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섭리 IVP 조직신학 시리즈
폴 헬름 지음, 이승구 옮김 / IVP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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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을 논하는 신학적인 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대표적으로 유신론(Theism)과 무신론(Atheism)이 있다. 유신론은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며 다스린다고 주장하고, 무신론은 신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 외에 범신론(Pantheism), 만유재신론(Panentheism), 이신론(Deism),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 등이 있다. 범신론은 세계 밖의 초월 신을 인정하지 않고, 신을 세계와 동일시 하여 만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본다. 만유재신론은 범신론과 비슷한 것으로 만물이 신(神) 속에 내재하나 신은 세상 이상의 존재로 본다. 그리고 이신론은 신이 세계를 창조한 뒤에는 직접 세계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끝으로 지적설계론은 과학적인 이론으로 지적인 존재의 설계에 의해 이 세상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상으로 살펴본 주장들 중 어떠한 주장은 신을 긍정하고, 또 어떠한 주장은 신을 부정한다. 반면 긍정도 부정도 아닌 중도적인, 모호한 입장도 있다. 각각이 주장하는 바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 이 세상의 형성과 진행을 규명하려는 노력 그 자체는 동일하다.

 '하나님의 섭리'

 여기서 '섭리(Providence)'라는 말은 세상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역사 등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서 섭리란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예정하시고, 계획하시며 진행시키시는지, 즉 그분의 의지와 결단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대변되며 그분의 허용과 책임 및 은혜, 아울러 인간의 책임을 포괄한다. 
 이 책에서는 세 가지 섭리관을 논한다. 그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섭리관, '위험 없는' 섭리관, '중간지식'이다. 
 가장 먼저 '위험을 무릅 쓰는' 섭리는 자유의지의 변증이라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이것은 비결정론으로 "인간이 자유롭다면 하나님은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만 행하도록 창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비결정론적 자유의지는 인간의 인격과 책임의 필수조건으로 다음을 주장한다. "하나님은 미래 일의 진행에 대해 전문가적 신념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 자신도 미래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위헙 없는' 섭리관은 결정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들이 결코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시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저자의 의견에 의하면 "성경 자료에 공정하고, 모든 사건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목적 있는 인도하신으로 섭리를 이해하는 고전적 기독교 사상에 충실"하다.
 마지막 '중간지식'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신이 무엇을 행할지 아실 뿐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이 처해 있는 모든 가능한 상황 중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신다." 이것은 위에 두 섭리관 사이의 중간적 견해로 '위험을 무릅쓰는' 섭리관과 '위험 없는' 섭리관 둘 다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이 가진 모호성과 비정합성 때문에 제대로 설 수 없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데 있어 '위험 없는' 섭리관, 결정론적 섭리관을 지지한다. "하나님은 미래를 모두 아시는 분이 아니기에 위험을 무릅쓰시면서 활동하신다"는 섭리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위험 없는' 섭리관의 타당성을 전개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기도, 인간의 자유와 책임, 세상의 악 등에 대하여 '위험 없는' 섭리관을 통해 그 답을 알아본다. 이 책은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된 현대의 이슈들을 복음주의적으로 심도 있게 다루고 있어 그분의 섭리와 오늘의 문제를 연결 지어 생각하려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세상에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신은 이 세상에 관여 하는가? 관여한다면 어디까지 어떻게 관여 하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된 문제로 섭리는 곧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역사하심을 규명한다. 오늘날 이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만연한 악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해답을 섭리가 제공한다. 섭리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틀을 마련해 준다. 따라서 이 섭리를 이해하면 하나님과 이 세상의 존재와 형성을 이해하고, 이 세상의 불합리한 일들의 원인과 이유를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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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받은 구원 영원한가 비교신학 시리즈 9
마이클 호튼 외 지음, 이한상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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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

 

