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 한국교회 성령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박영돈 지음 / IVP / 201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수선한 이 시대의 분위기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일까? 아니면 오순절/은사주의의 영향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현재 성령 운동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전 세계를 덮고 있다. 그에 따라 출처를 알 수 없는 각종 계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선포되고, 의심 할 만 한 각양 기적들이 성령님의 역사로 둔갑하고 있다. 북미와 남미, 아프리카... 세계 여러 곳에서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종교성이 강하고, 이슈와 유행에 무척 민감한 한국에서 그러한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벌어지고 있지 않나 싶다.
 현재 국내에는 각종 은사 집회가 성행하고 있다. 24시간 기도의 집, 주중 치유 집회, 그리고 철마다 열리는 각종 수련회 등 은사 관련 모임들이 전국 여기저기서 넘치고 넘친다. 일견 하나님의 은혜가 이 땅에 가득 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뜻 보았을 때 성령님의 역사가 이보다 크고, 광범위하게 일어난 때가 또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참으로 놀랍고,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염려되는 부분도 있다. 각종 집회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은 비성경적일 뿐더러 성경을 넘어서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집회 주도자들은 자신의 생각인지, 진정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하나님 혹은 예수님이 주신 말씀이라고 선포한다. 객관적인 검증이 필요한, 의심 할 만 한 기적을 성령님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성도들은 그것들을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있다. 무조건 아멘아멘 하며 열광한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러한 현상을 검증 할 아무런 기준과 안내가 없다는 데에 있다.
 현재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목회자 및 신학자 등 분별력 있는 이들의 목회적/신학적 차원에서 바른 분별과 안내가 제공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들이 먼저 나서서 그러한 일들을 추종하고, 지지한다. 신자들의 무분별함은 그렇다 쳐도 식견 있는 이들의 무분별한 모습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혼란이 더욱 가중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드디어 한 권의 좋은 책이 출간 되었다.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이 책의 저자는 고신대의 박영돈 교수로, 그는 "성령 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라는 저서를 통해 성령론과 관련된 귀한 메시지를 전해준 바 있다. 그는 국내에서 성령론에 관한 이들 중에 견줄 자가 별로 없는 대가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한 그가 고민 끝에, 2년여의 현장조사 끝에 오늘날 벌어지는 성령 운동에 대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 책은 오늘날 한국의 성령 운동의 문제점을 꼬집고, 진단한다. 구체적으로는 토머스 주남 등의 '계시'의 문제, '금니 소동', '토론토 블레싱', '임파테이션', 손기철 장로의 하늘의 터치 즉 '치유', 김우현 감독의 '방언', '성령의 불세례' 등 성령 운동, 현재 벌어지고 있는 각종 은사와 관련된 집회와 문제들을 살핀다.
 이 책은 현재로써는 은사와 관련된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다룬 유일무이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국내에 성령/은사 운동을 지지하고, 전하는 책은 상당히 많이 출간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비판하는 책은 몇 권 되지 않는다. 더욱이 양자 모두를 객관적으로 다룬 책은 아예 없다. - 우리에게 성경이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지식의 한계로 객관성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 이 책은 그 첫 책으로 동시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책이다.
 저자인 박영돈 교수는 세계적인 신학자이자 은사중지론자인 리처드 개핀의 제자이다. 박 교수는 비록 은사중지론의 줄기에서 공부를 하였지만 그의 고백에 의하면 그것이 그 자신을 지배하지는 못했다. 확고한 은사중지론자인 개핀의 밑에서 수학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은사중지를 외치지 않는다. 이 책에는 그러한 그의 중도적 입장이 잘 담겨 있다.
 박영돈 교수는 이 책에서 상당히 객관적인 입장을 취한다. 먼저 각 장에서 주제와 관련된 성령 운동의 문제를 꼬집는다. 해당 운동의 문제가 무엇인지 매우 날카롭게 지적한다. 강도 높게 비판한다. 그것이 어떠한 면에서 성경에서 어긋났고, 그로 인해 발생 할 문제가 무엇인지 진단한다. 여기서 끝내지 않는다. 문제만 늘어놓고, 대안은 제시하지 않는 몰지각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 성경적으로 그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지, 그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자세를 알려준다.
 박 교수는 오늘날 은사가 중지 됐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령에 의한 치유와 방언 등이 오늘도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은사와 관련된 모든 가시적인 현상이 성경적으로 옳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견지에서의 그의 진단과 해결이 과연 은사지속론자들과 은사중지론자, 양자에게 같은 공감과 만족을 줄지는 미지수다. 다른 서평 - http://mall.godpeople.com/?G=9788932812304 이곳을 참조 - 에서 알 수 있듯이 성령 운동의 옹호자들, 은사지속론자들은 그를 성령의 사역에 대해 무지하다고 할 것이다. 반대로 은사중지론자들은 그의 성경 해석을 발목 잡을 것이다. 그러나 양자 모두 박 교수를 쉽게 반박하지는 못할 것이다. - 물론 반박하려면야 얼마든지, 무엇이든 꼬투리를 잡아서 할 수 있겠지만 - 그는 신학자인 동시에 현재 목회를 하고 있는 목회자이다. 그는 깊은 신학적 지식, 다시 말해서 아무나 쉽게 반박하기 힘든 성령에 대한 성경적 지식과 이해를 갖추고 있다. 더불어 그는 현직 목사로, 목회를 통해 성령님의 역사 곧 은사의 기적을 체험하고 있다. 그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누구보다 깊은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 나은 객관적 - 어느 한 쪽만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중도에서 - 진단과 대안을 제시 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은사지속론자든 은사중지론자든 박교수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양자 모두 본서에 집중하여 자신의 견해에 문제점은 없는지 점검해야 할 것이다. 바꿔 말해서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을 다시 철저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말씀만 취하지 말고, 자신의 견해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하지 말고 성경 말씀으로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진단하고,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계속 자신의 생각만 고집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넘어서는 것이 될 것이다. 곧 자신의 생각은 하나의 우상이 될 것이다.   

