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뿔(웅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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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그림자의 춤"

캐나다의 대표작가이며, 단편작가들 중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작가.

그 작가의 정수가 이 소설에 있다고 했다.

 

총 15편의 소설이 수록된 행복한 그림자의 춤.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라는 소설도 가장 마지막에 실려있다.

 

나는 15편의 소설 중 가장 처음에 나온 작업실이라는 소설이 제일 좋았다.

 

이제 막 글을 쓰기 시작하는 주부 작가가 자신의 작업실을 얻으면서 일어난 일련의 이야기들이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이상한 주인을 만난 이야기라고나 할까?

 

이 소설부터 시작해서... 이 책은 마치 우리의 일상집 같다.

내 이야기 같고, 쟤 이야기 같고, 얘 이야기 같은.

그러나 한 편으로는 뭔가 음울하기도 하고.

해학적이고 비판적이기도 하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인가 싶기도 하다.

 

미이라는 작별 인사를 했던가? 하지 않은 것 같다. 높다란 병상에 앉아 너무나 큰 환자복 위로 섬약한 갈색 목을 꼿꼿이 세우고 배반에는 면역이 된 듯 나무로 깎은 듯한 얼굴을 들고, 미이라는 이미 자신이 받은 선물도 다 잊은 채 학교 뒤쪽 베란다에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외따로 떨어져 전설처럼 입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나비의 나날

 

나는 우리가 차에 타고 있던 아까 그 오후의 마지막 순간부터 거꾸로 흐르면서, 어리둥절하고 낯설게 변한, 아버지의 삶을 더듬는다. 마치 마술을 부리는 풍경처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는 친근하고 평범하고 익숙하다가도 돌아서면 어느새 날씨는 변화무쌍하고 거리는 가늠하기 어려운, 끝끝내 알 길 없이 바뀌어버리는 풍경 같은 그 삶을.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

 

단편 소설들을 하나 하나 읽어나가면서, 작가의 문체가 참 맘에 들었다.

묘사력이 참 뛰어난 것 같다.

사람 한 명, 마당 있는 집, 어떤 상황 하나조차 어떻게 이리 멋지게 묘사할 수 있는지!

보면서 작가의 필력에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특히 처음과 끝은 정말 좋았다.

 

"...내가 볼 적에는 사람이 떠나는 것도 머무는 것도 다 그럴만 하니께 그러는 거여.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구먼. 여기가 바뀌는 것도 괜찮아. 달걀을 더 많이 팔 수 있으니 좋겠지......"-휘황찬란한 집


거실에서 오갔던 말들은 이미 바람에 날려 갔다고 메리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들의 계획도 잊히고 단 한 가지만 남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그들은 승자이고 선량한 사람들이다. 자식들을 위해 집을 마련하려 하고, 어려울 때면 서로 돕고, 지역사회의 발전을 꾀한다. 마치 그 지역사회 안에서 아주 균형을 잘 맞출 수 있는 현대식 마술을 찾았으니 한 치의 실수도 없을 것처럼 운운하면서. 지금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정나미 떨어진 마음을 억누르는 수밖에.-휘황찬란한 집

 

그 뿐 아니라 작가는 사회의 쓸쓸함을 담고 있었다.

비정한 그러나 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인 그런 시선들이 소설 곳곳에 박혀있다.

초반에 이해가 안 가는 내용도, 나중에 가면 정말 현실적인 문제인 것이다.

 

이 책에서는 상상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나온다.

자신의 상상 속에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웃음이 나오지 않는 건 아니지만... 뭔가 씁쓸과 슬픔의 미소가 뒤따른다.

 

그것이 바로 트리스테(쓸쓸함)이다, 트리스테 에스트.(쓸쓸해지는 것이다.)

