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느껴질 때

내가 말한다. 경제적으로 실패하였다면 저 아래 낮은 곳으로 내려가라. 체면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그 체면에 "흠집을 내라scratch". 출발점을 저 낮은 곳에 다시 "그어라scratch". 당신이 놓치려고 하지 않는 생활수준이라는 것을 "지워 버리고scratch" 새로운 "출발점scratch"에서, "무에서from scratch", "근근이 살아가면서scratch along" "돈을 모아라scratch up". 그러면 "돈scratch"이 쌓이게 된다. 이것이 실패로부터 탈출하는 비결이다. 스크래치하라!

-실패하면 제로 점으로 내려가라 中에서

삶이 그대를 속이면 분노하라

서진규. 그녀는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읽어라―에서 ‘이만큼 성공하기까지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반항심과 복수심이다.’라고 쓰고 있다.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벌레처럼 나는 먹고 싸고 먹고 싸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었으며 내일은 다시 어제였다. 조그마한 차이도 없었다. 나는 내가 혐오스러웠다. 내가 분노하여야 할 대상은 세상이 아니었다. 나 자신이었다. 나는 혐오스러운 나의 삶이 너무나도 한심하였고 끝내는 저주스러웠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분노하였다. 내가 나를 죽이고 싶었던 것도 어쩌면 그런 혐오감과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절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나는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나는 5월의 찬란한 햇살 밑에서 향긋한 꽃 내음을 그대로 들이마시며 어깨를 펴고 살고 싶었다.

인생은 자전거와 같다. 뒷바퀴를 돌리는 것은 당신의 발이지만 앞바퀴를 돌려 방향을 잡는 것은 당신의 손이며 눈이고 의지이며 정신이다. 당신의 발이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움직여는 주지만 정작 당신의 손은 호주머니 속에 깊이 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정작 당신의 눈은 당신 앞에 놓인 길을 바라보지 않고 옆에서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오토바이들과 스포츠카만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볼지도 모른다. 때문에 비록 열심히 페달을 밟고는 있지만 당신이 탄 자전거는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그렇게 삶에 질질 끌려다니며 제자리를 맴도는 사람들이여. 이제는 그 삶을 정면에서 바라보아라. 비겁하게 외면하지 말라. 그 삶이 자랑스러운가? 이제는 그 삶에 대해 분노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파충류와 포유류의 차이 중 하나는 파충류는 본질적으로 화를 내거나 기쁨을 내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뇌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변연계가 퇴화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이 분노할 대상임에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이미 당신의 뇌는 썩어 버린 것이다. 차라리 강물에 빠져 죽어 버려라. 하지만 이제라도 삶이 당신을 속인다고 생각되면 그 삶을 던져 버려라. 내동댕이쳐라. 삶은 한 번뿐이다. 삶에 비굴하게 질질 끌려가지 마라. 명심해라. 당신이 분노하여야 할 대상은 이 세상이 아니다. 당신의 현재 삶에 먼저 슬퍼하고 분노하면서 ‘No!’라고 말하라. Say No! 그리고 당신의 삶을 스스로 끌고 나가라. 당신이 주인이다.

현재의 삶이 절망스럽고 괴롭고 암흑에 싸여 있는 것같이 보이는가? 그렇다면 이제 분노하라. 분노를 느끼는 사람만이 닫힌 문을 세게 쾅쾅쾅 두드릴 수 있다. 용수철처럼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당신의 삶을 이 거친 세상에서 우뚝 홀로 세울 수 있도록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피 튀기듯 노력하라. 그리고 이제는 자전거 손잡이를 제대로 잡고 정면을 바라보고 페달을 밟아라. 그렇게 하기 시작할 때 당신은 당신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며 그때 비로소 돈이 당신의 노예가 되어 당신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인생역전은 당신 스스로 현재의 삶에 분노하여 그 삶을 뒤집어 버릴 때 이루어지는 것이지 ‘수백억짜리 복권에 이번에는 내가 당첨될지도 모른다.’는 달콤한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돈독이 올라야 부자가 되는 줄 아는가? 투자 기법을 몰라서 부자가 못 되는 줄 아는가? 절대 아니다. 일확천금의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꿈 깨라. 쇠고랑을 찰 기회만 있을 뿐이다. 인터넷에서 광고만 보아도 돈을 벌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여. 메일만 보내면 수억 원을 벌 수 있다고 떠드는 자들이여. 편안하게 빨리 돈 벌고 싶어서 애를 태우는 자들이여. 평생 가난의 괴로운 숯불이 이마 위에 올려지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나는 그대들이 한시라도 빨리 그 허황된 몽상에서 깨어나기를 바란다. 피와 땀과 눈물과 시간 없이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가.

