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종일 교수와 김현진 사이에 오갔던 편지를 책으로 엮어내었다.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거기에 나이 차이도 엄청나게 나는 두 사람이 편지로 어떠한 대화를 펼쳐나갈지 궁금했다.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100이 있다고 하면 보통은 80 정도를 표현하는데 김현진은 120을 표현한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의 당돌함, 날카로움, 좀 너무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그 느낌이 항상 그를 지지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 이런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다소 모가 난 사람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야 마는 김현진의 독설을 노교수가 어떻게 풀어나갈까 궁금했다. 초반부에는 서로 예의를 지키며 조금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대화를 주고 받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그들의 서간 토론이 정말 볼만 했다. 극과 극의 사람이 만나 이렇게 논리적으로, 이렇게 우아하게, 이렇게 감정을 다치지 않고 토론을 이끌어나가는 경우가 우리에게 있었던가. 토론 문화가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는 우리 나라에서 이런 대화가 있었고, 이런 책이 출간되었었다는 사실에 새삼 기뻤다. 


보편적 30대 여성의 목소리를 낸다고 여겨지는 김현진은 소위 헬조선의 논리를 펼친다.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는(만 유독) 이렇잖아요. 이런 문제가 있잖아요. 하고 독설을 날린다. 그러면 역시나 연륜과 세계 각지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는 라교수답게 드넓은 시야로 그것이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그런 문제는 (아니면 또 다른 문제가) 어디에든 있다고 말한다. 나도 동감한다. 왜 한국을 벗어나 살아 보지 않은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이상향은 다른 곳에 있고 왜 한국에만 유독 문제가 가득하다고 여기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거칠게 예를 들어보자면 서울대생의 자살확률이 높은가? 서울대생이라면 선택받은 부류이고 요즘은 서울대생도 취업이 어렵다지만 아직은 여지가 있다. 누구나 안다. 서울대만 나오면 그 자부심으로 평생을 한국에서 잘 살 수 있다고. 그래서 너도나도 서울대에 들어가려 한다고. 하지만 미국의 소위 명문대라고 하는 곳에서의 학생 자살률은 끔찍할 정도로 높고 그 이유로 그 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 부모들도 의외로 많다. 자녀가 성적이 매우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십여년전 미국인 친구에게 한국사람들 중에 한국이 너무 경쟁적이라고 생각해서 미국을 이상적인 곳으로 생각하고 이주를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했더니 놀라워하면서 미국이 더 경쟁적이라고, 미국의 젊은이들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은 줄 아냐고 해서 말문이 막혔던 기억이 있다. 모두 자신들의 문제가 가장 큰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이기 때문에 내 우물만의 문제가 전부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우물에만 심각한 문제가 엄청나게 많다고 여기는 것이다. 소위 청년실업 문제는 이 시기를 살아가는 전 세계 젊은이들의 가장 큰 화두이자 어려움이다. 그런데 이 거친 논리에 라교수는 때로는 점잖게 때로는 다소 가혹하게 김현진의 비논리를 지적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일갈한다. 의외의 면이었다. 보통은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주장을 펼치지는 못하는데 그 점에 있어서 두 저자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 하며 서로 봐주는 것 없이 정면승부를 펼치는 느낌이었다. 


'누구 좋으라고 애를 낳아?'' 하는 김현진에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험은 자녀 넷을 낳아 키운 경험이라고 주저없이 말하는 라교수. '고래는 자기 아픔만 생각하고 상처와 싸우려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밧줄을 쥐고 고래가 지쳐 죽기만 기다리면 되었다'는 '모비딕'의 내용을 예로 들면서 서른이 넘도록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를 줄곧 넋두리하는 현진에게 라교수는 '영리하다는 사람들도 자기 상처만을 끌어안고 그 상처와의 싸움에 빠져 결국 인생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특히 지적이고 예민한 그리고 자기에게 집착이 강한 사람들이 그런 경향이 있다면서' 말이다. 다소 가혹하게 느껴질 수 있는 지적이지만 읽는 이로서는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다. 모두들 성장과정에 나름의 어려움을 겪었을 텐데 자신만이 어려움을 겪었다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그것이 잘 안 되었다는 그의 논리는 읽는 나도 좀 과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어려운 것인데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못 한다고 하다니. 도대체 그 평범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싶었다. 역시 주저함이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 말해버리면 어떻게 뒷수습을 하지 하는 주저없이 돌파하는 것이다. 역시 김현진 스타일. 


한화그룹인가? 김승연 회장의 딸이 되어 자신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에게 모조리 되갚아 주고 싶다는 현진에게 라교수는 '어떤 경우이건 사람과 사귀다 상처를 입었다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도록 허용한 본인의 잘못부터 생각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답한다. 보통은 김현진의 독설과 궤변에 대화 자체를 포기하고 싶을 텐데 라교수는 이성을 잃지 않고 이렇게 지적해 주는 것이다. 실로 대단한 지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한판 정면승부가 아름다웠다. 간만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책을 읽는 경험을 했다. 


+ '~한 채로'와 '잘난체하다' 는 분명 다른데 이 '채'와 '체가 그냥 이 책에서는 몽땅 '채'로 되어 있었다. 왜 이런 일이 거의 모든 책에서 발견되는 것일까. 아무래도 자동수정기능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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