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 장소/남산

경복궁을 마주보고 있는 산으로, 목멱산으로도 불렸다. 현재는 중구와 용산구의 경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난 100년간 남산은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모두 감당한 슬픈 공간이었다. 이곳에는 총독부의 전신인 통감부 건물이 세워졌고,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그를 기리는 박문사(오늘날 신라호텔 자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925년에는 조선 신궁이 들어섰다. 일본 신화의 시조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을 주신의로 삼은 최고급 신사였다. 해방 후에는 이곳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졌다. 하지만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로 쫓겨나자 시민들이 직접철거했다.
과거 독재 정권 시절, 남산은 이름만으로도 두려움을 자아내던 곳이었다. 중앙정보부 건물이 이곳에 있었는데, 지금의 서울 유스호스텔, 서울종합방제센터, 서울시청 남산 별관 등이 모두 관련 건물들이다. 1964년에는 한국반공연맹 자유터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지금은 한국자유총연맹 본부가 들어서 있다. 남영동대공분실을 설계한 김수근이 지은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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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가난한 집 중고등학교 학생이라면 일단은 코피 터지도록 공부해라. 돈이 없어 과외를 못 받고 학원을 못 다닌다고 서러워하지 말라. 교육 방송이나 인터넷 과외에 관심을 가져라.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으면 선생님을 붙들고 늘어져라. 집안이 제아무리 콩가루 집안이라고 해도 신경 쓰지 마라. 부모가 이혼을 했건, 한쪽에서 소주병이 난무하건, 한쪽에서 통곡 소리만 들리건 간에 귀를 막고 이를 악물고 공부만 해라. 엉엉 울고 싶은 상황이라면 울어라. 하지만 5분 이상 울지 말고 삼켜 버리고 하늘을 향해 ‘으악!’ 크게 한 번 외치고 다시 공부해라. 친구들이 무엇을 갖고 있건 간에 그것을 부러워하지 말라. 휴대폰이 없다고 해서 우울해하지 말고 그것이 없음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라. 돈이 없어서 누군가로부터 괄시와 모멸을 당했다면 그것을 잊지 말아라. 그리고 네가 받은 모멸감과 네가 흘린 눈물로 날카로운 비수를 만들어 마음속에 ‘나, 죽어도 죽어도 이날을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고 진하게 난도질하고 다시 공부해라.
집안이 어려워서 학비라도 벌겠다는 생각에 아르바이트하겠다고 깝죽대지 말고 그냥 죽어라고 공부만 해라. 공부는 궁극적으로 엉덩이 무거운 사람이 이기는 게임임을 명심해라. 그리고 최고의 학교에 들어가거나 최고의 장학금을 반드시 타라. 그게 아르바이트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짭짤한 좋은 돈벌이라는 것을 기억해라. 이성 교제? 개소리하지 말고 시간을 아깝게 여기고 바보처럼 공부만 해라. 명심해라. 이 사회는 학벌 사회이고 이 학벌 사회에서 출세하는 가장 손쉬운 길은 일단은 최고의 학교를 나오는 것이다. 나를 믿어라. 일단은 공부하는 것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생존 방식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렇게 공부를 1~2년 해도 도저히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면 너희는 공부하고는 안 맞는다. 그러나 학교를 그만두지는 말아라. 형편이 허락하는 데까지는 다니고 학교 공부 대신 닥치는 대로 일하는 방법과 장사나 사업에 대한 책을 읽어라. 아르바이트도

나도 소설 속의 그 부자 아버지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살펴볼 것을 권유한다. 내가 부자가 된 것은 부자들에 대한 정보도 없었던 시절에 부자들을 따라 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따라 하지 않으려고 기를 썼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백만장자들의 특성만 배우려고 하는가. 가난한 자들에게도 공통적 특성이 있다. 그 특성들은 ‘가난이 세습되는 이유’에서 설명하였듯이 부모로부터 주로 영향을 받게 되지만 부모와는 상관없이 사회에서 보유하게 되는 경우도 많은 듯하다.
첫째, 돈 받는 것 이상으로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둘째, 아무 일이나 하려고 하지 않는다.

셋째, 자신이 받았던 돈의 액수 이하로는 일하려고 하지 않는다.

넷째,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다섯째, 운명론을 받아들이고 사주팔자를 신봉한다.

여섯째, 세상을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쉽게 흥분한다

일곱째, 경험자의 이야기보다는 자기 판단을 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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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도 때로 자식을 타인으로 봐야 할 필요가 있지만, 자식 역시 자신의 부모를 타인으로서 정중하게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엄마’가 아니라 ‘어느 중년 혹은 노년의 여성’으로 바라본다면 측은지심을 느낄 것입니다.
부디 내가 가장 약하고 가난한 시절에도 다만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내 가족에게 약자의 패악을 부리지 않기를.