 이것은 칼빈주의 5대 교리인 튤립(TULIP)의 마지막 P에 해당하는 것으로, 칼빈주의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이다. 견인은 다른 말로 '영원한 안전(eternal security)' 등으로도 불리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단번의 속죄 사역을 통한 구원의 지속성, 영속성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거듭난 성도는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어떠한 경우에도 구원이 무효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견인은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 혹은 "한 번 구원 받았으면 언제나 구원 받은 것이다"라고 간단히 정리 할 수 있다.
 이러한 견인의 교리에 대해 - 견인 뿐만 아니라 튤립(TULIP) 전체적으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상반된 주장을 한다. 칼빈주의는 앞서 말한 바를 지지하고, 알미니안주의는 그 반대 진영으로서 그것을 거부한다. 즉 알미니안주의는 은혜로부터의 타락 가능성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한번 구원 받은 사람이 끝까지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본다. 이러한 두 진영의 대립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한 번 받은 구원 영원한가'

 

 이 책은 부흥과 개혁사의 비교신학 시리즈 그 9번째로 위에서 이야기한 견인의 교리를 다루고 있다. 시리즈 제목이 암시하듯이 견인에 대한 한 가지 주장이 아니라 상반된 주장들을 한데 모아 놓고 있다. 여기에는 총 네 가지 관점이 담겨 있는데 그것은 '고전적 칼빈주의', '온건 칼빈주의', '개혁주의적 아르미니우스주의', '웨슬리주의적 아르미니우스주의'이다. 각각을 대표하여 '마이클 호튼', '노먼 가이슬러', '스티븐 애슈비', '스티븐 하퍼'가 자신의 견해를 지지한다. - 여기에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각 논찬자의 주장이 해당 견해를 전적으로 대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각 견해마다 논찬자의 주장과 약간씩 다른 주장들이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가장 먼저 고전적 칼빈주의를 대표하여 마이클 호튼이 논찬한다. 그는 "구원에의 신적인 선택은 무조건적이기 때문에 필연적인 차원에서 견인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호튼은 견인을 변호하기 위해 자신의 '언역신학'을 끌어온다. 성경을 직접적으로 살펴보는 대신 '구속언약' '행위언약', 그리고 '은혜언약'을 담고 있는 성경적 패러다임을 통하여 견인을 설명한다.
 온건 칼빈주의를 대표하는 노먼 가이슬러는 전적 타락(튤립의 T)과 성도의 견인(튤립의 P)에 대한 완화된 견해를 수용한다. 그는 튤립의 'ULI'를 거부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가이슬러는 구원의 상실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견인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강경한 입장이 아니라, "십자가의 의의 전가와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약속에 근거할 때 영원히 안전"하다고 다소 완화된 견해를 견지한다. 본 논문에서 그는 구원의 상실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대신 상급의 상실이라는 견인과 관련된 한 가지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스티븐 애슈비는 개혁주의적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대변한다. 이 견해는 "배교를 나타내는 결단적 행위, 불신앙을 통해 그리스도를 떠나는 경우에 의해서만 구원을 잃는다. 배교는 대시 돌이킬 수 없는 상태"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애슈비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거부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개인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제외"한다고 말한다. 그는 "구원의 상실은 다시 회복 불가능하고,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거절 할 시에만 칭의가 취소"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스티븐 하퍼는 웨슬리주의적 아르미니우스를 대표하여 자신의 견해를 펼친다. 이 견해는 "불신앙 또는 고백하지 않은 죄로 인해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배교는 갱신된 회개를 통해 다시 치료될 수 있다"는 웨슬리의 견해에 무게를 더한다. 하퍼는 본 논문에서 특히 웨슬리의 일차 문헌을 강조한다. 많은 학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주장 할 때 자신의 견해의 뿌리에 해당하는 일차 문헌보다는 다른 이들이 정리해 놓은 자료를 인용한다. 그로 인한 원 자료 및 견해의 왜곡을 염려하며 하퍼는 웨슬리의 일차 문헌을 직접 분석 및 인용하여 그의 견해를 주장한다. 
 네 논찬자가 대변하는 각 견해 중 어느 것 하나만이 성경적이고, 옳은 주장이라고 하기에는 성경 해석에 있어 어려움이 있다. 성경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을 바라보는 각 사람마다 보는 시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경은 한 가지를 말하는데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과 입장 등을 통한, 자신의 고정된 틀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서로 상반된 결론이 도출 된다. 각자 주장하는 바는 다르지만 성경이 말하는 원 메시지를 찾기 위한 모두의 노력과 열정은 동일하다. 따라서 본서에 담긴 여러 견해 중 나와 다른 견해는 무조건 배격 할 것이 아니라 이성은 날카롭게 유지하는 동시에 가슴과 귀는 열어 두어 다른 견해를 살펴봄이 마땅 할 것이다. 나의 견해는 분명히 견지하되 그 부족한 부분을 보충, 보완하기 위해 다른 견해를 살펴본다면 이 책은 더할 나위 없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칼빈주의자와 웨슬리-알미니안주의자의 견인에 대한 견해에 상이한 부분이 있지만 양자의 동일한 주장은 성도는 구원 받는다는 것이다. 비록 전자는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고 주장 하고, 후자는 구원이 상실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어쨌든 성도의 구원이라는 주장 그 자체는 동일하다.
 아직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다. 그것은 완성되어 가는 중에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도는 구원 받았지만(칭의) 완전히 구원 받지는 못했다. 성도는 현재 구원 받고 있고(성화), 장차 구원 받을 것이다(영화). 따라서 구원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성도는 받은 구원에 감사 찬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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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예수 - 누가 예수를 왜곡하는가
크레이그 에반스 지음, 성기문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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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부 시대에는 예수에 관해 그가 신-인(God-man)인지 아니면 신 혹은 인간인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 되었다. 물론 정통 신학자들은 한치의 의심도 없이 예수를 신-인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에 맞선 이단들은 예수를 신 혹은 인간, 어느 한 쪽으로만 부각시켰다. 즉 이 시기에는 예수를 실존 인물로 보는 대신 예수 자체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 반면 예수와 관련된 오늘의 의문과 논의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예수는 역사적 실존 인물인가? 허구의 인물인가?"