 

 성령 운동, 오늘날의 은사와 관련된 양태를 어떻게 평가하고 해석해야 할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솔리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를 부르짖지만 사실은 코지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라는 데카르트 식의 자기 본위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 위에 내 생각을 두어 성경을 자신의 생각에 끼워 맞추고 있다. 명제를 성경에 맞추어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명제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명제에 맞게 성경을 짜맞춘다. 지금 우리의 모습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도 전혀 이상 할 것이 없다. 성경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면 오늘의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하니 은사와 관련되어 뜻이 모아지지 않고, 자꾸만 어긋나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성경 앞에 자신의 모든 생각을 내려놓으면 문제는 해결 된다. 박 교수가 말한 바와 같이 "자신의 해석을 은밀히 주관하는 전제가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직시해야 하며 그것을 통해 성경을 끊임없이 점검해 보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 우리는 신학적인 전통이나 경험이라는 전제에 의해 휘둘리기를 거부하고 성경 자체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들으려는 진지한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의 한 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체험을 말씀보다 우위에 놓는 것은 이단으로 가는 쳡경"으로 우리는 처음에는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 이단이 되어 있거나 악의 뿌리가 되어 분열과 싸움과 반목의 중심에 서있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막힌 속임수 - 렉 워렌과 뉴에이지와의 관련성 실체 폭로 배도와 미혹 시리즈 2
워렌 스미스 지음, 스데반 황 옮김 / 밴드오브퓨리탄스(BandOfPuritans)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성경 곳곳에는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에 대한 경고가 담겨 있다. 특히 미혹에 대한 말씀은 참으로 엄중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4, 5, 11, 23, 24)."

 미혹에 대한 그분의 말씀은 참으로 놀랍다.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말씀이 현재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특히 북미와 한국에서 사도요, 선지자라 불리는 이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받은 계시라며 제법 그럴 듯한 말로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있다. 그들만이 아니라 신뢰받는 교사들이 잘못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성도들은 아무 분별력 없이 그들의 권위에 무조건 따르며 그 말을 맹신한다. 성경보다 그들의 말을 더 신뢰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 시대는 포스트모던, 다원주의 시대이다. 범신론이 세상을 장악하여 모든 것이 신이라며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뉴에이지 사상이 그것의 중심에서 사람들을 호리고 있다. 놀라운 것은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뉴에이지의 물결에 합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특히 릭 워렌을 주시 할 필요가 있다.
 릭 워렌은 새들백 교회 담임 목사로 '목적이 이끄는 삶'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의 책은 세계 곳곳에 퍼져나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우리나라에도 번역 되어 많은 이들이 읽고 감동을 했다. 그러나 그의 성공과 명성 못지 않게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그의 책 '목적이 이끄는 삶'은 여러 부분에서 불안을 보인다. (완전 할 수는 없지만) 공신력 있는 공역(共譯) 성경을 놔두고, 굳이 다양한 사역 성경을 인용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의 메시지는 의심 할 만한 내용이 가득하다.

