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과 정체성은 같은 의미로 쓸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사람은 인격자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비인격자다. 정체성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사람이라도 정체성을 확립하면 인격자로 나아갈 수 있다. 정체성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에게 주어진 삶을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다.

유유상종이란 자연이 질서를 확립해 가는 일종의 자정 작용이다. 질서가 잘 잡힌 평화로운 세상을 ‘치세’라고 부른다. 반면 질서가 흐트러진 혼돈한 세상을 ‘난세’라 부른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이 치세인가 난세인가를 가늠해 보고 싶다면 유유상종이 얼마큼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남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다. 남을 실망시킨 일은 생각 외로 빨리 잊힌다. 하지만 자신에게 실망한 사람은 오래도록 이어지는 부끄러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부끄러움은 치료가 어렵다. 부끄러운 감정은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걸리기 쉬운 난치병이다.

평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양심과 욕심에 달려 있다. 양심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좋은 평판이, 욕심을 부리는 사람에게는 나쁜 평판이 따라붙는다.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173는 말이 있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평판을 남긴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과연 나의 평판은 양심과 욕심 중 어떤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가. 하루쯤 곰곰이 살펴볼 일이다.

정체성을 알아야 최선을 다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살다 보면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다. 내면의 혼돈이 걷히며 찾아온 평화를 여전히 혼돈 속에 있는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면 어떨까. 난세에서 치세로의 전환점은 그 가운데 있을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에게 손가락질하는 세태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 가운데에 내가 옳고 네가 틀리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마치 뜨거운 낙인을 쥔 사람이 자신의 손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줄 모르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접힌 세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고 있음을 잊어버린 듯하다. 폈던 손가락을 오므리고 당당하게 나의 길을 걸어갈 때, 아쉬운 일요일은 낙관적인 하루로 변화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인품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수양이 부족한 사람은 잘 갈고닦은 인품을 보고 놀랄 일이 많지만 수양이 잘된 사람은 어떤 인품을 보더라도 담담하다. 내 본성의 상태와 인품의 현주소를 찬찬히 돌아볼 때 사람과 짐승의 분기점은 어디에 있는가,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면서 어짊과 정의로움, 예절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어떤 이들은 인의예지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내고자 심혈을 기울이기도 한다. 자신이 깨달은 만큼의 인의예지를 삶 속에서 진실로 실천하고자 애를 쓰는 사람들 역시 의외로 많다.
하지만 무언가에 대한 지극한 앎을 가진 사람도, 또 그 앎을 실천에 옮기고자 밤낮없이 노력하는 사람도 쉽게 따를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바로 무언가를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도 앎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 밤낮없이 노력하는 사람도 이것을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것을 편안하게 여기는 사람은 쉽게 따를 수 없다.

어쩌면 큰 꿈을 갖는 것보다 값진 것은 온전한 나만의 꿈을 키우고 실현하는 일일 것이다. 원대한 꿈을 꾸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편견과 선입관으로 얼룩지지 않은 꿈을 꾸는 일이다. 욕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욕심이 실은 나의 욕심이 아니거나, 온통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심이어서는 곤란하다. 그런 욕심은 채우면 채울수록 충족되기는커녕 공허감만 낳기 때문이다.
되도록 원대한 꿈을 꾸며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교육은 숱하게 받아 왔다. 하지만 진짜 꿈을 찾기 위해 욕심을 버리고 마음의 평화를 확보하는 일의 중요성은 어디서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는 양날의 검을 잡고도 한쪽 날 쓰는 법만 배운 것과 같다.

유용함이 반드시 좋은 것도, 무용함이 덜 아름다운 것도 아님을 기억하자.

인간관계를 한마디로 줄이면 예절이 된다. 예절은 예의와 범절의 준말이다. 예의는 상호 존중을 위해 필요한 말과 행동이고 범절은 그 말과 행동에 절도가 있는 것이다. 예의만 있고 범절이 없으면 좁혀지지 않는 답답함이 생기고 범절만 있고 예의가 없으면 선을 넘을 듯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감돈다. 이 답답함과 긴장감 사이를 오가며 기진맥진하게 되는 것이 사회생활이다.

동양에서 중용은 균형과 같은 의미다. 서로를 대하는 마음에 중용이 깃들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있다. 하지만 중용이 없는 관계에서는 긴장감과 답답함만이 부각되기 쉽다.

