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신은
한스 라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리고 신은 얘기나 하자고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래 어느 날 갑자기 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신'이 나타났다.

모든 사건은 순식간에, 그리고 정신 없이 나타났다.

이혼한 아내의 현 남자에게 코를 맞아 코뼈가 부러져 간 병원에서 만난 한 광대가 돈을 내밀며 심리 상담사인 야콥에게 상담을 요청한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누가 나에게 와서 "내가 신이오!"라고 말하면 어떻게 반응할 지 생각해 봤다. 음, 그가 심리 상담가라서 일까 아니면 내가 일반 사람이라서 일까? 나는 야콥과는 좀 달리 반응했을 것 같다.

 

"이제는 신도 세상의 모든 걸 유머러스하게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다른 할 일이 없소." 그의 미소가 서서히 우수 어린 표정으로 변해 간다. 그는 묵묵히 바닥을 내려다본다. "이건 진실이오, 야코비 박사. 나는 정말 그렇단 말이오." 그가 몸을 내밀더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난 신이오. 우리끼리 얘기지만 난 많이 망가졌소. 당신이 날 도와주면 좋겠소. 야코비 박사."

 

"전지전능한 절대자?" 바우만이 이렇게 반복하고는 이 말을 음미한다. "안타깝지만 그건 오래전 이야기요. 나는 더이상 전지전능하지 않소. 지금도 그렇다면 내가 여기 이렇게 앉아 있겠소?"

 

"신이 노름꾼이라고요? 거참 흥미롭네요. 예전에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죠.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고."
"나도 알아요. 아인슈타인은 낄 데 안 낄 데를 모르고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인간이죠. 신은 주사위를 던질 뿐 아니라 룰렛도 아주 좋아해요. 블랙잭은 물론이고. 심지어 가끔 포커도 쳐요. 생각해 봐요. 도박꾼이 아니라면 어떻게 인간 같은 족속을 만들 생각을 했겠소?"

 

졸지에 자칭 '신'이며, 타칭 '사칭가'인 아벨의 심리 상담가가 된 야콥은 아벨에 대한 상담을 하기 위해 아벨과 함께 하는 여행을 떠난다. 아벨은 야콥을 천천히, 그리고 완전히 뒤흔든다.

아벨은 전지전능하지도 않고 완벽하지도 않고, 실수투성이며, 심지어 인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신'으로 나온다. '신'에 대한 많은 관념들이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유머있는 표현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신'이라 주장하는 아벨은 너무나 '인간적'으로 보인다.

 

"게다가 나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여러번 던졌어. 선은 뭐지? 악은 뭐지?" 아벨은 피곤하게 위스키를 홀짝거린다. "이 술도 어떤 상황에서는 약이 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사람을 개망난이로 만들기도 해. 돈도 그렇지 않아? 사람들은 돈으로 진짜 슬기로운 물건들을 많이 구입하지만, 돈은 지구상의 모든 나라를 혼란 속에 빠뜨릴 수도 있어. 아무리 아름답고 고결한 일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추악하고 비열한 것으로 바꿀 방법이 있다고." 아벨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그래. 내 상황이 그래. 나는 세계사를 인간과 함께 건너오면서 모든 걸 더 나은 쪽으로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결과는 어떻게 됐어? 헛수고였어.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어! 결국 나는 완전히 실패했어. 세계를 둘러봐! 어디에서건 굶주림과 전쟁, 자연 재앙, 탄압, 불의, 환경 파괴가 판을 치고 있잖아. 또 뭐가 있지?"
 나는 침대 위에서 피곤한 몸을 간신히 버틴다. "아벨, 이 세상이 꿀처럼 달콤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까지 설명해 줄 필요는 없어. 어쨌든 이 행성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럼에도 인생을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
 아벨이 나를 바라본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내가 이런 어리석은 망상을 버리면 아주 잘 살 수 있다는 뜻이군."
 "뭐.... 생각해 봐. 불행한 신으로 사는 것보다 행복한 서커스 광대로 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 않겠어?" 내가 약간 목소리를 높인다.
 "불행하더라도 난 신이야. 신으로 살 수밖에 없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나고?" 내가 되묻는다. "신도 돕지 못하는 일을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돕겠어?"
 아벨이 몸을 내민다. "야콥, 인간들 없이는 내가 뭐겠어? 인간이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냐. 나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을 때만 움직일 수 있어. 아무도 선에 관심이 없다면 나는 힘을 쓸 수 없다고. 그게 바로 내 문제야. 내가 지금 느끼는 이 무기력증은 믿음을 잃어 가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날수록 점점 커지고 있어. 이해하겠어? 나의 탈진은 곧 세상의 탈진이고, 나의 의욕상실은 곧 세상의 의욕 상실이야!"
 침묵. 나는 생각한다. 아벨이 아주 근사한 이론을 짜 맞추어냈어다고. "내가 자네를 위해 정확히 뭘 해줬으면 하고 바라는 거야?"
 "내가 뭔가 실수를 한 게 분명해. 인간들이 다시 나를 믿을 수 있도록 그 실수가 뭔지 찾아낼 수 있게 도와줘." 그가 절박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 전에 자네가 나를 먼저 믿어 줬으면 좋겠어. 내 심리 치료사조차 나를 미치광이로 여기는 마당에 내가 어떻게 인류에게 나를 믿으로라고 할 수 있겠어?"
 나는 아벨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그러나 입을 열지도 않는다. 내가 그의 망상을 진실로 받아들여야만 그를 치료할 수 있다는 논리는 정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영리한 노림수다.
 그가 웃는다. "잘 생각해 보게, 야콥. 나는 자네 생각을 읽을 수 있어."
 "잘됐군.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어쩜 이리 인간적인 질문인지. 나는 이 단락에서 너무나 인간적인 아벨의 모습과 작가의 고민을 볼 수 있었다. 저자의 신은 어떤 존재일까? 아벨만 보자면, 무기력하지만 인간을 위해 뭔가 해주고자 노력하는 모습일 것 같다. 더불어 유머있고, 도움을 청할 줄 아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싶다.

