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 문화/소작제
동아시아는 토지 문제로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동아시아 전체가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토지는 곧 부의 근원이었다. 따라서 귀족이나 세도가가 갖은 기회를 이용해 토질를 넓혔다. 획득한 토지는 농민들을 고용해 경영을 맡겼는데, 이를 소작제도라고 불렀다.자신의 농토를 경작한 농민은 국가에 내는 세금의 세율이 10%를 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남의 토지를 빌려서 경작하면 생산량의 50% 이상을 바쳐야 했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면 귀족이나 세도가는 더 풍요로워지고 소작농은 갈수록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귀족이나 세도가는 더욱 토지를 늘려갈 것이고 극단적인 경우에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바치고 노비가 되기까지 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 춘추 전국 시대 사상가 맹자는 ‘정전제’를 주장했다.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토지를 공정하게 나눠 여덟 가구에게 나눠주고 한 구역은 공동으로 경작해 국가에 세금으로 바치지는 생각이다. 이렇게 운영하면 합리적인 조세 수취와 농민들의 안정적인 생활이 유지될 수 있다고 봤다. 정전제는 맹자 개인의 주장이 아닌 중국 고대 국가의 이상적인 경제 개혁안이기도 했다.고려, 조선 시대 때도 소작제가 문제가 심각했다. 특히 고려 농민들은 ‘송곳 꽃을 땅도 없었다‘라고 할 정도로 사정이 어려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도전을 비롯한 혁명파는 과전법을 단행해 소작 제도를 일정 정도 해체하는 데 성공했다.하지만 조선 중기 소작제 문제는 다시 대두된다. 양반 지배 체제가 확립되면서 지배층에 의한 경제적 수탈이 광범위해지고 국가가 이 문제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로 가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생산량의 50%를 떼어가는 것을 넘어 보릿고개 때 쌀을 빌려주면서 이자를 취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추수 때 지주가 70~80%를 수취하는 일까지 발생한 것이다.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 일제 강점기 때 더욱 심각해진다.
59p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는가‘라는 것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행운, 유산, 학력이 부자가 되게 해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머리가 좋다고 해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란 근면, 인내, 계획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통제할 줄 아는 라이프스타일의 결과물이다.˝물통나르기는 결국 마르기 때문에 안정을 보장하지 못한다. 이 말은 일을 하지 못하면 수입이 끊어지므로 물통이 작을수록 파이프라인은 꼭 필요하다는 뜻이다.지속적으로 수익이 발생하는 이 파이프라인을 잘 구축하면 누구나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데 숙제로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는가‘라는 것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행운, 유산, 학력이 부자가 되게 해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머리가 좋다고 해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란 근면, 인내, 계획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통제할 줄 아는 라이프스타일의 결과물이다."
"내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내 선택이다."
"현재를 살되 미래를 계획하라!"
"세상에 그 무엇도 당연히 주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067. 유적•유물/미륵사지 석탑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백제 무왕이 세운 탑으로, 탑은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는 곳이다. 사리를 봉안했다는 것은 탑이 곧 부처란 의미이기도 하다.
백제 후기인 639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미륵사지 석탑은 규모가 크고 형식은 목탑인 양식을 따랐다. 내부로 들어가는 공간도 있다. 무왕은 백제 부흥을 꿈꾸며 대규모 사원을 건설했고 사원의 중앙에는 목탑, 동서에는 석탑을 세웠다. 그런데 목탑과 석탑뿐 아니라 미륵사 자체가 사라졌는데 그나마 남아 있던 서쪽 석탑이 일제 시대 때 시멘트로 흉물스럽게 복원되기도 했다.
강진과 해남은 우리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무대의 전면에 부상하여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일 없었으니 그 옛날의 영화를 말해주는 대단한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한 곳이며, 지금도 반도의 오지로 어쩌다 나 같은 답사객의 발길이나 닿는 이 조용한 시골은 그 옛날 은둔자의 낙향지이거나 유배객의 귀양지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월출산, 도갑사, 월남사터, 무위사, 다산초당, 백련사, 칠량면의 옹기마을, 사당리의 고려청자 가마터, 해남 대흥사와 일지암, 고산 윤선도 고택인 녹우당, 그리고 달마산 미황사와 땅끝〔土末〕에 이르는 이 답삿길을 나는 언제부터인가 ‘남도답사 일번지’라고 명명하였다. 사실 그 표현에서 지역적 편애라는 혐의를 피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남도답사 일번지’가 아니라 ‘남한답사 일번지’라고 불렀을 답사의 진수처다.거기에는 뜻있게 살다간 사람들의 살을 베어내는 듯한 아픔과 그 아픔 속에서 키워낸 진주 같은 무형의 문화유산이 있고, 저항과 항쟁과 유배의 땅에 서린 역사의 체취가 살아있으며, 이름 없는 도공, 이름 없는 농투성이들이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꿋꿋함과 애잔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향토의 흙내음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조국강산의 아름다움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산과 바다와 들판이 있기에 나는 주저 없이 ‘일번지’라는 제목을 내걸었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만큼만 느끼는 법이다. 그 경험의 폭은 반드시 지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각적 경험, 삶의 체험 모두를 말한다.
나의 학생들은 이처럼 시각적으로 감성적으로 정직하고, 무엇인가 느낄 줄 아는 답사의 모범생들이었다.
대학생 시절 나 역시 처음 남도땅을 밟았을 때, 나에게 다가온 가장 큰 감동은 남도의 포근한 들판과 느릿한 산등성이의 곡선 그리고 저 황토의 붉은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