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그, 교보문고에서 너덜너덜해졌던 백수린의 '여름의 빌라'를 읽었다. 단편집으로 8개의 작품이 실려있는데 그 중 '시간의 궤적(2019)', '고요한 사건(2017)'은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흑설탕 캔디'는 '나의 할머니에게'

에서 읽은 것이었다. 그렇게 따진다면 처음 보는 작품은 다섯 개 정도. 


이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시간의 궤적'이다. 이미 읽었지만 반가운 마음에 다시 읽었다. 다시 읽어도 어쩌면 이국생활을 그렇게 잘 묘사했는지, 정말 이렇게는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 국내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 특히 육아에 대한 이야기(아직 집에 가지 않을래요-알고보니 2020 현대문학상 수상작이었다.)는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잘 전달했다는 느낌이 든다. 아주 잘. 의도적으로 그렇게 느끼게끔 했을 수도 있지만 왠지 뼛속깊이 느껴본 것 같지는 않다. 그런 면에서 백수린 작가는 외국 배경 작품에 특화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 리옹 대학에서 박사를 받으려면 그곳에서 꽤 오래 체류해야 했을 테니  당연한 결과인 듯도 하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여성 캐릭터들이 다들 독특하다는 점이다. 어떤 나눔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느낌이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우리의 선입관과 편견을 비껴간다. 자식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엄마(폭설), 타향살이에서도 남몰래 백인할아버지와 연애를 하는 할머니(흑설탕 캔디) 범생이지만 소위 노는 애와도 학교 밖에서는 가끔 일탈을 하고(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달동네에 살지만 재개발을 노리고 몇 년을 임시로 사는, 그래서 소위 있어 보여서 동네 사람들은 예의 바른 거리를 두고 잘 사는 집 애들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성적 때문에 무시는 하지 못한다. (고요한 사건) 따지고 보면 우리 누구나가 다 이런 경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겠다. 


특히나 앞의 두 캐릭터가 좋다. 좀 더 이기적인, 늘 자신을 먼저 고려하는 그런 캐릭터가 마음에 든다. 자식 입장에서는 자식보다 나를 먼저 생각해 나를 버리고 미국으로 가버린 엄마는 평생 용서되지 않을 존재이겠지만 엄마입장에서는 또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딸은 받지 못한 사랑으로 인한 구멍을 평생 메우지 못하며 살 것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한 엄마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폭설)


'아주 잠깐 동안에'도 한밤에 무겁게 구형세탁기를 나르는 할아버지와 간신히 아파트 전세를 얻어 집들이를 하고 난 다음의 나가 등장한다. 피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를 도와 드리게 되지만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나는 가난과 부유함의 어느 경계에서 갈팡질팡하는 느낌이다. 겉으로는 평탄하게 아파트 전세에 안착해 아이들 낳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몰래 그 기억에서 잘 벗어나지 못한다는 면에서 그렇다. 백수린 작품 중에서 나름 특이하다면 특이한 작품인데 작가가 이와 같은 문제를 계속 해서 써 나간다면 어떤 모습일까, 작가는 어떤 식으로 성장하게 될까 궁금증이 인다. 


'여름의 빌라'(알고보니 2018 문지문학상 수상작이었다. 백수린 작가는 대세 중의 대세인데 나만 몰랐던 듯.)는 이 작품집의 제목이기도 한 작품인데, 여행과 유학시절(독일)의 인연으로 알고 지낸 한스와 베레나 부부가 시엠레아프에 '빌라'를 빌려 놓고 동남아를 여행하던 중 빈 방이 있다며 나와 지호 부부를 초대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고 있다. 주로 함께 여행하며 벌어지는 일들, 그것들에 대한 그들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딸을 사고로 (테러로 연상되는) 잃고 딸이 남긴 손녀를 키우면서도 그들은 일 때문에 딸이 손녀를 맡기고 갔다고 손녀에게도, 나와 지호에게도 말한다. 한스, 베레나 부부는 끝까지 그 사고에 대해서 함구한다. 나중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기억을 잃기 전에 쓰기 위해 보내진  베레나의 편지로 그 사고에 대해서 밝히게 되지만. 그것도 모르고 지호는 여행 중 한스에게 소위 백인 중산층의 안일한 세계관을 비난한다. 하지만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는 백인 중산층의 우월적 세계관에서는 많이 비껴나 있을 수 밖에 없는데,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 투성이인 우리들이라 이런 실수를 종종 범하고 서둘러 가치판단을 하게 마련이다. 좋은 것만 보여주고 좋은 모습만 보고 싶어하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많은 오해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끔 하는 작품이다. 수많은 몰이해와 오해 속에서도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가, 유지해야만 하는가 하는 회의도 들었고, 한 길 사람 속이라는 것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나같이 개성과 생각거리로 가득찬 작품이다. 멋진 소설집이라 그렇게 너덜너덜해졌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몰려온다. 


+ 하지만 코로나 시대에 야생동물을 대하는 태도에는 좀 의문이 들었다. 비둘기도 먹이를 주지 말라고 하던데. 그들은 그들 나름의 생활이 있고 인간과는 구분되어야 하는데 섞여서 살게 되다보니 코로나 바이러스도 생기게 된 것이라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박쥐에서 바이러스가 나왔다는 것이 정설인데 요즘은 어떻게 생각이 바뀌셨는지. 어떤 자세로 살고 계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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