 

 현대에 들어 예수에 관한 논의는 그의 실체가 아니라 실재, 다시 말해서 예수의 역사성에 집중 되었다. 예수는 역사적으로 실존 했던 인물인가? 실존 인물이라면 무엇으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허구의 인물이라면 누가, 어떻게, 왜 그를 만들어 냈을까? 등 교부 시대와 달리 오늘의 논의는 예수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예수에 관한 오늘의 연구는 크게 세 시기를 거쳐서 진행 되었다. 그 첫 번째는 19세기 초, 헤르만 라이마루스(Hermann S. Reimarus, 1694-1768)를 필두로 시작된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A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의 선구자인 라이마루스는 예수의 목적에 의문을 제기 했다. 그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정치적 왕을 기도 했다(만들어진 예수 中)"고 주장 했다. 이 당시 학자들은 계몽주의 등의 영향으로 예수가 구원자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가 선각자나 도덕 선생이었다는 개념만 받아들였다. 이후 브레데(William Wrede, 1869-1906)와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 등을 거치며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가 계속 진행 되었다. 그러나 양식 비평을 탄생시킨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에 이르러 역사적 예수의 탐구는 잠시 종결된다. 양식 비평가들은 "복음서 자료의 상당수가 교회가 만든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를 찾을 수 없다(만들어진 예수 中)"며 역사적 예수에 관한 탐구를 포기한다.
 역사적 예수 탐구의 두번째는 1950년 대에 시작된 '새로운 탐구(A New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이다. 이 시기의 주요 학자들은 보른캄(Guenther Bornkamm, 1905-1990), 케제만(Ernst Kaesemann, 1906-1998), 에벨링(Gerhard Ebeling,1912-2001) 등으로 이들은 주로 정경을 비평하며 연구를 진행한다. 이들 '새로운 탐구'의 학자들은 특히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하기 위한 연구를 했다.
 마지막으로 1980년 대 이후에 시작된 '세 번째 탐구(third Quest)'는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 1900-1979),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1934- ), 던(James D. G. Dunn, 1939- ), 샌더스(E.P. Sanders, 1937- ), 어만(Bart D. Ehrman, 1955- ), 라이트(N. T. Wright, 1948- ) 등에 의해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세 번째 탐구'는 예수와 1세기 유대교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보수신학자들과 '예수 세미나' 학자들 사이의 대립이 눈여겨 볼만 하다.

