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8 ㅣ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8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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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1.11~1881.2.9). 여기까지는 널리 알려진,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그가 남긴 많은 걸작들을 모두, 최소한 한 개라도 완독을 한 이는 아마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떤 작가일까?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그에 대해 간단히 정리 해보면, 모스크바 말린스키 시립병원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1838~4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사관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846년에 처녀작《가난한 사람들》발표 하였다. 1849년에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시베리아로 유형 되었는데 이때 총살 직전에 황제의 특사로 감형된 그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 후《죄와 벌》(1866) 《백치》(1868) 《악령(惡靈)》(1871∼1872) 등을 발표한다.(자료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48095)

 도스토예프스키가 남긴 대작들을 모두 읽고,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린다. 수많은 고전이나 걸작들이 그렇듯이 그의 작품들 또한 깊은 의미와 사색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모든 작품을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욕심을 내어 차근차근 읽어보고 싶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여건 상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그의 여러 작품 중 가장 유명하다고 생각되는 죄와 벌만 읽고자 마음먹었다.

 죄와 벌은 1866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근대 도시를 배경으로 법과 대학을 중퇴한 가난한 라스꼴리니꼬프를 그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기아상태에 빠져 자신이 가진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고, 받은 돈으로 하숙방 비를 해결하는 등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는 전당포를 몇 번 드나들며 헛된 공상을 하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것을 실행으로 옮긴다. 전당포의 노파를 살해한 것이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 별다른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그러나 한 여인으로 인해 차츰 동요가 일어난다.

 

 죄란 무엇일까? 사회적인, 성문법 안에서의 죄는 법에 반하고, 그것이 정해 놓은 범위를 벗어나는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종교, 특히 기독교에서의 죄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벌은 무엇일까? 법적 측면에서는 잘못을 하거나 죄를 지은 사람에게 그것에 합당한 고통을 주는 것이다. 심리학적 측면에서는 어떠한 행동의 빈도수를 줄이거나 없애기 위해 유쾌한 자극을 빼앗고, 불쾌한 자극을 주는 것이다.

 죄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객관화 시킬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마다 생각과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죄와 네가 생각하는 죄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도모하기 위하여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나로 제한하기 위한 강제적 장치인 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죄로 인한 벌의 종류와 강도를 정하는 데에도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에 그것을 하나로 제한하기 위하여 법적 기준을 마련한 것이다.

 죄는 상대적이다. ‘너와 내’가 ‘특정한 상황에서의 어떠한 행동은 죄’라고 합의 하였기에 그것이 죄라고 인식 되는 것이다. 그러한 합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인식 된다. 살인을 예로 들어보자. 내가 평상시에 누군가를 살인 하였다면 그것은 명백히 죄이다. 그러나 전시에 적군을 죽였다면 누구도 그것을 죄라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살인, 곧 죄를 ‘법과 제도적 측면’에서 이해하였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죄 인식은 다른 측면에서도 가능하다. 전시에 적군을 살인하였다고 해도 나의 마음속에는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책이 생긴다. 이것은 죄를 ‘도덕과 양심의 측면’에서 이해한 결과이다. 어느 측면으로 인식하든 ‘너와 내’가 죄라고 합의한 - 혹은 교육에 의해 그렇다고 인식된, 어쩌면 인간이 날 때부터 이미 그 내부에 죄를 인식할 수 있는 잠재된 기준이 있을지도 모르는 이유로 - 행위에 대해서만 죄라고 인식하기에 그것을 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죄와 벌의 주인공인 라스꼴리니꼬프는 무척 빈궁한 생활에 허덕였다. 그것으로 인해 그는 죄를 짓게 된다. 그것은 개인의 양심에 국한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작은 죄’가 아니라 인류가 정한 ‘가장 극악한 죄’인 살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 무감각 했다. 그저 여느 살인범과 같이 자신의 죄를 숨기고, 벌을 피하려 할 뿐이었다. 그처럼 라스꼴리니꼬프가 자신의 죄에 대해 - 법학도이기에 누구보다 자신의 죄의 잘못과 심각성을 (법적 측면에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임에도 - 무감각 했던 이유는 ‘너와 나’라는 죄의 상대적 충족조건 중 ‘너’가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결핍 중에 한 여인으로 인해 자수를 하고, 벌을 받게 된다.