로마인들은 ‘말하다’라는 뜻의 동사 ‘for(포르)’의 과거분사 ‘fatum(파툼, ‘말하여지다’라는 뜻)’을 명사화하여 ‘운명’이란 단어로 사용했고, 여기서 바로 ‘운명’이라는 뜻의 영단어 ‘fate’가 유래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운명이란 신들이 천명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운명을 말할 때 ‘fate’보다는 ‘destiny(영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destiny는 ‘정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동사 ‘destino(데스티노)’에서 유래했는데, 무의식 가운데 운명은 정해진 것, 그래서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깔린 듯합니다. 혹시 오늘날 전복시키기 힘들어진 굳건한 계층사다리로 인해, 운명은 인간의 힘으로 돌릴 수 없다고 여기게 된 사람들의 열패감이 말에도 영향을 끼친 것일까요.
반면 그리스인들은 ‘운명’을 자신에게 할당된 ‘부분’으로 이해했습니다. 인간은 ‘부분’을 부여받으면서 태어나고, 바로 이 ‘부분’이 한 인간의 존재를 특징짓게 될 일련의 사건들을 결정지을뿐더러 죽음의 의미와 순간까지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빈 부분, 부재, 텅 빈 것’도 삶의 ‘부분’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없는 것’ ‘없는 부분’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평등합니다.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

Qui maledixerit patri suo vel matri,
퀴 말레디세리트 파트리 수오 벨 마트리,
morte moriatur.
모르테 모리아투르.

부모님을 생각하면 복잡하고 묘한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성장기에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던 그분들이 나이들수록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부모님이 달라졌다기보다는, 내가 나이들어가면서 철도 들어 어른의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이 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날은 문득 나의 부모가 그 험난한 세월 동안 부부의 연을 놓지 않고 끝까지 살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나의 부모를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 여긴다면 나 또한 ‘별 볼 일 없는 사람’의 소생에 지나지 않는가! 내가 타인 앞에서 내 부모님을 규정하는 만큼, 나는 꼭 그만큼의 인간, 그 정도의 아들이 되는 셈이지요.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깎아내리고 자학함으로써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모는 사형과 마찬가지이지요.

빨리 따라오는 사람들하고만
길을 걸어가야겠습니까?
더 늦게 오는 사람들을
버려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Sed numquid cum celerioribus
세드 눔퀴드 쿰 첼레리오리부스
tantum ambulamus viam?
탄툼 암불라무스 비암?
Et qui tardius ambulant,
에트 퀴 타르디우스 암불란트,
non sunt relinquendi.
논 순트 렐린쿠엔디.

빨리 따라오는 학생들만 데리고 가려는 선생, 자신에게 경제적 정신적 지지를 수월하게 해주는 부모가 되어주지 못한다고 제 부모를 욕하는 자식, 이들은 모두 제 발등에 도끼를 찍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더디 따라오는 학생이나 뒷받침을 잘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부모들마저 존중하고 사랑하는 성숙한 인간이 되지 않으면, 자신과 연결된 그들의 결핍과 아픔을 모른 척 외면해버리고 나면, 그것은 평생의 상처와 얼룩이 되어 당신을 영영 따라다닐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날을 눈물과 복받치는 감정으로 보낸 어느 날, 머리가 아주 차가워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가 무엇이 될지, 어떠한 사람이 될지는 모르지만 내 안에 들끓고 있는 그 뜨거운 마음을 믿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도 나란 존재가 이 세상에 버려지듯 던져졌다가 사라지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때 나는 스스로를 소중히 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내가 나를 먼저 이해하고 나의 소중함을 받아들이자, 내 가장 가까운 이웃인 부모님도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식된 자로서 부모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 바라고 기대하기보다 먼저 가져야 할 마음은 부모를 향한 연민이었습니다. 처음 부모가 되어서 많은 것이 서툴고 힘겨웠을 텐데 부모 역할을 하시느라 수고하셨다고, 살아주셔서 감사하다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건네는 연민 말이지요. 부모도 자식도 서로를 선택할 수 없는 관계이기에 단지 한 세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완벽한 부모 노릇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부모에게도 그 윗세대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상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운명적이면서도 어찌 보면 그저 우연한 만남일 뿐입니다. 하필 나는 왜 이러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을까 생각하는 대신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아이를 키워야 했을 부모님에 대해 연민을 가져보십시오.
나는 세상 한구석에서 한탄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고 그저 내 몫을 살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이 세상 전부가 학교이고 선생입니다.