 

 

 

 '만들어진 예수'

 

 이 책은 어쩌면 '예수 세미나' 일원 등에 의한 예수와 성경과 관련된 문제 제기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책이 될 수도 있다. 저자는 크레이그 에반스(Craig A. Evans)로 한국에서는 WBC 주석의 마가복음 하 등을 통해 만날 수 있다. 국내 독자들에게는 그리 잘 알려진 학자는 아니지만 북미 신학계에서는 역사적 예수, 유대교, 사해 사본, 신약성경의 배경사 등을 연구하며 그 탁월함을 크게 인정받는 학자이다.
 에반스는 이 책 '만들어진 예수'를 통해 그동안 제기 되어 온 예수에 관한 수많은 의문들과 회의에 강력한 답변을 제공한다. 예수에 관한 탐구의 출발과 접근 방법의 오류를 지적하고, 도마복음, 베드로복음, 마리아복음, 그리고 유다복음 등의 연대성과 신뢰성의 문제 다룬다. 시대착오적이며 과장된 주장들, 예를 들면 성혈과 성배(자음과 모음, 2005), 다빈치 코드(문학수첩, 2008) 등에서와 같이 예수에 관한 괴이한 주장과 허구들에 대한 신뢰 할 만 한 답변을 제공한다.
 이 책의 큰 특징은 일차자료를 풍부하게 사용한다는 점이다. 학술 서적의 경우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다른 학자들의 견해를 많이 인용한다. 그러나 에반스가 인용하는 견해들은 주로 그와 반대 되는 주장들이다. 다른 학자들의 견해는 비평을 위해 인용을 했다. 나머지 인용문들은 내용 분석 및 증거 제시를 위한 주제와 관련된 일차자료들이다. 여기서 그의 탁월성과 학문성 및 신뢰성이 입증된다. (물론 일차자료를 잔득 가져다 놓기만 해서는 이것들이 생기지는 않는다.) 그는 일차자료들을 일일이 분석하며 관련된 문제를 지적하고, 충분한 답변을 제공한다.
 다른 특징으로는 일부 사람들(특히 근본주의자들과 일단의 복음주의, 그리고 개혁주의자들의)에 의해 논란과 문제제기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에반스는 기본적으로 성경에 대한 다음과 같은 관점을 견지한다.

 

 "... 기독교인들이 신앙적인 이유로 복음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이지만 복음서가 결코 무오하거나 예수가 했다는 모든 말씀과 행위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 "(314p)

 

 물론 에반스는 범위를 복음서로 제한하고 있지만 성경의 무오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그 다음에 이어지는 그의 말에 분명히 유의 할 필요가 있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복음서 저자들의 관심(편집비평의 과제)과 전승을 전달한 초기 기독교인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하지만(양식비평의 과제), 저자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전달하는 데 있었다. 그들에게 말씀과 삶은 규범적인 것이었다. ..."(314p)

 

 앞에 말에 사로잡혀 뒤에 이어지는 에반스의 지적을 잊는다면, 이 책에서 그가 제공하는 수많은 자료와 주장들은 가치를 잃게 될 것이다.

