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과 선교 - 모든 성도를 위한 부르심
손창남 지음 / 죠이선교회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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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단지 좋은 것을 맛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복음의 은혜와 그 감격이 복음을 전하는 힘을 제공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이 원동력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전도를 하는 이유는,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지상 대위임명령이기 때문이다.

 전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다. 마태복음 28장 19 ~ 20절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전도를 해야 한다. 그것은 잃은 양을 다시 하나님의 집에 들이기 위함이다. 전도는 택한 자를 구원 얻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회복을 위한 위대한 사명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의 은혜를 나누려는 선한 의도를 넘어, 사명 완수를 위해 전도에 힘써야 한다.

 그러한 전도는 각자의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게 가장 일반적이다. 이 방법은 물론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지만 가장 쉽고 편하게 할 수 있다. 내가 아는 사람, 나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일정한 부담과 어려움이 따르긴 하지만) 큰 장애가 없다. 하지만 선교, 해외로 나가서 하는 복음 전파는 큰 어려움이 따른다.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직업과 선교'


 본서는 선교의 방법 중 전문인 선교의 방법을 다루고 있다. 정확하게는 직업을 통한 선교에 대해 다루고 있다. 총 3부, 11장으로 구성된 본문에서 직업 선교의 필요성과 유형 및 그 준비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단지 성경 분석이나 머리에서 나온 이론이 아니라 저자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제적인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다. 여기서는 눈에 띄는 몇 장만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1부에서는 직업 선교의 필요성을 알린다. 직업 선교가 왜 필요한지, 초대 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선교의 역사를 1장에서 간략히 살펴본다. 그것을 통해 선교의 대상이 이제는 어느 한정된 지역이 아니라 전세계로 확장 되었음을 전한다. 그 말은 선교지에 복음을 들고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뜻한다. 다양한 문화와 언어로 인한 어려움은 물론이고, 특히 공식적으로 선교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에서의 선교의 어려움을 알린다. 그에 대한 보완책으로 직업을 통한 선교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2장에서는 사도행전을 통해 선교의 두 가지 모델을 제시한다. 하나는 '바울과 바나바 팀의 선교'이고, 다른 하나는 저자가 '풀뿌리 선교'라 칭하는 선교이다. 전자는 사도들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만 한정된 지역에 국한 되어 있음을 분석한다. 반면 후자는 사도가 아닌 모든 성도들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모든 지역에 걸려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풀뿌리 선교'는 디아스포라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흩어진 사람들이 타지역, 타문화에 살며 자연스럽게 했던 선교이다. 이 모델에서 저자는 직업을 통한 선교의 방법을 발견한다.

 2부에서는 저자가 구분한, 직업과 관련된 선교의 유형을 살펴본다. 저자는 선교와 관련하여 다섯 가지 유형을 제시한다. 그것은 '선교사(1타입)', '직업을 가진 선교사(2타입)', '선교사가 된 직업인(3타입)', '해외에 있는 직업인(4타입)', '국내에 있는 직업인(5타입)'이다. 여기서 1에서 3타입은 선교사, 그리고 4와 5 타입은 직업인으로 구분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 유형 중 1타입인 선교사를 제외한 네 가지 타입을 각각 살펴본다.

 마지막 3부에서는 직업 선교를 준비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여기서 저자는 일(work)과 증거(witness)의 네 가지 타입을 제시한다. WW1은 "일이 사역이다", WW2은 " 일은 사역을 위한 공간", WW3은 "일은 사역을 위한 토대", WW4은 일을 통해 선교사로 감"이라는, 직업과 사역의 네 가지 관계를 통해 직업 선교의 준비 방법을 알려준다. 각각의 유형의 특징을 제시하여 직업 선교에 대한 방법을 가르친다.

 본서는 직업 선교의 현실적인 방법을 제공한다. 직업을 통한 선교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준다. 막연한 이론으로 막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분석과 대안을 제시함으로 준비에 큰 힘을 안겨 준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부분에서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자신의 기능과 직업을 어떻게 선교지에 가져가서 사용할지와 어느 선교단체나 교회의 도움을 받을지 등은 각자의 과제로 남는다. 이 부분은 경우의 수가 다양하여 저자가 해결해 줄 수 없는 부분이기에 각자 해결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신 9장, 10장에서 보여주는 직업 선교사로서의 저자의 여정을 통해 그 부분에 대한 접근 방법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선교에 전적으로 매진하는 전문 선교사가 아니라 직업을 통한 선교, 전문인 선교를 꿈꾸는 이들에게 이 책은 귀한 보물이 될 것이다.


