’의 또 다른 이름들이다. 이 우울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 자체와 대면하는 데서 생기는 정서이다.

내면이 안식의 장소가 아니라 못 견디게 만드는 재앙의 장소라면, 인간은 자기 바깥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다. 바로 ‘여행’을 하는 것이다.

죄의식으로 가득한 영혼이 유럽에서 탄생했고, 구원받지 못할 자기 운명의 가능성을 내면에서 우울하게 응시하던 이 영혼으로부터 여행의 꿈이 탄생했으며, 그 꿈이 우울한 유럽을 벗어나 우연히 신대륙 발견으로까지 이어졌다고 한다면 과장된 생각일까? 물론 이 모든 일은 신대륙의 황금이 강력한 자석처럼 곁에서 이끌어주어야 했지만 말이다. 유럽은 원죄와 죄의식과 말세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우울은 유럽을 자신의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싶게 만들었다. 그것이 콜럼버스, 마젤란Ferdinand Magellan, 다 가마Vasco da Gama 같은 여행가들을 탄생시켰다.

물과 바다의 철학:바다 이야기 2

물은 태곳적부터 인간의 삶에 개입해왔다. 자연으로서뿐만 아니라, 도덕적 징벌이나 존재론적 개념 또는 경제적 환경으로서 말이다.

삶에서 물이 근본적임을 알려주는 것이 홍수 신화만은 아니다. 최초의 철학자라 불리는 기원전 6세기의 탈레스Θαλ??는 만물의 원천이 ‘물’이라고 했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이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를 등장시켜 이렇게 말하게 한다.

만물은 물에서 생겨났도다!
만물은 물로써 생명을 유지하도다!1

이런 강물의 이야기를 넘어서 인류는 ‘바다’라는 더 큰 물과 조우하게 된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 중 배를 타야 했는데, 심한 멀미가 그를 괴롭힌다. 그러다 그는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감동적인 체험을 하게 되고, 이를 《이탈리아 기행》에 기록했다. "어디를 둘러보나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세계를, 그리고 자신과 세계와의 관계를 진정으로 파악할 수 없다."2 이 말은 괴테의 경험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바다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세계를 넓혀나갈 수 있었던 인간의 보편적 경험을 표현한다.

땅의 경영에 못지않은 바다의 경영을 이야기하면서, 서구의 대항해시대와 이후 근현대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대항해시대 이후, 바다로 나가는 일 자체에 엄청난 가치가 부여되었다는 것은, 예컨대 19세기 철학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다음 구절들만 읽어봐도 잘 알 수 있다. 니체는 자신이 동경하는 바를 바다 너머의 ‘지복의 섬’에 투영했다.

함성을 치듯, 환호를 지르듯 나는 저 드넓은 바다를 넘어가겠다. 내 벗들이 머물고 있는 저 지복의 섬을 발견해낼 때까지.(…) 이제 나는 내 아이들의 나라, 아직 발견되지 않은, 멀고 먼 바다에 있는 그 나라만을 사랑한다. 나는 내 돛에 명하여 그 나라를 찾고 또 찾는다.(…) 아득히 먼 바다에 있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땅! 이 땅을 찾고 또 찾으라고 나는 그대들의 돛에 명한다!5

이런 구절들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드물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바다는 유럽인들에게 새 땅을 안겨주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실제 역사 속에서 유럽은 바다를 지배한다. 유럽의 바다 지배는 서구의 번영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식민지가 된 다른 세계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땅과 바다라는 대조적인 두 축을 중심으로 현대 유럽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20세기 카를 슈미트Carl Schmitt의 《땅과 바다》는 얼마간 헤겔의 착상을 이어받는다. 슈미트는 말한다. "세계사는 땅의 힘에 대한 대양의 힘의 투쟁, 대양의 힘에 대한 땅의 힘의 투쟁의 역사란다."

유럽의 대지가 수많은 국가에 의해 분할된 데 반해, 바다에선 오로지 영국이 주도적이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아는 바처럼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전 지구에 식민지의 고통을 안겨주는 국가가 된다. 이것이 최종적인 "유럽 전체의 약진의 결과"라는 것이다. 요컨대 영국의 성공 이전에, 또는 그와 맞물려 유럽 전체가 바다에 나가 나름의 힘을 겨루었고, 그 힘겨루기의 결과란 식민지 쟁취였다.

슈미트는 유럽이 합리성 측면에서 다른 세계보다 우월하고, 그래서 다른 민족들에게 명령하는 지위를 누리며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다고 이해한다.

헤겔의 눈에나 슈미트의 눈에나 바다는 오로지 서구인의 역사에 속한 것일 뿐이었다. 당연히 오늘날의 바다는 그럴 수도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오늘의 바다는 세계 시민의 것이고, 또 무엇보다 난민들을 위한 바다이다.