 아무튼 이 책은 그동안 제기 되어 온 예수에 관한 역사성에 대한 의문과 수많은 오해와 회의 및 이상한 해석들에 대한 총체적 답변을 제공해 주고 있다. 방대한 자료와 그에 대한 철저하고, 면밀한 학문적 분석을 통해 기존의 주장들 중 가장 신뢰 할 만 한 논증과 답변을 제공한다. 특히 학문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 누구나 읽기 쉽다. 따라서 학자들은 물론 여러 소문으로 예수와 성경에 대해 의문과 회의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예수에 관한 탐구는 세 번째 시기에 접어들어 무척 흥미로운 주장들과 그에 대한 활발한 논의, 그리고 새로운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을 위시한 '예수 세미나'의 예수에 관한 연구가 계속 되고 있다. 또한 최근 학계를 점점 뜨겁게 달구고 있는 샌더스(E.P. Sanders), 던(James D. G. Dunn)과 라이트(N. T. Wright) 등의 바울에 대한 새관점(New Perspectivie On Paul) 등이 예수를 넘어 신약에 새로운 이해와 문제를 제기하며 전통적 개신교의 핵심에 강력한 도전을 가하고 있다. 각각의 도전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어느 쪽으로 이루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독교는 2천년 동안 줄곧 새로운 도전을 맞이했지만 그러한 수많은 도전들은 명멸한 반면 성경에 담긴 기독교의 진리는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 그리고 내일도 동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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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와 성화 - 구원의 두 기둥 칭의론 시리즈 3
이순홍 지음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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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틴 루터로 시작된 16세기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 교회(이하 로마 교회)의 면죄부 판매가 도화선이 되었다. 종교개혁의 원인은 표면적으로는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 즉 성경과는 다른 주장과 삶에 있었고, 루터 개인적으로는 구원의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자신의 노력으로는 결코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진 루터는 로마서 1:17절을 통해 구원의 빛을 본다. 칭의에 대한 올바른 관점, 올바른 구원관이 생기는 순간이다.
 로마 교회도 칭의와 관련된 구원관이 존재한다. 그러나 문제는 칭의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있다. 로마 교회는 인간이 선행을 쌓아 성인의 수준에 도달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한 자는 일단 연옥에 가고, 이 땅에서 사람들이 기도 등을 해 주어야 비로소 구원을 얻는다고 본다. 이 때문에 로마 교회가 그토록 인간의 공로와 선행을 강조하는 것이고, 면죄부 판매 등 부조리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부조리에 직면한 루터는 오랜 고민과 몸부림 끝에 로마 교회의 오류를 직시 할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성경을 통해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이라는 올바른 구원관을 정립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중심에는 칭의가 있다. 즉 종교개혁 이후 로마 교회와 개신교는 서로 다른 칭의관으로 첨예하게 대립 했다. 앞서 말했듯이 구원에 있어서 로마 교회는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였고, 루터 이후 개신교는 오직 믿음만으로의 구원을 주장했다. 이러한 문제의 충돌은 종교개혁 후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칭의와 성화'

 

