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은 오랜 시간 동안 차분하게 모든 걸 준비했다. 그렇게 준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길 시점도 인내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성실의 움직임은 거침없고 일사불란했다. 머릿속에서 이미 수백 번 시뮬레이션해 둔 덕이었다.

성실은 평온하게 컨테이너를 걸어 나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문을 닫았다. 잠금장치까지 완벽하게 걸었다. 민규의 욕이 계속됐지만 그 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올 가능성은 없다는 걸, 성실은 오래전 그날의 경험으로 알았다.
김민규 교수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물리적으로 문제가 생겨 죽거나, 성실이 원하던 대로 자신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무기력에 점철되어 그 마음 때문에라도 죽게 될 것이다.
성실은 기왕이면 후자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계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서둘러 움직였다.

준비했던 계획의1구간을 마쳤다. 아직 끝은 아니었지만 가장 어렵고 물리적으로 힘이 많이 들어가는 구간이 마무리된 거였다.

성실이 눈을 떠 확인한 시간은7시27분. 곧바로 민규의 휴대폰으로 연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연희의 휴대폰 벨 소리가 전화기 너머가 아닌 성실이 있는 공간에서 울렸다. 소리는 성실이 마주한 캐비닛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놀란 성실은 천천히 걸음을 떼어 캐비닛에 다가갔다. 조심스레 문을 당겨 열자,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연희가 막 잠에서 깬 듯 고개를 들어 성실을 봤다. 성실 또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스쳤다. 지금 연희가 이곳에 있다는 건, 어제저녁 그 시간에도 여기에 있었을 확률이 높다는 얘기였다. 성실이 민규를 쓰러뜨리고 납치하는 모든 과정을 연희가 봤을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지? 성실의 눈빛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만큼 흔들렸다.

자신의 선(善)을 유지하게 해 주면서 필요한 악(惡)이 되어 준 게 성실이었다는 걸, 한경은 진즉 깨달았다. 성실이 더 현실적이었고 영리했으며 목표 달성에 있어서도 뛰어났다. 한경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선택하지 않을 방식이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조건을 무시한 채 성실을 비난할 자격은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방금의 간접적인 협박도 사실은 암묵적인 거래의 제안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성실은 여전히 한경을 지켜보고 있고 앞으로도 필요하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증명이자, 한경이 위협적인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위해를 가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
그러니 한경도 이번만큼은 확실히 도울 생각이었다. 김 교수와의 승부에서 성실이 최후까지 승리하도록.
어느새 경찰서 출입구에 다다랐다. 한경은 그대로 반듯하게 서서 숨을 차분히 들이마셨다. 그것을 머금은 채 결전장으로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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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문학/저승사자

저승사자는 보통 두 사자가 함께 다니는데 한 사자는 ‘공덕이 있는지를 점검‘하고, 다른 한 사자는 ‘죄인을 가려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도교의 영향도 있지만 오랫동안 관료제가 발달한 동아시아의 문화에서나 나올 법한 믿음이다.
보통 저승사자는 죽은 인간 중에 선발한다고 알고 있는데 이를 입증할 만한 체계적인 내용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저승사자가 나오는 대부분의 설화에서 주인공은 저승사자가 아닌 망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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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다 봤죠들?
―그 인간 말로가 결국 이렇게 됐군! 그렇게 우릴 핍박하더니만. 갑자기 사라졌길래 뭔 일이 있긴 있구나 싶었는데, 그래도 설마 이렇게 됐을 줄은.
―와, 전 진짜 충격! 그냥 어디 찌그러져 있을 줄 알았는데. 근데요, 이런 상황이면 누가 죽인 거 아니에요?
―에이, 설마???

기사를 보던 창에서 메신저 창으로 넘어간 한경은 바로 다음에 뜬 메시지에 일순 등골이 오싹해졌다.

―난 동의. 근데 누가 죽였을까?

입술 안쪽을 질끈 씹었다. 재빨리 공소시효를 찾아보기 위해 검색 앱을 띄웠다. 하지만 이내 현실을 자각하고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고작3년이었다. 김 교수가 실종되자마자 죽었다고 해도 살인의 공소시효가 그보다 짧을 리는 없다. 한경이 짧게 숨을 뱉어 내며 생각했다. 결국 이렇게 드러나고 마는 건가.…잡히게 될까?
심장이 제어하지 못할 박동을 지속하는 중에도 메시지들이 다시 이어졌다.

연구실 막내였던 최순창의 메시지에 한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특유의 깐죽거리는 농담이 술자리에서 나왔다면 웃어 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곤두선 신경을 짜증스럽게 긁어 대는 헛소리로 느껴질 뿐이었다.
‘지금 농담이나 할―’, 빠른 타이핑으로 메시지를 쓰다가 멈췄다. 정신 차려, 박한경. 지금 여기서 이러면 괜한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어. 화살표 버튼을 길게 눌러 대화창에 썼던 글을 단번에 지웠다.