 선교는 결코 쉽지가 않다. 내가 나고 자란 문화 및 환경과는 너무나 다른 타문화와 환경에 적응하는 것부터 어렵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곳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외톨이로 지내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게다가 전적으로 선교에 매진하는 경우 언어 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역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재정적인 문제는 큰 압박으로 작용한다. 물론 이 경우 대개 후원을 받지만 그에 대한 불안은 지속된다. 설령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문화에 적응하였다 하더라도 또 다른 장애물이 기다린다. 그것은 고국과 음식에 대한 결코 적응 할 수도, 제거 할 수도 없는 본능적인 향수이다. 이것은 누구도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다. 이것들만으로도 버거운데, 여기에 더해지는 어려움이 있다. 자녀 양육 문제이다. 타국에서의 생활로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자녀, 그리고 선교사 부모가 사역에 집중함으로 상대적으로 소외 되는 자녀드를 잘 양육한다는 것은 선교사에게 있어 아마 가장 해결하기 힘든 어려움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여러 어려움들을 이겨내야 하는 것이 선교이다.

 국내에서 하는 전도도 쉽지는 않다. 하지만 국외에서 하는 선교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사명을 위해 열길 마다 않고 선교를 하러 나가는 모든 이들은 참으로 위대한 제자들이다. 그 위대한 사명자들, 전적으로 선교에 매진하는 이들이든 아니면 직업을 통해 선교를 하는 이들이든 그 사명자들의 위대한 헌신과 수고에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로서 실제적 보탬이 되지는 못하지만 힘찬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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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연구 - 갈라디아서에 대한 성경신학적 해석 이신칭의 신학의 교회론적 이해
이재복 지음 / 칼빈아카데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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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는 기존 유대교의 관점에서는 무척이나 급진적이고 상당히 도발적인 주장이었다. 구원에 있어 율법의 준수, 인간의 행위를 중요시 했던 유대교의 관점에서 믿음과 복음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주장은 급진적이다 못해 폐기해야 할 거짓 주장이었다. 따라서 (열렬한 유대교 신자였,던 바울의 회심 전 관점에서 봤을 때) 그러한 주장을 하는 기독교인들은 질타의 대상을 넘어 몰아내야 할 악한 존재들로 여겨졌다. 유대교와 로마 카톨릭은 구원에 있어 인간의 행위를 강조한다. 하지만 구원에는 인간의 행위가 자리 할 곳이 전혀 없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구원을 뜻하는 '이신칭의'. 여기서 의롭게 된다는 말은 상태 자체가 의로워짐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법정적 용어로써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 하시는 것이다. 그 선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 값없이 거저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은혜가 얼마나 큰가! 이때 그 믿음 조차도 우리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감화를 통해 얻는 것이니 우리는 그 큰 은혜에 감사치 아니 할 수가 없다!

 

 '갈라디아서 연구'

 

 본서는 개신교의 핵심 교리인 '이신칭의'에 관한 연구를 담고 있다. 갈라디아서를 통해 '이신칭의'를 꽤 심도 있게 논의한다.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한다. 그 설명을 통해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이어 갈라디아서 본문 분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와 '이신칭의'의 관련성 등을 설명한다. 그리고 교회의 기반이 되는 '이신칭의', '이신칭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교회의 관련성을 논의 함으로 '신자의 삶의 원리를 밝힌다.

 본서에 특기 할 만한 점이 있다면, 먼저 갈라디아서의 저작 연대에 대한 저자의 확증을 들 수 있다. 갈라디아서의 저작 연대는 세 가지가 제시 되어 있다.