 

"겨우 20년 갖고 뭘 그래? 물고기 한 마리가 용기를 내어 뭍으로 올라오기까지도 수억 년이 걸렸어. 게다가 난 할 일도 무척 많았어."

 

"코미디" 아벨이 밝게 대답한다. "영화에서는 인생의 수수께끼가 다 해경 되잖아. 이거 누가 한 말인지 알아?"
"모르겠는데."
"그랜드 캐니언의 스티브 마틴이 한 말이야."
"그래서? 자네는 인생의 모든 수수께끼를 풀었나?"

 

아벨의 몸 안에 갇힌 '신'은 '아벨'이 되어버린 듯 했다. 세상에, 죽기가 두려운 '신'이라니... 정말 웃을 수밖에 없다. 작가의 상상력과 유머력에 읽으면서 계속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보면 유머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안에 고민과 생각이 있고, 철학이 있으며 성찰이 있었다. 둘 다 잡기가 쉽지 않은데... 아벨이 '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이 '멋진' 것은 사실이다.

 

나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늦은 오후다. 이젠 깨끗한 속옷도 가져왔고, 집에 가면 와인과 미식가의 식탁도 기다리고 있다. 게다가 함께 만찬을 즐길 사람도 있다. 그것도 자기가 신이라고 주장하는 남자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지만 아름다운 상상인 건 분명하다.

 

"아니, 그럼 그것 말고 믿을 게 뭐가 있소? 감정만큼 구체적이고 생생한 건 없소. 그래서 사람들이 지식이 아닌 사랑과 행복, 우정 같은 걸 동경하는 거 아니겠소?"

 

나는 방금 깨달은 게 있었다. 아벨 바우만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광대든 신이든 원칙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아벨이 내게 보여 준 것이 진짜 기적이든 눈속임 마술이든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아벨의 체험이 나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신이 있다고 해도 더 이상은 신에게 요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야콥은 아벨의 과거를 되짚으면서 그 자신에 대한 것들도 생각해 보게 된다. 삼촌에게 받은 거액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자신과 이혼한 아내, 매일 술을 드시던,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와 명예를 중시하고 가족이 함께 살던 집을 지키는 은행가가 된 동생을 예뻐하며 가난한 심리 상담가인 야콥에게 잔소리를 하는 어머니, 훌륭한 은행가로 성공한 듯 하지만 결국 범죄자가 되어 쫒기게 된 동생.

 흥미로웠던 건, '만약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이었다. 야콥은 아벨에게 그가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없었더라면... 세상이 어떻게 되었을지 보여달라고 했다. 내가 없었더라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더 좋아졌을까 더 나빠졌을까? 만약은 만약이기에 나는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이 장면에서 솔직히 스쿠르지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스쿠르지는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봤지만 야콥은 자신이 없는 현재를 봤다는 게 좀 다르달까?

