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다의 '걸어본다'시리즈. 요즘 시리즈에 정신이 팔려있는 내게 다가온 시리즈.

 

시인들은(모든 문학가들은) 엄살쟁이라지만 내가 이들의 엄살을 견뎌내고 눈물없이 이 글들을 다 읽어낼 수 있을까 의문이다.

 

특히나 이 책 '너 없이 걸었다'니. 왜 하필 '너'는 없는가. 너와 함께 걸을 수는 없는 것인가. 적어도 '나'는 '너'와 '함께' 걷고 싶다.

 

'이 도시에서 나는 혼자 걸어다니는 이방인이었다. 오랫동안 몸 없는 유령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자아없는 겉옷의 삶 같은 이방인의 생활, 내 도시들은 비행기 거리로 열 시간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낯섬을 견뎌내는 길은 걷는 것 말고는 없었다. 걷다가 걷다가 마침내 익숙해질 때까지 살아낼 수밖에는 아무 도리가 없었다.'

 

이 문장들을 읽고 무장해제되었다. 그리고 스치는 생각. 유럽은, 독일은 걸을 수나 있지. 미국은 걸을 만한 데도 없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뼈 속으로 사무치는 그 절대 고독을 너무나 이해했기에 무장해제.

 

이국에서의 생활은 공기 자체에 이미 스트레스가 있다고 한다. 물론 그냥 몇 년은 여행자처럼 살 수 있다. 객창감도 멋지고 뭐든 새롭고 예쁘다. 갈 곳도 많고. 지겨운 일상과 복잡한 인간 관계에서 벗어나 참으로 홀가분하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하지만 그 햇수가 늘어날 수록 여기가 어디인가, 나는 어디인가, 나는 대체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내가 여기 있는 것이 맞는가, 내가 속한 곳은 어디인가, 나는 내가 머무르는 이곳에도 내가 떠나온 곳에도 속하지 못 하는 인간이 아닌가, 내가 머물 곳은 과연 어디인가 하는 생각이 마구 든다. 익숙해져도 뭔가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 남고. 그놈의 문화 차이는 햇수에 상관없이 불쑥불쑥 나타난다. 어딘가 아파서 병원에 가면 온찜질이 아니라 냉찜질을 해대는 그 문화 차이.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다. 온찜질보다 냉찜질이 더 익숙해지는 날이 오면 그제서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을 찾은 것일까. 그런데 온찜질보다 냉찜질이 더 낫다고 느끼는 그 날이 올까. 올 수도 있는 것일까. 영영 안 오는 것은 아닐까. 수구초심이라는데. 여우도 죽을 때조차 떠나온 고향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데.

 

더군다나 허수경 시인이 고인이 된 이유를 만 40세가 넘으면 국가에서 암검진을 강요하는 효율적인 의료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지 않은 '이국'에서의 '오랜 객지 생활'에서 찾는 나로서는 그가 이렇게 말하는 데 눈물짓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 걸어다니는 이방인', '몸 없는 유령', '자아없는 겉옷의 삶.' 무시무시하다. 이것을, 이 감정을 우리는 뛰어넘어야 하는가, 받아들여야 하는가, 적응해야 하는가, 무시해야 하는가, 즐겨야 하는가, 함께 해야하는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의문을 갖고 이 책을 읽어 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심히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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