 그 무모한 여정. 처음이라서였을까? 술기운이 알딸딸하게 올라서였을까? 아니다. 그건 로이스 때문이었다. 사랑을 할 때 어떤 사람은 조금만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꽤 멀리까지 가서 신비주의자처럼 아주 많은 것을 내던지기도 한다. 그 사랑의 신비주의자, 로이스가 이제는 꼬깃꼬깃 구겨지고 추운 모습으로 완전히 자기 안에 갖힌 사람처럼 자동차 좌석 한쪽 끝에 앉아 있었다. -태워줘서 고마워

 

그러나 붉은 벽돌집이 늘어선 무더운 거리를 빠져나오고 시내를 벗어나 마살레스 선생님과, 이제 두 번 다시 못할, 앞으로 영영 못할 게 거의 확실한 선생님의 파티를 뒤로하고 집으로 차를 몰고 가면서 우리는 도대체 왜 딱한 마살레스 선생님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걸까. 분명코 하고도 남을 이 상황에. 그건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 우리를 방해하기 때문이고 그 음악은 선생님이 사는 저쪽 나라에서 보낸 코뮈니케이기 때문이다.-행복한 그림자의 춤

 
전반적으로 이 작가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고,
작가의 문제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쩜 그리 묘사를 잘하는지 감탄이 나왔다.
 
나중에 배껴쓰기 공부를 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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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구역 소년 오늘의 청소년 문학 6
샐리 가드너 지음, 줄리안 크라우치 그림, 최현빈 옮김 / 다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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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구역소년"

소년 스텐디시는 7구역에 사는 소년이다.

성장소설로 좀 유쾌한 이야기를 기대했던 나에게 이 책은 좀 무겁게 다가왔다.

 

책의 본 내용이 시작하기 전,

작가의 말이 내 가슴을 때렸다.

 

학교에서 무시당하고 상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꿈꾸는 당신을 위하여 내일을 가질 당신에게.


무슨 내용일까 하는 궁금증이 더 커졌다.

 

만약에......
그랬다면 지금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 거다. 알다시피, '만약'은 하늘의 별만큼이나 끝없이 이어지니까. 

"선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들이 있는가 하면, 너 같은 사람도 있어, 스탠디시. 상상력 공원에 한 줄기 바람 같은."

지금은 암흑의 시대다. 우리는 노래하지 않는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바다 건너에 있다. 
여기는 하늘이 무너져 내린 지 오래다. 

나는 절대 울지 않는다. 눈물이 무슨 소용이야? 할아버지는 자기가 한 번 울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진흙탕을 만들며 쓸데없이 낭비될 뿐일 짠물. 눈물은 모든 걸 집어삼키고, 목이 메게 한다. 또 소리를 지르고 싶게 한다, 눈물은.

헥터가 없다는 걸 견딜 수 없는 거다. 그들이 헥터를 어디로 데려갔는지만 안다면. 헥터가 괜찮다는 것만 안다면, 내 배 속에 자리 잡은 매듭이, 매일 더 단단히 조여지는 이 매듭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현재에서 시작해서 과거를 회상하다가 다시 현재의 흐름으로 돌아가는 식이다.

이 소설의 배경인 마더랜드-7구역은 뭔가 어두운 분위기 이다.

사람들은 초록파리들을 무서워하고, 강제하고 강압하는 분위기 이다.

마더랜드의 원함을 달에 우주선을 쏘아올리는 것이다. 

 

스탠디시는 소위 왕따이다. 오드아이인데다가 난독증이 있어 글을 잘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뒤에 작가의 말을 보면서 작가도 난독증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난독증이 있는데 어떻게 글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지... 작가가 될 수 있었는지 놀랍다.


나는 글을 쓸 줄은 몰라도, 어휘 구사력은 높다. 나는 단어를 수집한다. 입 속에서 단어를 굴리면 사탕같이 달다. 

그때, 세상이 구멍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든 그 구멍으로 떨어질 수 있고, 그러면 다시는 빛을 볼 수 없게 된다. 사라진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의 차이를 알 수 없었다. 나에게는 둘 다 똑같이 느껴졌다. 둘 다 구멍을 남겼다. 심장에 구멍이 뚫린다. 삶에 구멍이 뚫린다. 구멍이 얼마나 많은지는 쉽게 보인다. 구멍이 하나 더 생기면 금방 알 수 있다. 집에 불이 꺼지고, 그 다음에는 집이 폭파되거나 해체된다. 