"굳은 것이라고 다 불변의 것"은 아니며 "출렁인다고 해서 다 부질없는 것"도 아님을 깨닫고 "굳은 땅에서 패이고 갈라진 것들"과 "슬픔으로 허물어진 상처들"로 가득 찬 "잘못 살아온 세월"을 지우고 "다시 출발하고 싶은 세월"을 시작하여라.
종종 자기혐오에 빠져 죽고 싶다고 말하는 독자 메일을 받는다. 고통 없이 죽는 방법을 물어보는 독자들도 있다. 이런 독자들에게는 언제나 이렇게 답장하곤 하였다: "너 자신을 죽이고 싶다면 그 죽이고 싶은 인간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어 제삼자 입장에서 살펴보아라. 불쌍하고 가련한 모습이 아마 하나둘이 아닐 것이다. 길거리에서 그런 사람을 만났다고 치자.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칼로 찔러 죽이겠냐? 아니면 이런 사람도 있구나, 불쌍하구나, 생각하면서 뭔가 이끌어 주고 도와주고 싶어질까?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바로 그 마음을 너 자신에게 가져라. 너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보살펴라."
"난 내가 혐오하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어요. 그래서 수면제를 먹었죠. 하지만 내 안에 내가 사랑할 수도 있는 다른 베로니카가 존재한다는 걸 모르고 있었어요."―파울로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 정신병원에 갇힌 베로니카가 간호사에게 하는 말이다. 나는 믿는다. 누구에게나 그 내면에는 그 육체의 주인이 사랑할 수도 있는 그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이다. 당신 자신을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조금씩 바꿔 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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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는 휴식처이자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다. 한가할 때 홀로 거기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마음을 정리해보기도 하고, 때로는 여럿이 오붓하게 모여 정서를 교감하고 흥을 돋우던 장소다.

마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유행가를 부르듯이 그들의 시작(詩作)은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옛 정자는 문학의 산실이기도 했다. 이것이 곧 우리 정자 문화의 내용이다.
이러한 정자를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사항은 말할 것도 없이 위치 설정이었다. 마을 어귀 사람들이 편안히 모일 수 있는 한쪽 켠, 전망이 좋은 언덕, 강변의 한쪽…… 우리가 지나가다 잠시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곳에는 어김없이 정자가 세워져 있다.

정원이 일반적으로 도심 속의 주택에서 인위적인 조경 작업을 통하여 동산〔園〕의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면, 원림은 교외?옛날에는 성 밖〔城外〕?에서 동산〔園〕과 숲〔林〕의 자연 상태를 그대로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집칸과 정자를 배치한 것이다. 그러니까 정원과 원림에서 자연과 인공의 관계는 정반대다. 우리가 찾아갈 소쇄원과 명옥헌은 정원이 아닌 원림이다.

인간은 사물을 통하여 언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반대로 언어를 통하여 사물을 인식한다. 그리하여 어휘력은 인간 정신의 고양과 정서의 함양에 크게 기여한다. 이뿐만 아니라 풍부한 어휘력은 사물에 대한 관찰과 인식이 남다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양산보가 원림의 이름을 소쇄원이라 하고 사랑채와 서재가 붙은 집을 ‘제월당(霽月堂)’, 계곡 가까이 세운 누정을 ‘광풍각(光風閣)’이라고 한 것은, 송나라 때 명필인 황정견이 주무숙의 인물됨을 "흉회쇄락 여광풍제월(胸懷灑落如光風霽月)," 뜻을 풀자면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밝은 날의 달빛과도 같네"라고 한 데에서 따왔다.
그리고 「처사공실기」에는, 양산보가 어렸을 때 이곳 계곡에서 놀다가 물오리가 헤엄치는 대로 따라 올라가게 되었는데 지금 소쇄원 자리에 이르자 작은 폭포와 못을 이루며 계곡이 깊어지고 주위의 풍광이 너무도 수려하여 거기에서 미역도 감고 이리저리 뛰놀며 언젠가는 여기에 와서 살 뜻을 세웠다고 전한다.