 '기막힌 속임수'

 이 책은 릭 워렌과 뉴에이지의 관련성을 폭로하고 있다. 그의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목적이 이끄는 삶'의 문제점은 물론 그의 행적에 있어 문제가 있는 부분들을 추적하여 폭로한다. 그 외에 얼마 전 파산한 미국 수정교회의 전 담임 목사이자 '생각의 가능성(Possibility Thinking)'이라는, 겉으로는 그럴 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비성경적인 사고를 전파한 로버트 슐러에 대해서도 다룬다. 그리고 뉴에이지 사상이 말하는 '하나님의 꿈' 등 그 사상의 기저에 있는 음흉한 간계가 무엇인지 등을 밝힌다.

 뉴에이지는 "20세기 이후 나타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영적인 운동 및 사회활동(위키백과)"으로 "종교, 의학, 천문학, 환경, 음악 등의 영역의 집적된 발전을 추구하는 신문화운동(네이버 백과)"이다. 이것은 물질주의와 유일신 사상 등에 대한 반동으로 탄생하여 "범신론적이고, 개인 혹은 집단의 영적 각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위키백과)." 이러한 뉴에이지의 두드러진 특징은 음악 등을 매개로 전파 된다는 것이다. 어쿠스틱 악기를 이용한 편안하고, 감미로운 연주는 인간의 감정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어 심리 치료 등에 이용된다. 종교적 형태로는 명상 및 관상기도 -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것을 추천하는데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 등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고, 신과의 합일을 돕다. 그 외에 요가 등을 통해 마음의 제어 및 심신의 단련을 추구한다. 이처럼 뉴에이지 운동은 외견상 인간의 심신의 평안과 단련을 추구하는 매우 이로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철저히 반기독교적이다. 뉴에이지 운동의 모든 것은 철저히 인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모든 활동의 목표는 오로지 인간의 평안과 안위만을 위한다. 이는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하나님 중심의 기독교와는 정확히 반대 된다. 그렇기에 뉴에이지는 시나브로 기독교에 해악을 끼칠 수밖에 없다.
 뉴에이지는 현재 기독교 내에 일부 지도자들을 통해 다양한 용어들이 사용되어 전파되고 있다.

 " '뉴라이트 리더쉽', '양자 영성', '새 영성', 그리고 '새 세계관' 등 교묘하고 새로운 용어들을 사용한다. 이러한 용어들은 마치 세계의 유익을 위한다는 개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이들은 교회를 구 시대/성경적인 기독교에서 벗어나 새롭게 등장하는 새 영성의 새 시대로 이끌어가고 있다."(153p)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한 뉴에이지의 전파는 참으로 교묘해서 평신도는 물론 목회자 및 신학자들도 쉽게 분별하기 힘들다. 물론 분별하려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학식이 뛰어나고, 영적 안목이 있는 이들이라도 그들의 교묘한 속임수에 넘어가 분별력을 상실하고, 동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 대표적인 예로 릭 워렌, 브라이언 맥클라렌 등을 들 수 있다. -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의 교묘한 공작으로 우려하던 바가 점점 현실화 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와 뉴에이지는 이제 서로 겹치고 있으며 대단히 많은 부분에서 서로 섞이고 있다. 그래서 조만간, 매우 빨리, 이 둘은 새 세계 종교의 새 영성으로 섞이게 되면서 둘 사이으 구분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164p)

 이것은 다음과 같은 용어의 사용으로 구체화 되고 있다.