선생님이 사라지다. 엄마가 사라지다. 아빠가 사라지다. 헥터가 사라지다. 사라지다. 
나는 사라지지 않을 거다.
  

7구역에서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 사람은 소모품같은 존재가 되어, 사람들은 위의 눈치만 보면서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으려 한다.

스텐디시의 부모님은 교사였다. 어느날 엄마가 초록파리에게 끌려갔고, 혀가 잘려서 돌아왔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는 그 날 밤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어느 날 헥터가 부모님이 살던 옆집에 부모님과 함께 오게 되었다.

헥터의 아버지는 과학자였는데, 우주선이 달에 못 갈 것이라 말해서 7구역에 오게 되었다.


그들은 전부 '메에'하고 울 줄 밖에 모르는 양떼다. 그 부적응자 무리 전부 말이다. 그들은 질문을 던질 줄 몰랐다. "왜"라고 묻는 희귀종은 한 마리도 없이, 그저 평범하게 털을 깎아내고 표백된 양들이다. 

그래서 주먹질이 다시 시작됐다. 나는 내 살을 벽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벽 안의 나를 괴롭힐 수는 없다. 만질 수도 없다. 

선생님 중에 왜 우리를 보호해 줄 늑대가 없는 거죠? 교육, 교육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세요. 선생닝은 우리를 가르쳐야지, 학생들을 머리가 터지도록 때리면 안 되잖아요. 

헥터가 사라진 어느 날, 방해자들과 적대관계인 마더랜드는 달에 우주선을 쏘아올릴 것이라 한 날이었다.

 늘 맞고 다니고 놀림감이었던 스텐디시는 시걸 선생님에게 대들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더이상 나약한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시걸 선생은 스텐디시가 자신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크게 웃던 꼬마를 잡아 때린다.

결국 꼬마는 머리가 터져 죽고 만다.

 

이 책에서는 폭력에 대해서 많이 나온다.

학생끼리의 폭력,

선생의 폭력,

나라의 폭력.

 

스텐디시는 모두에 돌을 던진다.


나는 창문 옆에 앉았다. 더 이상 공상에 빠져 있지 않았다. 현실이 너무 거대해서 상상은 모두 짓눌렸다. 
할아버지가 나를 꽉 붙들었다. 나는 끝까지, 그 끝이 무엇이든, 언제든, 끝까지 이 순간을 기억할 거다. 

달로 가는 우주선은 거짓이었고, 헥터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 세상에 돌을 던졌다.

청소년의 성장 소설이 아닌

민주 항쟁의 지도자를 본 듯한 느낌이었다.

 

소년은 나의 마음에도 돌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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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집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71
최상희 지음 / 비룡소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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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집"

 

이 소설을 처음에 접했을 때, 왜 제목이 칸트의 집일까 생각했다. 책을 보면서 나의 집은 어떤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들과 상관없는 양, 멀찍이 물러서 있곤 했다. 하지만 별 소용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한 세트인 걸 이미 마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겹도록 매일 똑같은 풍경이었다. 

 

열무는 엄마와 형과 시골 바닷가로 이사를 오게 된다. 시골 바닷가에는 학원도 없었지만 햄버거 가게도, 피씨방도 없었고 친구들도 많지 안았다.


갯벌을 향해 다시 달려가니 갈매기 떼가 하얗게 날아올랐다. 형은 사라지고 없었다. 

뒤돌아봐야 아무것도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내 되를 따라다니는 게 있다면, 그건 아마 형일 테니까. 

형은 역시 틀별한 아이였다. 단지 엄마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특별할 뿐이었다. 그때부터 엄마의 소원은 하나였다. 형이 특별한 아이가 아니라 평범한 아이가 되는 것. 하지만 특별해 보이는 이웃는 알았지만 평범한 아이가 되는 방법은 알아내지 못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이기적인 자식. 

 

소열무의 형의 이름은 소나무인데, 그는 서번트 장애가 있었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신만의 규칙으로 사는 그는 칸트 같았다. 철학자 칸트는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하고, 자신의 정해진 규칙대로 살았다.

그런 그들 앞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는데, 그는 매일 정해진 시각에 산책을 했다.