 이 책이 흥미로운 또 하나의 이유는 신의 죽음을 다뤘다는 것이다. 신이 죽다니... 신이 과연 죽을 수 있을까? 죽는 존재를 전지전능하다고 말할 수있을까? 죽을 수 있는 존재가 신이라고 불리기에 합당한가? 죽음이 두렵다고 했던 아벨은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솔직히 너무나 갑작스런 전개였다. 그렇게 아벨은 나타난 듯 사라졌다.

 

나는 물 속으로 잠수하는 그의 뒷 모습을 보며 생각을 정리해 보려 한다. 그러나 정리가 쉽지 않다. 다만 침몰하는 호화 유람선 안에서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구하려고 목숨을 걸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면서 묘한 행복감을 느낀다.

 

"하늘이여, 저희를 도와주소서!" 라이터가 고개를 들고 외친다.
"당연히 도와주겠죠!"
나는 차가운 물 속으로 뛰어든다.


 

인용구 중에 "아벨 바우만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광대든 신이든 원칙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아벨이 내게 보여 준 것이 진짜 기적이든 눈속임 마술이든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아벨의 체험이 나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하는 문장이 참 맘에 든다. 광대든 신이든 원칙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 그가 신인지 미치광인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과연 야콥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다. 신의 윙크인 호화 크루져 여행에서 타이타닉처럼 극단적인 사고가 일어 난다.

 

과연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신은 불완전하다는 것일까? 아니면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진리일까?

나는 신은 물론 알 수 없고, 작가의 생각마저 알기 어렵지만,

한 가지는 안다.

이 책이 재밌다는 것 말이다.

 

나도 다시 차창으로 고개를 돌려 미친 듯이 휘날리는 눈송이를 지켜본다. 우리가 이렇게 대화하는 동안에도 수백 킬로미터씩 우주 공간을 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다. 우리 인간은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믿기에 그것을 믿는다는 것이 놀랍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허니문 인 파리
조조 모예스 지음, 이정임 옮김 / 살림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허니문 인 파리


허니문 인 파리는 ' 조조 모예스의 신작으로 책이 발간 되기 전부터 기대가 되었던 책이다. 과연 파리의 허니문은 어떤 모습일지, '그' 조조 모예스가 어떻게 그렸을지 말이다.


이 책에는 두 커플이 나온다 1912년도의 커플과 2002년도의 커플. 파리에서 허니문을 보내는 이 시대를 뛰어넘는 두 커플의 연결은 에두아르의 '화가 난 아내'라는 작품이다. 이 그림이 궁금해져 열심히 찾아봤지만, 찾지 못했다. 다만 에두아르 르페브르는 에두아르 마네를 차용한 인물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매장을 사진들이었다. 파리의, 그리고 연인들의, 부부의 사진들이 글의 한쪽 면을 차지 하고 있었다. 개중엔 여백에 책 안의 글을 적어 놓은 부분도 꽤 눈에 뛰어 좋았다. 책의 좋은 구절들을 써 놓아서 좋았다.

 


1912년의 커플의 상황과 2002년도의 커플의 상황은 꽤나 다르다. 12년의 커플은 가난한 화가남편과 점원이었던 아내가 있고, 2002년에는 신혼여행보단 사업가와의 미팅이 중요한 남편과 그런 남편에게 실망하고 애정을 갈구하는 아내가 있다. 


"당신이 내 그림을 그리고, 또 아무도 나를 당신처럼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당신 사람이었어요. 당신은 나의 가장 좋은 면만을 보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내가 아주 근사한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사랑스러운 내 아내. 당신은 이것만 기억하면 돼. 당신을 알고 나서야 나는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


2002년의 아내는 신혼여행지에서조차 혼자인 자신이 싫고, 1912년의 아내는 남편이 못난 자신을 내두고 매력적인 모델들과 전처럼 무분별한 생활을 할까봐 하는 걱정으로 화가 난다. 연도도, 처지도, 사람도 다른 두 커플은 시간이 지나도 우리의 관심은 여전히 사랑이며, 사랑은 언제나 쉽지 않지만 사랑만큼 쉬운 것도 없다는 걸 보여준다.


'어쨌든 이런 게 결혼생활이다. 양보와 타협의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적응하는 게 힘들어요. 내가 결혼생활에 잘 맞는다고 생각 했었어요. 지금은, 정말 모르겠어요. 그것에 도전할 만한 기질이 있는지 확신이 없어요."


