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징 교회와 신비주의 잘못된 기독교 분별 시리즈 7
로저 오클랜드 지음, 황 스데반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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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참으로 혼란스럽다. 곳곳에서 대형 지진이 발생나고, 화산이 분출 되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는 민중 봉기가 일어나고, 세계 경제는 공황으로 치닫고 있다. 기상 이변과 환경 오염 등으로 빈곤국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식량 사정이 악화되고 있다. 세계는 지금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단 세계만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또한 마찬가지 상황에 처해 있다. 진화론이 창조론을 공격하여 결국 미국 학교에서는 창조론을 가르치지 못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다원주의 사상으로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다면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다는 것을 거부한다. 더욱이 기독교에 신비주의 사상이 들어와 혼합 종교가 되고 있는 형국이다. 기독교는 과연 이 위기에 어떻게 대처해나갈 것인가?

 

 '이머징 교회와 신비주의'

 

 이머징 교회는 더 나은 교회를 위한 개혁일까? 아니면 교회를 썩게 만들 독일까? 이 책은 현재 미국에서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이머징 교회의 문제점과 그것을 매개로 많은 교회로 전파되고 있는 신비주의 요소를 고발한다. 가장 먼저 이머징 교회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그 근원을 추적한다. 그리고 이머징 교회를 주도하고 있는 주요 이머전트들의 주장과 철학을 살핀다. 동시에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그것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밝힌다. 또한 계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이머징 교회에 가담하고 있는 일부 유명 목사들과 작가들의 오류와 잘못을 지적한다. 정리하면, 이 책은 신비주의 및 뉴에이지 요소가  이머징 교회를 통해 어떻게 기존 교회에 전파 되고, 그것을 잠식하고 있는지 밝히며 주의를 당부한다.
 국내에는 아직 이머징 교회가 본격적으로 전파되지 않아서 아마도 이 책이 국내 독자들에게는 큰 어필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한국 교회는 현재 미국에서 들여온 마케팅 및 교회 성장운동 등에 매진하고 있기 때문에 이머징 교회가 아직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이머징 운동의 주요 사항들이 신앙서적 등을 통해 은밀히 국내에 상륙해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이머징 운동에서 내세우는 관상기도 등 주요 도구들에 물들어 있다. 여기에 주의가 요망된다.
 이전의 추세대로라면, 사대주의에 빠져 미국 것은 무조건 좋은 것인 줄 알고 국내에 들여오고 있는 일부 목사들과 신학자들 및 출판사들에 의해 이머징 교회도 국내에 곧 본격적으로 상륙하지 않을까 싶다. 아마 그렇게 된다면 이머징 교회는 이전의 다른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전파될 것이다. 대형교회의 막강한 힘과 파급력을 통해 많은 교회가 이머징 교회에 쉽게 물들고, 무분별하게 그것을 따를지도 모른다. 아직 이머징 교회의 형태가 국내에 뚜렷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이 방비 할 적기라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우왕좌왕 하지 말고, 미리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교회는 어려운 상황일수록 더욱 잘 헤쳐 나갔다. 초대 교회 시대에 영지주의 등 이단들이 아무리 그럴듯한 주장으로 교회를 흔들었어도 중심을 잃지 않았다. 로마가 신자들을 몹시 핍박하고, 숱한 목숨을 앗아갔어도 교회는 더욱 뿌리 내리고 퍼져나갔다. 수많은 이단사설과 거짓 진리들은 하나같이 모두 명멸 했지만 교회는 여전히 건재하고, 빛을 발하고 있다. 교회만이 참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진리의 교회도 때로는 부패하고, 타락도 했다. 그때마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교회는 다시 제 모습을 찾았다.
 현재 교회는 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진리로부터 많이 이탈하였고, 외부적으로는 교회를 거부하는 거센 도전을 맞고 있다. 어쩌면 교회의 또 한 번의 개혁이 요구되는 때인지도 모른다. 이전의 개혁은 분리를 낳았지만 다가올 개혁은 결합이 필요할지 모른다. WCC 등에 의한 외적 결합이 아닌 진리를 중심으로 한 본질적 결합을 말이다. 개혁인가? 변질인가? 교회는 그 기로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교회가 부디 지금의 난국을 이전과 같이 진리를 붙들고 잘 헤쳐 나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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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말인식
리차드 카일 지음, 박응규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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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이 지구적 종말에 관심을 쏟는다. 그 이유는 아마도 종말은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종말을 바라지 않는다. 대신 필연적으로 영생을 원한다. 인간의 생명에는 끝이 이기에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어한다. 이러한 열망이 종말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역사 속의 종말인식'