어떤 사람도 특정인을 자기 부모로 정해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어린 저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 번의 연민과 깨우침으로 저를 완전히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는 일상에서 보고 겪는 고통이 너무나 컸고, 그 고통은 가까스로 추어올린 나의 결심을 단번에 무너뜨렸습니다. 그때 나의 미숙한 삶은 마치 수용소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피할 수만 있다면 어디로든 피하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내 작은 몸을 숨길 곳도 피할 곳도 없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태어난 가난한 사람hominem pauperem de pauperibus natum;호미넴 파우페렘 데 파우페리부스 나툼. 그것이 바로 나였습니다. 그런 내가 선택할 수 있고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몸부림과 절규뿐이었습니다. 그 절규는 마치 구약성경 하바꾹 3장 10절의 표현과 같았습니다.
"산들이 당신을 보고 몸부림칩니다. 폭우가 휩쓸고 지나갑니다. 심연은 소리지르고 그 물줄기가 치솟습니다."
그런 가운데 나온 외마디 절규는 ‘살고 싶다’라는 외침이 아니라 ‘살려주세요’라는 호소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읊조렸습니다.
주님, 제가 온 마음으로 당신을 찬미하리다. 당신 종에게 선을 베푸소서. 제가 살아 당신 말씀을 지키오리다. 저는 몹시도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주님, 당신 말씀대로 저를 살려주소서.
Confitebor tibi, Domine, in toto corde meo: retribue servo tuo: vivam, et custodiam sermones tuos: vivifica me secundum verbum tuum, Domine.
콘피테보르 티비, 도미네, 인 토토 코르데 메오: 레트리부에 세르보 투오; 비밤, 에트 쿠스토디암 세르모네스 투오스: 비비피카 메 세쿤둠 베르붐 투움, 도미네. (시편 119, 17과 107 참조)

길을(계속) 걸어가다.

Insisto iter(viam).
인시스토 이테르(비암).

타인의 삶은
우리에게 스승이 된다.

Vita aliena est nobis magistra.
비타 알리에나 에스트 노비스 마지스트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그냥 하는 힘을 믿고 막연히 제 앞에 있는 길을 걸어갔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낯선 길을 걸어야 할 때 밀려오는 감정은 막연함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습니다. 어디까지만 가면 목적지가 있다고 알려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제겐 스승이 필요했습니다. 그 길에서 부모님이 스승이 되어주셨더라면 좋았겠지만, 모두가 그런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부모가 내게 스승이 되어주지 못하더라도 일단 타인의 삶이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스승이 될 만한 이들은 역시 내 가까이엔 없었습니다. 너무 유명하신 선생님들은 감히 다가갈 수도, 제 형편으로는 그분들의 강의를 들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책을 통해 타인의 삶을 만나고, 그 책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에게도 기꺼이 스승이 되어줍니다. 모든 책이 선생이 될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의 선생이 되어줄 인생책은 세상 어딘가에 꼭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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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 인물/소수림왕

소수림왕(?~384년)은 고구려의 제17대 왕으로, 4세기 고구려의 중앙 집권화를 이됐다. 고구려는 5세기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수백 년간 만주 집안지역의 국내성을 수도로 뒀다. 위치상 중국은 물론 만주 일대의 수많은 부족, 한반도의 여러 왕국까지 상대해야 하는 처지였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고자 적극적으로 주변 지역을 공략해 나간다.

고국원왕의 뒤를 이은 왕이 소수림왕이다. 소수림왕은 정복 사업보다 체제 개혁에 집중한다. 그는 율령을 반포했고 불교를 공인했으며 태학을 설립했다. 중국에서 발전한 법체계인 율령을 도입하여 각종 제도와 국가 운영 방식을 개혁했으며, 불교를 통해 기존의 신화적이고 부족적인 정신세계를 해체하고자 했다. 또 교육 기관 대학을 통해 관료를 양성하고자 했다. 즉, 국왕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 이후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장수왕이 등장하면서 5세기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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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 사건/일본군 위안부

일제 강점기 성노예 제도로, 1937년 중일 전쟁부터 1945년의 패전까지 일본 점령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실시됐다. 일제는 러시아혁명 당시 시베리아에 출병하고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는 등 지속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확대했다. 따라서 해외에 파견한 군대를 통제하거나 점령 지역을 관리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일본군은 현지 여성을 겁탈하거나 성매매업 여성들과 어울리면서 성병에 걸리는 등 각종 문제를 일으켰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와 군부는 군의 사기를 유지하고 성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과 대만 등 식민지에서 성병에 걸리지 않은 일반 여성들을 동원하고자 한다. 군이 직접 관리하는 위안소와 위안소에서 일하는 여성인 위안부를 조직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사회가 민주화되자 여성 문제, 역사 문제 등 다양한 이슈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여성학자들과 정대협 등 여성단체의 도움을 받아 공개적으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렸다. 일본은 1993년 고노담화를 통해 이 사실을 시인했고, 1995년 무라야마 총리는 일본 식민 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공식 사과하는 등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후 일본이 우경화되면서 현재까지 각종 갈등과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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