적당한 답답함과 적절한 긴장이 있어야 예절이 성립할 수 있다. 담담하지 못함에서 오는 답답함과 아무런 긴장도 없는 달콤함은 결국 독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예절을 실천할 수 있다.

스스로를 마음껏 사랑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 오늘날이다. 한 주를 되돌아보면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수두룩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많은 사람이 나보다 더 사랑받고 인정받기에 충분한 듯하다. 초라한 나를 보며 긍정적인 하루를 맞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날에 공자와 장자는 주눅 들 것 없다며 손을 내민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라며 조언한다.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점차로 남도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준 사랑과 인정이 반드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지만 결국 세상의 다른 누구에게라도 돌아는 갈 것이다. 인정과 사랑은 그렇게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경敬’이란 ‘진실로 삼가고 조심하여 정중함’을 뜻한다.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 앞에서도 그러하다. 스스로에게 정중하지 못한 사람은 좀처럼 남에게도 정중하지 못한 것과 같은 이치다.

남의 편안함만을 편하게 여기고 자신의 편안함은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는 사람의 삶에 우울과 부정은 필연적이다. 바꿔 말하면 생기가 넘치는 삶은 자신의 편안함을 얼마큼 긍정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 셈이다. 내 삶의 첫 단추는 잘 끼워져 있는가. 내 삶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긍정하는 나를 만나는 길은 이 두 가지를 점검할 때 발견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였다. 이는 사람의 마음이 시커멓고 음흉함을 강조했다기보다 그만큼 마음이 자주 바뀜을 시사하는 속담이다. 나조차도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내 마음이다.

마음의 여유가 물적 여유와 상관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꼭 물적 여유만이 마음을 여유롭게 해 주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마음의 여유는 인색함과 쩨쩨함으로 스스로를 한계 짓는 대신, 열린 자세로 주고받을 수 있는 가능성에서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은 부족하다. 그렇기에 서로 주고받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꼰대’와 ‘라떼는’이라는 말은 오늘날 세대 차이를 언급할 때 자주 사용된다. ‘꼰대’란 자신의 경험과 생각만이 옳다는 입장을 굳게 지키며 자신의 가치를 남에게 가르치려 하는 사람을 말한다. ‘라떼는’은 꼰대라 불리는 이들이 주로 쓰는 말을 변형한 표현이다. ‘나 때는 말이지’로 운을 떼는 것이 꼰대들의 공통된 행동 양식이라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이 둘을 합쳐 아예 ‘꼰대라떼’라고 부르기도 한다.
얼핏 들으면 분위기 좋은 카페의 신메뉴 같기도 한 이 말은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이들의 실망을 투영하고 있다.

지금의 젊은이들도 언젠가는 기성세대가 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문득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체감할 때, 과거의 내가 기피했던 모습으로 남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기성세대에 대한 실망감은 잠시 내려놓자. 그 대신 앞으로 올 세대에게 자신이 느낀 실망감만은 안겨 주지 않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면 어떨까. 이런 고민은 마냥 기성세대에게 변화를 촉구하는 것보다 세상을 더 효율적으로 바꿔 나가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변화가 빨라지면서 앞 물결과 뒷 물결을 구분하기가 모호한 세상이 되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한 사람의 경험이 지니는 가치는 점차 작아지고 있다. 세상은 진화하고 사람도 진화한다. 나보다 진화된 존재가 나를 쫓아올 때 인간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다가오는 세대를 두려워하여 잘 대우하지만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그들을 무시하고 밀어낸다. 앞 물결이 뒷 물결을 밀어낼 수 없는 것은 자연의 순리다. 뒷 세대를 배척하는 앞 세대는 시대를 역행하는 세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들리다’는 뜻으로 잘 알려진 한자 문聞에는 ‘안다知’는 의미도 담겨 있다. 공자가 "사십이나 오십이 되었음에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다"라고 말하는 까닭은 사십이나 오십이 뒷 물결에서 앞 물결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살 만큼 살았는데 왜 저러나’ 싶은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다. 어쩌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좋은 스승일 수 있다. 훗날 내가 사십이나 오십이 되었을 때 저런 사람으로 남아서는 안 되겠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이 끊임없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의 변화를 잘 파악하여 훌륭한 경위서를 넘겨줄 수 있는 사람은 선배가 되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낡아 빠진 사람이 된다.