 이 책은 지난 종말의 역사, 초대 교회부터 서기 2천년 까지 서구 역사 상에 등장 했던 종말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담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종말에 대해 어떻게 인식 했는지를 중심으로 다루며 그 외의 인식도 포함하고 있다. 변방종교나 사이비 종파들이 종말에 대해 어떻게 접근했고, 세속 차원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 했는지도 함께 다룬다. 또한 과학자들과 문학 작가들의 견해도 담고 있다. 특기 할 만한 점은 저자의 견해는 배제한 채 객관적 서술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 종말론에 대한 비평을 하지 않는다. 독자 스스로 평가 할 수 있도록 역사가의 객관적 입장을 견지한다. 대신 책을 마무리하기 전에 저자는 균형잡힌 조언을 한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지난 2천년의 역사 동안 종말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 했는지를 객관적으로 조망 할 수 있다. 종교, 세속, 과학 등 다양한 차원에서의 종말에 대한 인식들을 지각 있게 살펴 볼 수 있다. 이것은 종말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세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현 시대의 우리는 개인적 입장과 종교적 입장 모두에서 종말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방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현재 대두되고 있고, 또한 대두 될 또 다른 종말론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판단력을 제공 받고, 그에 대한 균형을 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종말에 대한 관심은 어느 시대에나 늘 있어 왔다. 그런데 유독 어느 특정한 시대에 그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집착을 보일 때가 있었다. 예를 들면 한 사이비 종교는 1999년에 지구가 멸망 할 것이라며 크게 호들갑을 떨었다. 여기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한 몫을 하였다. 지구가 정말 멸망 할지도 모른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 되었으나 우리는 멀쩡히 살아있다. 그럼에도 종말론은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그것에 매번 속고, 거짓으로 판명 났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종말론에 관심을 갖는다.
 과연 지구는 정말 멸망할까? 답은 "아무도 모른다." 어떠한 인간도 그에 대한 답을 분명히 말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그럴 권한도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직 현재를 살 권한만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는 특별히 종교적 해석과 입장은 배제한 채 보편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지구 멸망에 관심을 갖기보다 자신의 현재에 관심을 갖고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 유한한 존재인 나에게 들일 시간도 부족한데 지구 멸망에 관심을 두고 시간을 빼앗겨 무엇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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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의 허구성
정태홍 지음 / 등과빛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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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몇 년 전 이슈가 되었던 심부기(심리학에 물든 기독교)와 비슷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심부기보다는 내용의 범위가 좁다. 제목에서 유추 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내면의 아이', '쓴뿌리' 등을 언급하는 '내적치유'라는 심리학을 이용한 자아치유 사역을 비판하고 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심리학을 이용한 '내적치유'는 중단해야 한다. 성경만으로 충분하다.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병들거나 상처가 있는 게 아니라 죄인이다. 이것을 직시해야 한다. 믿음으로 구원의 반석 위에 서야한다"

 

라고 할 수 있다. 본인이 요약한 저자의 주장을 보면 심리학을 무조건 비판하고, 맹목적으로 성경과 믿음을 강조하는 걸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저자는 올바른 신앙을 강조한다. 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본서에서는 특히 주서택 목사가 주도하는 '내적치유'를 비판한다. 특별히 주서택 목사를 지목한 이유는 '내적치유'를 하는 이들 중 그가 전국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적치유'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지극히 인간적인, 심리학이라는 도구를 이용하기 때문이 아니다. 저자는 '내적치유'가 심리학에 기초한 것은 물론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신비주의 및 뉴에이지와 동양 사교' 등에 뿌리한 '구상화', '내면아이', '관상기도' 등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저자의 그러한 판단에 대한 다양한 근거 및 증거를 제시하고, 그에 따라 '내적치유'가 가지고 있는 비기독교적, 비성경적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내적치유'는 성경과 그러한 비성경적 개념들과 원리들을 혼합하여 사용하면서도 다른 건 전혀 안 섞인 성경적 방법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몰염치하고, 모순된 주장을 문제 삼는다. 그렇게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것을 비판한다. 더불어 '내적치유' 교재와 주서택 목사의 주요 저서의 내용을 분석, 비판한다. 저자는 다각도로 '내적치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성경적 답변을 제시한다.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내적치유'의 무용성을 주장하고, 성경(그리고 교리 교육)과 올바른 신앙으로의 회귀를 설파한다.