양보와 타협의 기술이 필요한, 적응이 필요한 일... 나는 아직 결혼을 해 보지 않았고, 그러므로 신혼여행을 가본 적이 없으며, 심지어 파리도 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런 게 결혼이라면 신중히 고려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부인의 결혼생활에서 가장 큰 위험 요인은 부인 남편이 아니에요. 부인이, 그리고 부인 남편이 걱정해야 하는 것은 소위 이 의논 상대의 조언이에요."


친구라고 소개해 준 사람보다 나은 집시 여자의 말이다. 의논 상대를 잘 골라야 한다는 충고의 말. 전에 화가 남편이 모델로 삼았던 친구로 지내라는 여자가 심어놓은 의심의 씨앗이 둘 사이를 갈라 놓았듯, 똑같이 모델을 했던 집시 여인의 말은 밤거리를 떠돌았던 아내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 두 커플의 공통점은 앞서 말했듯이 '화가 난 아내'들이다. 어떤 그림인지 정말 궁금하다. 1912년에 그려진 그림이 2002년도의 한 커플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 스토리텔링이 잘 된 것 같다. 아쉽고도 좋은 점은 책이 짧아서 후루룩 봤다는 점 정도? 어떤 가슴을 울리는 글이 나올까 기대했는데, 이번엔 막 결혼한 신혼부부들과 그들의 불안과 그리고 희망을 그린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12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


이 글은 아르센 뤼팽은 스무살의 기록이고 동시에 첫 모험의 기록이며, 첫 사랑의 기록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뤼팽의 모험이 놀랍다거나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에 대한 감상이 아닌,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뤼팽은 '과거'가 있는 남자였다. '아르센 뤼팽'은 숨겨진 이름이었고, '라울 당드레지'로 살아가고 있었다.


"....라울 당드레지... 아르센 뤼팽... 한 조각상의 두 얼굴! 이 중 어떤 것이 살아 있는 자들의 태양으로, 영광으로 빛을 발할까?"


뤼팽, 아니 아직은 라울인 '그'는 나쁜 남자였다. 클라리스의 마음을 훔치고 나서 조세핀을 만나고 그를 책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라울 당드래지는(훗날 아르센 뤼팽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지겠지만 일단 이렇게 부르기로 하자) 이제껏 한 번도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사실, 기회가 없었다기보다 시간이 없었다. 야망에 불타기는 했으나 명예와 재산과 권력에 대한 꿈을 어느 분야에서 어떤 방법으로 이뤄야 할지 알지 못했던 라울은 언제든지 운명의 부름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도록 모든 방면에서 전력을 다했다. 지성, 재치, 의지력, 신체적 민첩함, 근력, 유연성, 끈기 등 갖고 있는 모든 재능을 최대한 계발했으며 노력하면 할수록 그 한계가 물러나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한 여자의 마음을 빼앗은 남자는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뺏기며 자신의 사랑을 열렬함을 고백한다. 처음 보는 아름다운 신비한 여인인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 아니 그 부인의 딸, 조제핀 발사모, 아니 조진. 그리고 남자는 이 사랑이 첫 사랑이며 영원할 것이라 말한다.

 

 

누구나 능력껏 살아가는 법이다. 상황에 따라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기적이란, 이해되지 않는 일을 일컫는 말이지. 예를 들어, 우리가 80킬로미터를 하루 만에 주파했다고 쳐.... 당신은 기적이라고 감탄하지.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 거리를 뛴 것이 두 마리 말이 아닌 네 마리 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야...."


여기서 양면적인 인물들이 몇 나온다. 라울과 뤼팽이란 두 이름을 가진 남자와 보마냥이라는 신부이지만 욕망 넘치는 남자, 그리고 여러 이름을 가진 성모와 같은 얼굴을 한 냉정한 여자 조진. 그녀에게 많은 이름이 있지만 난 조진이라는 이름이 제일 '그녀'스럽다고 생각한다.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보다 말이다.

책을 읽으며 처음엔 나쁜 남자 라울을 보았고, 그보다 지나서는 조진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얼굴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여자의 지적 매력에 말이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나쁜 남자 라울의 매력을 보았다.


마음 속 깊이 라울은 자문하고 있었다, 자신의 가장 냉혹한 적은 자기가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고 있으며 또한 자기를 열렬히 사랑하는 이 온화한 얼굴의 여인이 아닐까 하고.


이 여자는 적인가? 도둑? 어쩌면 살인범인가? 아니었다. 그저 여자, 무엇보다 여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대단한 여자란 말인가!


조진과 라울의 관계는 무어라 말하기 어렵다. 둘은 연인이며, 라이벌이며, 적이다.


