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왈드 챔버스의 산상수훈 - 하나님의 영적 폭약 오스왈드 챔버스 시리즈 1
오스왈드 챔버스 지음, 스데반 황 옮김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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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상수훈이란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 걸친,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하신 설교를 일컫는다. 그것은 8복에 대한 말씀과 '신앙생활의 내적, 외적 실천 규범을 담고 있는데 성경 전체, 나아가 세계 문화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가장 완벽한 수준의 윤리 체계(톰슨 2 성경 주석 참조)'를 보여준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가르침 중 가히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다.그러한 산상수훈에 대한 책은 이미 많이 출간되어 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산상수훈'도 그 중 하나이다.

 오스왈드는 이 책을 통해 산상수훈의 말씀을 전부(마 5 ~7), 하나하나 다 풀어 설명한다. 아마 이보다 더 자세한 설명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이 얼마나 좋았던지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의 저자인 고든 맥도널드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오스왈드를 칭찬한다. 내 현재 상황 때문일까? 아니면 말씀이 워낙 좋기 때문인가? 나 또한 이 책을 읽으며, 그리고 다 읽고 나서 그의 칭찬과 같이 오스왈드를, 이 책을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말씀 하나하나가 귀한 보물 같고, 모든 말씀이 반짝반짝 빛이 나서 내 안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들을 비추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읽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지만 동시에 거북함이 들었다. 내 안의 죄가 수없이 찔림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책은 나에게도 좋았고, 항상 옆에 놓아 두고두고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마음을 가장 쳤던 말씀은 3부 '계시의 세계와 상식의 세계를 아우르는 삶' 중 4장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한다'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염려하지 않도록 주의함'이 나를 강하게 쳤다. 나는 염려를 불필요하게 많이 한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분을 불신하고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 6:34)"  

 나는 항상 염려하고, 항상 걱정 한다. 오늘 어떻게 살까?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먹어야 할까? 오늘의 걱정을 내일도 하고, 내일 모레도, 그 다음 날도 한다.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날마나 허우적대며 힘들어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철저히 어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나에게 오스왈도의 말이 내 마음 깊이 다가온다.  

 "당신의 삶의 한 가지 초점은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집중하는 것이어야 하지 당신의 먹고 마시는 문제가 삶을 주관하게 해서는 안 된다.(138p) ... (중략) ... 예수님은 순서를 바꾸라고 하신다. 하나님과 먼저 바른 관계를 맺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그 어떤 것에 당신의 마음을 집중하지 말고 주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당신 삶의 가장 큰 관심사로 삼으라는 것이다.(139p)" 

 기도하지 않고 염려하고, 말씀 읽지 않고 염려하니 하나님께 집중 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분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관계가 자꾸만 틀어지고 멀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많은 도전과 힘을 얻었다. 내 마음이 무뎌지고, 신앙이 약해져가는 지금 오스왈드가 이 책을 통해 내게 준 도움에 너무나 감사하다. - 성경을 제외하고 - 내 인생의 보화 같은 이 책을 항상 옆에 두고, 넘어지거나 방황할 때 읽고 나를 제자리에 돌릴 수 있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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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보여주는 21세기 과학
레오 김 지음, 김광우 옮김 / 지와사랑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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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에 인간은 자연을 경배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았다. 자연 그 자체를 신으로 보았고, 모든 자연 현상은 신의 노여움이나 메시지로 해석을 했다. 그러나 과학이 문명을 지배한 이후 그러한 생각은 무지에서 비롯되었음이 판명 되었다. 과학으로 인해 자연은 더 이상 경배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누려야 할 대상, 더 나아가 정복의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 인류의 한계를 극복하고, 더 발전시켜줄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다. 자연을 인류의 동반자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정복의 대상으로 전락시키자 자연 파괴가 일어났고, 그로 말미암아 인류의 생존이 위협 받게 되었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과학, 아이러니 하게도 그것은 인류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존재한다. 과학의 발달은 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것이다. 죽음을 정복하고 보다 건강하고, 오래 살기 위해, 그리고 보다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한 인류의 노력이다. 그러나 삶의 질은 나아졌을지 모르나 삶의 환경은 퇴보하고 있는 느낌이다. 