 

 ①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이 끝난 후 예루살렘 공의회가 있기 전에 기록

 ② 2차 전도 여행 중에 기록

 ③ 3차 전도 여행 중에 마게도냐에서 기록

 

되었다는 견해가 제시 되어 있는데 저자는 가장 처음, 예루살렘 공의회가 있기 전에 기록 되었다고 본다. 그 이유는 공의회 후에 기록 되었다면 '이신칭의' 사상은 바울 고유의 사상이 아니라, 사도들에게 전수 받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눈여겨 볼부분은 '이신칭의' 사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통상 '이신칭의'는 구원론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개인 구원의 서정의 단계로 이해된다. 이러한 이해는 교회의 존립보다는 개인 구원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하지만 바울은 '이신칭의'를 교회의 존립과 밀접하게 연관 시킨다. 본서가 기반으로 하고 있는 갈라디아서를 예로 들면, 당시 갈라디아 지역 교회에는 율법을 통한 구원을 주장하는 유대인 교사들의 잘못된 주장이 퍼져 있었다. 이에 바울은 교회를 보호하고 바로 세우기 위하여 '이신칭의' 사상을 주장하며 교회를 보호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신칭의'에 대한 오늘날의 구원론적 이해와 적용은 물론 바른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러한 일방의 이해와 적용은 바울이 원래 의도하였던, 바른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워나가려는 그 원칙과 적용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신칭의'를 단지 개인의 구원과만 연결시키는 좁은 이해와 적용을 넘어 바른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교회를 세워 나가는 좀더 넓은 이해와 적용으로 가져 갈 필요가 있다.

 본서를 통해 독자는 '이신칭의'에 대한 분명하고 바른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신칭의'를 개인 구원과만 연결시키는 좁은 적용이 아니라 교회의 근간이 되는 그 사상의 배경을 선명히 알게 됨으로 그 사상을 통해 교회를 세워나가는 좀더 넓은 적용에로 나아가는 계기를 얻게 될 것이다.

 

 구원이 만약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은 전연 쓸모가 없는 헛된 희생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구원이 만약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비웃음을 샀을 것이다.

 구원은 결코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희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귀한 희생인 것이다. 원은 결코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기에,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그 은혜는 한량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상을 단 한 마디로 표현하는 '이신칭의'라는 그 사상. 신자와 교회의 구원과 존립의 기초가 되는 그 사상을 우리는 고이 간직하고 전하며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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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첫째 아담에서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까지 - 창세기 1~3장으로 보는 성경의 맥 구속사적 성경의 맥잡기 시리즈 3
존 페스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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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1~3장은 많은 의문과 논란을 일으키는 부분이다. 신학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많은 논쟁과 의문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신학적으로는 창조의 날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6일을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24시간 씩 여섯 날을 말하는 것인지 하니면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리고 인간의 창조 기사가 두 번에 나뉘어 소개된 것을 두고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과학의 렌즈는 진화론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창조를 거부한다.

 창세기, 특히 창세기 1~3장은 성경 66권을 여는 부분으로써 그 부분은 기독교의 기초를 이룬다. 창세기 1~3장은 창조와 타락을 보여줌으로 이후에 이어지는 구원과 새 창조를 암시하며 그 당위성을 제시한다. 창세기 1~3장은 구속사의 맥을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부분을 잘못 이해하면 기독교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부실해지고, 나아가 그러한 믿음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부분을 올바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명확하게 이해 할 필요하다.


 '태초의 첫째 아담에서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까지'


 본서는 창세기 1~3장을 렌즈의 배율을 높아 들여다 본다. 총 7장의 본문을 통해 창세기 1~3장을 세밀하게 살펴본다. 구속사의 시작을 이루고, 끝을 암시하는 그 부분을 기독론과 종말론적 관점에서 보고, 설명한다.

 기독론과 종말론이라는 해석 방법론을 제시하며 시작되는 본서는, 1장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그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그리고 하나님의 형사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과 이해를 제시한다. 2장에서는 에덴 동산의 목적과 특징 그리고 그 안에서의 인간의 책임을 설명한다. 저자는 에덴 동산의 일체적 목적이 농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전의 지위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그곳에서의 아담의 원형은 농부가 아니라 제사장이라 말한다. 3장에서는 행위 언약에 대해 살펴본다. 아담의 언약적 의무와 그 실패를 보여준다. 4장에서는 노아, 아브라함, 모세의 언약을 통해 그 언약들은 아담으로 인해 깨어진 행위 언약의 회복이 아니라 "약속된 복음이 완성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언약들의 궁극적 목적은 "둘째 아담에 대한 그림자와 모형으로 작용"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5장에서는 첫째 아담과 둘쨰 아담 사이의 공통점을 들여다 본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죽음과 부활 안에 있는 창조론적 요소", "창조론과 교회론 사이의 관계", "통치 명령과 둘째 아담이 완수한 사역과의 연결성으로 표현되는 창조론과 종말론 사이의 관계"이다. 6장에서는 안식일의 성격, 즉 안식일이 어떻게 언약의 종말론적 표지의 역할을 하는지와 미래에 성취될 새 창조의 완성으 가리키는지 그 원리를 설명한다.