아이네아스,
보트피플의 로마 건국:바다 이야기 3

《아이네이스》는 호메로스의 완성된 퍼즐을 엎었다가 그림을 어색하게 다시 맞추어놓은 듯한 인상을 숨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고전끼리 키재기를 시키는 독법이 무슨 소용인가? 고전을 대할 때 관건은 진열장의 상품처럼 가격을 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어떻게 일깨우는지 깨닫는 것이다

《아이네이스》의 후반부는 정복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고, 전반부는 보트피플의 방황 이야기이다. 그래서 후반부는 전쟁의 서사시인 《일리아스》를 모범으로 삼고, 전반부는 바다에서의 방황 이야기인 《오뒷세이아》를 모범으로 삼는다. 작품의 골격은, 트로이 멸망 후 여신 비너스의 아들이자 트로이 왕족인 아이네아스가 트로이 유민들과 함께 온갖 방황을 거쳐 이탈리아에 상륙해 로마의 선조가 되는 이야기이다. 작품 중간중간 아이네아스와 그 후손인 미래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등의 연관성을 제시함으로써 로마인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해주는 로마의 민족 서사시가 《아이네이스》이다.

지배자가 옹호하는 국가의 창건 신화들이 그렇듯 《아이네이스》는 로마의 주류적 인물들에 대한 찬양을 담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이민족을 정복하는 이야기도 들어 있다.

《아이네이스》를 또 다른 관점에서 읽어볼 수 있을까? 영웅들의 눈부신 전쟁을 통한 국가 창건 신화가 아니라, 지리멸렬한 보트피플의 이야기로 말이다. 그야말로 《아이네이스》는 나라가 망하자 바다에 배를 띄우고 탈출한 보트피플의 수난사이다. 다음은 마치 21세기의 텔레비전 속에서 기자의 카메라와 마이크가 시리아 유민들의 절규를 따라가는 장면 같다.

트로이가 멸망한 후 두 사람의 항해자가 출현한다. 한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다 길을 잃은 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을 받아줄 정착지를 찾아 방황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서로 적이었다. 한 사람은 침략자 오뒷세우스, 다른 한 사람은 패배한 아이네아스. 트로이의 침입자도 트로이의 주인도 트로이를 떠나 방황하고 있다면 대체 트로이에는 누가 남았단 말인가? 파괴만 있었을 뿐 침입자도 거주자도 떠난 도시. 전쟁은 이런 어리석음으로 가득하다.

고대 세계의 이 여행자를 기다리는 것은 환대였고, 그것은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전쟁을 피해 바다에 배를 띄운 여행자들이 저 막막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애타게 기다리는 것이었다. 아이네아스와 스치듯이 지나치는 적수 오뒷세우스의 방랑에서는 이런 환대가 더욱 두드러진다.

이런 환대가 없었다면 오뒷세우스도, 아이네아스도 영원히 보트피플로 떠돌며 육지에 발을 디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육지에 발을 디뎠을 때 하나의 새로운 문명이, 로마가 이탈리아에 잉태된 것이다.

토착민의 이름과 이방인의 피가 한데 섞여 새로운 세계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바로 ‘로마’ 말이다. 아시아의 해안(트로이)과 유럽의 해안(이탈리아)은 각자 순수한 정체성을 고집한 채 서로를 외면하고 있지 않다. 아이네아스라는 보트피플의 항해와 정착이 알려주듯, 이질적인 자들에 대한 환대가 있고, 이 환대 속에 새로운 문명과 국가의 탄생이 준비된다.
문명 자체의 성격이 그렇다. 한 문명이란, 또는 문명의 울타리가 되곤 하는 국가란 순수한 혈통도, 순수한 전통도 담고 있지 않으며, 이질적인 것들의 마주침만을 담고 있다.

해안에서 해안으로의 이동, 곶에서 곶으로의 이동이 아이네아스의 보트를 따라가는 베르길리우스의 사념 속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대 사상의 중요한 관심거리이기도 하다. 가령 데리다Jacques Derrida의 《다른 곶》은 제목 그대로 해안에 대한 사유, ‘곶’에 대한 성찰이다. 이 작품은 유럽과 다른 곶, 즉 한 번도 유럽이었던 적이 없고 앞으로도 절대 유럽이 되지 않을 곶의 사람들, 바로 유럽의 타자가 어떻게 비로소 개방된 유럽을 가능케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보트를 타고 온 아이네아스가 환대받았듯, 그리고 그 환대가 결국 로마로 이어졌듯, 타자에 대한 개방으로부터 한 공동체는 새 길을 찾고, 새로운 영감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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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 인생과 역사와예술의 비밀

시간과 삶이 일직선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반복의 질서를 따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반복이 지탱하는 것들은 삶 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반복은 우리가 살아가는 근본적인 방식이다. 불쾌한 것을 피하고 쾌락을 좇는 우리의 성향을 배신하는 우리의 놀라운 점 가운데 하나는, 나쁜 일을 겪으면 잊기보다는 맛난 먹이처럼 되새김질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악몽을 반복해서 꾸며, 한밤중 이불킥을 하면서 낮의 실수를 계속 반추한다

어떤 문제 때문에 악몽을 계속 꾼다면,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그 문제의 자리로 돌아가 해결해보기 위해서다. 한밤중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낮에 있었던 자신의 실수를 끊임없이 반추한다면, 그 문제를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변명해 실수의 비극적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우리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상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반복을 한다.