 인간이 과학 발전에 그리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표면적인 이유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인류의 복지 향상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것이다. 인간의 근원을 밝히는 것이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한 질문을 동일하게 하고 있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모든 과학과 종교 및 철학은 그 한 가지 의문에서 시작했고, 그것을 향해 나아간다. 그것이 왜 그렇게 궁금할까? 그것을 왜 그토록 해결하려 할까? 그냥 살다 죽으면 안 되는 것일까?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간의 노력과 의지가 참으로 수고스럽게 느껴진다. 

 근대의 과학은 신을 부정 했고, 21세기 과학은 신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근원과 최후는 우리의 노력과 능력으로 밝힐 수 있다는 생각이다. 영성과 종교(이하 종교)는 그것에 회의를 품는다. 그로 말미암아 신을 아래 두려는 과학과 신을 위에 두려는 종교 사이의 관계가 벌어졌다. 그 둘의 화해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 책은 과학과 종교, 그 둘의 화해와 협력을 통해 인간의 근원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둘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한 책이다. 

 

신을 보여주는 21세기 과학

Healing ├ the ┤ Rift

Bridging the Gap Between Science & Spirituality  

 

 이 책은 가장 먼저 과학 안에서 창조와 생명, 그리고 진화를 살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보고 느끼는 실재의 영역과 그 인식의 오류를 밝힌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로 시선을 옮겨 몸과 뇌, 마음과 의식 등을 들여다 본다. 끝으로 과학, 그리고 영성과 종교가 멀어진 이유 등을 알아본다. 

 저자는 과학자라는 자신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극단에 치우쳐 어느 한쪽만을 지지하지 않는다. 과학과 종교를 공정하게 두루 살피고, 각각의 문제점 또한 제시한다. 결론적으로 그 둘이 화해하는 방법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라고 한다. 지금처럼 서로 미워하고,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점을 보완해 주는 것이다. 물론 서로 어디까지 얼만큼 양보해서 도와 주어야 할지가 문제로 남지만 말이다. 어쨌든 인간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저자의 공정한 노력이 참으로 반갑게 느껴진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의 길을 고집하고 있다. 서로를 미워하고 있다. 각각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정말로 완전히 다른 길로 갈 수밖에 없을까? 계속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종교는 그 특성상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다는 말이다. 새로운 것이 나온다 하더라도 큰 관점에서 봤을 때는 기존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때문에 영성과 종교는 과학을 무엄하게 보고 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불안함을 느끼고 있다. 자신의 밑에 있던 과학이 이제는 머리 꼭대기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그런 과학이 어디까지 나아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따라서 과학이 오만함을 버리지 않는 이상, 종교가 불안함을 버리지 않는 이상 둘의 관계는 조금도 좁혀지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서로가 자신의 오만과 불안을 버리면 둘은 화해할 수 있다. 그때에 상보관계가 이루어지고, 마침내 인간의 근원에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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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무엇이 문제인가?
문효식 지음 / 크리스챤서적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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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적으로 논쟁 중인 교리가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교리에 대한 정보를 모두 명확하게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에서 교리를 끌어낸 것이지, 교리로 성경 말씀을 엮은 것이 아닌 까닭이다. 방언 논쟁도 그 중 하나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방언에 대한 논쟁이 상당히 진행 되었고, 관련 서적도 많이 출간 되었다. 하지만 한국은 미국의 신학을 따라가는 수준에 불과하고, 국내 저자에 의한 관련 서적도 거의 없다시피하다. 그러한 상황에서 방언 논쟁에 불을 지핀 책이 지난해 출간 되었다. 그것만으로는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신학 교육을 정식으로 받지 않은 평신도가 민감한 사안에 대해 - 신학적 타당성을 떠나 - 상당히 날카롭게 지적을 했기에 매우 뜨거운 조명을 받을 수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한동안 방언 논쟁이 타올랐다.

  사실 그 책은 07년에 교회와 기독교 출판계에 방언 열풍이 갑작스레 뜨겁게 불자 그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지난해 출간 되었다. 방언이 워낙 논쟁의 중심에 있는 문제이기에 그 책은 불에 물을 붓는 격, 혹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반론을 담은 책의 출간을 유도 했다. 이 책은 그 중 가장 마지막에 출간된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내용을 지지하지만 전체적인 구성은 상당히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 바로 전에 나온 책과 비교하면 학문적으로 매우 빈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구성을 살펴보자. 