실제로 아르센 뤼팽의 첫 모험이라기 보다는 뤼팽이 되기 전 '라울'의 첫 모험이랄까? 두 이름을 가진 자신만만하며 실제로도 능력있는 한 젊은이의 사랑에서 시작된 엄청난 모함이랄까? 이 글은 인간의 양면적인 모습이 잘 드러나 있는 것 같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웠던 것은 책의 말미에 있는 에필로그였다. 그 짧은 글은 다음 내용의 예고편이었으며, 뤼팽의 일생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 에필로그로 인해 나는 다음 권에서도 뤼팽을 만나게 되고, 다시 한 번 그의 매력에, 모험에 빠지고 말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11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르센 뤼팽 전집 11-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

 

난 추리 소설을 무척 좋아하는 편이다. 셜록 시리즈는 말할 것도 없고, 유명한 괴도 아르센 뤼팽은 과연 어떤 인물인지 어떤 모험을 할지 기대가 부풀었다. 나는 뤼팽이 괴도로 유명하기 때문에, 어릴 적 티비 애니메이션이 보여주는 괴도 처럼 이상한 가면을 쓰고 망토를 휘날리며 뭔가를 훔치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는 '레닌공작'의 모험담이다. 갑자기 왠 레닌 공작?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뤼팽과 레닌 공작이 동일 인물이라고 암시하는 글이 글의 시작 전에, 그리고 글 중간에 있다.

 이 글은 물건을 훔치는 괴도 뤼팽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가 반하게 된 한 여인의 심장을 훔치는 8번의 모험담이며 로맨스이다. 그리고 물건을 훔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이다. 


"……첫번째 연결고리를 찾았으면 좋든 싫든 마지막 연결 고리까지 찾아야 하겠지요. 이보다 재미있는 일도 없을 겁니다."


"우리가 볼 줄 알고 추구할 줄 안다면 삶이란 그런 것입니다. 모험은 곳곳에 있지요.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안에 있는 가장 현명한 사람의 가면 뒤에 말입니다. 우리가 원한다면 마음을 흔들어놓고 선행을 하고 희생자를 구하고 부당함을 제대로 잡아줄 기회가 있는 겁니다."


여기서 뤼팽은 뭔가 신비하고, 지혜롭고, 모험적일 뿐 아니라 매력적이다. 자신의 호기심 충족을 위해 또는 새로운 모험을 찾아 헤메는 것 같아 보이는 이 남자는, 동시에 동정을 느끼고 자비를 베풀고, 선행을 하는 여자를 흔들어 놓는 '매력적인' 남자다.

 이 이야기는 여 주인공 오르탕스의 이야기로 시작이 된다. 남편은 정신병원에 갇히고, 돈은 숙부에게 다 잡혀 있는, 아무것도 아닌 남자와 도망치려는 가련한 여자. 레닌 공작은 이 여자에게 반하게 되고, 이 여성을 구한 뒤, 모험을 제안한다. 여덟 번의 모험 뒤 12월 5일 고성의 낡은 시계에서 종소리가 울릴 때, 자유를 고를지 자신을 고를지 결정하라고 말이다.


"모험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저 모험을 즐기는 사람 중 하나이지요. 삶은 타인의 모험이든 자신의 모험이든, 모험하는 그 순간에 가치 있습니다. 오늘 했던 모험이 당신을 혼란스럽게 한 이유는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모험도 이 못지않게 흥미진진하답니다. 시험해보겠습니까?"


레닌의 장담만큼이나 그들의 모험은 사소하지만 흥미진진했다. 테레즈와 제르멘, 영화 속 단서 같은 모험도 흥미진진했지만, 가장 재밌었던 건 장 루이 사건이었다. 두 엄마를 가진, 그래서 어머니의 성이 두 개이고, 성 없이 이름만 둘인 장 루이의 이야기는 진정 흥미로웠다.

 뤼팽, 아니 레닌 공작이 사건을 풀어가는 그 과정도 참 흥미로운데, 이 책에서 그는 천성이 사기꾼인 사람 같다. 어쩌면 그렇게 사람을 잘 떠보고, 잘 속이는지! 그러나 한 편으로 그 일이 누군가를 돕기 위함인 게 그의 매력이며 이 책의 매력인 것 같다.