석금동이 자리를 뜨자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셋, 둘, 하나, 발사! 칸트가 나타났다. 

칸트는 매일 산책을 하고, 또 다른 칸트는 늘 정해진 만큼 그림을 그린다. 도대체 왜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물을 필요도 없다. 그건 칸트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바에 의하면 유명한 철학자 칸트가 일생에서 딱 하루 산책을 빼먹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책을 읽다가 그랬단다. 당최 이해가 안 간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엄마가 늘 아빠에게 하던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어 대신 아빠는 포기하지 않았던가. 생각해 보면 아빠가 포기한 건 형 하나뿐은 아닌 것 같다. 나와 엄마, 그리고 아빠와 남편임을 포기하려는 중이다. 아니, 나를 포함한 그것들은 이미 오래전에 포기당했는지도 모른다.
 
칸트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묵묵히 서 있었다. 칸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칸트의 집이 떠올랐다. 거의 아무것도 없이 휑한 칸트의 집처럼, 그의 등은 고독하고 쓸쓸했다.
 
내일부터 규칙은 취소다. 어차피 규칙은 어기라고 만든 것이니까. 형은 모르지만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칸트라 별명지은 남자는 건축가였고, 한때 건축 사무소를 열였었고, 소장님이라 불렸었다. 그는 많은 상을 탔고, 멋진 집을 지었었다. 그는 왜 칸트가 된 것일까? 그는 왜 관같은 집에서 혼자 사는 걸까?

칸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형제가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에는 나무에게, 그리고 열무에게 마음을 연다.

 개똥철학. T자를 멜론 위에 대며 사뭇 즐겁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칸트를 보며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소리가 바로 그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T자는 말이다. 누구나 하나 가지고 있어야 하거든.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는 수직과 수평을 지녀야 하는 거지."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해서 멍하니 쳐다봤다.

생각해 보면 그 때 칸트가 내게 하려던 이야기는 수평선과 수직선이 아니라 형과 나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수직과 수평. 전혀 다른 방향에서 시작한 두 선이 만나야 T자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아름다운 선이 그려지고 그 위에 집이 서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칸트의 이야기는 형이나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집에 대한 이야기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괜찮았다. 집이 곧 칸트였으니까. 만날 때마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게 대하고, 까질하게 굴어도 그 속에서 조용한 환대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피워 준 불처럼 따스하고 아늑했다.

카트를 만난 뒤부터 시간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기다리는 시간과 미칠 듯이 기다리는 시간. 칸트의 집에 갈 시간을 기다렸고 칸트의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번에는 미친 듯이 기다리기 시작했다. 규칙 따위는 무시하고 눈을 뜨자마자 칸트의 집으로 달려가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열무도, 나무도, 칸트도 칸트의 집에서 만나면서 별로 말을 안하고 별 거 안 하는 것 같지만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어느새 만지고 치유하는 과정 가운데 있었다. 칸트를 만남으로 나무는 자신의 집을 상상하기 시작했고, 열무는 형이 아닌 자신을 보게 되었고, 칸트는 관의 집이 아닌 빛과 바람이 가득한 유리의 집이 되고,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당분간 석금동을 만나기 힘들 거란 예감이 들었다. 늘 그랬잖아.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넘기기가 이번엔 힘들었다. 늘 있는 일로 치기에 이 바다는 턱없이 지루하고 친구는 너무 적지 않는가.
 
나도 숨어들고 싶었다. 아니, 최소한 어떤 기분인지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형은 구획을 정확하게 나눈 식판처럼 자기 기분을 남과 공유할 마음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형의 세상은 이쪽이 아닌, 초록색 담요 안에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칸트의 2층 방은 형이 발견한 또 다른 초록 담요였다.
 

형은 거짓말을 안 한다. 그러나 상상력도 없다. 다만 눈 앞에 있는 걸 외우고, 자신만의 규칙을 따라 살 뿐. 열무는 자기 멋대로 사는 형이 부럽기도 하고, 밉기도 하다.


"누군가와 맺어져 있다는 건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수반하지. 그게 사람이든, 사물이든, 이 세상 모든 것은 말이다. 하지만 말이야, 그것 때문에 살아가는 건지도 몰라. 삶은 아이러니란다."
 