 본서는 인간과 세상의 기원에 대한 기존의 접근과는 다른 방향에서 창세기 1~3장에 접근한다. 창세기 1~3장이라는 제한된 부분을 창조론, 구원론, 기독론, 교회론, 종말론이라는 조직신학의 주제들과 연관을 시키며 세밀하게 관찰한다. 이러한 접근과 관찰은 구속사 저체를 가로지르는 창세기 1~3장에 대한 명확하고 바른 이해를 돕는다. 따라서 구속사의 기초를 마련하여 주는 본서는 목회자, 신학생 뿐만 아니라 성도들도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성경의 첫 단추인 창세기, 특히 그 1~3장을 잘못 이해하면 기독교에 대한 모든 이해가 삐뚫어지게 된다. 창세기 1~3장은 성경의 전체의 시작인 동시에 그 모든 내용의 이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1~3장은 단지 인간과 세상의 기원만을 설명하는 부분이 아니다. 그 부분은 구속사 전체를 가로지른다. 창조와 타락을 증거함으로 구원과 새 창조의 당위성을 제공한다. 창조를 말하는 동시에 종말을 암시한다. 따라서 창세기 1~3장을 기존의 이해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좀더 세밀하게 관찰하면 성경 전체에 대한 이해가 더 넓어지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그 큰 은혜를 온전히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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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jo 2013-02-25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더확실하게,,,이해가 됩니다,,,좋은글 감사합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 존 오웬 전집 4
존 오웬 지음, 이한상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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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대하여 참으로 악한 죄인이다. 단 한 사람도 없이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으로 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그 죄를 이어 받게 되었다. 물론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첫 사람의 타락으로 인간은 죄의 유혹과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죄를 짓지는 않을까 알게 모르게 날마다 긴장하며 살아간다. 때로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죄를 지는다. 또 때로는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결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죄에서 자유케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시뫄 부활로 우리는 죄로부터 승리를 얻게 되었다. 날마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우리는 죄와의 지독한 악연을 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죽기 전까지 죄를 완전히 짓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

 

 본서는 청교도의 황태자라 불리는 존 오웬의 죄에 관한 강론이다. 본서를 통해 오웬이 보여주는 죄에 관한 탁월한 고찰은 우리가 죄를 억제하는데 귀한 가르침을 준다. 우리가 은혜의 지배로 나아가는데 큰 도움을 제공한다.

 오웬은 죄의 목표와 본질을 알려줌으로 그 무서움과 사독함을 보여준다. 죄는 우리를 지배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죄는 신자를 지배하여 그 영혼과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죄는 그 지배력을 발휘하기 위해 인간의 순종을 요구한다(56p)." "죄는 지배력을 발휘하기 위해 신자가 은혜의 지배를 받지 못하게 한다(57p)." 그리하여 신자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악을 행사하도록 만든다. 즉 죄의 지배는 인간의 파멸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죄의 지배는 '사악'한 것이다.

 오웬은 이처럼 악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분별력을 알려준다. 어느 것이 죄의 지배에 대한 증거가 아니고, 또 어느 것이 죄의 지배를 나타내는 것인지 가르친다. 각각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죄 죽임을 실천한다면 정서 내에 존재하는 죄가 반드시 죄의 지배에 대한 증거는 아니다(88p)." 라고 말한다. 그리고 "죄 죽임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죄의 지배를 나타내는 위험한 징후(89p)"라고 말한다.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어 죄 죽임을 실천할 것을 촉구한다.

 이제 오웬은 죄의 지배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제시한다. "죄가 그의 의지를 장악하고 있다면, ... 자기의 죄를 떳떳이 선언하며 결코 감추지 않을 때, 그리고 그것을 많은 사람 앞에서 자랑할 때, 술 취함이나 부정함이나 욕설 등과 같이 명백히 알려진 자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 인정은 하지만 결코 새로이 회해하지 않을 때 (등등) 우리는 죄가 어떤 사람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라고 말한다.