예상했던 대로 김 교수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사건을 재조사한다는 얘기였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잊힌 존재가 되었지만, 한때 김민규 교수는 질병 치료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유전자 연구 학자로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우연히 출연한 방송에서 대중적 언어로 쉽고 재미있게 자신의 분야를 설명한 게 계기였다. 유명세를 치르면서 관련 분야의 연구를 지원하는 재단은 물론, 유수의 대기업에서 그의 프로젝트에 앞다퉈 연구비를 대겠다고 나섰다. 거기에2015년을 기점으로 유전자가위 기술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커지자, 한국 대중에게 그 분야의 유일한 전문가로 인식된 김 교수가 과학 분야는 물론 정치, 경제 분야 뉴스에까지 도배되었다. 그 시류를 타고 김 교수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스타 과학자가 되었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되었고3년이 지나서야 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전화를 끊었지만 한경의 얼굴에 떠 있던 경계의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선이 자연스레 전화기를 쥔 손목 아래로 향했다. 커다란 몬스테라 잎으로 이어지는 녹색 줄기의 문신이 시작되는 곳으로.
손목에. 나뭇가지가. 있었어.
연희의 뚝뚝 끊기는 말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한번은 어느 연구원이 반려묘가 죽어서 얼마간 힘들어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사정 봐주지 않고 실험 성과를 독촉하는 바람에 연구원들 사이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성실은 오히려 공사 구분 못 하고 동료들에게 피해를 준 연구원이 더 문제가 아니냐며 반박했고, 완성된 논문이 해외 저널에까지 소개되면서 결국 성실을 향했던 비난은 수그러들었다. 그 일을 계기로 이 박사에게 성실은 ‘실험실에서의 삶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이 박사는 순창에게 설명하면서 화가 조금씩 진정됐다. 몸을 책상에 기대며 눈을 내리깐 채 말을 이었다.
"그래서 박 박사는 연구실 단톡방에 그걸 비교하는 수치를 정리해서 올리며 언론에 까발리자고 한 거야. 다들 우리가 그간 핍박받았단 사실을 수치로 보니 더 흥분하고 분노해서, 모두 그러자며 당장이라도 행동을 취할 거 같은 분위기가 됐던 거지.…근데 너도 알지? 사람들은 그러다가도 금방 식어. 감정을 그냥 말로 털어놓는 것과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건 다른 거니까. 우린 그냥 김 교수 욕이나 하고 말 생각이었어. 하지만 박 박사는 달랐던 거지, 우리랑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까. 결국 다음 날 기자들까지 불렀어."

김 교수는 즉시 한경을 뺀 연구원을 모두 초대해 따로 단톡방을 열었다. 해외에서만 공부한 한경이 한국의 연구 환경을 이해하지 못해서 오해한 거라고 설명하며, 최근 새롭게 지원받은 연구비는 연구원들에게 자율권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한경에게 도움을 주지 않겠다고 약속만 하면 향후 최고의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도 했다. 연구원들은 한 명도 빠지지 않고 한경과 함께 있던 단톡방을 나왔다.
결국 다음 날 기자들을 맞은 연구원은 한경 혼자였다. 그마저도 김 교수의 신고를 받은 경비원에게 쫓겨 학교 정문 밖에서 인터뷰를 진행해야 했다. 온라인에 기사 몇 건이 올라오긴 했지만 하루 이틀 사이 자취를 감추었고 사건도 묻혔다.

민규는 홀로 중얼거리며 점차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들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전혀 다른 표정이 된 민규가 룸미러로 슬쩍 성실의 눈치를 살폈다. 이내 작게 헛기침 소리를 내고는 느릿한 말투로 물었다.
"어… 근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네? 연구실…?"
"가까운 모텔로 가, 모텔. 좀 쉬었다 들어가자."
한 손을 파닥이며 가벼운 말투로 민규가 말했다. 성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으며 파리해졌다.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민규가 막 두 눈을 감으려고 할 때, 성실이 다급히 입을 뗐다.
"교수님, 죄송한데. 제가 또 대상포진이 올라와서."
"뭐? 하, 너는 왜 그렇게 몸 관리를 못 해서 맨날 그 지랄병을 달고 살아? 내일이면 마누라도 연주회에서 돌아오는데. 알았어, 연구실로 가. 쯧!"
성실은 말없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라디오를 틀었다. 클래식 채널에 맞추고 볼륨을 낮게 설정하자 잔잔한 피아노 음악이 차 안을 채웠다. 차는 음악의 리듬에 맞춰 일정한 속도로 연구실을 향해 달렸다.

담당자는 마주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까지 깊게 숙였다. 연구비가 끊긴 후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스타트업 회사의 자문 계약 해지 통보였다. 한경은 일방적인 통지에 화가 났지만 표정을 정리하고 회의실을 나왔다.
건물을 나서며 한경은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바보같이! 김 교수가 이사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회사의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한경은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건물에 드나드는 학생들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자신도 저 나이 땐 저렇게 풋풋하고 생기가 넘쳤을까 싶어 기억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관찰자 입장에서 자신을 회상해 내기란 쉽지 않았다. 어쨌든 적어도 지금보단 생기가 넘쳤겠지. 지금은 하루하루가 날카로운 송곳 위를 걷는 기분이니까.
생각의 흐름을 따라 한경의 이맛살이 한껏 찡그려지고 있을 때, 종이 상자를 안은 순창이 도서관 앞마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슬금슬금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에서 누군가의 눈에 띌까 봐 두려워하는 티가 났다.

순창은 항상 존댓말로 대해 주는 한경이 고마웠다. 언젠가 왜 그러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한경의 부모님은 미국에서도 집에선 한국어만 사용하도록 교육하면서 반말도 금지했다고 했다. 그 덕에 순창은 보통의 연구실 막내라면 거의 들을 수 없는 존댓말을 한경에게만은 듣고 지냈다. 순창이 연구실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되어 한경이 쫓겨나는 바람에 비록 그 기간은 짧았지만.

며칠 후, 한경은 작은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초조한 듯 마주 쥔 두 손을 계속 움직거리고 있었다. 연구실에서 일하는 동안, 프로젝트로 진행하던 실험과 논문 초안 작업은 물론, 연구실 재정과 관련한 일도 성실을 거쳐야 했기에 함께 일한 시간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함께 ‘일한’ 시간일 뿐이었다.
다른 연구원들과 달리, 성실과는 친분을 쌓기가 쉽지 않았다. 연구실 내의 유일한 여성 연구원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성실 스스로가 높은 벽을 주위에 두른 채 자리를 내주지 않는 느낌이었다. 팀워크 차원에서 협조가 필요한 일에도 사생활이 관여되면 정색하고 싫은 기색을 내비쳤다.
그런 성실에게 친한 사이끼리도 쉽지 않을 이야기를 해야 했다. 너무도 개인적이고도 수치스러울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다시 안부를 묻고 연구 프로젝트를 묻는 식으로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반복되었다. 한경은 여전히 두 손바닥을 마주 댄 채 차오르는 식은땀을 비벼서 날리기라도 하려는 듯 문질러 댔다. 점원이 주문했던 음료를 가지고 나타나면서 잠시 말이 끊겼다.