 "현재 기독교와 뉴에이지 간의 겹치는 용어로는 "혁명", "개혁",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1), "하나님의 꿈"2), "우주적 그리스도", "하나됨", "모든 것 안에 계신 하나님"3) 등이 있으며, 이러한 용어들은 한때 전통 기독교로 여겨지던 것들이 뉴에이지의 새 영성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사용되고 있다."(164p)

 이러한 용어는 기독교 지도자들은 물론 여러 기독교 영성 작가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위에서 언급된 "혁명", "개혁", "우주적 그리스도", "하나됨" 등은 외견상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기독교의 것과 전혀 다르기에 기독교 지도자들 혹은 영성 작가들의 책에서 이러한 말들을 접할 때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그러나 문제는 뉴에이지 사상과 용어를 매우 잘 알고 있지 않고서는 그러한 것들을 쉽게 알아챌 수 없다는데 있다. 이것은 매우 걱정 할 만한 문제이다. 책에서 읽은, 단지 맞는 것 같고 좋아보여서 의심 없이 사용한 말이 실은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경악스러울까? 그들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이 당연히 기독교의 하나님인 줄 알고 고백 했는데 실은 다른 하나님이었다면 그동안의 나의 고백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따라서 뉴에이지 사상과 그것을 전하는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 및 작가들의 책과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는 말에 각별히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막힌 속임수' 이 책을 통해 뉴에이지의 실체와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의 개탄스러운 죄악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뉴에이지와 그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부디 그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대비해야 할 것이다. 이 경고가 단지 무조건적인 비판이고, 허무맹랑한 말이 결코 아님을, 본 서평의 서두에서 인용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 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리, 곧 성경을 더욱 알도록 노력하여 앞으로 더 강력하고, 거세질 교묘한 속임수로부터 미혹 당하지 않도록 철저한 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주1) 이 말은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의 주기도문에도 사용된다. 이는 예수님의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를 뉴에이저들이 자신들의 계략을 위해 교묘히 변형한 말이다. - 본서에 담긴 내용을 본인이 약간 수정
주2) 뉴에이저들은 여기서 "꿈"이라는 말을 단지 마틴 루터 킹이 말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에서 "꿈"과 같은 것이라고 하나, 양자는 분명히 서로 다르다. - 본서에 담긴 내용
주3)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범신론(모든 것이 신이다.) 혹은 만유재신론(모든 것 안에 신이 있다.)과 동일한 주장이다. - 본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주와 인간의 시작 - 창세기 1~3장을 통해 본 창조와 진화 논쟁 존 맥아더 시리즈 6
존 맥아더 지음, 이심주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 되었다. 이로써 신에 대한 인간의 절대 복종의 시대는 끝이 났다. 인간은 이제 자신의 지식에 의존하기 시작 했다. 합리주의와 이성주의를 기준으로 하여 모든 것을 지식으로 판단하고, 평가 했다. 특히 과학이 이성주의의 절대 기준이 되면서 모든 것은 과학을 통하지 않고는 설명 하고,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과학의 설명과 이해를 벗어나는 것은 거짓으로 정죄 되었다. 또다른 신흥 종교의 탄생이다.
 과학의 맹신은 한 가지 특징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진화론에 대한 확고한 추종이다. 진화론은 세상 및 인류의 창조와 죄의 기원, 그리고 구원을 다루는 창조론에 팽팽히 맞섰다. 그것은 과학을 기반으로 하여 생명의 기원을 밝히고, 급기야 생명 창조의 영역으로까지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진화론은 가장 근원적인 부분에서부터 창조론과 전면 대치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긴장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과연 창조론이 옳을까? 진화론이 옳을까? 둘 사이에 적당한 양보와 타협이 가능할까?

 

 '우주와 인간의 시작'

 

 이 책은 국내외로 매우 저명한 목회자이자 신학자인 존 맥아더의 책이다. 그는 탁월한 성경 강해로 유명하다. 맥아더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전하기 위해 철저히 성경 각 권과 각 구절을 강해한다. 특히 그는 복음을 왜곡하지 않고, 그 순수한 진수를 전파하는데 큰 공과 노력을 기울인다.
 본서에서 맥아더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에서 창조론을 변호하기 위해 창세기 1~3장을 살펴본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가 창세기 1~3장에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통해 진화론이 허구라고 강하게 반박한다.

 

 "과학이 아닌 성경이 모든 진리의 궁극적인 시금석이다(31p). ... 진화론은 비도덕적인 동시에 그만큼 비이성적이다(47p). ... 만일 모든 것이 우연으로 발생한다면, 궁극적인 면에서, 어느 것도 현실적인 사상적 출발점은 찾아보기 힘들다(48p)."