 본 강론의 마지막은, 죄가 신자들을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이 확신의 근거는 신자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128p)."는 사실에 있는데, 그 정당성을 보이기 위해 크게 네 가지 예를 든다. '은혜는 죄를 이길 힘을 준다.', '은혜의 복음은 자유를 준다,', '은혜는 신자를 효과적으로 인도하며 위로한다.', '은혜의 복음 안에는 죄를 멸하시는 그리스도가 있다,' 이상의 네 가지 근거를 제시하며 우리는 은혜의 지배에 대한 확신을 가질 것을 종용한다.

 본서를 통해 독자는 자신을 지배하려는 죄를 분명히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 죄의 지배의 악함을 알아 그것을 경계하게 될 것이다. 죄를 죽이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시작하고, 은혜의 지배를 확신하며 그것에로 나아가기 위한 걸음을 띄게 될 것이다. 혹 죄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죄 경계하지 않으며, 죄 죽임을 하지 않으면 자신에 대한 죄의 지배가 시작되지 않았나 의심해야 할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은혜를 신자를 죄로부터 승리를 얻게 되었다. 그렇다고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것은 아니다. 죄는 신자를 지배하여 악행을 저지도록 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 따라서 신자는 그 안에 내재하는 죄를 인식하고 경계해야 한다. 날마다 죄를 죽이기 위한 노력을 하여, 죄가 아니라 은혜의 지배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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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 어떤 관계인가 비교신학 시리즈 11
스튜어트 괴츠 외 3인 지음, 윤석인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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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의 입장에서 인간의 구성에 대한 입장은 두 가지로 나뉜다. 그것은 이분설 혹은 삼분설이다. 전자는 인간의 본질적 구성 요소를 육체와 영으로 본다. 그리고 후자는 영과 육과 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기독교 외에 여기에 몇 가지를 더한다면 일원론과 이원론을 들 수 있다. 일원론은 인간을 지나치게 단순화 한 것으로, 인간을 하나의 단일체로 보는 것이다. 이원론은 이분설과 같이 인간을 영과 육으로 구분을 하지만 다른 면이 있다. 그렇다면 각각은 어떤지 먼저 이분설과 삼분설을 살펴 보고, 나머지 두 가지는 본 글의 말미에서 살피기로 한다.

 이분설의 입장에서는 인간을 물질과 비물질, 육체와 영으로 구성 되어 있는 존재로 본다. 따라서 삼분설이 지지하는 영과 혼의 구분은 무의미한 것이고, 영과 혼은 존재론적으로 같은 것으로 여긴다. 인간을 전인적 존재로 본다. 정통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이분설을 지지한다. 이 입장은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의 삶 및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있을 부활과 그 뒤에 이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할 인간의 체재((滯在))에 가장 잘 부합하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삼분설은 인간을 영, 육, 혼으로 구성 되어 있는 존재로 본다. 여기서 영과 혼은 각각 독립된 실체로 생각한다. 이들의 해석은 독특한데 육은 세상의 의식을 전달하고, 영은 신 의식을, 그리고 혼은 자아 의식을 전달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삼분설은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반영 되어 있는 존재라고 여긴다. 인간의 구성을 지나치게 세분화 하는 삼분설은 인간을 분열적 존재로 만든다. 영과 혼의 구분은 감정과 의지의 충돌을 가져온다. 한쪽이 강조 될 경우 자칫 감정주의 혹은 경건주의로 치달을 수가 있다.

 인간 구성에 대한 입장은 이상에서 본 것처럼 다양한데, (이상은 신학적 입장에서의 견해이고) 기독교 철학에서는 인간의 구성을 이상과는 다르게 바라본다. 그렇다면 기독교 철학은 인간의 구성을 어떻게 보는지 살펴보자.