"가장 최고의 모험은 바로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을 때 일어나지요. 전문가가 아닌 한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기회란, 손이 닿을 만큼 가까이 있는데도 잡으려 노력하지 않을 때 갑자기 나타납니다. 기회는 왔을 때 즉시 잡아야 하지요.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때는 너무 늦습니다. 기회를 잡으려면 우리에겐 특별한 감각이 있어야 하는데, 마치 뒤섞인 냄새에서 좋은 냄새를 구별하는 사냥개의 후각과도 같은 감각이 필요하죠."


책을 읽으면서 모험이란 거창한 것이 아닌 우리의 일상 가운데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느꼈다. 나는 기회를 붙잡고 있으며 좋은 냄새를 구별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 책은 앞서 말했듯이 레닌 백작과 오르탕스의 로맨스이다. 레닌 공작은 언제나 자신만만하게, 그리고 자신을 매력적으로 모험을 통해 오르탕스에게 어필했다. 보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레닌의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하는 것이었다. 책의 초반에 그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나 나오긴 하지만, 나의 상상을 자극할만 했다. 또 작가의 표현 중, 추상적인 감각과 느낌으로 판단하는 것을 볼 때, 한 번 쯤 실패할 법도 한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우리는 여덟 개의 멋진 모험이라는 책을 끝내야 합니다. 그 책에는 에너지와 논리와 인내와 어떤 미묘함과 이따금 약간의 영웅주의까지 들어 있지요. 이제 마지막 장인 여덟 번째 모험입니다. 알랭그르 성의 괘종시계가 저녁 8시를 알라는 종을 치기 전에 12월 5일에 해당하는 페이지를 완성해야 하고, 그건 당신 행동에 달렸습니다.

 

싸움은 금방 끝날 것이지만 그 결과는 당신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 그리고 성공하리라는 확신에 달려 있습니다.


이 책의 처음과 끝은 오르탕스의 모험이다. 첫째 모험은 그녀를 그녀의 권리를 지닌 채, 성에서 탈출시키는 이야기였다면, 마지막 모험은 모험을 떠나기 전에 조건을 걸었던 행운의 단추를 찾는 내용이었다.


레닌 공작은, 어쩌면 뤼팽은 천부적인 사기꾼이며 도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이 글에서 본 그는 신사였고, 모험가였고, 사랑꾼이었다. 다음 권도 정말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앵무새 죽이기


하퍼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는 읽기 전부터, 워낙 유명해서 많이 들었던 책이다. 너무 유명해서 대략적인 주제도 알 정도였다. 그래서 보기 전부터 이 유명한 책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글을 시작하기 전, 옮긴이의 말이 있었는데 이 책의 제목중 일부인 '앵무새'는 우리가 아는 앵무새와는 좀 다른 종이라는 것이다. 왜 제목이 앵무새 죽이기일까 궁금했었는데, 의문이 좀 풀린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간단한  요령 한 가지만 배운다면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어."
아빠가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야."
"네?"
"말하자면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다니는 거지."

"너 타협이란게 무엇인지 알고 있지?"
아빠가 물으셨습니다.
"법을 융통성 있게 적용하는 것 말이에요?"
"아니, 서로 양보해 합의에 이르는 것 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지. 네가 학교에 가기로 양보한다면, 우리는 전처럼 늘 매일 밤마다 계속 글을 읽을 거야. 그러면 되는 거지?"


이 소설은 성장소설이다. 어린 여자 아이인 스카웃의 시점에서 모든 이야기가 전개 된다. 변호사인 아빠와 오빠인 젬, 방학마다 놀러오는 딜, 맛있는 요리를 해주는 켈퍼니아, 이웃의 무서운 이야기가 있는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인 부 래들리 아저씨, 옆집의 모디 아줌마, 고모, 학교, 친구들 등등.

평범하고 조용한 마을에서 일어나는 백인과 흑인,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등등의 차이가 아이의 눈을 통해 자극적이지 않게 필터링 되어서 전해 온다.

 

 

이 사진은 아마 이 책에서 무척 유명한 부분 중 하나일 것이다. 몸이 아닌 머리로 싸워라. 나는 이 쪽보다 이 다음 쪽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아빠, 우리가 이길까요?
"아니."
"그렇다면 왜-"
"수백년 동안 졌다고 해서 시작하기도 전에 이기려고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할 까닭은 없으니까."

"이번인 사정이 다르단다. 이번에는 우리가 북부 사람들과 싸우는 게 아니고 우리 친구들과 싸우는 거야. 하지만 이걸 꼭 기억하거라. 그 싸움이 아무리 치열하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우리 친구들이고 이곳은 여전히 우리 고향이라는 걸 말이야."