 

 그의 주장과 반대는 격렬하고, 단호하다. 물론 진화론자들, 과학의 눈으로 창조론을 봤을 때 그것은 비이성적이고, 허구적으로 보일 것이다. 창조의 이야기는 현설적, 이성적으로는 이해 할 수 없고, 특히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이성적이고,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진화론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면에서 진화론도 허구라고 할 수 있다. "자연주의(진화론 - 본인 추가)는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신념에 불과하다(69p)."

 

 "본문(창세기 1:1 ~ 2:3 - 본인 추가)의 중요한 표현을 거부하거나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은 창세기의 설명을 어느 정도로든지 진화론이나 "점진적 창조론"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90p).

 

 "만일 자연의 법칙이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제한시킨다면, 모든 기적의 가능성은 배제될 것이다. 그러나 자연 법칙은 하나님에게 가능한 일에 어떤 제한적인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에 의한 인간의 이해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의 여부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129p)."

 

 창세기 1~3장에 나타난 창조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의 근간 및 모든 것이 부정 가능하다. 더불어 인간의 죄의 기원과 현재 상태 등은 설명이 불가능해진다. 창조가 거짓이라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조차도, 당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또한 믿을 수도, 믿을 필요도 없다. 지난 2천년 동안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순교한 많은 사람들은 단지 미치광이들이거나 쓸데없는 일에 아까운 목숨을 바친 것에 불과하다. 그 모든 것의 기반에는 인간을 비롯한 우주 만물의 창조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화론이 옳은가? 그렇지 않다. 우주가 단지 대폭발에 의해 우연히 생성 됐다면, 인류의 탄생과 진화 그 모든 것이 그저 기막힌 우연의 결과라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설명이 불가능해진다. 인간의 이성과 존재는 목적과 방향을 잃는다.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회의적으로 봤을 때 인생을 굳이 가치 있게 살 필요가 없다. 허랑방탕한 삶을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어차피 무(無)로 돌아갈 인생 어떻게 살든 문제 될 것이 전혀 없다.
 창조론과 진화론, 어느 것이 옳은지 그 판단은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고, 현실적인지는 자명하다. 그러나 그 판단은 이성으로는 쉽게 할 수 없다. 둘 다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창조, 복음은 영으로만 판단할 수 있다. 이처럼 창조와 진화를 판단함에 있어 비록 제한이 있지만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여 자연(일반계시)과 성경(특별계시)을 들여다봄으로 그것을 어느 정도 알고, 판단 할 수 있다.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여 무엇을 판단할지, 그 후의 결과는 천양지차이 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 박영선 목사 그의 삶과 신앙, 설교를 말하다
박영선 지음 / 복있는사람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은혜의 설교자 박영선 목사. 그는 약 20여 년 간 목회를 하며 성도들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성화는 무엇인지 설교해 왔다.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 뿐 만 아니라 그 외에 한국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설교가 녹아 있는 책인 '하나님의 열심', '믿음의 본질', '성화의 신비' 등을 통해 믿음과 성화를 전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는 성화에 대해 스스로 찾고 구하며 전하고 있다.

 '시간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이 책에는 박영선 목사의 삶과, 신앙과 목회 철학이 담겨 있다. 설교자로서 그의 삶이 어떠 했는지, 어떠한 각오로 목회를 했는지 잘 담겨 있다. 그의 신앙과 목회는 한 마디로 '처절한 분투'였다고 할 수 있다. 목회자가 아닌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믿음은 무엇이고, 성화는 무엇인지 알기 위한 처절하게 몸부림의 연속이었다. 그는 한국 교회의 보편적 신앙과 가르침을 거부하고, 의심 했다. 고민하고, 절망하며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옳은 신앙인지 알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신앙은 성화가 무엇인지 알기 위한, 그렇게 살고자 하는 계속 되는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그의 설교는 신앙인으로서 바른 삶을 살지 못하는 성도들과 한국 교회에 대한 따끔한 외침이었다. 아니, 그의 설교는 그 자신을 향한 다그침이었다. 이 책은 그런 그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박영선 목사는 이 책에서 시간을 강조한다. 그동안 목회와 신앙 생활을 하며 하나님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깨달은 바를 전해준다. 단지 오늘이 아니라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하나님이 어떻게, 얼마나 크게 일하시는지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믿음의 본질은 무엇인지, 성화는 무엇인지 논한다. 그는 말한다.

