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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있는가 ㅣ 비교신학 시리즈 1
리차드 개핀 외 지음, 웨인 그루뎀 엮음, 이용중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몇 해 전 방언에 관한 문제로 국내 기독교 서점가가 뜨거웠다. 방언이 오늘날에도 존재하는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문제로 긴 설전이 오갔다. 이 쟁점은 현재 수그러 들었지만 (비단 방언의 은사 뿐만이 아니라 은사에 관한 문제는) 언제 또 다시 고개를 들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현재 국내에는 은사 관련 집회가 꾸준히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방언의 은사는, 다시 말해서 기적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존재할까? 이에 대한 논의가 여전히 진행 중에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진전을 보이고 있지 않다. 20세기 초에 오순절의 태동으로 은사 문제가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이 문제는 아직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기적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있는가'
이 책은 기적의 은사, 구체적으로 성경에 나온 여러 은사 중 특히 방언과 신유, 그리고 예언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존재하는지의 여부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서의 답을 담고 있다. 앞서 말한 특정 은사들에 대해 은사중지, 신중수용, 제 3의 물결, 오순절/은사주의 이렇게 총 5가지 입장, 4명의 논찬자가 각각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은사중지의 입장에서 기적의 은사(방언, 신유, 예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은사 1세기에 신약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던 시기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된 것이라 주장한다. 반면 오순절주의는 신약 성경에 언급된 모든 은사는 오늘날에도 존재한다고 말한다. 특히 이 입장에서는 회심 이후의 성령 세례 체험을 강조한다. 이 성령 체험의 표시가 방언이라 주장한다. 은사주의 입장에서는 오순절주의와 마찬가지로, 대체적으로 은사를 인정한다. 교회 성장 운동의 대가인 피터 와그너가 명명한 제 3의 물결 신봉자들 또한 은사들의 지속을 주장한다. 단 이들은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들만큼 방언에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는다. 이들 외에 신중수용론자들은 기적의 은사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 남용을 우려하며 그것에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다섯(정확하게는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를 하나로 묶어 4개) 입장의 주장과 각 입장에 대한 다른 입장의 논찬자의 반론을 한 곳에 모아놓고 있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은사 문제와 관련된 모든 입장을 한 번에 볼 수 있다. 그런데 각 논찬자의 주장은 서로 상이하기에 독자들은 도대체 어느 주장이 가장 성경적인지 혼란을 느낄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 처음 접해보거나 아직 생각을 깊이 해보지 않은 독자는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은사에 대해 다양한 입장이 존재하는 것은 성경은 한 가지를 말하지만 사람마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자신은 어떠한 입장을 견지 할 것인지, 먼저 성경 말씀을 들여다 보아 성경에서는 뭐라 말하는지 정리를 한 후 이 책의 도움을 받아 다듬으면 자신의 입장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독자의 별도의 수고를 덜어주고 가이드라인이 되어주는, 참으로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과감히 말하는 동시에 은사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성경 내용 중에는 신학적으로 아직 의견을 모으지 못한 난제가 꽤 많이 존재한다. 특히 은사 문제는 다른 어느 문제 못지 않게 팽팽한 대립 구도가 형성 되어 있다. 오늘날 은사는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 존재하긴 하나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등 서로 다른 견해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 성경은 한 말을 하는데 왜 이리 다른 입장이 존재할까? 어느 입장이 성경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에 답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누구는 이에 대해 답답함과 조급함을 느낄 것이다. 혹시 그렇다면 웨인 그루뎀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내게 왜 똑같은 성경을 믿고 모두가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개인적인 사랑을 가진 이 네 사람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는지를 묻는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초대 교회가 서기 381년에 와서야 (콘스탄티노플에서) 겨우 최종적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확정하게 되었고 서기 451년에 이르러서야 (칼케돈에서) 한 인격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쟁을 마무리 지었다고 말한다. 그러니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 복잡한 질문들이 이틀 안에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18p)"
현재의 팽팽한 대립은 결코 소모적이고, 쓸모 없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더 나은 발전과 합의를 위한 귀중한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현재의 숙제는 이전의 다른 문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원래 한 가지 답만 있던 것 같이 자연스럽게 풀려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