 왜 인간은 죄를 지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피의자에게 심한 고통을 줌으로 같은 고통을 다시 맛보지 않으려는 인간의 심리와 육체적 거부를 이용하여 죄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양심과 종교적 측면에서는 죄로 더럽혀진 순결한 영혼을 벌을 통하여 깨끗했던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의식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순결한 영혼을 악(죄)으로 물들이지 않으려는 영혼의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수를 하여 벌을 받지만 죄질에 비해 가벼운 벌인 8년의 시베리아 유형을 받게 된다. 벌인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죄에 대한 물리적 벌은 - 비록 합당한 만큼은 아니지만 - 받았지만 양심에 대한 벌은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단지 범인으로서 들킨 것에 대한 자책을 할 뿐이다. 그의 자수는 죄를 법적 측면에서만 인식한 결과이다. 여전히 그의 죄 인식은 완성되지 않았다. 그런데 소냐라는 한 여인으로 인해 그는 결핍된 ‘너’가 충족됨으로, 다시 말해서 죄 인식에 대한 상대성이 완성됨으로 마침내 그의 마음은 동요를 일으킨다. 이제 자신의 죄와 그 잘못을 양심으로 인식하게 된다. ‘너와 나’의 합의가 드디어 모든 측면 - 법과 양심 - 에서의 죄 인식을 가져 온 것이다.

 

 인간의 죄 인식은 법과 양심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가능하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합의된 것이다. 교육에 의해 강제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어쩌면 신이 인간에게 넣어 준, 날 때부터 갖게 되는 프로그래밍에 의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에서든 죄 인식은 인간의 편의, 즉 서로의 안녕을 위한 것이다. 인간은 보편적 상황에서는 그것에 일조를 하지만 특수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편의만을 추구한다. 상대의 피해는 생각하지 않는다. 죄를 저지른다. 과연 죄에 대한 벌로 보편적 상황을 넘어 특수한 상황에서까지 죄에 대한 욕구를 소멸시켜서 마침내 모두의 안녕을 이룰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법은 그것에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아무리 강한 법도 범죄를 막지 못한다는 것은 인류 역사가 증명한다. 오늘의 뉴스가 증거 한다. 그렇다면 양심은 어떠할까? 그 또한 법과 다를 바 없다. 보편적 상황에서는 법과 양심이 모두 발동을 하여 죄의 충동을 막는다. 하지만 특수한 상황에서는 그 둘 다 힘을 잃는다. 과연 인간에게 희망이 있을까? 안녕을 이룰 수 있을까?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사랑’이 아닐까 싶다. 라스꼴리니꼬프가 마침내 양심으로까지 죄를 인식하게 된 것은 소냐의 사랑 덕분이다. 그에 대한 소냐의 사랑이 없었다면 그는 죽기 전까지도 죄 인식의 완성을 이루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냐의 사랑은 그의 양심을 흔들었고, 마침내 그의 죄를 - 진정한 의미에서 - 알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앎은 어떠한 의미에서 그에게는 진정한 벌이 된다.

 

 인간이 정한 법적 테두리 안에서 죄는 분명히 나쁜 것이다.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억제하기 위한 벌은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양심은 죄에 대한 법의 태도에 동의하지만 벌에 대해서는 - 부분적으로 - 동의하지 않는다.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 하더라도 인권에 호소하여 사형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나는 죄를 지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다수의 인권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한 사람에 의해 다수의 인권이 침해 된다면 그 사람의 인권이 어느 정도 희생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영혼은 귀하다. 따라서 아무리 나쁜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영혼은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죄에 대한 일정한 벌을 주되 범법자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가?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 만약 내가 피해자가 된다면 솔직히 말해서 나의 주장을 실천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한다. -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만약 반인륜적인 죄를 저지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참회하지 않고, 떳떳하다면 어찌 해야 할까? 죄에 찌들고, 악에 철저하게 물든 그의 영혼도 사랑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류의 유일한 희망인 ‘사랑’이 그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어떠한 경우의 예외도 두지 않는다. 만약 예외를 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인류의 유일한 희망인 것이고, 그러한 사랑이 있기에 인류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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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은 주님 것이다 -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이에게 부어주시는 놀라운 축복
최수현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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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자주 하는 고백이 있다. 

  "제 인생은 주님 것입니다.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이 말 뜻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길로 이끄시든 기꺼이 따르겠다는 말이다. 나의 선택권을 포기하겠다는 말이다. 모든 선택을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고백이다. 고백은 그렇게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하나님께 나에게 선택권을 달라고 한다. 아니 아예 막무가내로 빼앗으려 한다. 진정한 순종은 어렵게만 느껴진다. 아브라함과 같은 순종은 언제쯤에나 가능할까?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첫 발을 내딛을 때 두려운 마음을 갖는다. 과연 그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맞는지 의심하낟. 자신이 그 길을 잘 갈 수 있을지 불신한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누구나 처음부터 완벽한 순종을 할 수는 없다. 훈련 과정에서 깨지고 깨지며 진정한 순종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부족한 모습에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네 인생은 주님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최수현'은 한 때 잘 나가는 강남의 미술학원 원장이었다. 얼마나 잘 나갔던지 압구정동 유명 백화점의 VIP 고객이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처럼 부족한 줄 모르는 안락한 삶을 살던 그녀의 삶이 180도 바뀌었다. 그것은 옛 일이고, 지금은 어엿한 선교사로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으로 헌신하고 있다. 그녀에게 어떠한 변화가 있던 것일까? 