소쇄원 원림은 결국 자연의 풍치를 그대로 살리면서 곳곳에 인공을 가하여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 공간을 창출한 점에 그 미덕이 있다.

소쇄원에 처음 가보는 사람들은 우선 길이가 50미터나 되는 기와 지붕을 얹은 긴 흙돌담의 아이디어에 놀라게 된다. 가지런하게 잘 쌓은 이 흙돌담은 소쇄원과 지석마을을 갈라놓는 경계 구실을 하고 있지만, 안에서 바라볼 때는 소쇄원을 더없이 아늑한 공간으로 감싸주는 기능을 한다. 본래 자연 그대로의 상태라는 것은 두려움 내지 무서움을 유발한다. 그러나 인간의 손길이 적절히 닿아 있을 때 우리의 정서는 안정을 찾는다. 그러니까 담장은 외부 공간과의 차단, 온화한 내부 공간의 조성, 자연에 가한 인간의 손길이라는 3중 효과를 갖고 있다.

그런데 담장에는 필연적으로 폐쇄감이 있기 마련이니 자연과 인공의 조화로움을 파괴할 소지가 거기에 도사리고 있다. 그 문제를 소쇄원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해결하였다. 하나는 대문이 없는 개방 공간, 이른바 오픈 스페이스로 풀어버린 것이다. 또 하나는, ㄱ자로 둘러친 담장의 북쪽 편은 계곡을 가로지르게 되어 있는데 마치 돌다리를 놓듯이 받침돌이 담장을 고이고 있어서 담장 밑으로 냇물이 자연 그대로 흐르게 해놓은 것이다. 절묘한 개방성이며, 자연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인공의 겸손이 바로 이런 곳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나는 이것을 조선시대 사대부 문화의 위대한 강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대부는 군자로서 살아가는 길을 끊임없이 반성하면서 삶을 영위하는 확고한 도덕률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이 지향한 바는 전문인·기능인이 아니라 총체적 지식인으로서 문사철(文史哲)을 겸비한 사람이었으며, 그리하여 그 지식으로 세상을 경륜하고, 그 안목으로 시를 짓고 거문고를 뜯고 글씨를 쓰고 집을 짓고 사랑방을 디자인하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전쟁조차도 전문성보다는 총체성에 입각하여 대처했다. 우리 시대의 전문인들이 잃어버린 바로 그 총체성을 우리는 이곳 소쇄원에서 배워야 마땅할 것이다.

명옥헌의 호수와 배롱나무 | 고목이 된 배롱나무가 늘어선 명옥헌은 한여름 꽃이 필 때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한다.

명옥헌은 가운데 섬이 있는 네모난 연못을 파고 그 위쪽에 정자와 서재를 겸한 건물을 지은 간단한 구성이지만 연못 주위에 소나무와 배롱나무를 장엄하고 넓게 심어놓고 언덕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시야를 끌어들임으로써 더없이 시원한 공간을 창출한 뛰어난 조경 설계를 보여주는 원림이다.

한국의 정원미는 중국 정원처럼 인공에 의하여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 정원처럼 자연을 주택의 마당에 끌어들여서 주인 행세를 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 정원의 이상은 소박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2021년 9월 2일, 문화재청은 명승으로 지정된 별서정원 22개소 중 11개소 정원의 만든 이와 소유자, 변화과정 등을 고증한 결과를 발표하며 소쇄원의 ‘소쇄(瀟灑)’라는 이름이 ‘맑고 깨끗하다’라는 뜻으로 송순이 지어준 이름임을 밝혔다. 이는 양산보와 교유했던 하서 김인후의 『하서전집(河西全集)』에서 "소쇄원의 이름을 하서가 지었다고 하기에 송신평(宋新平, 송순)에게서 나온 것임을 밝힌다"라는 새로이 발견된 구절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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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 사건/강제 징용

