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때 보통은 공항에서 원서를 사서 읽는데 작년에 이어 올해도 국제공항은 이용하지 못 해서 원서는 사고 싶었지만 못 사고 이번 휴가에는 그냥 밀리의 서재만 믿고 책을 가져가지 않았다. 전자책 초창기부터 읽어왔지만 전자책은 오래 읽기에는 눈에 부담이 많이 가고 쉽게 피곤해져서 많이 읽지는 못하겠다 싶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책을 들고 다니는 짓이 바보같이 느껴져 달랑 아이폰만 들고 휴가지로 고고..
에어비앤비 숙소에는 다양한 일본 소설이 비치되어 있었는데 호스트는 일본 소설 특히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었는지 비치된 작품 대부분이 그의 작품이었다. 비치된 이삼십여권의 책들 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 하나, 에쿠니 가오리 작품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일색이었다.
그 중에 골라 읽은 책은 바로 '용의자 X의 헌신'.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은 두세권 읽은 것이 전부이지만 그의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대표작만 읽고는 그만 됐다는 심정이 되었었다. '용의자 X의 헌신'도 이전에 시도했다가 그만둔 작품이었는데 이번에는 읽는 데 성공했다. 역시나 여성관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기서는 주인공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그나마 덜 거슬렸다. 반전이라는 것이 광고 문구대로 소름은 끼치지 않았지만 기막히게 일본스러워서 좀 끔찍했다. 엽기적 발상의 끝판왕은 역시 일본이 아닐까 싶었다.
연이어 읽은 책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
하루키에 열광하던 시기가 나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과 함께 시들해졌었다. 1Q84이후였던가. 변치않는 하루키 작품의 어떤 패턴들이 읽혀 읽기를 그만두었었다. 왜 하루키는,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늙지 않고 늘 그대로일까 의문이었다. 좋든 나쁘든 작가들도, 작가들의 작품들도, 작품의 주인공들도 나이가 들게 마련이다. 나이가 듦에 따라 세계관도, 가치관도, 작품을 대하는 방식이나 태도도 바뀌게 마련인데 하루키는 그러한 변화가 초반부에 조금 일어나다가 말고 그 이후로는 시종일관 그대로인 것처럼 느껴졌다. 영미소설과 같은 느낌의 생활방식, 자폐적인 생활을 하는 주인공, 노골적인 성애묘사 등은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도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작품의 질은 보장하는(문학계 백전노장 하루키에게 꽤나 인색한 평가로군!) 하루키의 작품은 휴가지에서 읽기에 제격이다. 조금씩 펼쳐보이는 이상한 사건의 소용돌이는 그 패턴이 충분히 예상되면서도 궁금해지는 것이 하루키 소설의 마력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으며 읽어나갔다. 1권은 재미있게 읽었는데 2권 중반부에 좀 늘어지고 마지막은 충분히 예상했던 결말들이 나왔다. 1200페이지의 작품을 이렇게 밀고 나갈 수 있는 것도 하루키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싶기도 하고. 다 읽고 드는 생각은 역시 하루키는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할 것 같다는 것. 그 특유의 반복되는 노골적인 성애 묘사는 소위 순수문학을 높이 평가하는 문학전공자들에게는 아무리 후하게 점수를 매긴다고 해도 하루키의 작품을 중하류로 폄하하기에 손쉬운 소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걸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데 이 작품에서 그런 특성이 더 두드러진 것 같았다. 노년에도 시종일관 이런 작품을 써낸다는 것이 대단하다 싶었고 '상실의 시대' 등등의 작품이 인기였던 것은 포르노와 같은 작품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도 더위를 피하는 물놀이와 먹고 마시기 말고는 딱히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생기지 않는 휴가지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에는 제격인 작품들을 읽었다는 느낌이다. 에어비앤비 주인장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덕분에 정말 휴가를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딘가를 직접 가서 유흥을 즐기는 데는 체력이 많이 필요한데 아무래도 최고의 피서는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도톰한 이불을 덮고 책을 읽다가 자다가, 깨면 또 책을 읽는 그 시간들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