 이 책은 크게 총 3부와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라는 제목으로 신약에 나타난 방언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2부는 '방언! 과연 하늘의 언어인가?'로 07년 출간된 방언 논쟁의 진원이 된 책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다. 마지막 3부는 '방언의 은사에 관한 질문들'로 방언에 대한 질답을 정리했고, 부록에서는 방언에 관한 저자의 소논문을 두 편 싣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부분은 1부이다.  

 1부에서는 논쟁의 중심에 있는 성경에 나온 방언에 대해 살펴 보고 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고린도전서에 나온 방언을 말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숲을 보는 느낌이다. 방언에 대해 전체적으로 조망을 할 뿐 방언에 대한 성경 원어를 통한 언어적 측면이나 방언이 사용된 상황 등에 대해 깊게 들어가지 않는다. 이 책 바로 전에 나온 책이 그러한 부분들을 학문적으로 깊게 들어간 것과 무척 대조적이다. 물론 이 책이 그 책에 대한 비판서가 아니기에 똑같이 할 필요는 없지만 기대했던 것보다는 짜임새가 부족해서 아쉬운 느낌이 든다. 나머지 2부와 3부, 그리고 부록은 다른 책들과 대소동이하기 때문에 특별히 이렇다 저렇다 할 말은 없다. 

  아무튼 방언 논쟁과 그 귀결은 교회가 바르게 서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초대 교회 이후 멈춘 방언이 2천년이 지난 20세기에 다시 시작 되었고, 그에 대한 견해 중 많은 신자들이 어느 쪽을 따라야 하는지 혼란을 느끼고 있기에 그 문제에 마침표를 어서 찍어야 할 것이다. 아직 방언에 대해 모두가 납득 할 만한 확실한 결론이 없기에 조속히 매듭을 지어 교회가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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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포노포노의 지혜 - 하와이에서 전해지는 비밀의 치유법
이하레아카라 휴 렌.사쿠라바 마사후미 지음, 이은정 옮김, 박인재 외 감수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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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을 때 혹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여졌을 때, 그것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함이 명백하면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원인이 명백하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그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 이때 종교적인 사람의 경우 신이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적인 사람이 아닐 경우 타인의 잘못으로 인함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운명이 그런 것이라고 치부한다. 종교적이든 그렇지 않든 일의 원인은 모두 외부에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호오포노포노(Self-identity through Ho' oponopono = SITH)'는 다르다. 그것은 모든 일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여기서 '호오포노포노'란 하와이어로 '호오'는 목표를, '포노포노'는 완벽함을 의미한다. 즉 호오포노포노는 완벽을 목표로 수정하는 것, 잘못을 바로잡는 것을 뜻한다(14p). 책속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만사가 완벽하지 않은 이유는 무의식 속에 있는 과거의 기억이 재생되어 현재에 투영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무의식은 우주가 창조된 이후의 모든 기억에 접근하여 매 순간 방대한 기억을 깨웁니다. 우리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은 의식이지만 그 백만 배나 되는 기억이 1초 동안 무의식 속에서 꺠어나고 있습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병, 사고, 좌절, 불행 등 과거의 불쾌한 기억이 우리들 인생에 투영되어 불행한 일을 끌어당겨 일으키고 있습니다. 지금 고민과 불행을 안고 있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모두 과거의 기억 때문입니다(14,15p).
 
   

 모든 일은 자신의 의속속에 잠재되어 있는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한다. 자신이 과거의 기억을 꺠움으로 그것이 안 좋은 일을 끌어당긴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을 정화해야만 한다고 한다. 정화를 하면 더 이상 안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이상 끌어당길 과거의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흥미로운 이론이다. 그러면 내용을 조금 더 들여다 보자.  

 건물이나, 방, 모든 동식물, 한 마디로 모든 것에 의식이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만질 때에는 자신을 먼저 정화한 후 만져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을 정화하지 않고, 그것들을 만지면 자신으로 인해 병을 짊어져 고장을 일으키거나 잘못된다는 것이다. 태아와 아기에게도 과거의 기억이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부모가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고 한다.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알면 알수록 놀라운 이론이지만 개인적인 생각과는 맞지 않기에 단순히 그런 것도 있구나 라며 읽었다. 