 저자 최수현의 남편인 '최하진'은 카이스트 박사와 스탠포드 포스트 닥터의 영예를 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것을 깨끗이 정리하고, 중국에 선교하러 가겠다고 다짐한다. 그녀는 당연히 펄펄 날 뛰었다. 하나님을 믿긴 했지만 현실의 안락함에 취해있던 그녀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기도로 그녀는 바뀌었고, 현재는 남편 못지않게 선교에 열심을 내고 있다. 

 이 책에 나타난 저자의 삶과 그 남편이 모습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다짐을 한 사람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렇지 않다. 나는 아직 진정한 종의 길을 걷고 있지만 과연 내가 그 길을 갈 수 있을지 의심하고 있다. 불신하고 있다. 저자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고, 거부 했던 그 길을 지금은 잘 걷고 있다. 나와는 완전히 대조된다. 차라리 그녀가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도 아직은 시작점에 조차 이르지 못했기에, 아직은 시작점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기에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그녀도 진통 끝에 지금의 헌신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니 나도 더 지켜보는 게 옳을 것이다. 더 기다려 보자...  

 

  정말 내가 원하는 길을 가는 것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는 것이 더 기쁠까? 나의 적은 경험에 의하면 물론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믿음이 부족하고, 욕심이 크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다 큰 기쁨을 누리는 것보다 아주 작은 기쁨을 누리는 것으로 만족한다. 소박하지만 더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반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세상의 길을 가려고 한다. 기쁨이 아니라 근심이 가득한 그 길을 말이다. 

 말 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고백을 하고 싶다. "제 인생은 주님 것입니다!" 그 고백을 수백 번 하더라도 공허한 외침으로 그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기만이 될 뿐이다. 그 고백은 한 번으로 족하다. 고백을 했으면 이제 남은 것은 그 고백을 다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렇게 사는 것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말과 다른 삶이 아니라 말과 일치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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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순간들 : 전쟁편
류펑 지음, 김문주 옮김 / 시그마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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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류는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전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인류는 왜 그렇게 전쟁을 일으키는 것일까? 원인은 다양하겠지만 대개 권력, 민족, 영토, 종교 등이 그 주된 원인이다. 

 이 책은 인류의 운명을 바꾼 주요 전쟁들을 소개하고 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일어난 크고 작은 전쟁들을 기술하고 있다. 전쟁들을 주제별로 묶어서 그 각각의 발생 원인, 전개, 결말을 상술한다. 이 책의 장점은 전쟁들을 주제별로 묶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의 원인은 한번에 파악할 수 있다. 반면 아쉬운 점은 책의 내용이 전쟁사에 대한 사실 진술로 그칠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쟁에 대한 저자만의 의견이나 다른 코멘트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전쟁은 왜 일어난다는 종합적 결론이나, 전쟁은 왜 일어나면 안 된다는 등의 저자만의 의견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책에 담긴 전쟁에 대한 사실들은 인터넷에서도 얻을 수 있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전쟁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 사색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은 왜 일어날까? 앞서도 말했지만 전쟁의 원인은 권력, 민족, 영토, 종교 등 매우 다양한 이유로 일어난다. 왕가의 집안싸움으로 일어나기도 하고, 민족적 대립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원인이야 어떻든 그것은 매우 참혹한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사람의 귀한 목숨을 앗아가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헤어지게 되는 아픔을 겪는다. 그러한 정신적 충격은 물론이고, 신체적 고통을 당한다. 경제적 손실도 생긴다. 그럼에도 인류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 그 폐해를 잘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혹자는 말한다. 전쟁은 남자들의 야욕으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남자들이 정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남자의 독특한 공격성으로 전쟁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이 맞는 말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전쟁은 인류의 가장 큰 비극이고, 불행이다.