 

 저자는 고신(고려신학대학원) 출신의 개혁주의 목사로 종교개혁의 5가지 기치를 주장한다. 그는 '내적치유'를 비판하는 데만 집중하지 않는다.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지 않는다. '내적치유'가 성경으로 회귀하길 바라며 올바른 신앙의 본질과 순수성을 잘 가르쳐준다.

 

 본서는 제목과 같이 '내적치유'에 문제점이 있는 것 같으나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이, '내적치유'를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이들이 꼭 읽어 봤으면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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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왕국
클라우스 / 성광문화사 / 198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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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긴장 속에서 종말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미 시작 되었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에 살며 도래 할 종말을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 전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큰 환난이 있어야 하고(마 24:21), 그 후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이 땅 가운데 오셔야 한다(마 24:30). 이 일들을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수 없다.
 예수님의 재림 전후에 많은 일들이 벌어질 것인데, 그 일들의 순서에 대한 몇 가지 다른 해석이 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20장 1~6절에 언급된 천년왕국과 관련이 있다.

 '천년왕국'

 이 책은 천년왕국에 대한 상이한 해석 및 관점, 즉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그리고 후천년설 및 무천년설에 대한 논문을 담고 있다. 그 각각의 논찬자는 조지 E. 래드(George E. Ladd), 헤르만 A. 호이트(herman A. Hoyt),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ner), 안토니 후크마(Anthony A. Hockema), 그리고 편집에 로버트G. 클라우스(Bobert G. Clouse)이다. 논찬자들은 당대를 대표하는 훌륭한 학자들로 (사람을 높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나) 논찬자의 구성만으로도 이 책의 값어치가 상승한다.
 이 책에 담긴 각각의 관점을 천년왕국을 중심으로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다. 역사적 전천년설은 7년 대환난, 예수님의 재림 및 휴거, 천년왕국의 순서로 일어날 것이라 주장한다. 이 관점은 문자적 1천년을 지향하는데 재림이 가까워지면 대배교와 대환난이 있을 것이라 말한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공중 재림 및 휴거, 7년 대환난, 지상 재림, 천년왕국의 순서를 주장한다. 이 관점은 역사주의적 전천년설과 비슷하나 재림의 방식과 순서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후천년설은 천년왕국, 재림을 주장한다. 이 관점의 특징은 재림 전 천년왕국 기간에 악의 영향은 점진적으로 축소되고, 기독교의 선이 확산 되며 그로 말미암아 복음의 확장이 이루어질 것이라 말한다.
 마지막으로 무천년설은 천년왕국, 재림을 주장한다. 이 주장의 특징은 천년왕국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를 천년왕국이라고 본다. 그 기간에 선과 악이 예측할 수 없이 섞여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각각의 내용을 매우 압축하였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각자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각각의 주장은 어느 것이 맞고, 또 어느 것이 틀리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계시록에 나온 천년왕국을 어떠한 관점으로 보았는지, 해석의 차이에 따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천년왕국을 문자적으로 보았는지 아니면 상징적으로 보았는지 등으로 말이다. 따라서 어떤 주장을 무조건 따르거나 배격하기보다 논찬자들의 글과 무엇보다 성경을 참고하여 각자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자신의 관점을 세우고, 다른 주장을 존중하는 게 바람직 할 것이다.
 아무튼 이 책에 담긴 저명한 학자들이 제공한 글들을 통해 (물론 본인은 이 책을 가지고 있지만, 현재 절판이라 다른 이들은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 무척 아쉽다.) 천년왕국에 대한 내용을 심층적으로 정리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천년왕국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천년왕국에 대해 학자마다 다른 견해를 주장하지만 모두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양 그대로 앞으로 언젠가 이 땅 가운데 다시 임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를 알 수 없다(마 24:36). 그렇다고 우리는 결코 태만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그분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기에 우리는 항상 임박한 재림을 직시하며 그것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고, 신실한 신부의 모습을 갖추며 항상 깨어 신랑을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신랑이 더디 온다고 졸다가는(마 25:5) 남은 처녀들과 같은 신세(마 25:8, 10, 11)가 될 것이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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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있는가 비교신학 시리즈 1
리차드 개핀 외 지음, 웨인 그루뎀 엮음, 이용중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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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 전 방언에 관한 문제로 국내 기독교 서점가가 뜨거웠다. 방언이 오늘날에도 존재하는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문제로 긴 설전이 오갔다. 이 쟁점은 현재 수그러 들었지만 (비단 방언의 은사 뿐만이 아니라 은사에 관한 문제는) 언제 또 다시 고개를  들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현재 국내에는 은사 관련 집회가 꾸준히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방언의 은사는, 다시 말해서 기적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존재할까? 이에 대한 논의가 여전히 진행 중에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진전을 보이고 있지 않다. 20세기 초에 오순절의 태동으로 은사 문제가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이 문제는 아직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기적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있는가'