 어쨌든 이 책을 읽으며 일의 원인을 외부가 아니라 자신에게서 찾는 것에 눈길이 갔다. 모든 일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 이면에 담긴 생각은 좋다고 본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이기에 나를 정화하면 더 나은 세상이 될거라는 생각 말이다. 

 세상은 남탓하기 바쁘다. 나는 잘못이 없고, 모두 네 잘못이라고들 한다. 그러면서 서로 티격태격 한다. 책임의 소재를 남에게서 찾고, 그에게 책임을 전가 한다. 골치 아픈 것을 싫어하고, 그 일로 귀찮아지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자신의 신용에 손상을 입는 것을 피하려는 것이다. 너그러운 사회, 나의 안위가 아니라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아니라 남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는 유토피아나 다름없다. 현 세상에서는 매우 요원한 일이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 나 혼자 변한다고 모두가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영향력이라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모든 이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호오포노포노에 마음이 끌린다. 내가 정화되면 다른 이들도 좋게 변화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과 상치 되기에 따를 수는 없지만 호오포노포노가 바라는 세상을 나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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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의 임재를 연습하라
조태성 지음 / 베다니출판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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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날마다 교제를 나누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온전히 살 수 있다. 이때 "예배가 그것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한 날, 약속된 시간에 하는 예배만으로는 부족하다. 평소의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하고, 그러한 삶 가운데서 하나님과 늘 교제를 나누며 그분을 느끼고, 누려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고하기만 하지 그분의 말씀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어여 한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음성이라니? 그분이 사람처럼 음성으로 말씀하신다는 말인가?" 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러기도 하신다. 하지만 그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고, 보편적으로는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는 도중, 아니면 찬양을 하거나 듣는 등 평상시의 행동을 통해 사람의 마음에 꺠달아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하고,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 하신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도 그 방법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사단 자신의 속삭임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착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음성을 들으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인지 아닌지 성경을 놓고 판단 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어기시면서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다. "하나님, 제가 당신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귀기울이고 있으니 말씀하세요." 라고 해서 갑자기 단번에 들려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 하나님과 날마다 교제를 나누고,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이 책 '성령님의 임재를 연습하라'에서 그 방법을 알려 준다.
 
 
 
 이 책에는 저자가 성령님과의 교제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성령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한 방법들과 성령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등을 알려 준다. 가독성이 상당히 높다. 말 자체를 읽기 편하게 썼고, 어려운 말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을 읽으면서 성령님과의 교제를 위한 저자의 노력이 참으로 눈물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까지 해야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일상의 모든 일을 통해 성령님과 교제를 나누려는 저자의 노력이 지나치게 무리하는 것 같아 보였다. 너무 힘들게 느껴졌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저자가 성령님과의 교제를 얼마나 갈망 했는지, 그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 했는지 엿볼 수 있다. 더불어 그것을 통해 그동안 나는 성령님을 얼마나 홀대 했는지 돌아보고, 반성하게 되었다.
 
 만약 누군가가 이 책을 보고,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를 갈망하게 됐다면, 그분의 임재를 위해 연습과 노력을 해야 겠다고 결심 했다면 저자의 사소한 노력까지 모두 따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노력은 성령님과의 교제를 위한 여러 방법 중 하나이지 절대적인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되 아직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상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저자의 방법을 다만 가이드 라인으로 삼으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갈망과 노력은 꼭 본받으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스도인이 성령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 우리는 우리의 앞 길을 알지 못하기에 그분의 안내가 없다면 엉뚱한 길로 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가 없다면 우리는 금새 힘을 잃게 된다. 우리의 의지와 힘만으로는 대적들의 공격을 충분히 막아낼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것을 간과한다. 기도하는 열심과 말씀을 읽는 노력 조차 없다. 물론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하는 이들 조차 성령님의 임재를 위한, 그분과 평상시에 교제를 나누기 위한 노력까지는 기울이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성령님과의 교제를 나누길 권한다. 그분과 교제를 나눌 때 얻을 수 있는 놀라운 영적 유익을 맛보길 권한다. 한번 맛보면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하루라도 맛보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니 처음에는 들리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인은 한때 성령님과의 교제를 갈망하여 저자와 비슷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그러한 모습을 잃었다. 이 책을 읽고, 그때를 떠올리며 성령님과의 교제를 위한 노력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참으로 기쁘고, 이 책을 읽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성령님과 교제를 나눌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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