 전쟁이 완전히 종식될 수 있을까? 섣부른 추측이 될지 모르겠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아마도 그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인간이 지구에서 살아지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쟁 종식을 포기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 한다. 최대한 전쟁을 줄여야 한다. 비참한 그것을 멈출 수 없다면 줄여야 함이 마땅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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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Not Grammar! 이츠낫 그래머 - 말하고 쓰려면 문법부터 다시 하라
정재영 지음, Time E-Lab 기획 / 타임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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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국내에는 영어 열풍이 한창 불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 열풍이 영어의 네 가지 스킬 -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 - 을 늘리겠다는 목표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시험 점수를 잘 받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잘못 되도 한참 잘못 됐다. 영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이지 그렇게 단순히 사용 할 도구가 아니다. 물론 그 당사자에게는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영어 열풍이 근본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영어 공부에 들이는 시간이 엄청남에도 영어로 말도 못 하고, 글도 못 쓰는 어이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오로지 읽기만 조금 될 뿐이다.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영어 공부에 투자하는 시간이 많은 만큼 어떻게 하면 영어 공부를 더 잘 할 수 있을지 궁금해 한다. 어떠한 교재를 사용해야 영어 실력이 늘어나는지 궁금해 한다. 시중에 영어 공부를 돕는 책이 너무도 많고, 공부 할 시간은 한정 되어 있기에 좀 더 나은 책을 찾아 헤맨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책이 있을까?

 

 It's not grammar 는 문법이 아니라는 말이다. 문법책이 아니라는 말일까? 문법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일까? 그 해답은 "말하고 쓰려면 문법부터 다시 하라!"는 광고 카피에 있다. 이 책이 주장하는 것은 '써먹을 수 있는 문법'을 가르치겠다는 것이다. 진짜 실력을 길러주는 문법책이 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어려운 문법 용어를 나열하여 골치를 아프게 하지도, 빼곡한 설명으로 읽기 전부터 부담을 주지도 않는다. 체지방을 모두 빼고, 근육만 남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체지방을 뺐다는 것이 아니라 남은 근육이 얼마나 쓸모가 있느냐이다. 이 책은 장황한 설명을 줄이고, 요점만 담고 있기에 꽤 쓸모 있는 근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체지방을 빼도 너무 뺀 느낌이다. 예문이 너무 적다는 말이다. 어떤 문법은 한 두 문장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몇 개의 문장을 살펴 본 후에야 겨우 이해할 수 있는 문법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예문의 양이 워낙 적기 때문에 왕초보가 보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 또한 연습문제가 별로 없다. 이 책의 주 타깃은 왕초보가 아니다. 문법의 기초지식을 이미 가지고 있는 중에서 상위의 사람들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큰 문제는 아니다. 또한 부족한 연습문제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 책을 구입하지 않아도 누구나 - 무제한으로 풀 수 있으니 큰 문제가 없을 듯 싶다.

 

 모든 이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단 한 권의 책은 없다. 아무리 좋다하는 교재가 있더라도 모든 이를 만족 시킬 수 없다. 저마다 타깃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수준에 가장 잘 맞는 책을 골라서 그것을 외울 정도로 보라. 그런 후 부족하거나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그것을 돕는 책을 찾아서 또 다시 외울 정도로 보라. 그런 식으로 자신의 부족을 채우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실력이 늘어 있을 것이다. 이 책 조금 보고, 저 책 조금 볼 시간에 한 책을 꿰뚫어라. 더 나은 책을 찾을 시간에 한 책을 더 들여다 보라. 그것이 가장 현명한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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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정체성 - 오스왈드 챔버스의 ㅣ 오스왈드 챔버스 시리즈 7
오스왈드 챔버스 지음, 스데반 황 옮김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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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디는 예수는 좋지만 그리스도인은 싫다고 말했다. 이는 간디 개인의 말이지만 어쩌면 수많은 비그리스도인들을 대변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비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점은 배타적이고,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비춰지는 것이 현실이다. 왜 그러한 문제점이 발생하였을까? 그 답을 단 한 가지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 까닭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곧 그리스도인답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서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올바로 가르쳐준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떠해야 하는지 말한다.

 챔버스는 그리스도인의 주도적인 관심은 하나님께 "저를 위해 이렇게 해주세요"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께서 원하시는 곳에서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사용하시라고 말하는 거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져야 할 십자가는 자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오는 모든 고통을 의미한다고 한다. 자신에 대한 권리를 완전하게 예수 그리스도께 드림으로 나타나는 모든 결과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저를 위해 이렇게 해 주세요"라고 부탁한다. 오히려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한 자기중심적 행동, 곧 정체성의 혼미가 오늘날 비난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실천하지 않고, 거꾸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실천하니 그리스도인들이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이다.

 물론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기독교는 더 비난을 받고, 더 큰 반대에 부딪힐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것들은 종말과는 다소 먼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크다고 할 수 있으니 안타까움이 줄지 않는다. 따라서 챔버스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인지, 제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등의 실천이 시급하게 느껴진다. 정체성을 찾아서 자신의 모습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한 영혼의 구원은 점점 멀어지고, 급기야 아흔 아홉의 양까지 잃게 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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