 "(성화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더 많이 의존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성화는 '거룩해지는 것',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 등의 어려운 신학적인 말과 달리 그의 말은 참으로 단순하다. 무척 이해하기 쉽다. 과연 설교자의 말답다. 또한 그는 한국교회의 과거와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내다본다. 그의 모든 말들 속에 깊은 연륜이 묻어난다.
 이 책을 통해 박영선 목사 개인의 신앙과 목회 방향을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믿음과 신앙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칼빈주의자라 하기에는 몇몇 부분에서 의문이 드는 말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깊은 가르침이 있기에 잘 귀담아 들으면 자신의 신앙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칭의 논쟁 - 칭의 교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존 파이퍼 지음, 신호섭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칭의 교리는 기독교에 있어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칭의 교리에 대한 견해 차이로 기독교는 신구교로 분리 되었다. 카톨릭은  구원에 있어 칭의만으로는 부족하여 인간의 공로를 추가하였다. 반면 개신교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부르짖었다. 이렇게 칭의 교리는 한 번의 진통을 겪은 후 양자 대립 이외에 다른 진통 없이 오늘에 이렀다.
 카톨릭의 칭의관에 대한 개신교의 정당한 도전 이후, 약 500년 만에 칭의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이 시작 되었다. 그것은 예수에 관한 탐구 세 번째 시기에 해당하는 ’세 번째 탐구(third Quest)’ 과정의 한 갈래에서 벌어지고 있다. 샌더스(E.P. Sanders), 던(James D. G. Dunn)과 라이트(N. T. Wright) 등은 바울에 대한 새관점(New Perspectivie On Paul)을 제시했다. 이들은 칭의와 1세기 유대 율법주의 등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해석을 주장하고 있다.

 ’칭의 논쟁’

 이 책은 앞서 소개한 이들 중 라이트의 칭의론에 대한 거센 도전에 맞서 전통적인 칭의론을 강력하게 변호하고 있다. 저자는 개신교 진영에서 매우 저명한 존 파이퍼 목사이다. 그는 기쁨의 신학을 바탕으로 많은 이들에게 큰 은혜를 전하고 있다.
 파이퍼는 이 책에서 칭의에 대한 라이트의 새로운 해석의 문제점을 낱낱이 고발한다. 라이트는 칭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이 의로운 자들인지를 선언하는 것이며 그들의 죄는 용서받고 따라서 언약 백성의 참된 구성원, 즉 하나님에게 속한 백성이 되었다는 선언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칭의는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이 언약 안에 있다는 선언"이다. 또한 그는 말한다.

 "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가 바울이 의미하는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받드시 강조해야만 한다."

 이상의 두 말만 보아도 전통적인 칭의론에 대한 라이트의 도전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개신교 전통에서 칭의는 단지 선언이 아니라 명백한 ’의의 전가’이다. 다시 말해서 칭의는 ’언약 안에 있다는 선언’이 아니라 ’단번에 받는 법정적 선언’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 되어 우리의 죄책을 사함 받는’ 게 칭의이다. 이러한 칭의 교리는 분명히 복음의 핵심이다. 그럼에도 라이트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니 도대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상에서 간략히 살펴본 칭의에 대한 라이트의 도전에 맞서 파이퍼는 강력하게 전통적 칭의를 비호한다. 라이트의 주장의 잘못된 점을 상세히 꼬집으며 그의 삐뚤어진 칭의관을 바로 잡는다. 비록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이 책을 통해 칭의에 대해 보다 깊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라이트는 훌륭한 학식을 바탕으로 폭넓은 독자층을 형성하며 자신의 신학을 전파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가 쌓은 신학적 업적이 뛰어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더욱 분명한 것은 그가 주장하는 칭의관과 1세기 유대 율법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단지 전통적인 견해에 도전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심각한 것이 아니다. 그의 왜곡된 칭의관으로 많은 이들이 복음의 핵심을 잘못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이는 한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만드는 비참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라이트가 과연 제정신으로 이상한 주장을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제정신이라면 단지 이름을 알리고, 명성을 쌓기 위함인지 혹은 그를 조정하는 배후가 있어서 그러는 것인지 알고 싶다. 물론 라이트가 잘못된 주장을 하는 이유는 본인 외에는 모를 일이다. 어쨌든 개신교 칭의 교리는 명백히 복음의 핵심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보호 받아야 하고, 계속 전파 되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