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돌보심에도 우리는 왜 불안해 하는가
한나 W. 스미스 지음, 김진선 옮김 / 두란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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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시작 하면 평안이 가득하고, 좋은 일만 생길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막상 신앙생활을 하자 그전과 달라진 것은 없고, 도리어 전보다 마음이 더 어려워 졌다고 느끼는 이들 - 이 글에서 언급되는 모든 인칭 대명사는 눈에 띄는 명시와 구분이 없는 한 모두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 이 있다. 이들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 신앙생활을 하면 평안하고,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전제가 있다. 그것은 '믿음 안에 온전히 거했을 경우'에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평안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 어떠한 일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내게 발생한 일이 남들이 보기에 좋은 일로 보이지 않아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좋은 일이 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만 바라본 채 불평하고, 불안해 한다.

 

 변화무쌍한 세상을 살다보면 수많은 일을 겪게 된다. 나의 마음과 가정 경제를 어렵게 하고, 또는 즐겁게 하는 일들을 숱하게 겪는다. 그러한 경험들로 인해 우리는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닥칠 것이라 예상하며 그것을 미리 걱정하고, 불안해 한다. 물론 어떠한 일은 분명히 닥칠 일이지만 대부분의 일은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자신이 상정한 상황에 불안해 하고, 두려움에 떤다. 전혀 불필요한 그 일을 자처한다.

 

 '하나님의 돌보심에도 우리는 왜 불안해하는가'

 

 이 책은 '19세기의 잔느 귀용'이라 불리는 한나 휘톨 스미스의 책이다. 그녀는 다른 책을 통해 위로의 말을 전한 바 있다. 이 책을 통해서도 그녀는 우리에게 귀한 말을 전해 준다. 오늘의 불안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 할 수 있도록 평안과 위로를 전한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것과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이 책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녀는 퀘이커교도라는 점이다. 퀘이커교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열정은 본받을만 하나 몇 가지 사항에 있어 분명한 이견이 있기 때문에 지지 할 수는 없다. 더욱이 퀘이커교는 신비주의적 색체를 띄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따르는 한나 스미스의 말은 점검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다. 특히 9장과 같이 맞는 말인 것 같으면서도 의심이 가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자신도 모르게 왜곡된 생각과 신앙생활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의 모든 내용이 이상한 것은 아니니 이 책을 읽는다면 모든 내용을 아무 생각 없이 읽지 말기를 당부한다. 기독교 교리에 분명히 입각하여 읽는다면, 그리고 이 책에서 언급하는 성경 내용을 들쳐 보면서 읽는다면 믿음생활에 더욱 집중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교리와 성경에 대한 공부가 선행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며 불안에 떠는 이유는 온전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분명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확실한 신뢰가 있다면 불안에 떠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더 이상 불안해 하고, 힘들어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각자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게 되었을 때를 떠올리면 문제의 해결은 간단하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처음 했을 때는 감사와 기쁨, 그리고 평안이 넘쳤을 것이다. 왜 그럴까? 그때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께 콩깍지가 씌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온 초점이 그리스도께만 향해 있었던 까닭이다. 우리는 이것을 회복 할 필요가 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오직 주님만 신뢰하며 그분만 생각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더 이상 불안에 떨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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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비평학은 과학인가 조작인가
에타 린네만 지음, 송 다니엘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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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성경비평학 관련 수업을 듣고, 신학책을 읽으며 여러 고민과 의문을 품었습니다. 신구약의 내용과 저자 등에 - 성경의 권위를 침범하면서까지 - 의문을 제기하는 신학적 주제와 내용들을 보며 신학이라는 명목하에 성경을 그렇게 대해도 되는지 나름 우려를 느꼈습니다. 인간인 우리가 성경을 그렇게 난도질 하는게 잘못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신학적 작업의 합당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강의와 책의 내용이 너무도 당연시 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저의 의문이 잘못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괜한 생각을 한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제 의문이 꼭 잘못된 것만은 아니라는 위로와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성경비평의 문제와 잘못된 점을 꼬집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시작 되었는지 그 뿌리를 찾기 위해 철학의 역사를 더듬어 봅니다. 신학이 철학적 방법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변질 되었는지 신학의 잘못된 역사를 폭로 합니다. 특히 성경비평 - 역사비평, 그것의 지주인 문학비평, 양식사, 편집사 - 을 부정합니다. 한 마디로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복음서와 관련된 두 자료설, 이사야서의 본문과 저자의 설정 등 소위 성경비평 - 그 안에 포함 되어 있는, 앞서 언급한 다양한 역사비평 방법들 - 이라는 신학 연구방법이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과학적 근거가 희박 하고, 터무니 없는지 다양한 예를 들며 비판합니다.  