동양인으로서 흑인 열등이나 백인 우월에 대한 감각은 거의 없어서 엄청난 공감은 되지 않지만, 전에 보았던 노예 12년이나 버틀리 같은 영화들이 많이 생각 났다. 수백년 간 졌다고 해서 시작하기도 전에 이기려고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할 까닭은 없다는 그 말이 가슴에 와 박혔다. 이 말은 흑인들의 투쟁사를 한 마디로 정리한 것 같았다. 전에 버틀리라는 영화를 본 적 있는데, 백악관의 흑인 집사를 뜻하는 말이다. 많은 대통령을 모신 이 버틀리의 삶의 순간순간이 흑인의 투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백인을 모시는 일을 하던 버틀리 할아버지가 결국 흑인 해방운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어떠한 감격이 있었던지!


"난 네가 뒷마당에 나가 깡통이나 쏘았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새들도 쏘게 되겠지. 맞힐 수만 있다면 쏘고 싶을 만큼 어치새를 모두 쏘아도 된다. 하지만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라."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 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뭘 따 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 놓고 노래를 부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난 이 문장들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왜 책의 제목이 앵무새 죽이기가 되었는지 말해주는 구절들이랄까? 어치새를 쏘는 건 허용이 되지만, 앵무새를 쏘는 건 죄가 된다. 이 대비는 흑인 톰과 백인 유얼 아저씨의 대비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생각할 권리가 있고, 따라서 그들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해줘야 해."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난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기 전에 나 자신과 같이 살아야만 해. 다수결에 따르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한 인간의 양심이다."


"누가 욕설이라고 생각하는 말로 불린다고 해서 모욕이 되는 건 절대 아니야. 욕설은 그 사람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인간인가를 보여 줄 뿐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는 못해. 그러니까 듀보스 할머니가 뭐라 하시든 실망할 필요 없어. 할머니는 할머니 일만으로도 고통이 많으시단다."


"그래, 훌륭하신 귀부인이셨어. 할머니는 세상일에 대해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계셨지. 내 생각과는 아주 다른 생각을.... 아들아, 네가 그 때 만약 이성을 잃지 않았어도 난 너에게 할머니께 책을 읽어 드리도록 시켰을 거다. 네가 할머니에 대해 뭔가 배우기를 원했거든. 손에 총을 쥐고 있는 사람이 용기가 있다는 생각 말고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말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 승리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지만 때론 승리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이 책은 '스카웃'의 생각으로 필터링 된 '아빠'의 이야기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아빠는 작가의 생각을 대변하는 존재이다. 정의롭고, 지식인이며, 과하거나 치우침이 없음에도 인간적인 따스함이 있고, 남을 동정할 줄 아는 동시에, 인간적인 아픔도 겪는. 멋지면서 다분히 인간적인.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내가 볼 때 다분히 영웅상인 것 같다. 아빠의 말들은 멋있다. 또 양심을 자극하기도 하고, 또 깊은 감명을 주기도 한다.


"알고 있는 모든 걸 말할 필요는 없지. 그건 숙녀답지 못한 거고..... 둘째로, 사람들은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이 옆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아. 화가 나는 거지. 올바른 말을 한다고 해도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바꿔 놓을 수 없어. 그들 스스로 배워야 하거든. 그들이 배우고 싶지 않다면 입을 꼭 다물고 있거나, 아니면 그들처럼 말하는 수밖에."


"하지만 젬, 너도 나이를 먹으면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될 거다. 폭도들도 결국 사람이거든. 커닝햄 아저씨는 어젯밤 폭도들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한 명의 인간이야. 남부의 작은 읍내마다 폭도들은 하나같이 늘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지. 별것 아니란 말이야."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오빠가 대꾸했습니다.
"그래서 여덟 살짜리 꼬마가 그들에게 판단을 할 수 있게 만들었던 거냐?" 아빠가 말씀하셨습니다. "그걸 보면 뭔가 알 수 있어, 들짐승 같은 패거리들도 인간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멈추게 할 수 있다는 걸. 흠, 어쩌면 우리에겐 어린이 경찰대가 필요한지도 모르지. 어젯밤 너희들은 비록 잠깐이지만 월터 커닝햄 아저씨를 아빠의 입장에 서게 만들었던 거야. 그걸로 충분하단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봤던 장면은 재판 전에 흑인 톰을 죽이러 온 폭도들을 어린 소녀 스카웃이 돌려 보낸 그 장면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많은 말들이 있지만, 유얼은 성악설, 커닝행은 성선설의 대표가 아닐까? 어쩌면 성무선악설일지도 모른다. 어쨋거나 폭도도 똑같은 인간이며 평범한 인간이라는 점. 하퍼리도 그런 것이 더 잔인하게 느껴지고 더 아이러니 하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말이야, 딜, 결국 그는 흑인이잖아."
"난 그런 거 손톱만큼도 상관 안 해.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건 옳지 않아. 옳지 않다고. 어느 누구도 그러 식으로 말할 권리는 없어. 그게 나를 구역질 나게 만드는 거야."
......."너희들은 낯가죽이 두껍지 않아. 그래서 구역질이 나는 거지?"