 칭의와 성화는 다른 문제이지만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개신교 칭의관에 근거하여) 칭의는 성화의 근거이고, 성화는 칭의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러한 칭의와 성화 문제를 함께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동시에 면밀히 다루고 있다. 가장 먼저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를, 그리고 로마 교회의 견해를 다룬다. 특히 로마 교회의 주장이 잘 담겨 있는 트렌트 종교회의의 내용을 살펴본다, 그리고 어거스틴과 루터의 견해를 비교한다. 이어 개혁주의 견해 중 존 칼빈과 루이스 벌코프,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여 박형룡의 견해를 살핀다. 그 외에 별도로 게릿 벌카우어와 존 머리, 안토니 후크마의 견해를 조사한다. 끝으로 칭의와 성화가 나타난 성경 구절을 살펴본다.
 여전히 로마 교회는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는 칭의관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가 협력하여 칭의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의화(칭의 + 성화)를 내세우며 성화 후에 칭의를 받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소멸 되거나 줄어 들 수 있는데 인간이 선행 등 공로를 쌓아야만 그것을 유지 할 수 있다고 한다. 공로를 일정량 쌓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반면 개신교는 이신칭의를 주장하며 칭의는 성화의 근거이자 성화는 칭의의 결과라고 말한다. 칭의는 단번에 받는 법정적 선언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 되어 우리의 죄책을 사함 받는 게 칭의이다. 그리고 성화는 칭의를 근거로 신자가 일생에 걸쳐 이루어야 할 점진적 과정이다. 성화는 일생 동안 완전을 이룰 수 없고, 다만 죽음 후에 비로소 단번에 완성 되어 영화를 누린다.
 이러한 각각의 차이는 여전히 대립 중에 있는데 로마 교회의 칭의관은 반펠라기우스주의적이며 성경 어디에도 없는 관점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성경에서는 분명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이신칭의를 말한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또 다른 칭의, 잘못된 주장을 펼치며 신자들을 다른 길로 인도하고 있다. 개신교의 경우 칭의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논리적이고, 사변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크다. 이로 인해 신자가 복음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본서에서 가장 주목 할 만 한 부분은 아마도 존 머리의 칭의와 결정적 성화, 그리고 점진적 성화가 아닌가 싶다. 기존에 개혁주의에서는 칭의와 점진적 성화만 강조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화가 언제 시작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발생하게 되었다. 존 머리는 이에 대한 문제를 칭의와 결정적 성화를 통해 해결해 준다. 그는 성화에는 점진적 성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단회적이고, 확정적인 결정적 성화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것을 통해 성화의 시작을 분명히 해준다. 또한 결정적 성화는 웨슬리의 제 2 축복을 통한 완전 성화에 대한 적절한 답을 준다. 즉 "성도는 중생과 동시에 결정적으로 죄의 지배에서 영원히 단번에 결정적으로 벗어난다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본서는 로마 교회와 개혁주의의 칭의 및 성화에 대한 견해, 그리고 개혁주의 내에서의 칭의와 성화 교리의 발전 등을 살펴보고 있다. 알미니안주의 등의 견해에 대해서는 살피고 있지 않아 아쉬움이 남지만 커다란 두 개의 견해를 면밀히 살펴보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주목 할 만 하고, 큰 유익을 준다. 이 책을 통해 성도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옳은 관점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종교개혁 이후 분열 되었다. 그 후 개신교는 분열 되고, 또 분열 되었다. 분열의 가장 큰 이유는 교리의 미묘한 차이 때문이고, 때론 이권이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20세기 중반에 더 이상의 분열을 막고자 하는 노력이 일었다. 에큐메니컬 운동을 위시하여 교회가 다양성을 존중하고, 일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작금의 교회를 보노라면 참으로 반가운 운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에큐메니즘의 방향은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여러 다른 입장에 서 있는 교회들이 성경에 더욱 충실하려는 노력과 함께 이전에 덜 충실했던 것들을 고치며 서로 이견을 좁혀 나가면서 성령의 은혜로운 인도 아래 교회의 하나됨을 지향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닌 의견 일치와 가시적 연합의 추구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 될 것이다."(p19)

 