뜬금없이 띄운 화제에 성실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한경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주스를 한 모금 빨아올리곤 답했다.

한경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성실이 그 얼굴을 잠시 마주 보다가 백팩에서 손수건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한경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손수건으로 향하려는 찰나, 성실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목소리 톤을 바꿔 날카롭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절 보자고 하셨어요? 박사님과 제가, 이런 담소를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았나요?"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한경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떴다. 잠깐 고민이 됐지만 지금 와서 물러설 순 없었다. 침을 꿀꺽 삼키곤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 어쩌다가 우연히 알게… 소, 소문을 들었습니다."
"어떤 소문요?"
"저, 기 박사님이 김 교수에게… 성 착취를 당하신다는."
한경은 차마 성실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낮춰 말끝을 흐렸다. 순창은 성실과 김 교수의 관계가 상호합의에 의한 거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한경은 상식적으로 위계에 의한 폭력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정작 현실에서 한경의 귓가에 들려온 건, 어조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담담한 성실의 목소리였다.
"그래서요?"
"…네?"
"제가 성 착취를 당하고 있다… 쳐요. 그래서요? 그게 박 박사님과 무슨 상관이죠?"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은, 남의 일처럼 얘기하는 성실의 태도에 한경의 머리가 하얘졌다. 이런 상황으로 흘러갈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성실의 얼굴을 바라만 봤다.

한경은 실수를 깨닫고 급히 몸을 움츠렸지만 트인 공간에서는 그다지 효과가 없는 대처였다.
하지만 성실은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앞으로 숙여 한경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느린 말투로 또박또박 얘기했다.
"박 박사님, 양심에 손을-얹고-답해-보세요."
한경의 눈이 커졌다. 성실은 그 눈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제겐 너무도 치욕스러울 수밖에 없을 그런-일을-정말로 절-생각해서-끄집어-내신 거예요? 진심?"
한경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테이블로 떨어지고 입가가 일그러졌다.
성실이 옅은 조소를 입가에 머금고 백팩을 챙겨 일어서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박사님의 상황은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제가 이제껏 희생하며 지켜 왔던 자리를 포기할 순 없어요. 곧 발표될 논문들이면 목표한 교수 임용도 코앞이에요. 박사님의 상황은 다 본인이 벌이신 일 때문이니까, 그 결과는 오롯이 스스로 감당하셔야죠. 그 똥물을 왜 저한테까지 튀기려고 하세요, 양심도 없이? 저는 제 길 알아서 만들어 갈 테니까, 박사님은 본인 길로 가세요."
그 말을 끝으로 성실의 구두 소리가 가볍게 카페 바닥을 울렸다.
한경은 내리깔고 있던 눈을 결국엔 감아 버렸다. 그렇게 성실의 구두 소리를 따라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아 있던 기회가 멀어지는 것을 받아들였다.

한경은 착잡한 마음에 숨을 깊게 내쉬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걸음을 떼려는데 성실이 테이블 위에 두고 간 손수건이 눈에 걸렸다. 평소에 지니고 다니는 물건이라면 소중한 것일 수도 있겠단 생각에 챙겨서 주머니에 넣었다. 연구실에 우편으로라도 보내 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얼마 뒤, 김민규 교수가 행방불명됐다.

쏟아지는 알람이 멈추길 기다리며 휴대폰을 쳐다보고 섰는데 알 수 없는 번호로 전화까지 걸려 왔다. 불길한 예감에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한경의 뇌리를 스치면서 머리가 쭈뼛 섰다. 경찰이 나한테 연락할 일이 뭐가 있지? 게다가 내가 어디 있는지가 왜 중요한 걸까.

한경은 경찰을 상대로 답변을 미루는 건 현명하지 않단 판단에 위치와 상황을 곧바로 설명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조금 놀란 듯한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한경의 말이 빨라지며 목소리가 커졌다. 경찰이 갑자기 자신을 찾는다면 미국에 계신 부모님이 유일한 이유였다. 하지만 다급한 물음에도 건너편에선 침묵만 유지했다. 답답해진 한경이 더욱 소리를 높여 상대방을 불렀다.

한경은 순간적으로 하 경사의 말을 인지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했던 답변에 상황 파악이 되지 않고 머리가 하얘졌다.
김 교수가 실종되었다고…?
속으로 다시 한번 되풀이해 봤지만 여전히 그 문장이 갖는 현실감은 영점, 제로였다.

전화를 끊은 한경은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경찰서로 왔다. 진술 녹화실에 홀로 앉아 있는 한경의 얼굴은 초췌함, 그 자체였다. 병원에 입원까지 해서 치료받긴 했지만, 난생처음 앓았던 대상포진의 여파가 쉽게 가시지 않은 탓이었다. 신체 컨디션이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퇴원하자마자 김 교수의 실종 건으로 조사를 받게 되자 심적 부담이 신체로 다시 고스란히 옮겨 간 거 같았다. 명치 부분에 답답한 느낌이 들자 한경은 주먹으로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한경은 생수병을 받아 단숨에 반을 비웠다. 전화를 받은 이후부터 바싹바싹 입이 말랐다. 경찰이 자신을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최근 상황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가정할 테니까.

한경은 거리낄 게 없었지만 그 눈빛을 받아 내야 하는 상황이 묘하게 꺼림칙했다. 자신은 떳떳하지만 자칫 오해라도 사면 평생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숨이 막혔다.

한경이 하 경사를 마주 관찰하며 오른 소매를 걷었다. 그런데 손목에 몬스테라 줄기의 문신이 드러나자, 하 경사의 눈빛이 일순 바뀌었다.
"이걸… 찾으시던 겁니까?"
"김 교수님 실종을 목격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사실상 납치입니다만."
"네? 납치요?!"
한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멍한 표정이었다가 이내 상황을 깨달은 듯 표정이 심각해졌다. 몸을 앞으로 숙이며 황급히 물었다.