"아직 저 아이의 심장은 세상 물정에 물들지 않았어. 하지만 조금만 나이를 먹어 봐. 그러면 저 앤 구역질을 느끼지도 않고 울지도 않을 거야. 어쩌면 세상에서 옳지 않은 일을 봐도 울먹이지 않을 거야. 앞으로 몇 년만 나이를 더 먹어 봐, 그렇게 될 테니."


"그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했어. 전에도 그랬고, 오늘 밤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또다시 그럴 거야. 그럴 때면 오직 애들만이 눈물을 흘리는 것 같구나. 그럼 잘 자거라."


하퍼 리는 아이의 순순함이 어른의 더러움을 덮거나 혹은 어른은 볼 수 없는 자신들의 더러움을 보는 눈을 가졌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책의 전반에 걸쳐 아이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영악함이 나오다가도 그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순수함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들의 단순함이 아쉽기도 했다.


"애티커스 핀치는 이길 수 없어, 그럴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는 그런 사건에서 배심원들을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 수 있는 이 지역에서 유일한 변호사야. 그러면서 나는 또 이렇게 혼자서 생각했지. 우리는 지금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 거야, 아기 걸음마 같은 것이지만 그래도 진일보임에는 틀림 없어"
"그렇게 말하기는 쉽죠. 기독교를 믿는 어떤 판사들, 어떤 변호사들도 이교도적인 배심원들을 꺾을 순 없어요. 제가 자라는 대로-" 오빠가 나지막히 중얼거렸습니다,
'그게 바로 네가 네 아빠의 뒤를 이어 해야 할 일이야." 모디 아줌마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크면 어릿광대가 될 거야." 딜이 말했습니다.
오빠랑 나는 발걸음을 갑자기 멈췄습니다.
"그래, 맞아. 광대가 되는 거야. 웃는 것 말고는 사람들에 대해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을 거야. 그래서 서커스단에 들어가 허파가 터지도록 실컷 웃을 거야."딜이 말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마침내 오빠가 입을 열었습니다. "네 나이 때는 말이야. 오직 한 종류의 인간만 있다면, 왜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못할까? 그들이 서로 비슷하다면, 왜 그렇게 서로를 경멸하는 거지? 스카웃, 이제 뭔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왜 부 래들리가 지금까지 내내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말이야, 아저씨가 집 안에 있고 싶어 하기 때문이야."


이 책은 스카웃과 젬이라는 두 남매를 통해 발현된 깨어있는 어른들의 의지를 보여준다. 이렇게 정의로웠던 어린이 젬이 과연 커서는 어떻게 되었을지.... 새삼 하퍼리의 후속작 파수꾼이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이 책은 흑인 차별에 대한 글로 유명하지만, 난 솔직히 여성 차별에 대한 것도 마음이 불편했다. 여성은 배심원이 될 수 없고, 여성은 수다쟁이고, 여성은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사치만 부리고, 여성은 남자를 유혹하고..... 난 작가가 흑인과 백인의 차별에는 분노했지만,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당연시 넘어가는 모습이 불편했다. 또 여성 차별적 언사가 나올 때마다 책을 덮어버리고 싶었다.


"스카웃, 결국 우리가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멋지단다."


그러나 뭐 결론은 언제나 이런 것이다. 좌절을 겪은 멋진 아빠의 가슴은 너덜해졌고, 어린 젬과 스카웃과 딜의 가슴에는 상처가 생겼다. 너무 갑자기 그러나 사건은 어느 정도 종결 된 채로 이야기는 끝난다. 이 책에는 많은 사건들이 있지만, 결국 세 사람의 죽음으로 끝이난다. 듀보스 할머니의 죽음, 톰의 죽음, 그리고 유얼의 죽음. 세 죽음이 아빠와 젬과 스카웃과 딜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는 다음 이야기인 '파수꾼'을 보면 알 수 있을까?


다음 읽을 책이 결정되는 순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