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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와 성화 - 구원의 두 기둥 ㅣ 칭의론 시리즈 3
이순홍 지음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10년 5월
평점 :
마틴 루터로 시작된 16세기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 교회(이하 로마 교회)의 면죄부 판매가 도화선이 되었다. 종교개혁의 원인은 표면적으로는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 즉 성경과는 다른 주장과 삶에 있었고, 루터 개인적으로는 구원의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자신의 노력으로는 결코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진 루터는 로마서 1:17절을 통해 구원의 빛을 본다. 칭의에 대한 올바른 관점, 올바른 구원관이 생기는 순간이다.
로마 교회도 칭의와 관련된 구원관이 존재한다. 그러나 문제는 칭의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있다. 로마 교회는 인간이 선행을 쌓아 성인의 수준에 도달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한 자는 일단 연옥에 가고, 이 땅에서 사람들이 기도 등을 해 주어야 비로소 구원을 얻는다고 본다. 이 때문에 로마 교회가 그토록 인간의 공로와 선행을 강조하는 것이고, 면죄부 판매 등 부조리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부조리에 직면한 루터는 오랜 고민과 몸부림 끝에 로마 교회의 오류를 직시 할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성경을 통해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이라는 올바른 구원관을 정립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중심에는 칭의가 있다. 즉 종교개혁 이후 로마 교회와 개신교는 서로 다른 칭의관으로 첨예하게 대립 했다. 앞서 말했듯이 구원에 있어서 로마 교회는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였고, 루터 이후 개신교는 오직 믿음만으로의 구원을 주장했다. 이러한 문제의 충돌은 종교개혁 후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칭의와 성화'
칭의와 성화는 다른 문제이지만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개신교 칭의관에 근거하여) 칭의는 성화의 근거이고, 성화는 칭의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러한 칭의와 성화 문제를 함께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동시에 면밀히 다루고 있다. 가장 먼저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를, 그리고 로마 교회의 견해를 다룬다. 특히 로마 교회의 주장이 잘 담겨 있는 트렌트 종교회의의 내용을 살펴본다, 그리고 어거스틴과 루터의 견해를 비교한다. 이어 개혁주의 견해 중 존 칼빈과 루이스 벌코프,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여 박형룡의 견해를 살핀다. 그 외에 별도로 게릿 벌카우어와 존 머리, 안토니 후크마의 견해를 조사한다. 끝으로 칭의와 성화가 나타난 성경 구절을 살펴본다.
여전히 로마 교회는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는 칭의관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가 협력하여 칭의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의화(칭의 + 성화)를 내세우며 성화 후에 칭의를 받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소멸 되거나 줄어 들 수 있는데 인간이 선행 등 공로를 쌓아야만 그것을 유지 할 수 있다고 한다. 공로를 일정량 쌓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반면 개신교는 이신칭의를 주장하며 칭의는 성화의 근거이자 성화는 칭의의 결과라고 말한다. 칭의는 단번에 받는 법정적 선언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 되어 우리의 죄책을 사함 받는 게 칭의이다. 그리고 성화는 칭의를 근거로 신자가 일생에 걸쳐 이루어야 할 점진적 과정이다. 성화는 일생 동안 완전을 이룰 수 없고, 다만 죽음 후에 비로소 단번에 완성 되어 영화를 누린다.
이러한 각각의 차이는 여전히 대립 중에 있는데 로마 교회의 칭의관은 반펠라기우스주의적이며 성경 어디에도 없는 관점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성경에서는 분명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이신칭의를 말한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또 다른 칭의, 잘못된 주장을 펼치며 신자들을 다른 길로 인도하고 있다. 개신교의 경우 칭의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논리적이고, 사변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크다. 이로 인해 신자가 복음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본서에서 가장 주목 할 만 한 부분은 아마도 존 머리의 칭의와 결정적 성화, 그리고 점진적 성화가 아닌가 싶다. 기존에 개혁주의에서는 칭의와 점진적 성화만 강조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화가 언제 시작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발생하게 되었다. 존 머리는 이에 대한 문제를 칭의와 결정적 성화를 통해 해결해 준다. 그는 성화에는 점진적 성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단회적이고, 확정적인 결정적 성화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것을 통해 성화의 시작을 분명히 해준다. 또한 결정적 성화는 웨슬리의 제 2 축복을 통한 완전 성화에 대한 적절한 답을 준다. 즉 "성도는 중생과 동시에 결정적으로 죄의 지배에서 영원히 단번에 결정적으로 벗어난다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본서는 로마 교회와 개혁주의의 칭의 및 성화에 대한 견해, 그리고 개혁주의 내에서의 칭의와 성화 교리의 발전 등을 살펴보고 있다. 알미니안주의 등의 견해에 대해서는 살피고 있지 않아 아쉬움이 남지만 커다란 두 개의 견해를 면밀히 살펴보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주목 할 만 하고, 큰 유익을 준다. 이 책을 통해 성도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옳은 관점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종교개혁 이후 분열 되었다. 그 후 개신교는 분열 되고, 또 분열 되었다. 분열의 가장 큰 이유는 교리의 미묘한 차이 때문이고, 때론 이권이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20세기 중반에 더 이상의 분열을 막고자 하는 노력이 일었다. 에큐메니컬 운동을 위시하여 교회가 다양성을 존중하고, 일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작금의 교회를 보노라면 참으로 반가운 운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에큐메니즘의 방향은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여러 다른 입장에 서 있는 교회들이 성경에 더욱 충실하려는 노력과 함께 이전에 덜 충실했던 것들을 고치며 서로 이견을 좁혀 나가면서 성령의 은혜로운 인도 아래 교회의 하나됨을 지향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닌 의견 일치와 가시적 연합의 추구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 될 것이다."(p19)
이 말은 로마 교회와 몇몇 개신교회의 에큐메니컬 운동을 향한 '칭의와 성화' 저자의 일침이다. 에큐메니컬. 그 의도는 참 좋다. 본인도 마땅히 지향해야 할 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전에 이것이 반드시 전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일치와 연합은 성경의 올바른 해석과 그것에 대한 모두의 동의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하나님과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실은 진정성 있는 일치와 연합이 아니라 그저 눈가리고 아웅이식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자신들의 입장은 고수한 채 단지 명목상의 의견 일치와 가시적 연합의 추구는 설령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모두를 멸망으로 이끄는 크나큰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외형적인 일치는 진정한 일치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일정한 합의일 뿐이다. 즉 또 다른 문제를 양산 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적으로 일치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 일치요, 공멸의 지름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