 이 말은 로마 교회와 몇몇 개신교회의 에큐메니컬 운동을 향한 '칭의와 성화' 저자의 일침이다. 에큐메니컬. 그 의도는 참 좋다. 본인도 마땅히 지향해야 할 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전에 이것이 반드시 전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일치와 연합은 성경의 올바른 해석과 그것에 대한 모두의 동의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하나님과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실은 진정성 있는 일치와 연합이 아니라 그저 눈가리고 아웅이식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자신들의 입장은 고수한 채 단지 명목상의 의견 일치와 가시적 연합의 추구는 설령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모두를 멸망으로 이끄는 크나큰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외형적인 일치는 진정한 일치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일정한 합의일 뿐이다. 즉 또 다른 문제를 양산 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적으로 일치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 일치요, 공멸의 지름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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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 개정판
마이클 호튼 지음, 윤석인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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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교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매우 약해진 것 같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교회들이 성장 운동에만 매달린 게 한 가지 원인이 아닌가 싶다. 교회는 양적 성장을 위해 다양한 전도 방법을 개발 했고, 성도들이 듣기에 좋은 물질적 축복, 그리고 육체의 평안 등과 관련된 설교를 주로 했다. 성도들을 교회에 붙잡아 두기 위한, 교회에 충성하게 하기 위한 다양한 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하기에 바빴다. 교회가 다른 것에만 정신이 팔려 성경과 교리 교육에 시간과 공을 들이지 않자 성도들은 그것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교리는 특별한 사람들만 배우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교리 교육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교리 교육이 사라지자 발생하게 된 문제 중 한 가지는 성도들이 성경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당연히 성경을 잘 알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교회가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지 않으니 성도들은 성경을 잘 모른다. 성경을 모르니 말씀대로 살 수가 없다. 참성도가 되려야 될 수 없다. 성도들은 점진적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성경을 모르니 그럴 수가 없다. 거듭나고, 의롭다 칭함 받게 되었지만 거기에만 머물고 더 나아가지 못한다. 이로 인해 성도들의 선데이 크리스천화는 더욱 가속 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은혜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이 책의 저자는 마이클 호튼으로, 그는 미국의 개혁주의 신학자이다. 호튼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진수와 철저한 복음을 다룬다.  호튼은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며 신자들의 믿음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책에는 교리 교육의 부재에 대한 호튼의 안타까움이 깊게 묻어있다. 그는 이 책에서 기독교의 주요 교리를 다루고 있다. 창조, 타락, 예정, 구속, 종말 등 교리의 핵심사항들을 가르치고 있다. 종교개혁 신학의 진수를 전하고 있다. 다루고 있는 것은 신학적인 내용이지만 글은 신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학 서적과 같이 딱딱하고, 절제된 진행을 하지 않는다. 읽기 쉽게 교리를 설교식으로 가르친다. 이것은 장단점을 동시에 갖는다. 설교체이기 때문에 문체는 부드럽지만 글이 장황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다루고 있는 내용 자체가 이해하기 쉽지는 않다. 교리를 이미 알고 있는 이라면 복습하는 기분으로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리를 처음 접하는 이는 내용이 약간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이 경우 차분히 읽으면 완전히 이해는 못할지라도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리를 강조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만 열심히 읽고, 잘 알면 되지 교리가 무슨 필요냐고 묻는다. 밥그릇 싸움을 위한 도구가 아니냐 한다. 교리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교리는 분명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교리는 성경을 정리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교리는 성경을 체계화 시킨 것이다. 66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성경 속에 담겨 있는 많은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것이 교리이다. 따라서 교리를 알면 성경을 보는 안목이 깊어지고, 넓어진다. 교리를 알고 성경을 읽으면 성경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을 보다 깊게 깨달을 수 있다. 교리는 진리를 아는데 큰 도움을 준다!
 물론 그렇다고 교리를 맹신해서는 안 된다. 성경 해석의 차이, 교리의 미묘한 차이로 인해 교회가 여러 개로 분리 되었다. 순전히 자신의 이권을 위해 교리를 핑계 대며 형제를 이단으로 쉽게 정죄하곤 한다. 교리만 내세우며 성경의 근본적인 메시지인 사랑랑과 연합은 무시한 탓이다. 교리의 맹신은 성경의 권위 넘어서는 것이다. 성경 위에 교리를 두는 이러한 행위는 무척 위험하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되 성경 이해를 위한 도구 이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교리가 성경을 넘어서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에 유의한다면 교리는 성도에게 큰 유익을 줄 것이다. 교리를 통해 무엇을 믿고, 고백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교리를 잘 배우면 성경을 바르게 보는 안목을 길러주고, 참성도가 되는데 매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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