흥분한 한경의 태도에 놀랄 법도 한데, 하 경사는 동요 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한경의 눈조차 피하지 않았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손을 뻗어 앞에 놓인 서류를 몇 장 넘기더니, 페이지 하나를 찾아 멈추곤 거기에 쓰인 문장을 또박또박 읽었다.
"손목에 나뭇가지가 있었어."
말을 마친 하 경사가 시선을 치켜뜨며 한경과 다시 눈을 맞췄다. 그녀의 눈빛은 처음의 부드러웠던 인상과는 확연히 다른, 매서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손목에 나뭇가지가 있었어.’
그 문장을 듣는 순간, 목격자가 연희라는 것을 직감했다.
한경은 평소에 연희를 많이 아껴 주었다. 김 교수가 연구실의 박사들을 동원해 자기 아이를 가르치게 하는 건 상식적이지 않은 행태였고 한경이 비난하던 일의 일부였지만, 그래도 한경은 연희를 대할 땐 성심을 다했다. 김 교수의 자식이라고 해도 아이는 그와 별개의 인격체였으니까.

원망스러운 마음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연희가 왜 자신을 곤경에 빠뜨릴 말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 이상했던 건, 연희가 사실이 아닌 말을 만들어 냈을 리도 없다는 거였다. 그런 사고 자체가 불가능한 아이니까. 그런데 왜 하필 내 문신을 언급했을까? 그날 정말 나를 보기라도 한 걸까?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연희가 왜 그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연희의 정신세계는 한경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에 있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연희의 증언을 부정할 만한 다른 증거를 확보하는 거였다.

김 교수는 여전히 실종 상태였다. 경찰은 몇 번 더 한경을 찾았지만 모두 사실 확인을 하는 수준에서 끝났다.

오늘은 성실이 가장 오랜 시간 조사받았지만 연구원들에 대한 혐의는 이제 모두 걷혔고, 경찰은 유력 용의자로 한 조직폭력배의 행방을 쫓는 중이라는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걸 확인한 한경이 드디어 미뤘던 전화를 걸었다. 꼭 얼굴을 보고 지난 일을 사과하고 싶다며 만남을 꺼리던 상대를 설득해 약속을 잡았다.

한경은 두 달여 전 성실을 만났던 카페로 걸어 들어갔다. 당연한 기시감이 오히려 생소했다.
먼저 도착해 앉아 있는 성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날과 같은 테이블, 같은 자리에, 같은 옷차림의 성실이 있었다. 어중간한 시간이라서인지 다른 손님들은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에도 직원 한 명만 홀로 분주히 청소를 하고 있었다.

성실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짜증 섞인 말투로 답하던 찰나, 한경이 성실의 왼쪽 팔을 붙잡곤 재빨리 토시를 잡아당겨 벗겨 냈다.
"무슨 짓이에요!"
성실이 기겁해 소리치며 한경에게 잡혔던 손을 빼냈다. 황급히 오른손으로 왼 손목을 가렸다. 한경을 쏘아보는 눈빛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한경은 예상했던 흔적을 이미 확인한 후였다. 착잡한 눈초리로 시선을 옮겨 성실의 눈을 마주 보았다.
손목에 나뭇가지가 있었어.
연희가 말했다는 그 문장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계속 되뇌다 결국 깨닫게 됐다. 그 말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본 경험이 있다는 것을. 한경이 어릴 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누나의 몸에서였다.

미국 이민 생활 초기, 적응에 어려움이 없었던 한경과는 달리 내향적이었던 누나는 오랜 시간 다른 환경과 문화에서 살아온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한참이 걸려서야 함께 다니는 친구 몇이 겨우 생겼다. 그러나 그들은 한경의 누나를 교묘하게 농담거리로 삼아 놀리거나 돈을 갈취하기 위해 친구인 척했을 뿐이었다. 장난삼아 폭행을 가하기도 했다는 것을, 누나가 죽은 후에야 알게 됐다.
하지만 누나는 가족들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고통을 숨기면서 잘 지내는 척 연기를 했다. 이젠 친구들이 생겨서 괜찮다고, 즐겁게 학교생활도 하고 있다며 웃어 보였다. 그렇게 참아 낸 고통과 아픔은 밤에 혼자가 되었을 때, 잘 보이지 않는 몸의 한 곳에 칼로 새기며 버텼다.

마음의 상처는 아물 수 없었지만 칼이 들어간 자리엔 새살이 돋았다. 허벅지 안쪽 하얀 속살에 핑크빛 나뭇가지가 하나씩 뻗어 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뭇가지의 색이 어두워지면 그 위로 새로운 가지가 더해졌다.
그렇게 하나둘 겹치던 나뭇가지들은 그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위로, 더 위로 자라나 누나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 압박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누나의 심장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쪼개져 버렸다. 부서진 심장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마무리는 나뭇가지가 더 이상 자라지 않게 하는 거였다. 가지가 밖으로 드러나 가족들에게 들키기 전에 끝을 내는 거였다. 그렇게 부모님을, 한경을 떠났다.

그래서 한경은 확인해야 했다.
전에 카페에서 마주한 성실의 태도는 한경의 상식을 너무도 벗어나 있었다. 김 교수의 온갖 수발을 든 것에 더해, 성 상납 소문에까지 무심한 태도를 보인 건 납득하기 힘든 위화감까지 불러일으켰다.
당시엔 미처 그 이유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연희의 말이 가슴에 묻었던 아픔을 상기시키자,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성실 또한 누나처럼 아픔과 분노를 억누르고 버텨 내기 위해 비슷한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그걸 일상적인 방법으로 감추었을 거라고.
한경은 성실이 그동안 감내해야 했을 고통을 상상하자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경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암담했던 자신의 처지가 떠올랐다. 김 교수의 비리를 밝히기 위해 모든 걸 던졌지만 연구원 하나의 일탈 행위로 취급되며 끝이 났다. 모든 수입원이 끊기고 연구 커리어마저 지속할 수 있을지 장담 못 할 지경이 되었다. 김 교수가 실종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경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김 교수의 비리는 여전히 꽁꽁 감춰진 채 영원히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거였다.

