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사고를 당했을 땐 기자들이나 경찰이 도와줄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진도대교 싸움도 누가 시켜서 했던 게 아니에요. 처음엔 촛불집회에도 가지 말자고 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우리 부모들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정부 쪽에서는 우리 싸움을 막으려고 개인보상으로 파고들어올 테고 그걸 방어하는 게 제일 시급한데 우리는 잘 버티고 있잖아요. 최대한 막아내야죠. 큰 걱정은 안 해요. 세월호 싸움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은 덕도 크지만, 부모들이 당당하게 중심을 잡아갔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했어요. 스스로 필요를 느끼니까 청와대에도 가고, 민주당 점거농성도 하고, 분위기를 주도해가고 있잖아요. 부모들이 자랑스러워요. 감동적이에요.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 마음은 다 똑같아요. 억울하게 죽은 애 생각만 하고 자기 자신은 힘든 줄도 몰라요. 의무감이지만 대단한 힘이에요. 이제는 개인의 슬픔, 분노보다는 대한민국 학부모의 대표라고 생각하면서 싸워나가야겠죠. 그래야 국민적 지지를 받아서 특별법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돌이켜보면 내 삶은 우리 현대사의 급류에 휩쓸려왔고, 그 끝에서 참사의 당사자가 되어 이렇게 길거리에 앉아 있어요. 87년 6월항쟁부터 거의 30년이 지났는데도 세상은 그때하고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어떻게 이렇게 변한 게 없을 수 있을까 싶어요. 오히려 더 나빠진 거 같아요. 사회의 모순은 더 고착되고 견고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동안 허울만 좋은 민주주의에 국민들이 완전히 속았어요. 참담하죠. 내 딸을 잃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간절해졌어요. 우리가 꼭 진실을 밝힐 거예요. 이 문제를 지금 해결하지 못하면 30년 후에 나 같은 사람이 또 가족을 잃고 이 자리에 앉아 있지 않겠어요?

4월 16일 이후 우리는 모두 세월호 참사가 만들어낸 시간을 살아가게 되었다. 슬픔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래서 슬픔을 잊기 위해 그 시간들로부터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생긴다.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며. 그 말들이 비수가 되어 다시 하나의 시간을 슬픔에 가둔다. 그러니 우리는 가족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슬픈 이야기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자식 잃은 부모가 웃는다고 쳐다볼까봐 웃지도 못한다는 가족의 이야기를 들으며 슬픔만 고백할 수는 없다.

하나의 시간은 균질한 시간이 아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시간들에 하나의 수식어를 붙인다면, 슬픔이 아니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이 더 맞다. 집 밖을 나갈 수도, 집 안에만 있을 수도 없는 시간, 아이의 물건을 태울 수도 그대로 둘 수도 없는 시간, 밥을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없는 시간.

이는 가족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위로하며 같이 울고 싶지만 섣부른 위로가 가슴을 후벼팔까봐 다가서기 어려운 시간, 진실을 밝히려고 앞장서는 가족들에게 경의를 표하다가도 뒤돌아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경의조차 잔인하다 여겨지는 시간. 집에 들어가며 누군가의 존재를 느낄 때 누군가의 부재에 직면해야 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소소한 일상에 행복해하지도 미안해하지도 못하는 시간. 이 책을 읽는 우리가 보내는 시간도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똑같지는 않다. 가족들은 이 시간을 살아내기를 미룰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답이 없는 시간, 그동안 익혀온 어떤 삶의 기술도 무력해지는 시간, 살면서 쌓아온 세상과 인간에 대한 감각을 처음부터 다시 써내려가야 하는 시간을 가족들은 먼저 살아내고 있다. 그것은 절망적이지만, 세월호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외쳤던 우리는 다시금 가족들로부터 배운다. 누군가 이와 같은 참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가능성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보다 적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더이상 확률을 따지지 않는다. 단 한 사람이라도,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으며, 모욕당해도 되는 죽음은 없다. 부인되어야 할 삶이 없는 세상으로, 가족들은 우리를 이끌고 있다.

혼자였다면 어딘가쯤에서 이 시간을 닫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죽은 아이를 통해 ‘아이들의 죽음’을 겪게 된 부모들이 서로 지켜주며, 자꾸만 돌아오는 시간을 미래로 밀어가고 있다. 누군가는 집에서, 누군가는 거리에서, 누군가는 말하며, 누군가는 들으며, 누군가는 울며, 누군가는 웃으며, 시간을 만들어간다. 시간을 밀어갈수록 죽은 아이가 돌아올 수 없다는 아픔은 뼈저리다. 그렇게 아픔을 삼키며 밀어가는 시간의 무게를 우리는 충분히 짐작하고 있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간을,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시간으로 바꾸며 사람의 시간을 여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어야 한다. 8개월여의 시간을 정리한 연대기(年代記)가, 슬플 수만은 없는 연대(連帶)의 기록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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