"사람들은 건축이란 눈에 보이는, 실체가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건축가란 말이지, 실은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사람이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막연한 상상으로 시작해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형체를 완성해 내는 거야. 말하자면 건축가는 상상에 의해 현실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고나 할 수 있지."
"그게 뭔 소리예요?"
"현실로 이루어지게 하려면 일단 상상해야 한다고."
집은 지어지지 않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형은 상상하지 않으니까.
 

삶은 아이러니라는 말, 정말 와 닿는 것 같다. 삶은 정말 아이러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건축가에 대해서, 건축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건축가와 소설가는 닮은 점이 많은 것 같다. 상상으로 무언가 형체를 만들어 간다는 것. 건축하는 그것이 집으로 완성되는 것이고, 소설가는 책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네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나면, 네게 필요한 집도 뭔지 알 수 있게 될 거다."
또 시작됐다. 그놈의 개똥철학. 결국에는 아, 그래요, 내가 바보예요! 하고 항복하게 만드는 칸트의 개똥철학이 시작된 거다.
"네가 생각하고 끔꾸는 것, 이를 테면 이상향이라고 하는 것에 맞는 공간이 있다면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집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지. 그건 한 칸짜리 서랍이 될 수도 있고 저 넓은 바닷가가 될 수도 있단가."
그래요, 난 바보고 소장님은 잘났어요!하고 외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네 속에 굳게 자리 잡고 있는 집을 허물고 나면 너도 네 집을 갖게 될 거다. 그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았지만."
이 역시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칸트도 늦게 깨달은 걸 내가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생각하고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드디어 자신의 집을 그린다. 마치 새 둥지같이 생긴 집. 나무는 칸트의 집도 새 둥지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드디어 자가만의 집을 만들어낸 나무. 칸트도 세상밖으로 나온다. 이제 그의 집은 관에서 아름다운 유리의 집이 되었고, 새박물관도 짓기로 한다. 그러나 그는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모든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형의 표정을 흉내내며 말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난 상관없어요, 하는 형의 표정 말이다.
 
"혼자인 건 어떤 느낌이에요?"
벽에 닿아 되돌아오는 내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울렸다.
"가끔 궁금해지곤 했어요. 형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늘 아무도 필요 없고, 아무와도 상관없다는 표정 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 궁금했어요. 형의 세상은 형의 머릿속에만 존재하죠. 형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완벽한 세상으로 들어가고, 또 끌어내면 더 싶숙이 들어갔죠. 형이 만든 세상 외에, 그 바깥쪽은 형에게 아무 의미도 없어요. 형이 내가 누군지나 알까요? 내가 동생이고, 동생이란 게 어떤 관계고, 어떤 의미인지 알까요? 내가 죽는다고 해도 형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거에요. 조금도 슬퍼하지 않을 거예요. 그게... 슬퍼요."
 
"늘 있는 일이란다. 인생에서 엎어지는 일은 흔하지. 살다 보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돌부리가 사방에 널려 있지."
 
 형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형의 손을 잡고 집을 향해 걸었다. 등 뒤에서 바람이 부드럽게 밀어 주었다. 나와 칸트의 집으로, 우리는 간다.
 
 칸트의 집이 제목이지만, 내게 이 책의 부제를 정하라고 한다면 '자기만의 집을 짓자.'라고 하겠다. 시골바닷가를 풍경으로 펼쳐지는 잔잔하고, 때론 냉소적이며, 때론 한 없이 감성적인 소설이다. 주인공들은 다 상처입은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세계 속에서 사는 나무, 그런 형 밑에서 너무 빨리 철이 든 조금은 삐뚤어진 감성의 열무, 아들을 잃은 슬픔에 아픔에 잠겨 사는 칸트. 이 셋은 T자처럼 서로 만나 하나의 집이 되었다.

 이 책을 보면서 나도 나만의 집을 지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스케치북과 연필 한 자루 구입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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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 2013 제37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재찬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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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펀치의 화자는 고3 수험생이다. 이제 수능이 눈 앞에 현실이 되어버린 시기이다.