성실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훗, 기억하시네요? 그래요, 내가 가장 잘하던 거. 숨 참고 버티기. 그렇게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렸어요. 가장 완벽하게, 놈이 이용하고 착취했던 그 모든 것을 그대로, 아니, 그 이상 돌려줘도 남들이 전혀 의심할 수 없을 순간까지. 그렇게 모든 걸 단숨에 빼앗아 버릴 수 있는 순간이 오기를."
후련해 보이는 표정의 성실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한경이 얼어붙은 눈빛으로 그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그러다 안타까운 듯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낮춰 얘기했다.
"하지만… 박사님이 저지른 짓은 정의 실현이 아니라 명백한 범죄예요. 기 박사님도 그걸 알잖아요?"
한경은 성실이 분노와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일생을 바꿀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모든 잘못의 시작은 김 교수였지만 그 결과는 피해자인 성실이 고스란히 책임져야 하는 사회의 속성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지 안타까웠다.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한경의 눈을, 성실은 뚫어져라 바라봤다. 상대를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결국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답답하다는 듯 얘기했다.
"제가 언제 정의 실현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냥 되갚아 주고 싶었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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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유적•유물/성균관

조선 최고의 교육 기관으로,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초입에 위치했고 근처에는 유학자들의 총본산인 유림회관이 있다.
관료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은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이다. 유학이 발전한 곳에서는 반드시 교육 기관이 만들어졌다. 중국 한나라 때는 태학, 당송 때는 국자감 등 여러 이름으로 존재했는데 주변 국가들도 같은 명칭을 사용했다. 고구려 때는 태학, 발해 때는 주자감, 고려 때는 국자감이라는 교육 기관이 만들어졌고, 고려 후기 국자감이 성균관으로 개칭된 후 공민왕은 성균관을 유학교육 기관으로 발전시킨다.
이러한 전통은 유교 국가인 조선 시대 때 더욱 강화됐다. 성균관은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명륜당 그리고 기숙 시설로 동재와 서재, 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존경각 등으로 구성돼 있다. 대성전은 평소에 문이 닫혀 있고 제사를 지내는 특별한 날에만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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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의 목소리는 냉철해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침착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이해 못 하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게 태현의 신경을 더욱 긁었다.

태현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는 형사의 표정에는 그다지 열의가 없었다. 태현은 답답함을 넘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가슴을 씨근덕거리는데 계단에서 누군가 올라오다가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 멈칫했다.

태현은 소파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쯤 되니 자신이 뭐에 홀린 것 같았다. 형사의 말처럼 사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괜히 예민해져 모든 것을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만 같았다. 태현은 피곤한 듯 양손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형사님도 제 말을 안 믿으시죠?"
"그럴 리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말에서 진실성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팀장님, 빌라 입구CCTV 확보했습니다."
"그래?"
그 말에 태현이 얼굴을 번쩍 들었다. 여기에1년 넘게 살았으면서도CCTV가 달려 있는 줄은 몰랐다. 그 여자가 오늘 여기에 왔다면 분명CCTV에 찍혔을 것이다. 공동 현관 말고는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드디어 증명할 길이 열렸다.
"같이 내려가시겠습니까?"
김 형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현은 일어나1층으로 내려갔다. 거기서CCTV 확보 소식을 알렸던 형사를 따라 지하로 한 층 더 내려갔다. 작은 사무실이 있었는데, 빌라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걸 태현은 오늘 처음 알았다. 노크하고 들어가자 낡은 모니터 앞에70대로 보이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태현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사랑한다는 말을 원하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호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감정은 사랑을 열렬히 고백할 만큼은 아닌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다들 그렇다. 보통 호감으로 연인이 되지만 처음엔 알아 가는 단계다. 그 시기에 말하는 사랑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말을 내포한 것이지 진실한 사랑은 아닌 것 같았다. 갑자기 태현은 수연을 떠올렸다. 목숨도 걸 수 있었던 사랑. 그것이 태현이 생각하는 사랑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사랑의 기준이 같진 않다. 게다가 사랑과 함께 시계를 받은 이상 자신의 생각을 말할 타이밍은 오늘이 아니었다.

지영은 태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태현도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다음 도로로 나왔다. 깊은 한숨이 자연스레 나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목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았다.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뭔가 가슴이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태현은 집 앞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을 샀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날과는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다들 자신의 업무를 하긴 하지만 좀 더 목소리가 낮았다. 게다가 태현이 들어서자 흘깃거리는 시선들이 바로 느껴졌다. 태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몇몇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전화를 받고 있었지만 대부분 사무실 가운데에 있는 테이블 쪽에 모여 있었다. 회의는 보통 회의실에서 하는 데다 태현이 알기로는 오늘 아침엔 회의가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이 모여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앉아 있지 않고 하나같이 서 있는데 뭔가를 중심에 두고 둘러싼 느낌이었다. 그 사이에 있던 김 대리가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다 태현을 발견했다.

태현은 머쓱하게 인사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김 대리와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일일까 싶은 마음에 회의 테이블 앞까지 간 순간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회의 테이블에 지영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엄청난 크기의 찌개 냄비와 반찬들, 그리고 일회용 플라스틱 밥그릇이 놓여 있었다. 지영은 야유회라도 나온 것처럼 사람들에게 찌개와 밥을 덜어 주는 참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무실 안에 김치찌개 냄새가 가득했다.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지영과, 잔뜩 굳은 인상으로 간신히 웃고 있는 부장님뿐이었다.
이건 영업사원들에게 상당한 실례다. 바쁜 아침 시간을 빼앗는 것도 그렇지만 온몸에 김치찌개 냄새가 배고 만다. 다른 회사에 가서 미팅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곤욕일 것이다.

태현의 목소리에 지영이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해사하게 웃으며 태현을 반겼다. 태현은 그녀만큼 웃어 줄 수가 없었다.

태현은 지영을 이끌고 회사 앞에 있는 카페 ‘돌체’로 들어갔다. 아침이라 그런지 카페에는 손님이 없었다. 태현은 지영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키고는 자리를 잡았다. 어떤 식으로 얘기를 꺼내야 할까. 생각 같아서는 두 번 다시 이런 짓은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머리가 아파 왔다. 이마를 짚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니 지영이 눈치 없이 말했다.