 

 이 책과 같이 성경비평을 비판하는 책은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 저의 짧은 정보력으로는 - 첫 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내용을 지지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지식과 생각이 무척 짧기 때문에 함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먼저 기존의 신학 연구방법에 대해 - 가진 지식이 미천하지만 가능한한 깊이 - 생각해 보고, 이 책을 몇번은 더 읽어보아야 저만의 생각과 입장이 정립 되고, 추천 여부가 가려질 것 같습니다. 그래도 최소한 본인은 기존의 의문에 대한 답변을 이 책을 통해 어느 정도 얻었기 때문에 이 책이 참 반갑게 느껴집니다. 마음껏 추천 할 수는 없지만 혹시 본인과 같이 신학 연구방법에 의문을 품은 이가 있다면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말씀 드립니다. 향후 다시 신학 연구방법들과 마주하게 될텐데 그때 또 당황하지 않도록 그 방법들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지금 미리 생각해 두어야 겠습니다. 

 

 어쨌든 본인은 신학 연구방법에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에 신학자들이 그 방법 - 역사비평 신학 - 에 따라 성경을 마구 오리고, 붙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연구방법에 문제는 없는지 돌아 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듭니다. 이 책에서 비판하는 내용을 더 깊이 연구하고, 논의하여 올바른 신학 연구방법을 마련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을 통해 성경을 보다 제대로(?) 연구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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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와 오순절 성령 강림
리처드 개핀 지음, 김귀탁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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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을 쓰기에 앞서 한 가지 사실을 당부 드립니다. 이 책과 '기독교 문서선교회'의 '성령 은사론'이라는 책은 동일한 책이니 혹시 이중 구입이나 혼란을 겪는 분들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리처드 개핀의 책을 구입 하실 때 이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저자인 리처드 개핀의 말을 빌리면

 

 "1974년 12월부터 1975년 1월까지 개최된 복음주의 개혁파 콘퍼런스의 후원 아래 뉴질랜드 전역을 다니며 행한 일련의 강좌에서 시작되었다. 이후에 이 강좌의 자료는 1976년 8월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개최된 개혁주의 연합 대회에서 실시한 성령 사역에 대한 콘퍼런스에서 발표하기 위한 자료의 기초로 사용되었다. 이어서 이 자료는 1977년 1월 겨울 학기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12번에 걸친 강의의 자료로 확대 되었다." (출처 : 서언에서)

 

 이상과 같은 과정을 통해 출간된 책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 책은 은사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한 심도 있는 논문이나 단행본이 아닙니다. 본래 강좌에서 확대된 책이기 때문에 시야가 넓지 않습니다. 본문의 양이 200 여 페이지가 조금 안 되는, 비교적 적은 양을 담고 있습니다. 시야가 넓지는 않지만 은사 문제에 대한 상당히 깊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결코 내용이 적다고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본다면 큰 코를 다칩니다. 내용이 많지 않지만 꽤 깊고,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리고 읽어야 합니다. 은사 문제와 관련해서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읽는다면 논지를 놓치기 쉬우니 그 문제에 대해 배경지식을 쌓고 읽으시길 당부 드립니다. 무엇보다 은사 문제에 대해 아무런 고민 없이 이 책을 읽는다면 입장 정리에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이 책은 은사와 관련해서, 특히 예언과 방언과 관련해서 리차드 개핀의 입장이 분명히 담긴 책입니다. 개핀은 은사 중지의 입장에서 두 문제에 관해 서술합니다. 그렇기에 은사 지속론의 입장에 있는 이가 이 책을 읽는다면 기분이 다소 언짢을 수 있으니 유의 하시기 바랍니다. 은사 중지를 지지하는 이라면 이 책을 읽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견지하고,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반대로 은사 지속을 지지한다면 이 책의 내용에 기분 나빠하고, 비판하기보다 담긴 내용을 기초로 자신의 논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정리 하면 좋을 것입니다.