소녀는 사회에, 부모에게, 학교에, 사람들에게, 심지어 자신에게도 냉소적이고 비판적이다.


모래 먼지가 안개처럼 흩날려 앞을 가린다. 모래 먼지는 미래를 꿈꾸라고 하면서 미래를 닫아 버린, 멍청한 어른들 같다. 

 

그녀는 마법에 걸리는 날이면 사막의 낙타의 꿈을 꾼다. 미래가 닫혀버린 끝없는 목마른 모래사막의 한가운데... 그녀는 앞으로 나가는지 제자리인지,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간다.

 

숨은 혈은도 찾아내는 기계로 우리 집을 들여다본다면 집안 구석구석 언어의 선혈이 낭자할 거다. 

 

말은 욕이고, 흉기이다. 부모의 말 한 마디에 소녀는 상처를 입고, 그 언어의 선혈은 집안 여기저기 낭자하다. 어쩌면 그 선혈은 분위기가 되어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계급사회에서 왜 계급을 못 만들게 하는지 헌법을 이해할 수 없다. 지들이 만들어 놓고 지들이 금지하고, 모순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는 것들. 난 겨우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교육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다. 그 구렁텅이에서 탈출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동물들한테도 선택받지 못한 실험녀가 직장 면접관에게 선택될 수 있을까.

 

 소녀는 자신의 등급이 5등급이라 말한다. 성적도 외모도... 그런데 성형 대국에 살면서 그녀도 충분히 예뻐질 수 있으나 그럴 마음이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수컷들의 발정을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소녀는 사회를, 부모를, 학교를,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한다. 소녀는 역설적인 부분이 많다. 그러나 그 모습이 객관적이고 냉소적으로 보이는 건 왜일까? 아마 그녀가 다른 이들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그런 냉정한 잣대를 대고 있으며, 가끔 비치는 냉소적 비웃음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사람이 역설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1등급이 아니면 기회조차 잡지 못해."
방 변호사가 한 말이다.  1등급은 유전자와 부모의 재산이 결정하는 거다. 주인공이 될 수 없기에 난 궤도에서 이탈할 테다. 안 그러면 내 인생은 보나마나 평생 들러리일테니까. 

말은 욕이다. 

사회가 현정이한테서 피자를 도둑질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자유롭지도 않다. 20대가 오기 전에 자유를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10대가 가기 전에 억압을 잘라 내야 한다. 나는 수년간 그 방법을 물색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약유강식에게 납치된 '니모'를 찾아야 한다. 

과외 두 시간 중 반 시간은 자기 자랑이다. 자랑할 만하다고 할 수 있지만, 아무튼 별로다. 과외를 보면 학고 과학실 앞에 붙어 있는 사진이 떠오른다. 아이큐만큼이나 혀를 길게 내밀고 있는 얄미운 아인슈타인. 

엄마한테 서울 안에 있는 대학은 기독교요, 서울 밖에 있는 대학은 이슬람교다. 나한테 아웃 서울은 리얼리즘이요, 인 서울은 해리 포터다. 어떻게 갑자기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란 말인가. 

익숙함은 스스로 사하는 면죄부다. 

한 학기 등록금만 낸 후에 학교는 다니지 말고 재수를 하라고 한다. 지금까지 19년이나 해도 안 되던 공부가 1년 더 한다고 좋아질까. 

전혀 부러울 것 없는 엄마 인생을 보며 가질 수 있는 진심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것밖에 더 있겠나. 

엄마도 방 변호사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에 의해 48평 아파트에 갇히게 됐다. 방 변호사도 '마을 사람들'에 의해 엄마보다 먼저 48평 방에 갇히게 됐을 거다. 이제 두 사람은 나를 48평에 가두려 한다.
나는 '어쩐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다. 

난 누군의 희망도 되고 싶지 않고 누구에게 희망을 걸고 싶지도 않다. 
각자 알아서 살자. 

내 구토는 내가 만드는 거다. 세상 누구도 가지지 못한 나만의 능력이다. 나는 내가 원할 때 역겨움을 토해 낼 수 있다. 