1937년 전개된 중일전쟁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 정책의 모든 것을 바꿨다. 전면전이 발발했기 때문에 국가총동원령을 발동했고 물자 수탈, 인력 수탈 등 각종 강제동원 정책을 펼쳤다.
강제 징용은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한 수단이었는데, 해외에 끌려가기도했지만 국내에서 진행된 경우도 많았다. 전투복을 꿰매거나 각종 노무에 동원된인력을 국내 약 550만 명, 해외 약 20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해외에 끌려가기 전에는 부산 일대에 머물면서 훈련을 받았는데 여기서부터 구타를 통한 길들이기가 시작됐다. 노동은 극도로 고됐고 식사와 거주 환경 등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사고 위험이 높은 곳일수록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을 감당했고 유사시에는 전투를 강요당하기도 했다. 목총을 들고 미끼가 되거나 수류탄을 짊어지고 전차에 뛰어들기를 강요하는 등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방직후에는 일본인들의 분풀이 표적이 돼 학살을 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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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상은 ‘안동 이천동(泥川洞) 마애여래입상’(보물 제115호)이라는 공식 명칭을 갖고 있지만, 조선시대에 제비원이라는 역원(驛院,오늘날의 여관)이 있던 자리여서 흔히 제비원 석불로 통한다. 과거에는 독한 안동 ‘제비원 소주’(1962년 생산 중단)로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지만 원래 제비원의 이미지는 단연코 이 석불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안동은 언어생활에서도 전통을 고수하는 집념을 보여준다.

얼핏 생각하기에 안동 양반들은 한자어를 많이 썼을 듯한데 이처럼 한글 이름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은 한글이고 한자고 한번 접수한 것은 무조건 끝까지 지키고 보는 전통 고수의 저력 때문이다. 그래서 안동 사람들은 일상에서는 순우리말을 많이 쓰다가 품위와 권위를 찾을 때는 한자어를 많이 쓰는 독특함이 있다.

제비원 석불 | 제비원 고갯마루 겹겹의 바위를 이용해 조성한 고려시대 석불이다. 파격적이고 개성적인 고려 불상의 좋은 본보기인데 「성주풀이」에서 무당의 본향을 여기로 지목한 것이 아주 흥미롭다.

병산에서 내려다본 병산서원 전경 | 밖에서 본 병산서원은 여느 서원 건축과 큰 차이를 못 느끼는 평범한 서원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부에서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병산서원은 1572년 서애 류성룡이 풍산 읍내에 있던 풍산 류씨 교육기관인 풍악서당(?岳書堂)을 이곳 병산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이후 1614년에는 정경세를 비롯한 서애의 제자들이 류성룡을 모신 존덕사(尊德祠)를 지었고, 1629년에는 서애의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을 배향했으며 1863년엔 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그리고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건재했던 조선시대 5대 서원의 하나이다.

병산서원은 그런 인문적·역사적 의의 말고 미술사적으로 말한다 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 건축이자 한국건축사의 백미이다. 병산서원은 건축 그 자체로도 최고이고, 자연환경과 어울림에서도 최고이며, 생생하게 보존되고 있는 유물의 건강 상태도 최고이고, 거기에 다다르는 진입로의 아름다움도 최고이다.

1543년,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소수서원을 기폭제로 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간 서원은 그 구조가 거의 공식화되었을 정도로 아주 정형적이다. 크게 선현을 제사 지내는 사당과 교육을 실시하는 강당 그리고 원생들이 숙식하는 기숙사로 이루어진다. 이외에 부속건물로 문집의 원판을 수장하는 장판고(藏板庫),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典祀廳) 그리고 휴식과 강학의 복합 공간으로서 누각(樓閣)과 어느 건물에나 당연히 있을 뒷간이 있으며, 서원을 관리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관리소인 고사는 별채로 구성된다.

병산서원 또한 그런 전형적인 서원 배치에서 조금도 벗어나 있지 않다. 그러나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을 배경으로 하여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이 빼어난 강산의 경관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며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건축적·원림적 사고의 탁월성을 보여준다.

만대루| 병산서원 건축의 핵심은 만대루이다. 200명을 수용하고도 남음이 있는 이 시원한 누마루는 낙동강과 병산의 풍광을 건축적으로 끌어안는 구실을 한다.

이제 병산서원을 우리나라 내로라하는 다른 서원과 비교해보자.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은 그 구조가 복잡하여 명쾌하지 못하며,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안강 옥산서원은 계류(溪流)에 앉은 자리는 빼어나나 서원의 터가 좁아 공간 운영에 활기가 없고,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덕천서원은 지리산 덕천강의 깊고 호쾌한 기상이 서렸지만 건물이 배치된 간격이 넓어 허전한 데가 있으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현풍 도동서원은 공간 배치와 스케일은 탁월하나 누마루의 건축적 운용이 병산서원에 미치지 못한다는 흠이 있다.