 

 이 책만으로 예언과 방언 문제에 대해 은사 중지 입장에 대한 정리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추가적으로 동 출판사에서 나온 '오늘날의 예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 라는 책도 읽으면 무척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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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예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
팔머 로버트슨 지음, 이심주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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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가끔 하나님께 직통 계시를 받았다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직접 무언가를 말씀해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씀에 권위를 주장한다. 특히 은사 집회에서 그런 일이 잦다. 과연 하나님께서 정말 그들에게 계시를 주신 것일까?

 

 19세기 말, 20세기 초 은사 문제가 크게 대두된 이래로 그것과 관련된 문제는 지금까지 온갖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 중심에는 주로 예언, 계시, 방언이 자리잡고 있다. 이 세 문제는 은사지속론과 은사중지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단골 메뉴이다. 그들은 그 문제들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반박하며 서로 팽팽히 맞선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하여 우리 각자에게 각양 좋은 은사를 주신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세 은사가 논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성경이 완성과 관련이 있다.

 

 이 책의 결론을 먼저 이야기 한다면 은사중지론을 대변한다. 저자는 성경의 완성과 함께 예언과 계시, 그리고 방언은 중지 되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그러한 주장을 골자로 그 세 가지의 문제를 각각 면밀히 살펴본다. 은사지속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단호하게 그러나 공격적이지 않게 반박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차분히 펼친다. 이 책을 읽으면 세 문제에 대해 입장이 분명히 정리 될 것이다. 이 책 한 권으로 그 문제들에 대한 정리는 충분하다. 물론 은사중지론을 따르는 사람에 한해서 그렇다. 은사지속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큰 아쉬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두 입장에 있는 모두가 한 번쯤은 꼭 보면 좋을 책이다.

 

 예언과 계시, 방언의 문제는 성경의 완전성과 충분성을 생각하면 답이 분명해진다. 그럼에도 오늘날 그 문제들로 인해 논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원하는 것인가?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우리에게 성경이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한 이해에 있어 더 이상의 의문은 필요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꾸만 의문을 갖고, 문제를 만들어 낸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른 분별력을 갖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더 깊이 상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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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비평학은 과학인가 의견인가
에타 린네만 지음, 송 다니엘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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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에 따라 신학(믿음)은 철학(이성)의 위에, 그리고 조화, 분리되는 과정을 겪는다. 교부시대에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강조 되었다. 신학은 철학 위에서 절대 권력을 군림 했다. 중세를 거치며 신학은 철학과 조화를 이루기 시작한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스콜라 철학을 취하여 신앙과 철학의 조화를 꽤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교리와 신학을 이해시키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도입한다. 철학을 도구로 사용한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은 이것을 잘 나타내는 주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근대가 되자 이제 신학과 철학은 분리 된다. 계몽주의 등을 거치며 믿음이 아닌 이성이 강조 되면서 철학은 - 물론 과학 등도 - 신학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다.

 현대에 신학은 도리어 철학의 노예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성경 연구와 그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할 때 철학방법을 동원 하고, 그 방법을 통해 결과를 얻어 낸다. 심지어 과학적 연구방법까지 동원하고 있다. 이는 신학은 믿음보다 이성을 중시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신약의 무슨 문서는 어떠한 이유로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고 의심하고, 이사야서는 본문의 내용 등을 연구하여 발생하는 차이에 따라 저자를 셋으로 구분하고, 각각 세 시기에 작성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성경비평학 - 이 책에서는 여기서 예로든 문제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대신 비슷한 문제를 언급하고 지적한다. - 을 비판하고 있다. 급기야 "역사비평 신학은 이단적 교리(177p)"라고 정죄를 한다.

 신학교에서는 성경비평을 버젓이 가르치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성경 내용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성경을 자르고, 붙이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성경을 믿음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 호소하고 있다. 성경을 대함에 있어 믿음보다 이성을 우위에 두고 있다. 성경의 내용을 이성으로 진위 여부를 가리고, 내용을 취사 선택한다. 이것은 성경을 100% 믿지 못한다는 고백과 같다. '성경 비평'이라는 말 자체가 그것을 보증하고 있다. 성경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저작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 내용을 의심하고, 진위를 가리는 것이다.

 이제 신학은 - 신학의 모든 영역이 그렇지는 않을지라도 - 철학의 시녀가 되어 버렸다. 성경비평은 신학의 주요 연구 방법이 되었다. 성경은 단지 이성의 산물이란 말인가? 어찌 그것을 이성의 판단 아래 둔다는 말인가? 신학에도 입장이라는 것이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해, 신학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 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해야 할 바를 지금이라도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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