영원히 앞 물결일 수도 없고 언제까지나 뒷 물결일 수도 없다. 늘 앞선 사람도 없고 항상 뒤처진 사람도 없다. 모래톱에 스러지는 슬픔 대신 뒷 물결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기쁨에 사로잡힌 앞 물결은 바다로 돌아가 새로운 뒷 물결을 이룰 것이다. 빨리 앞 물결을 밀어내야겠다는 조바심 대신 아직 파도를 이루지도 못한 물방울들에게 진심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 주려는 뒷 물결은 아름다운 바다를 만드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물결이 서로를 배척하여 갈라지는 법은 없다. 앞 물결과 뒷 물결이 조화롭게 일렁이는 세상, 앞서 간 사람과 뒤따르는 사람이 화합할 수 있는 세상. 서로 끊임없이 배워 나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런 세상을 꿈꿀 수 있다.

교권과 학생 인권, 상사와 부하 직원 간의 위계 등 세상을 살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인간관계를 맞닥뜨리게 된다. 학생의 인권과 교권이 균형을 잡지 못해 혼란스러운 오늘날, 쉽게 변하지 않는 가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과제가 되었다. 쉽게 변하지 않는 가치는 부끄러움을 아는가 모르는가로부터 발견할 수 있다.

좋은 사람은 뭘 해도 예뻐 보이고 싫은 사람은 뭘 해도 미워 보이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이 마음을 절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수오지심이 생긴다. 남의 잘못을 미워하기 전에 진심으로 내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내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만큼 남의 잘못을 미워할 수 있다면 오늘날 많은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배우지 않고도 난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나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며 배우고 또 남의 잘못을 미워하며 배운다면 누구나 참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불교의 경전 《반야심경》의260자를 다섯 글자로 줄이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된다고 한다. ‘세상 일체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을 한 글자로 줄이면 ‘심心’이 된다고도 한다. 이런 까닭에 많은 사람이 불교 철학이라고 하면 자연스레 ‘마음’을 떠올리는 것 같다.
어쩌면 반야심경의 정수는 심心 한 글자에 오롯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교 철학 전체를 심 한 글자로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법대로 해"라는 말이 판을 치는 오늘날이다. 대화로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소송을 하고 재판을 벌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명판사, 명검사, 승소율이 높은 변호사도 있다. 그래도 다툼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만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양보할 수 없다는 마음이 다툼을 부르고,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분쟁을 조장하며, 타협은 없다는 생각이 재판으로까지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나도 다치고 남도 다치며 세상도 다친다.

물론 때때로 날 선 태도는 억압과 강제에 유용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매 순간 남을 다스리고자 하는 백락이 될 필요는 없다. 시퍼렇게 날이 선 도구를 사용할수록 배움의 장은 좁아질 뿐이다.
《도덕경》에는 이런 대목도 실려 있다.
"말이 많을수록 금방 한계에 봉착한다."100
말을 많이 할수록 의도와 달리 궁색해지는 상황을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말과 지식은 금세 한계를 드러내지만 인내와 양보는 언제나 한계를 극복한다. 만약 자신이 한계에 봉착했다고 느낀다면 내가 다 안다는 생각을 잠시 내려놓자. 그런 뒤 세상으로부터 새로이 배울 자세를 정비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범하는 오류 가운데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지 않고 지레짐작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대한 판단을 ‘사실 판단’, 가치에 대한 판단을 ‘가치 판단’이라고 한다. 사실 판단은 대개 객관적이며 보편적이다. 그러므로 실증이 가능하다. 반면 가치 판단은 주관적이며 상대적인 경우가 많다.

살면서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 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판단은 대개 경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람이 아무런 경험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애당초 이 세상에 객관적인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 우리는 그저 우리가 믿는 것을 사실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쉴 새 없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지, 무엇이 좋고 무엇이 싫은지를 판단하느라 공연히 마음을 수고롭게 하진 않았던가 돌아보게 된다.

하루쯤은 판단을 멈춰 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변화의 흐름을 탈 줄 아는 사람은 섣불리 충고하지 않는다. 어제까지 좋다고 생각된 것이 오늘은 싫을 수 있고 오늘까지는 옳다고 생각된 것이 내일은 틀리게 여겨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과 조화를 이루려는 마음이 충고하고 싶은 마음을 앞서는 사람이 있다. 이들 주변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이 모여든다.
스스로를 타일러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는 데 매진할 뿐 남에게 충고하지 않는 일. 남의 거슬리는 점을 바로잡기보다 갈등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에 평화를 추구하여 세상과의 조화를 도모하는 일. 비록 용모는 추했지만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던 능력과 덕은 이러한 애태타의 정신에 있었다. 충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땐 한 번쯤 애태타를 떠올려 보자. 지혜롭게 관계 맺는 첫걸음이 될지 모른다.