이에 비하여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과 건물이 만대루를 통하여 흔연히 하나가 되는 조화와 통일이 구현된 결과이니 이 모든 점을 감안하여 병산서원이 한국 서원 건축의 최고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대루에 중심을 두는 건물 배치는 건물의 레벨 선정에서도 완연히 나타난다. 병산서원이 올라앉은 뒷산은 화산(꽃뫼)이다. 이 화산의 낮은 구릉을 타고 외삼문에서 만대루, 만대루에서 강당, 강당에서 내삼문, 내삼문에서 존덕사로 레벨이 올라간다. 하지만 이는 단조로운 기하학적 수치의 증폭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공간 운영을 자세히 따져보면, 사당은 위로 추켜올리듯 모셨는데, 만대루 누마루는 앞마당에서 볼 때는 위쪽으로, 그러나 강당에서 볼 때는 한참 내려보게 레벨이 잡혀 있다. 사당은 상주하고 상용하는 공간이 아니라 일종의 권위와 상징 공간이니 다소 과장된 모습을 취했지만 만대루는 정반대로 봄부터 가을까지 상용하는 공간이므로 그 기능을 최대치로 살려낸 것이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라며 안동 병산서원과 도산서원을 비롯하여 영주 소수서원, 경주 옥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장성 필암서원, 정읍 무성서원, 논산 돈암서원 9곳을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했다.

병산서원은 반드시 걸어가야만 병산서원에 간 뜻과 건축적·원림적(園林的) 사고가 맞아떨어진다. 그곳에 이르는 길은 절집 입구의 진입로와 같아서 만약 선암사, 송광사, 해인사, 내소사를 자동차를 타고 곧장 들어갔을 때 그 마음이 어떠할까를 생각해본다면 왜 걸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저절로 구해질 것이다.

만대루에서의 조망, 그것이 병산서원 자리 잡음의 핵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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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 명문장/조용히 즐기는 것이야말로 즐거움 아니겠는가

이곳에 집을 정한 지 이제 십여 년이다. 속세의 손님이 오지 않아 세상사를 듣지 못한다. 함께 다니는 사람은 산에 사는 승려뿐이고, 나를 아는 것은 강가의 새벽뿐이다. 명예와 이익을 잊고 수령이 있건 없건 내버려 둔 채 피곤하면 낮잠을 자고 즐거우면 시를 읊는다. 그저 해와 달이 뜨고 지며 강물이 쉬지 않고흘러가는 모습만 볼 따름이다. 찾아오는 벗이 있으면 먼지에 덮인 평상을 쓸어놓고 기다리고, 용렬한 자들이 문을 두드리면 평상에서 내려가 만나본다.
(…) 샘물이 졸졸 흐르니 갈증을 해소할 수 있고, 강물이 넘실거리니 갓끈을 씻을 수 있다. 술이 있으면 걸러 오고 없으면 사다가 혼자 따라 혼자 마시면서 혼자 노래하고 혼자 춤춘다. 산새는 나의 노래 친구요, 처마의 제비는 나의 춤상대다.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며 태산에 올랐던 공자의 기상을 떠올리고, 강가에서 시 읊으며 흘러가는 강물을 탄식한 공자를 본받는다. 거센 바람이 들이치지 않으니 좁은 집도 편안하고, 밝은 달이 뜰을 비추니 홀로 천천히걸어 다닌다. 처마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면 베개를 높이 베고 꿈을 꾸며, 산에 눈이 날리면 차를 끓여 홀로 따르기도 한다.
(・・・) 갈대꽃은 바람에 흔들리고 줄풀은 하늘거리며 안개비가 내렸다 그쳤다한다. 구름 덮인 강물이 만 리에 넘실거리니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또 눈보라가 창문을 때리고 겨울 추위가 혹독하면 화로를 끼고 앉아 술동이를 열기도하고, 책을 펴고 마음을 가다듬기도 한다. 드넓은 천지에 홀로 서서 조용히 즐기는 것이야말로 은자의 즐거움 아니겠는가.
- 길재, <야은선생언행습유》중

길재 (1353년~1419년)는 은둔 생활을 통해 끝까지 고려에 대한 충정을 지킨 인물이다. 정몽주, 길재는 이후 김종직, 조광조 등을 거치며 조선 사림파 계보의 기원이된다. 역설적이게도 사림파는 조선의 주류 세력으로 부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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