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를 다 읽었다. 340쪽 정도의 분량인데 생각할 거리들이 많아서인지, 그 특유의 예민함과 우울함 때문인지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렇다고 재미없다는 건 아니고. 솔직히 말하면 번역본을 읽는 내내 캐럴라인 냅의 원문을 떠올리느라 그랬던 것 같다. 


번역자 김명남이 저자에 대한 사랑으로? 원작의 순서들을 바꾸었다고 한다. 역자 서문에 그런 사심들이 오롯이 드러나는데 그래서인지 미국에서보다 냅의 다른 저서들(생전에 출간한 세 권과 나머지 유작 1권) 보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인기를 얻고 있는 듯하다. 그의 또 다른 유작 '욕구들'이 최근에 번역이 되었다. (다른 작품들도 꽤 오래 전에 번역이 되었던 듯하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냅의 대표작은 '드링킹'이 아닐까. '팩 오브 투' 하고. 미국에서는 이 두 작품이 훨씬 많이 읽히는 것 같다. 급한 마음에 '드링킹' 원서를 아마존에서 샘플을 받아보아 읽어보았다. 결국 사서 봐야지 하는 마음이 들 수 밖에 없었다. 멋진 문장들이었다. 


읽는 내내, 록산 게이를 떠올리며 비교하며 읽게 되었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 비슷하고 어떤 면에서 또 다른가. 예민한 그 감성들을 어쩔 줄 몰라 하며 한 사람은 거식증에 한 사람은 폭식증에 시달렸던 것이다. 


한 인간의 관점에서, 한 여성의 관점에서 캐럴라인 냅이 주목받는 이유는 참 많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것이겠지. 


그는 남자들이 생리를 하면 하루에 탬폰을 몇 개나 썼는지 으스댈 거라는 이야기에서부터, '입을 옷이 없어' Spontaneous Wardrobe Failure Syndrome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여자들이 '착한 건 그만'하고 여자 해병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고, 갓 태어난 조카들에게 정성을 쏟다가, 애완견에게 지나치게 몰입하다가, 부모의 죽음을 애도하다가, 자신을 학대하는 거식증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조정에 빠져 노젓기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하며, 여성들이 자신의 외모를 평가할 때 왜 그리 가혹한지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바비도 현실을 산다'고 하면서 나름의 논리를 펼치기도 하며 그녀는 종횡무진한다. 이 종횡무진이 그녀의 다른 저작들까지 포괄해서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것 같아 뭔가 그의 작품을 집대성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아무래도 유작으로 남아있는 글들을 모아 펴낸 책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가끔 잘 자란 중상류층 여성 지식인의 한계라고 여겨지는 면을 보여주기도 하지만('이탈리아인이 되고 싶어', '그냥 보통의 삶') 대부분은 깊이 있는 생각과 논리들이 녹아있어 지금의 관점으로 봤을 때도 손색이 없다. 여운이 오래 남는 책이다. 


이란성 쌍둥이었던 냅이 암으로 요절했는데 그의 쌍둥이 언니는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했다. 거식증과 알콜의존증과 다른 여러 중독들에서 헤어나오려는 노력으로 거의 일생을 다 보낸 듯한 냅이 왜 흡연 습관은 고치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책에서는 그의 쌍둥이 언니는 허브차를 마시는 의사라고 묘사되어 있던데 말이다. 매일 두 갑씩 피워댄 담배와 부모 모두 암으로 사망한 가족력이 더해져 이 아름다운 작가가 요절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프랑스와즈 사강의 그 유명한 말대로 '나는 나를 파괴할 자격이 있다'지만 이런 작가들은 좀 오래오래 살아주어야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유작을 읽을 때 자신이 오래 살 것으로 간주하며 써내려간 대목들이 나오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스탠포드 대학 연설에서 잡스가 몇 십년을 더 살 것처럼 연설하는 장면을 볼 때처럼 말이다. 


+ 번역은 매끄러운 편이었으나 너무 모든 것을 한국어로만 제시해서 독자들이 얼마나 세부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을지는 조금 의문이 들었다. 애드빌이 뭔지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을 듯 한데 모든 것이 한국어로만 표기되어 있었다. 심지어 이 책의 원제도 샅샅이 책을 뒤져봐야 한 군데밖에 나와있지 않았다는 점이 특이했다. 편안하게 읽히기를 원해서 그런 것 같긴 한데 과연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지는 따져봐야 할 것 같다. 원서로 다시 읽어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