태현은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지영의 손가락이 움찔하는 것을 분명 보았다. 하지만 진동벨이 울리는 바람에 더 묻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지영은 이미 태연한 표정을 되찾고 있었다. 태현은 테이블로 가 지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지영이 쟁반 위에 있던 커피 잔을 들어 태현의 앞에 먼저 놓아주고 나머지 한 잔을 자신의 앞에 놓았다.

지영의 과도한 분노가 태현은 너무 당황스러웠다. 이 순간 지영이 말없이 회사에 왔다는 것도, 회사에 어떻게 왔는지에 관한 것도 중요하지 않아졌다. 지영이 저러는 걸 보면 정말로 자신이 회사 이야기를 무심결에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명함이라도 한 장 건네준 건지도 모른다. 이전에 만났던 수연이나 다른 여자들에게도 몇 번쯤 그랬으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지금은 지영의 화를 풀어야 했다.

그 정도로만 끝났다면 헤어지자는 말은 안 했을지도 모른다. 급작스럽게 회사에 나타나거나, 시도 때도 없이 문자를 보내고, 그 답을 보내는 속도를 사랑의 척도로 재는 일 따위는 참아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렇게 중차대한 순간에 받은 전화이기 때문에 더욱 화가 나 헤어지자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태현은 그 전화 한 통으로 지영에 대한 모든 호감이 떨어져 나가 버리고 말았다.

잘 벼린 칼날이 와서 심장에 박히듯 날카롭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헤어지던 그날 수연의 표정이 머릿속에 떠올라 태현은 심장께가 아파 왔다.

만약 경멸과 분노가 섞인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태현은 잠깐의 기대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여자가 생겨서 수연이 질투라도 하는 건가 하는. 그러나 수연의 목소리는 그런 찰나의 오해조차 못 하게 만들었다.
[그 미친 여자 대체 뭐야? 내 휴대폰 번호 네가 알려 줬어?]
"무슨 소린지…. 천천히 설명해 줘."
태현이 부탁한 대로 ‘천천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수연의 말은 바로 이해가 되었다.

태현은 눈을 꾹 감으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굴욕과 분노가 뒤섞이는 기분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리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지영은 수연이 태현의 옛 여자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아직 태현의 휴대폰에 사진과 전화번호가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왜 아직 여지를 두냐고 전화를 걸어 욕설을 퍼부었다는 것이었다. 전화번호와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은 자신이 지우지 않은 것이고, 수연이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남긴 적도 없는데 왜 자신이 아닌 수연에게 전화를 건 것인지, 태현은 그 인과관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급한 것은 전화기 너머에서 펄펄 뛰고 있는 수연을 달래는 것이었다.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태현은 고함을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전화기를 든 손이 부들거렸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태현은 휴대폰에서 지영의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미안하지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와 전화기 너머 속 통화 연결음이 겹쳐 들렸다. 태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말을 걸어온 남자를 응시했다.K그룹 담당자였다. 그는 마치 밥을 못 얻어먹은 시어머니 같은 얼굴을 하고 태현을 보았다.
"오늘은 바빠 보이니 이만 가겠습니다. 바쁜 일 먼저 처리하시죠."
태현은 얼른 전화를 끊었다. 다급히 상대의 팔을 붙잡았다.
"부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바로 설명을…."
"아뇨!"
그는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팔을 붙잡고 있는 태현의 손을 밀어냈다.
"급한 일부터 처리하시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K그룹의 부장이 턱짓으로 태현의 손을 가리켰다. 그의 손에 들린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보고 말 것도 없이 지영이었다. 수신 거절을 눌렀지만, 또다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장은 낮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카페에서 나갔다.
태현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분노로 커다래진 눈두덩이 위로 힘줄이 불룩 튀어 올랐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금 어디야!"
태현의 고함이 너무 커서 카페 안의 손님들이 쳐다볼 정도였다.

"당장 헤어져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는 얼굴로 지영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렇게 예쁘던 얼굴이 이제는 가증스럽게만 보였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태현이 왜 화가 났는지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표정에 태현은 완전히 질려 버렸다.

다시 설명하려던 태현은 지쳐, 더 이상 말할 힘을 잃어버렸다. 왜 지금 자신이 지영에게 매달려 가며 설명을 해야 하는가. 오히려 사과해야 하는 건 저쪽이다. 생각해 보면 얼마 만나지 않은 짧은 기간 중에도 지영은 자주 저랬다. 잘못은 자기가 해 놓고도 모든 것을 태현의 잘못으로 돌렸다. 자신이 지영을 덜 사랑해서, 자신이 지영을 배려하지 않아서 화가 날 만한 모든 일들을 만들었다고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 분노가 너무 격렬해서 사정하다 보면 어느새 전부 태현의 잘못이 되어 있었고, 태현은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다 말고 그 사실을 깨닫곤 했다.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엔 절대 끌려가지 않으리라.
지영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테이블 위에 있는 커피 잔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커피 잔 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가 침묵을 지키면서 무슨 생각을 하나 불안했다. 그녀는 곧 고개를 들었다. 태현은 그 얼굴을 보고 온몸이 굳을 듯 소름이 돋았다.
지영은 웃고 있었다. 아주 비굴한 웃음이었다. 풍선 하나 받아 달라며 히죽 웃는 이벤트 아르바이트생 같은 작위적인 웃음이었다.

그 말을 마치자마자 지영의 표정이 싹 굳었다. 웃음은 온데간데없었다. 크게 뜬 눈 안에서 검은 눈동자가 희번덕거렸다. 흰자 안을 작고 검은 구슬이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그 구슬이 닿은 곳은 커피 잔이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영의 커피 잔이 박살 나 있었다. 커피는 강화유리 테이블 아래로 뚝뚝 떨어져 내렸고, 바닥에는 사기로 된 커피 잔의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지영의 손에 남아 있는 것은 커피 잔의 손잡이뿐이었다. 깨진 손잡이의 날카로운 끝을 지영은 자신의 목에 가까이 댔다.
"헤어지느니 차라리 죽을게."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주목되었다. 몇몇은 무슨 일이 일어나면 금세 도망갈 태세였다. 소란을 주의시키러 오던 점원도 멈칫한 채 경계하고 있었다. 태현은 사람들을 일일이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왜 상황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치닫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해 전에, 지영을 말려야만 했다.