난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구별해 보곤 한다. 여기서 훈련이 잘된 덕분에 학교에서 아이들의 거짓말은 첫 문장에서 대번에 알 수 있다. 오랫동안 훈련된 교사들의 거짓말은 한참 시간이 지나서 겨우 알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는 게 병이다. 

 

이 소설은 냉소로 시작해서 냉소로 끝난다. 그녀는 어린 소녀같지 않은 냉소... 그러나 어쩌면 고삼다운 냉소로 일관한다.

가슴에 쏙쏙 박히는 그녀의 말은 나의 고삼시절을 생각하게 했다.

"그래, 나도 이랬었지..."

 

 

사랑같지만 알고 보면 증오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지만 모두가 모른 척 한다.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웃기시네. 내 시작은 미약했고 이대로 둔다면 내 나중은 오물로 뒤덮이리라. 

나를 위한 게 남을 위한 건 될 수 없지만, 남을 위한 건 결국 나를 위한 걸 포장한 거다. 모래의 남자는 아직 얼마나 많은 걸 모르 있는 걸까. 
복잡한 건 간단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교실 밖처럼, 교실 안에 자비는 없다. 

 

상처 많은 그녀는 사실 그저 평범한 소녀였다. 그녀의 잘못은 방변호사는 아들을 원했다는 것. 엄마는 착하고 공부 잘하고 날씬하고 예쁜 딸을 원했다는 것. 사회는 1등급을 원한다는 것. 그리고 그녀는 그것들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 뿐이다.

 

 

내가 5등급이면서도 1등급 대우를 받는 건 어디까지나 방 변호사의 경제력 때문이다. 담탱이의 미소를 받아먹는다면 일곱 난쟁이가 와도 왕자가 와도 깨어나지 못할 거다. 

너무 예쁜 게 죄가 된다는 건, 기꺼이 동의한다. 미필적 고의, 아니면 과실치상, 그것도 아니라면 원죄 정도가 되겠다. 

너무 못생긴 게 죄가 되는 건, 내가 동의하건 말건 원숭이들이 우글거리는 대한민국에서 '레알'이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비판거리는 경제력, 등급, 그리고 여자의 외모이다.

이것들은 하나로 통할 수 있으면서도 각기 다른 상처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책의 어딘가에서 원숭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티비 프로그램에서 원숭이들에게 예쁜 여자와 안 예쁜 여자 중 누구에게 바나나를 먹는지에 대한 실험을 했다. 실험결과는 예쁜 여자의 완승.

원숭이 마저 사람의 외모를 보는데, 면접관은, 손님들은, 남자는 외모를 안 볼리 있겠는가....

씁쓸했다. 이 씁쓸함은 어쩌면 내 등급이 1등급이 아니여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말라깽이들한테는 얼씬도 못하면서 지방질은 내가 편한지 떠날 생각을 안 한다. 음흉한 시선으로부터 날 지켜 주는 지방질이 편하긴 하다. 살을 뺀다면 누구를 위해서 빼야 하는 걸까?

 

내가 평소에 자주 갖는 질문이다. 살을 뺀다면 누구를 위해서 빼야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위해서, 취업을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를 위해서였던 그 대답이 과연 몇 번째로 밀려났는지 매번 생각해 본다. 또 나를 위해선데.. 왜 자신들이 난리란 말인가.....? 내가 편하면 된 거 아닌가? 모든 질문은 뫼비우스의 띠가 되어버린다.

 

 

"이유란 원래 있는 게 아니고 새로 만드는 거니까."

"원래 진리는 말이 안 돼. 말이 되는 건 말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해."

슬퍼서 운 게 아닌데 울다 보니 슬퍼질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종백숙부라는 사람은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는 배우라고 한다. 그는 시종일관 표정이 없다. 장례식장에 있는 사람들 중 연극을 하지 않는 사람은 종백숙부가 유일해 보인다. 

높은 위치에 오를 때까지 계속해서 발악하고 올라가서도 그 위치를 지키는 건 할머니 말대로 "지랄 염병"해야 할 일이다. 