 

 이 책은 기적의 은사, 구체적으로 성경에 나온 여러 은사 중 특히 방언과 신유, 그리고 예언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존재하는지의 여부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서의 답을 담고 있다. 앞서 말한 특정 은사들에 대해 은사중지, 신중수용, 제 3의 물결, 오순절/은사주의 이렇게 총 5가지 입장, 4명의 논찬자가 각각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은사중지의 입장에서 기적의 은사(방언, 신유, 예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은사 1세기에 신약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던 시기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된 것이라 주장한다. 반면 오순절주의는 신약 성경에 언급된 모든 은사는 오늘날에도 존재한다고 말한다. 특히 이 입장에서는 회심 이후의 성령 세례 체험을 강조한다. 이 성령 체험의 표시가 방언이라 주장한다. 은사주의 입장에서는 오순절주의와 마찬가지로, 대체적으로 은사를 인정한다. 교회 성장 운동의 대가인 피터 와그너가 명명한 제 3의 물결 신봉자들 또한 은사들의 지속을 주장한다. 단 이들은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들만큼 방언에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는다. 이들 외에 신중수용론자들은 기적의 은사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 남용을 우려하며 그것에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다섯(정확하게는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를 하나로 묶어 4개) 입장의 주장과 각 입장에 대한 다른 입장의 논찬자의 반론을 한 곳에 모아놓고 있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은사 문제와 관련된 모든 입장을 한 번에 볼 수 있다. 그런데 각 논찬자의 주장은 서로 상이하기에 독자들은 도대체 어느 주장이 가장 성경적인지 혼란을 느낄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 처음 접해보거나 아직 생각을 깊이 해보지 않은 독자는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은사에 대해 다양한 입장이 존재하는 것은 성경은 한 가지를 말하지만 사람마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자신은 어떠한 입장을 견지 할 것인지, 먼저 성경 말씀을 들여다 보아 성경에서는 뭐라 말하는지 정리를 한 후 이 책의 도움을 받아 다듬으면 자신의 입장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독자의 별도의 수고를 덜어주고 가이드라인이 되어주는, 참으로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과감히 말하는 동시에 은사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성경 내용 중에는 신학적으로 아직 의견을 모으지 못한 난제가 꽤 많이 존재한다. 특히 은사 문제는 다른 어느 문제 못지 않게 팽팽한 대립 구도가 형성 되어 있다. 오늘날 은사는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 존재하긴 하나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등 서로 다른 견해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 성경은 한 말을 하는데 왜 이리 다른 입장이 존재할까? 어느 입장이 성경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에 답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누구는 이에 대해 답답함과 조급함을 느낄 것이다. 혹시 그렇다면 웨인 그루뎀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내게 왜 똑같은 성경을 믿고 모두가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개인적인 사랑을 가진 이 네 사람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는지를 묻는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초대 교회가 서기 381년에 와서야 (콘스탄티노플에서) 겨우 최종적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확정하게 되었고 서기 451년에 이르러서야 (칼케돈에서) 한 인격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쟁을 마무리 지었다고 말한다. 그러니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 복잡한 질문들이 이틀 안에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18p)"

 

 현재의 팽팽한 대립은 결코 소모적이고, 쓸모 없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더 나은 발전과 합의를 위한 귀중한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현재의 숙제는 이전의 다른 문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원래 한 가지 답만 있던 것 같이 자연스럽게 풀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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