발작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지영은 몸을 괴롭게 뒤틀어 댔다. 태현은 기회를 살피다 단숨에 일어나 지영의 손을 제압했다. 그렇지만 벗어나려는 지영의 힘은 대단했다. 아주 잠깐이라도 놓친다면 곧바로 제 목에 구멍을 내 버릴 것만 같았다.

이제 지영의 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그 여파가 사라지지 않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K그룹은 계약 기간 만료를 끝으로 재계약은 하지 않겠다고 최종 통보해 왔다.

그 일로 회사에서 태현의 입지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단순히 재계약을 놓친 것뿐이었다면 어느 정도 질타를 받는 선에서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장이K그룹 측으로부터 그날 미팅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결국 태현은 시말서까지 써야 했고, 직원들은 태현을 한심한 눈으로 보았다. 부장은 그를 보며 수시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치는 기분으로 집 앞에 도착해 힘겹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다행인 것은 이제 지영과는 볼일이 없다는 것, 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웬 음식 냄새를 맡았다. 고개를 들자 어둠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집 안이 빛으로 가득했다. 태현은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천천히 거실로 걸어갔다. 거실과 통해 있는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현은 그대로 할 말을 잃었다.
"태현 씨 이제 와요?"
에이프런을 두른 지영이 태현을 보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식칼이 들려 있었으며, 인덕션 위에서는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태현은 지금 경찰서에 와 있었다.
이별을 통고한 사흘 전 밤, 자신의 집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지영을 보고는 기겁하는 줄 알았다. 아무리 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소리를 질러도 지영은 뻔뻔한 얼굴로 "어서 와서 저녁 먹어요" 하는 말만 반복했다. 결국 태현이 식탁 위에 차려진 반찬들을 팔로 쓸어 버린 뒤에야 지영은 움직임을 멈췄다. 바닥은 쏟아진 반찬들로 엉망이었다. 그건 마치 자신의 기분과도 같았다.
지영은 그걸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저 그뿐이었다. 한 손에는 여전히 식칼을 들고.
그 모습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당장에라도 지영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 것만 같았다.
이건 분명 정상적이지 않았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아예 없던 일처럼 구는 지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지영이 두려웠다. 태현은 정신없이 휴대폰을 들었고, 그대로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은 여성 한 명과 남성 한 명의2인조였다.

자신들은 지구대원들이라 더 처리해 줄 수 없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태현은 고소하겠으니 경찰서로 이관해 달라고 단호히 말했다. 더 이상 지영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었다. 그는 이런 일일수록 더욱 단호하게 대해야 함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경찰이 당장 지영을 조사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흘 동안 태현은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 결국 경찰서에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수사 담당자의 이름도 출동했던 지구대를 찾아가 한참 싸운 끝에 얻어 냈다. 수사관은 피곤에 찌든 공무원 특유의 얼굴로 태현을 바라보았다.

태현은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경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실 태현도 이상했다. 무단 침입으로 신고한 이후 사흘간 그녀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문자 한 통도 오지 않았다. 공중전화 번호로 두 차례쯤 밤에 전화가 걸려 온 적은 있지만, 말없이 끊었기에 전화를 건 상대가 지영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불법 침입으로까지 신고당하자 자존심이 상해 완전히 돌아선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지만 오히려 이 고요가 태현은 불안했다.

경찰서를 나와 지친 몸으로 회사를 갔다. 회사를 가는 마음도 편치 않았다. 언제 어느 때에 지영이 들이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문이 열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일에도 집중하지 못한 탓에 거래처에서도 항의 전화가 종종 걸려 왔다. 계약 미팅 날짜를 잊는다든가 납품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 사고가 많이 벌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회사에서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눈이 곱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경찰서에 들른 탓에 출근이 늦었으니 분위기가 더 좋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냉소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경찰서, 라고 대답하자 부장은 몹시 궁금해했다. 무슨 일인지는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부장도 지영을 본 적이 있으니 얼마나 막무가내의 여자인지는 알 거라고 생각했다. 스토킹이라는 말에 부장은 크게 놀라며 ‘그런 미인이 따라다녀 준다니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허튼소리를 지껄였다.
당해 보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문제의식이라곤 없는 사람에게 그런 일을 설명하는 것조차 시간이 아까웠다. 대충 설명한 뒤 전화를 끊었는데, 그때만 해도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생겨 직원들 반응이 이런지 알 수 없었다.
"자네, 진짜 스토킹 사건 때문에 경찰서 다녀오는 것 맞나?"
부장은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을 향한 혐오가 그의 가느다란 눈 끝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현은 상대가 부장이라는 것도 잊은 채 언성을 높이며 따져 물었다. 그때 태현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지영이다. 그녀가 아니라면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이 없었다.

이 소문의 근간을, 태현은 반드시 찾아내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하면 분명 거짓 소문을 퍼트린 범인이 지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을 향한 지속적인 괴롭힘의 증거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부장은 태현이 바라는 말을 해 주지 않았다.

경찰들이 모두 사라진 뒤 태현은 힘 빠진 걸음으로 안방에 들어가 침대에 맥없이 걸터앉았다.

모든 것이 싫어졌다. 태현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협탁에 놓으려고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전기 요금 고지서와 교회 전단 같은 우편물들이 협탁 위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었다. 태현이 갖다 놓은 것은 아니었다.
"하…."
기가 막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 일을 풀어 나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태현은 침대 위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천장이 자신을 향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식은땀이 흘렀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발작하듯 온몸을 뒤틀었다. 그러고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듯 비명이 섞인 고함을 질러 댔다.
"으아아아아악!"