반복은 잘 보존된 집안의 보물이 상속되듯 동일성을 유지한 무언가가 되돌아오는 것이 전혀 아니다. 반복의 다른 이름은 변신이며, 그런 까닭에 반복이 이루어짐에도 새로운 무엇인가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반복은 새로운 것이 출현하기 위한 조건일 뿐 아니라, 과거의 것을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는 현재 속에서 과거의 것을 반추하며, 이를 통해 비로소 제대로 과거의 의미를 이해한다.

과거란 먼지 쓴 유물처럼 사망한 채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시 시작함을 통해 현재에 반복된다. 과거를 다시 시작하는 일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오늘을 위한 역사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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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의예술과 철학

기생충은 완전히 박멸될 수 있는가? 위생의 기준이 더할 나위 없이 높아져서 기생충은 과거에 비해 많이 사라졌으며, 기생충에 대한 혐오감 역시 더욱 가차 없어졌다. 그러나 형태가 어찌 되었든 우리는 늘 기식자와 함께 살아왔다. 하찮아 보이지만 떠나지 않는 온갖 고질적인 질병이 알려주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숙주로서의 삶이다.

가졌다.
숙주의 입장에서 기생충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박멸의 대상이다. 기생충에 대한 논의도 박멸이라는 과제에서 완성되고 끝난다. 그러나 기생충의 행위 유형은 그 이상의 의미 있는 성찰 대상이다. 기생충은 다분히 주체의 근본적 지위를 뒤흔드는 현대철학적 면모를 지니고 있다. 기생충은 근대적 주체(가령 데카르트의 ‘실체’)와 달리 독립된 주체로 있을 수 없고 말 그대로 다른 것에 기생함으로써만 존재한다는 점, 즉 숙주 없이는 정체성이 없다는 점, 그리고 동일성을 지닌 주체로서가 아니라 숙주의 동일성을 파괴하는 데서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식자라는 개념을 숙주의 관점에서 박멸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그 개념의 더 넓은 가능성에 대해 눈감는 일이다. 기식자는 숙주를 새로운 차원에, 새롭게 창조된 길 위에 올려놓는 자이다. 그런 점에서 생리학자 레리슈Rene Leriche의 말은 매우 흥미롭다.

질병은 인간에 붙어살고 있는 기식자, 그것이 탈진시키는 인간을 뜯어먹고 살아가는 기식자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생리학적인 질서의 일탈, 처음에는 미미한 그런 일탈의 결과를 본다. 질병은 결국 하나의 새로운 생리학적인 질서이다. 치료학은 병에 걸린 인간을 이러한 새로운 질서에 적응시켜야 한다.6

이 말이 단지 생리학에만 해당하는가? 그렇지 않다. 영화 <기생충>이 한국 사회에서 가리켜 보이는 지점 역시 저 말에 포개진다. 우리의 사회적 벽들은 타인(기식자)의 개입을 통해 부서질 수밖에 없다. 타인의 침투는 방어되거나 거부될 문제가 아니라, 침투받은 자를 변화하게 만드는 문제, 새로운 신체와 질서를 탄생시키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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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우주, 그리고모든 것에 대한 해답

우리는 늘 해답에 대해 목말라한다. 높은 성적을 얻을 수 있는 해답, 직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해답, 이상형을 만날 수 있는 해답 …… 우리는 이런 해답을 향한 편리한 최단 거리를 발견하지 못해 안달한다. 그래서 옆 사람이 만들어놓은 답을 슬쩍 가져다 써본다. 남의 공부 방법을 모방해보기도 하고, 각종 노하우를 수집해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이 정답’이라고 남들이 자랑하는 게, 내 경우엔 잘 적용되지 않는다. 도무지 왜 정답이라고 하는지조차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는 성급하다. 그래서 남이 찾은 답안을 빌려서 빨리 사용해보려는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성공적인 사업의 해답, 공부의 해답을 찾아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그런데 남들이 찾아낸 해답이 자기 자신에게도 꼭 맞던가? 얼마간 참고는 될지 몰라도 결코 자신을 위한 해답은 되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런가? 해답이란 그 해답을 얻어낸 질문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활짝 핀 꽃송이를 꺾어 가지듯 해답만을 똑 따낼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해답이란 문제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과이다.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가 해답의 범위와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는 각자가 앓는 저만의 질병처럼 각자의 삶으로부터만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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