 

 '몸과 마음 어떤 관계인가'

 

 본서는 신학적 입장보다는 기독교 철학과 과학적 입장에서 인간의 구성을 각각 주장한다. 어서너스 대학의 스튜어트 괴츠는 '실체 이원론'의 입장에 서 있다. 그는 영혼은 실체라고 말한다. 이 정의와 함께 스스로를 영혼이라고 믿는 신념은 근본적이라는고 말한다. 이러한 논지에서 나아가 데카르트의 이원론 등을 빌려 실체 이원론을 주장한다. 헌팅턴 대학의 윌리엄 해스커는 '발생적 이원론'을 주장한다. 그는 "일정한 종류의 성분들이 제대로 조합될 때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무언가가 생성(128p)" 된다는 뜻의 발생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 개념에 따라 그가 말하는 '발생적 이원론'은 "뇌와 신경계의 일정 구성과 기능의 결과로서 새로운 실체, ... 정신이나 영혼이 생겨난다(132p)."는 주장이다. 풀러신학대학의 낸시 머피는 인간을 물리적 존재로 보는 '비환원적 물리주의'를 주장한다. 그는 영혼을 배제하고 유기체의 적응성, 생물학적 결정 능력 등을 공식화 하며 물리주의를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칼빈대의 케빈 코코런은 기독교 신앙의 신념과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이으며 '인격에 대한 구성주의'를 주장한다. 그는 "내가 스스로를 물질적인 영혼이나 영혼과 몸의 혼합물과 동일시하지 않으면서도 스슷로를 생물학적인 몸인 물리적 대상과 똑같은 것으로 믿지 않는다(265p)."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격과 물리적 실체의 수적 동일성에 관해 설명한다.

 몸과 영혼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사색과 이해를 위해 이 책을 짚어든 독자라면 실망 할 것이다. 본서의 내용은 다분히 철학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네 논찬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기독교적 이해와 연결시키려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과 설명은 신학적 분석과는 명백히 다르다. 네 명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철학적 혹은 과학적 논증을 내세운다. 성경 해석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연역 및 추론은 전혀 없다. 따라서 그것을 기대한 독자라면 본서에 대해 크게 실망 할 것이다.

 설령 그렇다 하여도 본서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얻을 것이 전연 없지는 않다. 본서의 내용은 솔직히 말해서 어렵다. 그렇지만 본서를 꼼꼼하게 읽는다면, 인간의 물질적 실체인 몸과 비물질적 실체 인격 및 자아 의식 등의 구성과 상호 연관성 등에 대해 숙고 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성경에는 언급 되지 않았고,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지 않는 영역에까지 도약을 해보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 본 글을 마무리 하기 전앞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나머지 두 주장을 간략히 살펴보자. 인간의 구성을 단순화시키는 일원론은 인간을 그저 다른 피조물과 같은 동물로 만든다. 이 견해는 정신은 물질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이 견해가 연장 되면 인간의 자아 의식과 의사 결정 등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단지 본능 혹은 자연적으로 프로그램화된 것의 결과가 된다. 따라서 이 입장에 따른다면 인간의 성스러움은 그 가치를 잃게 된다. 인간의 도덕과 사회 질서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다른 주장인 이원론은 언뜻 보면 이분설과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이분설과는 분명히 다르다. 이원론은 세계 전체가 서로 독립된 두 개의 근본 원리로 나누어져 있다고 여긴다. 예를 들면 빛과 어둠, 선과 악 등 세계는 대립되는 두 개의 실재로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한 구분 안에 따라 인간도 영과 육으로 나뉜다고 본다. 여기서 이분설과의 차이점이라면 이원론은 영과 육 또한 대립 되는 실체로 보아 육은 이 세상에 속해 있기에 악한 것으로, 육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에 선한 것으로 여긴다. 이것은 인간을 전인적 존재로 보는 이분설과 명백히 다르며 주로 이단 및 이교에서 나타나는 주장이다.

 이상에서 인간의 구성에 관한 견해로 이분설과 삼분설, 그리고 일원론과 이원론을 살펴 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네 개의 견해가 동시에 대립하지는 않는다. 주로 이분설과 삼분설이, 그리고 일원론과 이원론이 서로 대립한다. 어쨌든 인간의 구성은 신학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살펴볼 수가 있다. 각각의 설명은 인간의 근원고 그 실체 및 실재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다.

 서로의 대립각이 분명하기에 모두가 하나로 환원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 존재에 대해 누구든 어느 하나를 선택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하여도,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견지하는 가운데 다른 주장을 인정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다른 주장을 잘 살펴보면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있다. 그것은 다른 주장을 통해서 내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을 맛보리라는 것이다. 나아가 인간에 대한 경이로움을 통해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높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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