태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빌라의 바로 옆 오피스텔 건물 앞에 지영이 서 있었다.
퇴근하여 돌아오는 길이었다. 소문 이후로 회사에서는 아직 태현을 경계하는 직원이 많았다. 특히나 여직원들의 가시 돋친 시선은 견디기 힘들었다. 거짓의 파급력은 컸고 진실의 무게는 가벼웠다. 가벼운 진실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지 못했다. 어쩌면 회사를 옮겨야 할지도 모른다고 태현은 생각했다. 이 모든 게 지영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에 지영을 발견했으니 자신의 원망이 깊어 헛것을 보는 것인가 생각하기도 했다. 왜냐면 지영은 여기 있어서는 안 됐다. 이미 접근 금지 신청을 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지영에게 통보가 간 걸로 알고 있었다.

목적은 위협이 분명하다.100m 접근 금지 따위를 누가 무서워할 줄 아느냐는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많은 스토커는 접근 금지 명령서를 받음과 동시에 광분한다. 상대를 더 괴롭힐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태현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지영의 시선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휴대폰을 들어 곧장112를 눌렀다. 상담 경찰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인근 지구대에서 곧장 출동할 수 있게 처리하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순간, 그사이 지영이 가 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은 태현을 향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진정하라는 제스처였다. 경찰이 다시 물었다.
"아까 이분은 여기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고 했는데요. 무슨 뜻인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물으나 마나 다 거짓말이야!"
"고객님 말씀이 맞아요. 다른 동네 찾으셨는데 오늘 이 매물이 나와서 한번 보시라고 제가 모시고 온 거예요. 이 동네라고 말씀 안 드리고 왔어요."
"하! 말도 안 돼."
태현은 기가 막혀 가슴을 씨근덕거렸다. 지영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몇 걸음 떨어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경찰 중 한 명이 그녀에게로 가 상황을 설명하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피해자를 위로하는 모양새였다. 가슴이 갑갑해서 눈앞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다른 경찰이 태현에게 말했다.
"접근 금지는 위반했지만 본인이 오려고 온 게 아니라서요. 지금 경찰이 조치할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바로 여기를 떠나시라고 하는 것 말고는요."
태현 역시 더 이상의 방법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 말이 거짓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그날 밤, 태현은 악몽을 꾸었다. 밤의 어둠이 내린 산중 어딘가였다. 나무와 풀숲을 헤치며 태현은 도망치고 있었다. 무거운 공포가 그를 잔뜩 억눌렀다. 도망을 치려고 해도 다리가 너무 무거워 잘 움직이지 않았고, 비명은 목이 꽉 멘 듯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다. 뒤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태현은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하지만 다리가 완전히 땅에 붙박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태현은 한쪽 다리를 붙잡고 움직이기 위해 힘을 쏟았다.
다리가 뜯겨 나갈 만큼 고통스러운 순간 태현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헉헉."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일으키고 앉았다. 온몸이 땀으로 가득했다. 양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신이 현실로 돌아오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이런 꿈을 꾼 것은 다 지영 때문이다.
입이 썼다. 태현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허벅지가 타는 듯이 아팠다. 꿈속에서 얼마나 힘을 썼으면 이럴까 싶었다. 주방으로 가 컵을 하나 들고 정수기 앞에 섰다. 컵을 대고 버튼을 눌렀지만 물이 나오지 않았다.

단수인가 싶었다.1년에 한두 번쯤 이 빌라는 물탱크를 청소한다고 단수를 시켰다. 하지만 이번엔 어떤 공지도 없었다.

휴대폰에서 관리인의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 몇 번 만에 전화를 받은 관리인은 단수는 없다고 했다.

전화를 끊은 태현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침부터 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출근하려면 씻는 일이 급하다. 곧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역시나 수도 계량기가 잠겨 있었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야."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든 순간 반 층 위 계단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는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지영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지영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기쁨의 웃음을 지었다. 그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광기에 태현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숨을 전혀 쉬지 못한 채 뭔가에 홀린 듯 천천히 일어났다.

태현은 모든 순간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기뻐하며 안길 듯 달려드는 지영의 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 날이 좁고 긴 칼이었다. 그리고 칼은 배에 닿자마자 쑥 빨려 들어갔다. 비명 대신 꺽, 하는 이상한 소리가 목에서 새어 나왔다.
"킥킥킥."
지영이 웃었다. 아무 고통도 없는 것을 깨닫자 태현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찢어질 듯 커다랗게 뜬 눈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지영이 붙잡고 있는 칼의 손잡이가 배에 바싹 붙어 있었다. 칼날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칼날은 태현의 배를 뚫지 않았다. 그랬다면 곧장 주저앉았을 것이었다. 칼은 가짜였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지영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칼을 태현의 배에서 떼었다.

"100m 접근 금지?"
지영은 큭, 하고 웃었다. 그러고는 태현의 귓가에 붉고 매력적인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대었다.
"신고받고 출동하는 경찰이랑 나랑, 누가 더 빠를까? 그리고 이다음에도 계속 장난감 칼일까?"
태현은 얼어붙었다. 하지만 뇌 속에서 어떤 생각 하나가 또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잘못 걸렸다는 것.
법의 심판 전에는 반드시 ‘피해’가 있다는 것.
태현은 그날 즉시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회사에도 사직서만 우송하고 사라져 버릴 작정이었다.

스토킹하던 태현을 피해 도망치듯 새벽 이사를 해야 했던 수연이 억울함과 답답함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있을 때 눈앞에 나타난 것이 선예였다. 처음엔 그런 회사가 있다는 것도 믿지 못해 사기라고 생각했지만, 속는 셈 치고 가 보지 싶어 명함을 들고 찾아왔다가 구원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회사의 규모는 물론이고, 의뢰인의 사연에 따라 체계적으로 담당 팀이 배정되는 시스템에 놀랐다.

"그놈 이사 간 곳은 저희가 가진 라인을 통해 금방 알게 될 겁니다. 쓸데없는 짓은 안 하는지 저희가 지켜볼 거고요. 혹여나 수연 씨에게 연락이 오거나 하면 바로 저희에게 알려 주시면 됩니다. 저희 수복 주식회사만의A/S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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