좋은 관계를 많이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좋은 인간이기도 하다. 인간人間은 ‘사람 사이’를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인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는 그가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것이다. 좋았던 사이가 하루아침에 나빠지기도 하고 나빴던 사이가 어떤 계기로 호전되기도 한다. 결국 행복이란 좋은 사이를 얼마큼 잘 유지하는가에 달려 있다.

때때로 지나친 관심은 부담이 되기도 한다. 오늘날 문제시되는 스토킹이나 가스라이팅, 그루밍 성범죄도 왜곡된 관심으로부터 비롯된 경우가 많다. 장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다름을 인정하면 그동안 이해되지 않던 많은 것들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러면 깨닫게 된다. 사실 세상엔 별의별 이상한 사람이 많은 게 아니라 별의별 이해받지 못한 사람이 많은 것일 뿐임을. 이상한 사람이 많은 세상엔 좋은 사이가 드물지만 이해하려는 사람이 많은 세상엔 나쁜 사이가 드물다. 나를 너로 만들고 너를 나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폭력이다. 하지만 나를 나답게, 너를 너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각기 다른 너와 내가 모여 우리를 이뤄 가는 것이 제물齊物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인仁이란 사람?둘二이 함께 잘 있는 것이다. 먼저 너와 나 두 사람이 잘 있어야 우리도 잘 있을 수 있다. 공자가 솜씨 있는 말과 꾸며진 얼굴빛을 경계한 이유는 이 두 가지에 욕심이 담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의리나 신뢰 등 나의 가치를 드러내고 싶다는 욕심이 앞설 때가 있다. 욕심을 따르는 말솜씨는 나도 모르는 새 좋아지고 얼굴빛은 자연스레 꾸며진다. 반면에 실천을 따르는 말과 얼굴빛은 자못 양심적이다. 양심이란 늘 인仁한 마음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기분 좋을 때 함부로 약속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좋은 기분에 말은 유창해지는 반면 실천은 점점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말을 아끼되 실천에 힘쓰는 일.

공자가 말하는 중간 이상 되는 사람과 장자가 말하는 함께 갈 만한 사람은 적어도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다. 반면 중간 이하 되는 사람과 함께 갈 수 없는 사람이란 귀로 들리는 것만이 전부인 줄 아는 사람이다. 들리는 것만이 전부라는 말은 곧 내 마음대로만 듣겠다는 말과도 같다.

서로의 수준을 알기 위해선 대화가 필요하고 특히 상대방의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동양에서 듣는 방법으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문聞이다. 이는 귀로 들어오는 모든 소리를 그저 들리는 대로 듣는 것이다. 둘째는 청聽이다. 이는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것이다. 셋째는 경청傾聽이다. 이는 마음을 기울여 상대방의 말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들리는 대로만 듣는 것은 귀가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주의 깊게 듣고 마음을 기울여 알아차리는 것은 상대방의 진정眞情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할 수 없다. 진정이란 진실하고도 애틋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상대방의 진정을 알기 위해선 내게도 진실하고 애틋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예민함은 잘 다루면 좋은 감정으로 승화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칫하면 나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무서운 감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민해지기 쉬운 날엔 내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용기가 더욱 필요하다. 예민할수록 주의 깊게 듣고 마음을 기울여 알아차릴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그래야 중간쯤 이상 되는 사람들과 오래 함께 갈 수 있다. 어떤 관계를 맺어 나갈지는 나 스스로가 함께 갈 만한 사람인가 그렇지 못한 사람인가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상호 신뢰는 때때로 도저히 안 될 것만 같은 일을 성사시킨다. 믿음 없이는 아주 작은 일조차 실현될 수 없다. 먼저 스스로를 믿고 나를 믿듯이 남을 믿어 주는 일. 남에게 받은 믿음으로 다시 스스로에게 확신을 갖는 일. 어쩌면 우리의 예민함은 세상을 향한 신뢰를 재정비하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바보처럼 서로를 믿어 보는 것은 어떨까. 그 믿음이 새로운 국면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