남을 걱정하는 척하는 건 사실 자기 위안을 하고 있는 거다. '어떡하니'는 '다행이다'와 동의어다. 고모는 내가 살이 찌는 걸 보고 언젠가 "어쩌면 좋니."라고 했는데 난 그때 고모의 얼굴에서 걱정은 커녕 안도감을 읽었다. 고모 딸은 날씬하다. 

지금껏 한 번도 결석이나 지각을 한 적이 없다. 엄마 덕분에 나는 태어나서 여태까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옥에 갔던 거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학교는 성실한 내게 교육도 친구도 주지 않았다. 

"실행될 때까지 계획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볼 수 있지."

행복은 외계에나 있는 거다. 행복을 찾아 떠난 사람 중 돌아온 사람은 모두 행복을 찾지 못했고 행복을 찾은 사람은 모두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의 시야가 어떻든 살인자이다. 부모를 청부살해했고, 그 청부살해를 실행한 자도 죽였고, 그녀의 말대로라면 그녀 자신도 죽일 예정이다. 남이 보면 그녀는 부자 부모를 만났고, 기독교에 외모를 뜯어 고치면, 상위층에 속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읽으면서 동감되고 동의하면서도 안타까웠던 건 그녀가 더 큰 불행과 아픔을 몰랐다는 것이다. 자신의 힘듦과 고통과 우울에 빠져, 그런 시각으로 세상을 봤던 그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 책을 보면서 얼마 전에 본 '달고 차가운'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부모를 죽이고 싶어하는 아이들. 달고 차가운의 주인공은 공부스트레스 뿐 아니라 사랑도 조금은 들어가 있었지만, 이 소설엔 우정과 형제다툼까지 있으니 쌤쌤이리라. 왜 아이들은 부모를 죽이고 싶어할까...? 그러고 보니 나도 고삼때 썼던 '가출일기'라는 소설에서 결국 부모를 죽이고 말았더란다.

 

솔직히 이 소설을 보면서 주인공의 시야가, 생각이 나와 비슷해서 많이 놀랐다. 난 아직도 세상에 조금은 냉소적이다. 그녀와 나의 차이점은 나는 소설로 그 시절이 지나갔고, 그녀는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울한건... 그녀에게 행복은 여전히 외계에 있다는 것이다. 연금술사의 결말처럼 늘 행복은 그녀 곁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사회에 대해서, 교육현실에 대해서, 고삼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제 막 수능이 끝난 시점, 얼마나 많은 고삼들이 자살을 하는지 뉴스에선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왜 우리의 자식을 죽이며, 우리를 죽이게 만들며 공부를 시키는지....

미래를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 지금의 행복을 누리게 해주는 건 어떻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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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 1 - 송지나 대본집
송지나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모래시계 1-2권의 표지입니다.

고현정, 최민수, 박상원 등 드라마의 등장인물들 사진이 표지에 있습니다.

 

등장인물 소개입니다. 각 등장인물에 대한 설정을 알 수 있습니다.

소개가 생각보다 세세하게 되어 있어서 놀랐습니다.

원래 대본에도 이렇게 세세하게 등장인물이 소개되어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 참 좋았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용어 정리집입니다.

시나리오 및 대본집에 어색한 독자의 이해를 위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어 좋았습니다.
 

 

모래시계의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이며, 지금까지도 패러디 되고 있는 장면 중 하나이지요.

"나...떨고 있냐?"

 

 

이 책의 마지막입니다. 우석과 혜린이 태수의 재를 뿌릴는 장면...

마지막 우석의 말이 가슴을 울립니다.

 

광주에서 계엄군으로 참가했던 우석과 시민군이었던 태수...

다른 사람이 아닌 우석이 자신에게 형을 내려달라며 태수가 "그 다음이 문제야. 그러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사는지. 하나는 너처럼 살고, 하나는 나처럼 산 거야."말했습니다.

이 책을 보면서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보게 되었고,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처음엔 그저 추억으로 이 책을 대했지만, 역사와 사회와 함께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질문만이 남았습니다.

 

정말 멋진 책 같습니다.

15년 보다 더 된 작품이 아직까지 회자되고 패러디되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력도 있지만 작품의 힘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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